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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摩訶般若) 이제 바라밀(波羅蜜) 이럽니다. 바라밀경.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 그래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바라밀 혹은 바라밀다,라고 하는데.
바라밀(波羅蜜) 하면 이제 뭐 우리가 알듯이 이 언덕과 저 언덕. 그래서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뭐 건너간다. 바라(波羅)가 저 언덕, 피안을 의미하고. 밀다(蜜多)가 건넌다. 그래서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라는 의미죠.
그래서 이 언덕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중생세계. 이것을 편의상 이제 이 언덕이라고 했구요. 저 언덕은 피안(彼岸), 깨달음의 세계를 편의상 저 언덕이라고 방편으로 쓴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불법은 방편일 수밖에 없습니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설하면, 우리 분별심은 말 그대로 분별심이잖아요. 분별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기 때문에. 분별된 용어를 쓸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용어는 진짜가 아니지요. 용어는 그것 자체를 완전히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임시방편으로만 쓰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라밀다,라는 것도 이 언덕, 중생세계를 이 언덕이라고도 하고 저 언덕이라고, 저 피안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 부처님의 세계를 저 언덕이라고 해놓고. 그런 다음에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을 바라밀다,라고 합니다.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 즉, 그 말은 깨달음으로 간다. 깨달음을 향해 간다. 뭐 이런 얘기일 수도 있지요. 그 말은 초기불교에서 말했던 중도(中道). 깨달음으로 가는 뭐 수행, 이런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대승불교의 수행법은 이제 바라밀이다.
이렇게 해서 보통 바라밀의 첫 번째는 반야바라밀이다 보니까. 어떤 절에서는 뭐 반야바라밀, 그냥 오로지 반야바라밀, 반야바라밀이라고 이제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반야바라밀이라는 것을 뭐 독송하기도 하고, 그렇게도 하지요.
이 언덕과 저 언덕은 실제 없습니다. 당연히, 당연히 없는데. 편의상 방편으로 한 것이지요.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하려고. 그래서 이 언덕은 우리가 중생일 때를 이 언덕이라고 하고. 우리가 부처일 때를 저 언덕이라고 하고. 즉,
우리가 허망한 허상에 집중하고 있을 때, 허상이 나를 집어삼키고 있으면서 허상으로써만 살 때, 그때를 이제 이 언덕이라고 하고. 그게 아니라 이제 실상에 뿌리내리고 사는, 그것을 이제 저 언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따로 갈 것은 없지만,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표현을 하느라고 이렇게 방편으로 했구요. 또 이제 여기서는 이 언덕의 종류, 이 언덕은 괴로운 중생들이 사는 곳이잖아요.
그래서 중생들이 사는 이 언덕의 종류를 뭐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수라, 천상, 이렇게 육도윤회한다, 그러지요. 육도윤회하면서 인간들은 온갖 괴로움을 당하고 산다. 선행을 많이 하는 사람은 천상세계로 간다. 악행을 많이 한 사람은 지옥세계로 간다.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 우리 번뇌망상, 분별심을, 핵심으로 줄여보면 탐진치 삼독이라고 세 가지 독이라고 하는데. 탐(貪) 내는 마음을 많이 일으키면 욕심이 많고 하니까 아귀, 아귀라는 지옥. 욕심 많은 이들이 가는 아귀 지옥을 만들어놨고.
진(瞋) 심, 화내고 성내는 것을 많이 하는 사람은 아수라, 수라지옥으로 간다. 그다음에 이제 어리석음. 개나 돼지나 이런 어리석은 존재들, 축생의 세계라고 이렇게 배당을 해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선악, 탐진치 삼독에 따라서 인간계까지 해서 이제 육도를 이렇게 설정을 해놓은 것이지요.
설정을 해놓은 겁니다. 실제 그런 게 있다. 뭐 저기 안드로메다 옆에 가면은 뭐 지옥세계가 있고. 뭐 이런 것이 아니고. 또 지옥세계도 경전에 따라 다 다르지요. 뭐 팔한(八寒) 지옥, 팔열(八熱) 지옥을 얘기하는 경전이 있고.
또 뭐 지옥세계를 또 다르게 묘사하는 것이 있고. 그것은 다 방편이란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고 저렇게도 설명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 지옥세계,라는 것 자체가, 이 육도가 바로 인간계 안에 고스란히 있는 것이지요.
아주 욕심이 많고, 그런 사람은 지금 이 순간에 그냥 아귀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뭐 배는 남산만 하다. 내 욕심은 어마어마하게 큰데. 실제 내 그릇은 그만하게 되지 못하는. 내 목구멍은 바늘구멍만큼 밖에 되지 못한다.
내 실제 현실은, 나는 요거밖에 소화를 시킬 수가 없는데 내 욕심은 남산만큼 이렇게 크게 불러있을 때 그런 사람을 아귀 지옥에 있다 그럽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밥을 먹을 때 목에서 불이 난다, 그래요. 즉,
나는 내 인연은 지금 요거밖에 안 되는데 더 많은 걸 억지로 막 나쁜 짓을 해서라도 큰 거를 가지려고 하고 애쓰려고 하고 막 집어삼키려고 하면 여기에 불이 난단 말이지요. 그게 나를 불태운다. 그 욕심이 나를 불태울 수밖에 없다.
오히려 고통, 더 큰 고통이 나를 괴롭힐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또 진(瞋) 심, 화를 내고 성내는 것도 내가 화를 내고 성냈을 때 그때가 바로 아수라 지옥에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이지요. 아수라 지옥에 있는 존재들은 끊임없이 천상세계 신들에게 싸움을 걸어요.
그런데 늘 싸움을 걸면 백전 백폐 하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싸움을 걸고, 막 별것 아닌 걸로 계속 시비를 걸고,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참 많지 않습니까? ‘왜 저게 화가 나는 거지’ 가만 생각해보면 저걸로 왜 화를 내는지를.
그러니까 어떤 사람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저게 왜 화가 나는 이유가 될까’ 그런데 그 사람은 어마어마 화를 내고, 씩씩거리면서 화를 내고 있는 거를 볼 때 영화 보는 것 같애요.(웃음) 너무 비현실감이 있는,
‘야, 저 사람은 정말 다른 세계를 살고 있구나’ 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저 사람에게만 저렇게 큰 문제가 되는 그런 어떤, 저게 바로 아수라 지옥이구나. 제가 그 얘기를 몇 번 드렸었는데. 이렇게 강의를 듣다가 스마트폰 소리가 울렸다.
그러면 그냥 웃고 마는데. 기어이 끝까지 인상을 풀지 못하면서 ‘저런, 성격 별로인 아줌마 말이지’ ‘저런 예의도 없고’ ‘기본, 예의가 없는 사람’ 이러면서 계속해서 끝까지. “그러실 필요 없다.”라고 얘기해도 끝까지 인상을 딱 쓰시면서
“아이, 그럴 수도 있지요.”라고 얘기하면 오히려 저를 혼을 내시면서 “그런 식으로 하시면 안 된다.”(웃음)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딱 얘기를 해주셔야지.” 이러면서 저를 혼내시면서 오히려 그러는 분도 계셨었거든요.
그게, 그 스마트폰 소리가 딴사람에게는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그냥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수 있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그거는 엄청난 예의범절이고, 그걸 어기는 것은 아주 잘못한 거라고 본인은 그래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 사람은 본인 스스로 만들어낸 그 틀, 공중도덕을 지켜야 되고 뭐 이런 틀에 스스로 너무 큰 어떤, 물론 그거를 그렇게 얘기하고 그럴 순 있겠지요. “그래도 좀 주의해주세요.”하고 얘기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걸 가지고 내 스스로 고통 받을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사람은 본인 스스로 만들어낸 아수라 지옥에 스스로가 빠져서 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확실하게 그 아수라 지옥이든 아귀 지옥이든 자기가 만드는 겁니다. 남들이 봤을 땐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왜 저걸로 화를 내는지’
‘왜 저렇게 허영 된 욕심을 부리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자식을 어떤 일이 있어도 특목고를 보내야 되겠다. 하고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막, 엄청나게 비싼 과외를, 학원을 보내면서 뭐 수학을 두 개 세 개를 시키면서 남들이,
다른 엄마들이 봤을 때는 애가 죽을 거 같애서 차마 못 봐주겠고. 애가 이러다가 곧 죽을 것 같고. 이 아이는 특목고 갈 실력까지는 누가 봐도 아닌데. 물론 어느 정도는 잘 하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이 엄마는 반드시 될 거라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그런데다가 남편이 그만큼 뒷바라지할 수 있을 만큼 재력이 되면은 모르는데. 남편이 전에는 재력이 됐었다가 이제는 회사도 잘리고 이러면서 좀 힘든 상황이라, 이걸 차마 봐줄 수가 없는데. 이 보살님이 그렇게 하는 거에 대해서 불편한 거죠.
내가 이렇게 해줄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는데, 저렇게까지 하는 걸 보니까 막 힘드니까. 그 보살님을 보면서 주변 사람들은 그 보살님 눈에 이렇게 불이 보인다고. 불이 활활 타는 게 보인다고. 만화 같은 거 보면 막, 눈에 불이 있잖아요.(웃음)
눈에 막 불이 타고 있는데, 그 불타는 것이 남들은 다 보이는데 본인은 안 보이는 거예요. 그리구 그 아이하고 얘기를 해보면 그 아이는 너무 힘들고 정말 죽겠다고 하는데, 그 엄마랑 얘기하면 그 엄마는 딱 그런다는 거지요. 나는 쟤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하는 거지.
내가 원해서 하는 게 아니다. 난 언제라도 안 해도 괜찮아. 이렇게 얘기한다는 거지요.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본인을 못 보는 겁니다. 제가 전에 그 말씀드렸지요. 에니어그램(Enneagram),
예전에 공부할 때 보면 에니어그램 2번 유형이라고 해서 나는 옳다. 자아 관념이 ‘나는 옳아’ 이게 너무 강한, 내 인생을 사는데 제일 중심이 되는 게 나는 옳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인생을 사는 사람. 그 사람은 법 없어도 사는 사람이에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건 철저하게 지키고 사는 사람. 그 대신 ‘나는 옳다’라는 게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자아 관념이다 보니까 남들이 틀린 걸 못 봐주는 거예요. 그러데 그건 진짜 옳은 게 아니라 내가 봤을 때 옳다고 생각하는 옳음이잖아요.
남들이 봤을 땐 다른 게 옳을 수도 있는데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걸 남들에게도 강요하는 사람이지요. 남들에게 자기 옳은 걸 너무 강요하는 완전, 그래서 남들이 너무 스트레스받는, 그런 사람이 이제 그 조직에 이었단 말이지요.
에니어그램 2번 공부를 하는데,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 전부다, 100% 전부다 2번을 딱 듣자마자 바로 그 사람을 다 떠올렸습니다.(웃음) ‘야, 100% 저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을 다했어요. 너무너무 어이없는 것은,
그분이 정작 2번 공부하면서 “야, 이런 사람 있더라.” “이런 사람 얼마나 스트레스받겠어?” 그래 얘기를 하길래.(웃음) 전부다 우리 서로 눈을 보면서 너무 어이없는 눈빛으로 “아니, 당신이 정확히 2번입니다.”라고 누가 너무 답답해서 얘기를 해줬어요.
그랬더니 발끈하면서 내 인생의 모토가 고집하지 말고 살 자인데.(웃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나는 전혀 내 고집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나는 내 인생의 모토가 내 고집부리지 않고 사는 건데. 너희들 정말 나를 잘못 알고 있다.
여러분들 나를, 완전 나를 잘못 알고 있다. 야, 정말 그 얘기를, 그 사람이 2번이라는 걸 납득시키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어서 몇 시간을 설명해줘서야 몇 시간 후에 ‘야, 너무 충격적이다. 내가 그런 성향이 있다’라는 거를 요만큼 인정 하더라고요.
요만큼 인정하면서 “야, 진짜 그런 거 같기도 하네.” 완전 인정을 그때까지도 못하시고. 그때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야, 그때 그분의 그 반응을 보고 모두 다 충격받았어요. ‘아, 본인의 성향을 본인은 이렇게도 모를 수 있구나’ 자기 자신을 자기는 절대 몰라요.
그런데 ‘안다’고 생각합니다. 안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자기를 모르니까, 자기를 이렇게 거울처럼 비춰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나이가 들면 들수록,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걸 있는 그대로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 특히나 자기 성격이 좀 안 좋은 사람일수록, 화를 잘 내는 사람일수록, 주변에서 그 얘기를 절대 못해줍니다. 절대 못해줘요. 괜히 얘기했다, 그 사람과 의(義) 상하고. 괜히 사이 안 좋아지고 이럴 필요가 없잖아요. 그냥 ‘그러려니’하고 살아라.
그런데 어느 날 이래 살다 보면, 갑자기 세상 사람들이 나한테 안 다가오고, 내가 왕따가 되는 거 같고, 이런 걸 느껴요. 그런데 그게 본인 탓이라는 생각은 못 합니다. 그러구 그분이 그러시더라구요.
내가 한창 잘나갈 때는 나에게 다 이렇게 잘하더니 내가 딱 일 끝나고 나니까 다 나를 왕따 취급한다. 이러면서 세상 사람들 다 나쁜 놈이라고. 그래서 이 세상이, 정말 내가 뭔가 가지고 있을 때만 나를 좋아하고. 내가 없으니까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라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을 다 나쁘다고 얘기하는데. 제가 요만큼 올라오는데,(웃음) ‘그게 그것 때문에 그런 게 아니고, 거사님이 돈이 많았을 때 사람들이 오다가 돈이 없어졌다고 안 오는 게 아니고, 높은 자리에 있을 때가 아니라고 그러는 게 아니고,
거사님의 성격 때문에 그렇단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라고 이만큼 올라오는데, 참. 그분이 저한테 정말 공부를 딱 배우겠습니다. 하고 이렇게, 이런 분이라면 저도 얘기했을 거예요. 그런데 이제 이런 얘기가 있더라구요.
그런 허물을 얘기할 때는 자기가, 자기보다 권위가 몇 배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얘기를 해도 먹히는데.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게 전혀 먹히지 않는다. 확실합니다. 그래서 그 얘기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못해주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까 사실은 마음을 확 연 사람에게는 그런 얘기를 해줄 수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전혀 그런 얘기를 해줘도 안 되고. 해줘 봐야 욕만 얻어먹고. 해줘 봐야 본인이 그걸 바꾸질 않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평생 자기를,
마음을 열기 전까지는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런 어떤, 이런 것에 빠져있기가 사람들이 참 쉽습니다. 이처럼 내 안에 지옥도 있고, 아귀도 있고, 축생도 있고, 어리석은 중생심, 망상을 따라가서 살잖아요,
모두 다. 그게 축생이에요. 개, 돼지, 고양이가 축생이 아니고. 개, 돼지, 고양이는 어찌 보면 그 실상으로서 살잖아요. 배고프면 먹고, 주면은 좋으면 좋아하고, 맛있는 거 많이 주면 그냥 좋아하고, 그냥 단순하잖아요. 막 분별, 머리 굴려서 살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어찌 보면 강아지나 고양이를 보면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면, 되게 순수하거든요. 보면은. 강아지들 얘기 들어보면, 저기 아는 스님들 얘기 들어보면 그 강아지가 너무 지혜로워서 정말, 절에 불날 때,
이 스님을 정말, 강아지가 문을 박차고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불난 것 때문에 스님을 살리기 위해서 정말 온 힘을 다해가지고 문을 그냥 거의 부수다시피 하면서, 이 스님을 깨워가지고 살게 하고.
막 그런 일을 몇 번 겪고 나서는 정말, 정말 ‘내 자식도 저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스님이 뭐 개에 저렇게 집착하나’ 싶을 정도로.(웃음) 처음에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을 했었을 정도에요. 그런데 얘기를 듣고 보니까 정말 그렇게 정말 그러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런 개, 돼지, 고양이, 이런 게 축생이 아닙니다. 정작 축생은 어리석은 것이 축생이에요. 어리석음. 어리석음은 뭐냐? 반야 지혜가 없는 것. 실상이 아닌, 허상을 실상으로 착각하는 것. 그것을 반야심경에서는 전도몽상이라고 그럽니다.
‘전(顚)’ 뒤집히는 것이지요. 허상을 진짜라고 알고, 실상은 저 제켜놓고 사는 거예요. 허상을 진짜라고 아는 거예요, 내 머릿속의 개념을 진짜라고 아는 거지요. ‘난 알아’라고 하는 생각을 진짜 아는 걸로 착각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사실은 뭐 대학교수님이라고 똑똑한 것이 아닌 것이지요. 어른이라고 더 똑똑한 게 아닌 것이지요. 개, 돼지보다 사람이 더 똑똑한 게 아닌 것이지요. 지식적으로 뛰어나다고 진짜 뛰어난 게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돈도 많이 벌고 저명하고 이런 분들이 TV 언론에 나오는 거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범죄를 저지르고, 정말 말도 안 되는 진짜 몹쓸 짓을 하고, 그게 저는 처음엔 좀 이해가 안 됐었어요. 나중에 가서 좀 이해를 했던 게,
처음에는 저는 높은 자리 계시고, 뭔가 돈도 많이 벌고, 뭔가 저명하고, 이런 분들은 다들 성품도 완전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지요. 어릴 때는. 그런데 그게 전혀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또 높은 자리 계시고 이런 분들 중에도 정말 성품까지도 정말 지혜롭고 마음공부도 열심히 하시고,
이런 분들도 당연히 계세요. 돈이 없든 뭐 낮은 지위에 있든, 이런 분들 중에도 똑같이 정말 지혜로운 분이 계시고, 그렇지 않은 분도 계시구요. 그러니까 사실은 이 마음공부의, 이 실상의, 공부에서는 공부의 눈으로 봤을 때,
반야 지혜의 눈으로 봤을 때는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세계가 펼쳐지지요. 겉으로 봤을 때 잘나고 뭐 화려하게 입고 다닌다고 진짜 잘난 게 아닐 수 있지요. 그래서 이제 내면의 어떤 아름다움이라고도 표현할 수가 있겠지요. 진정한 지혜.
‘내가 지혜가 있느냐 없느냐’ 이게 정말 출세간의 공부에서는 중요한 것이지. 세간에서 얘기하는 수많은 기준들, 거기에 내가 뭐 해당된다고 해서 막 대단하고 이럴 것이 없는 것이지요. 저도 가만히 생각하면 그냥, 그냥 우스개로,
제가 제일 스트레스받았을 때가요. 제가 제 나름대로 대학교 1학년, 2학년 때 제일 많이 막 꾸미며 살았던 거 같애요. 대학교 1학년, 2학년 때니까 이제 막 공부도 끝나고 하니까 이제 막, 관심도 생기고. 이러다 보니까 막 잘 보이고 싶고. 뭐 이러잖아요.
그러니까 막 옷도 예쁜 것으로 사보고 했던 거 같애요. 그런데 그때는 되게 불편하고 힘들고 뭔가 계속 남들 눈치 봐야 되고. 뭔가 이렇게 계속 잘 보이기 위해서 애써야 되는 그런 삶이잖아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중학교 1학년, 2학년 때까지 이제 저희 아버지 일을 도와드렸는데. 아버지가 토건업을 하시다 보니까 아버지가 보도블록 깔고, 담장 세우고, 노깡(일본어, 토관(土管))이라고 해요, 노깡. 노깡 이렇게 갖다가 묻고. 나중에 흉관(수로관) 이런 거, 일을 하셨거든요.
아버지가 이제 평일 날은 이렇게 지인분들과 가다가 주말이 되면 항상, ‘이게 인생 공부라고’ 하시면서 저를 반드시, 저를 데리고 다니면서 일을 시킨 거예요. 저는 일요일이 제일 싫었습니다, 저는. 일요일은 한 번도 쉬지 못했기 때문에.
정말 맨 날 삽질을 하면서 노가다를 하고 살았고. 그래서 그 당시는 그때는 막 보도블럭을 직접 찍었어요. 직접 보도블록을 찍고. 또 담장도 직접 찍고, 나르고, 직접 세우고, 시공도 하고. 그런 거 잘합니다.(웃음) 아주 어릴 때부터 해가지구.
초등학교 때부터 경운기 몰고. 그런 거 싣고 배달도 다니고. 그랬었거든요. 그런데 그때, 그때는 제가 그냥 뭐 이성에 대한 개념도 없고. 뭐 사춘기도 아니었던 거 같고. 그냥 아버지를 도와드리는 게 힘들긴 힘들지만, 그냥 뭐 이렇게 ‘멋’ 이런 걸 부릴 줄을 몰랐던 거 같애요.
그런데 그때 제가, 지금도 이렇게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똥 멋이 들은 거지요. 그때는. 별로 멋이 뭔지 모르니까. 아버지랑 그렇게 일을 하다 보면 온몸에 그냥 콘크리트가 다 튑니다. 얼굴에도 다 튀고, 온몸이 막 새까맣거든요.
그런데 아버님이 모는 경운기 뒤에, 얼굴은 거지같이 해가지고 옷도 이건 진짜 거지 같은 옷만 입고서. 작업복은 거지 같애야 되니까 그랬던 옷만 입고. 그러고 이제 경운기 뒤에 이렇게 노깡이랑 이렇게 뭐 담장 같은 거, 이런 거 착 싣고 아버지는 운전하시고 저는 그 뒤에 올라타가지고 시내로 탁 이게 배달 가는 거예요.(웃음)
배달을 가면 그냥 저는 그게 그렇게 뿌듯하고 그렇게 자랑스럽고. 이 못난 모습이 막 그렇게 멋있는, 내 스스로 ‘아, 난 너무 멋있어’ 이런 느낌으로 이렇게 있었던 것 같애요. 나중에 대학교 가니까 그런 모습이 이제 오히려 부끄럽고.
그런 모습보다는 뭔가 막 화려하게 하고 싶고, 그래서 제가 기억에 대학교 1학년 때 옷을 사 입고 싶어서 친구들 3명하고 노가다판에 가서 “하루만 일을 시켜주십시오.” 했더니 “너네 같은 애들은 안 된다.” 그래서 “저 삽질 진짜 잘합니다.”
그래서 “한번 해봐라.” 이래가지구. 셋이서 했는데, 내 친구들은 오지 말고 저만 오라고.(웃음) 그때 12만원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안 주거든요. 어떻게 젊은 애가 이렇게 노가다를 잘하느냐고.(웃음) 그거 받아가지고 바로 저녁때 옷 사 입었던 기억이 나거든요.(웃음)
그러니까 이게 자기 머릿속에서 자기가 만들어낸 헛 멋이 들은 거지요. 그냥. 이것이든 저것이든. 그러니까 그런 멋이 들어있으니까 삶이 되게 불편하고. 뭔가 남들을 자꾸 신경 써야 되고. 눈치 보고. 이렇게 살게 되더란 것이지요.
그런데 한 생각의 차이입니다. 한 생각이 바뀌면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지요. 우리도 남들에게 ‘이렇게 보여야 돼’ ‘저렇게 보여야 돼’ 자식이 어느 대학을 가고 어느 정도는 해야 내가 그래도 남들에게 이렇게 얘기할 수 있고.
그래서 삶에서 어떤 남들에게 보이는 이목, 이런 걸 신경 안 쓸 순 없는데. 그게 내 인생을 지배하게 되면 우리는 정말 삶을 자유롭게 살 수가 없게 됩니다. 항상 머릿속에 판단한 그 남들의, 남들을 의식하는 것 자체가 비교 분별심이잖아요.
의식하는 마음, 그 마음 때문에 정말 딱 중심 잡힌 삶을 살 수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 다시 돌아와서, 이렇게 육도윤회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입니다. 지금 이 순간, 매 순간 육도윤회를 하고 있어요. 죽고 나서 육도윤회하는 게 아니구요.
‘죽고 나서 육도윤회를 한다’ 실상입니까? 허상이지요. 생각이잖아요. 죽고 나면 내가 축생이 되거나, 개돼지가 되거나, 지옥 가거나, ‘어디 갈지도 몰라’ 이거 검증 가능한 실상입니까? 지금 이것만도(죽비로 손바닥을 치며) 못한 것이지요.
지금 이 순간 드러나있는 이것만이 실상인데. 그걸 어떻게 실상이라 할 수 있겠어요. 과거도 허상인데. 하물며 미래를 실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은 그런, 부처님 경전에 그런 게 있지요. ‘와서 보라고 할 만한 법이다’ 실제 검증 가능하고,
실제 자기 스스로 체험하는 것이지. 실제를 얘기하는 것이지. 허망한 얘기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사실은 윤회와 관련된 것들에 대해서는 ‘있다거나’ ‘없다거나’ 이렇게 딱 단정 지어 얘기하지 않습니다.
방편으로 윤회란 얘기를 쓸 순 있을지언정. 왜? 윤회라는 건 어제도 허상이고, 내일도 허상인데. 윤회라는 전생과 후생에 대한 이야기는 허상인데, 그 이야기를 강조해서 할 필요가 있습니까? 전혀 그 얘기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허상에 끌려가는 것이거든요.
옛날 사람들은 선악이라는, 이게 종교에서 상당히 중요한 걸 차지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뭐, 부처님 당시도 산길을 걸어가다가 도적 떼한테 당해서 뭐 죽고, 이런 일이 너무 많았으니까. 선악이라는 이런 기준, 지금 같은 이런 법이 없으니까,
그런 것들이 중요한 시대다 보니까, 선악에 대한 얘기를 더 강조해서 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까 이런 어떤 인과응보, 윤회, 이런 걸 통해서. 또 인도의 문화에서는 윤회가 너무 중요하잖아요. 또 힌두교에서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위에 있는 계층들이 자신의 어떤 계층,
이것을 합리화하기 위한 어떤 근거로 윤회를 쓰기 때문에. ‘너희들은 원래 천민들이야’ ‘우리한테 복종해야 돼’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돼’ 윤회를 그런 식으로 써먹었기 때문에. 그걸 더 강조했던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 과도하게 우리가 천착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왜냐면 실재, 실상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이렇게 지금 이 순간에, 우린 매 순간 육도윤회를 마음 하나로 육도윤회를 항상 경험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지옥, 아귀, 축생을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면서,
탐진치 삼독을 왔다 갔다 하면서, 선악을 왔다 갔다하면서 머릿속에 생각, 개념, 분별심, 이거를 쫓아다니면서 중생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육도윤회를 한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음이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잖아요.
육도윤회를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육도윤회를 육도를 벗어나는 것이 불교의 공부잖아요. 어떻게 육도를 벗어나겠어요? 육도는 생각, 개념, 번뇌, 망상, 식에서 나온 거잖아요. 허망한 의식에서 나온 거잖습니까?
그러니까 의식 너머에 분별하지 않는 무분별지, 반야 지혜, 실상을 바라보는 살상에 서있는, 실상을 바라보는 지혜. 그것이 육도윤회를 벗어나는 길입니다. 그래서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수라, 천상이라는 여섯 개의 이 언덕이 있고,
저 언덕은 불 세계. 부처님의 세계, 불국토라고도 하는 불 세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계에서 저 세계를 가려면 고해 바다를 건너야 된다, 그래요. 왜냐면 인간, 괴로움이잖아요. 고해 바다를 건넌다,라는 말은 고(苦)를 끝낸다,라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고해 바다를 건너가려니까, 바다를 건너가려니까 배를 타고 가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배를 탄다’라고 해서 탈 승(乘) 자를 써서 대승, 그러면 모두가 함께 타는 배. 함께 타고 갈 수 있는 배. 대승불교. 소승불교는 내 혼자 타고 가는 배. 소승불교.
그러고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가는 배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지요. 수행 방법이 있다는 것이지요. 방법에 따라서 부처님은 성문, 연각, 보살이라는 삼승을 얘기를 해요. 성문(聲聞)은 성문, 소리를 듣고 깨닫는다는 겁니다. 법문을 듣고 깨닫는다.
성문승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제자들은 전부다 성문승이었어요. 부처님은 연각(緣覺), 연각이라고 볼 수가 있지요. 부처님은 스스로 12연기를 깨달아서 스스로 부처가 되셨으니까. 부처님은 어찌 보면 연각승입니다.
그런데 부파불교가 워낙 왜곡되고 부파불교는 부처님 당시에 불교를 해석, 해석하고 막 현학적으로 연구하고 이런 불교. 아비달마 불교다 보니까 이게 나중엔 연구만 하다 보니까 글자에 막 천착이 돼서 불교의 본질을 잊어버렸던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까 대승불교가 나오면서 대승불교가 나오려면 필연적으로 잘못된, 삿된 걸 타파해야 되잖아요. 깨야 되잖아요. 부파불교의 그런 잘못된 부분을 깨기 위해서 부파불교를 전반적으로 타파하고 깨뜨리는. 깨뜨리면서 대승불교를 딱 세운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대승불교 수행자들이 부파불교의 수행자들을 폄하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폄하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문승과 연각승을 아주 삿된 수행자들이고, 보살승이 최고다. 보살승은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수행자를 보살승이라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그런 방편으로 쓴 거예요. 그러나 실제 성문승, 연각승이 잘못된 사람들이 아니지요. 부처님께서는 연각승이라고 볼 수도 있고. 또 부처님 제자들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소리를 듣다가 법문을 듣다가 깨달았으니까 성문승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성문승과 법문을 듣다가 깨닫거나. 스스로 연기법을 깨달아서 체득해서 깨닫거나. 보살승, 대승불교에서 말하듯이 대승의 공(空) 사상을 깨닫는 것. 그리고 일체 모든 중생들이 함께 공부해갈 수 있도록,
일체 모든 중생들에게 베풀고 자비를 나누고 이러면서 함께 가는 이 공부. 이런 어떤 보살, 이런 보살 수행자. 이것을 세 가지라고 해서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이라고 해서 삼승(三乘)의 세계가 있다고 합니다.
이걸 10법계라고, 6개(천상, 인간, 아귀, 축생, 아수라, 지옥), 3개(성문, 연각, 보살), 1개(부처), 이렇게 해서 10법계라고 부르는데요. 이 10법계가 곧, 하나의 법계입니다. 사실은. 그런데 이제 편의상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이 언덕을 건너가는 타고 가는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이 있다.
이렇게 해놓은 것이지요. 이것을 타고 가는 방법이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이 있다,라고 했는데. 이것을 이제 나중에 대승불교의 법화경이라는 경전에 보면 회삼귀일(會三歸一)이라고 해서 불타는 집에서 불이 타고 있는데, 불이 났는데.
자식들이 사슴이 끄는 수레, 장난감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서. 불났는데 나오라고 해도 안 나오니까 아버지가 밖에서 “야, 사슴이 끄는 수레 장난감을 줄 테니까 나와.” 또 “소가 끄는 수레 장난감 있으니까 나와.” 또 하나 뭐죠?
“양이 끄는 수레 있으니까, 줄 테니까 나와.” 그러니까 이 친구들이 이 수레 장난감을 받고 싶어서 뛰쳐나온 거지요. 뛰쳐나오니까 이거는 이제 애들이 조금 좋아하는 것들인데. 대백우거라고 해서 가장 좋은 수레, 이거는 감히 너무 비싸서 사 달란 말도 못 했는데.
이 세 가지를 주겠다고 해서 나오라 그래서 나왔는데. 나오니까 이 세 사람 모두에게 대백우거(大白牛車)를 줬다. 가장 좋은 수레를 주었다. 이렇게 표현을 하거든요. 그 말은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이라는, 중생들이 저 불난 집에, 탐진치 삼독으로 불나고 있고.
번뇌망상으로 불나고 있는 불속에 막 빠지고 있어서 오라고, 오라고, 나오라고, 나오라고 해서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들이 있는데. 나오라고 했는데 이들에게 결국에는 대백우거. 하나의 부처, 일불승, 하나의 부처를 선물해 주었다.
즉 성문, 연각, 보살이 결국에는 하나의 부처에 이르는 각각의 다른 방편이 아니라 하나다,라는 것을 설명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삼국시대를 통일할 때도 회삼귀일사상(會三歸一思想). 법화경의 회삼귀일사상(會三歸一思想)에 의해서
‘성문, 연각, 보살승이 하나의 일불성이 되어야 한다’라는 그 정신을 바탕으로 불연국토(佛緣國土) 사상이라고 해서요. 이 삼국을 하나로 통일한, 그래서 이 신라시대는 어떤 통일신라 자체가 아주 부처님의 인연이 있는 국토다. 이렇게 이제 뭐 갖다 붙인거지요, 어찌 보면.
그렇게 해서 우리 불국토사상, 불연국토사상을 이렇게 설했던 겁니다. 이처럼 지금 이 하나의 진실밖에 없는데 중생들이 다양한 번뇌망상의 6가지 종류에, 다양한 번뇌망상에 시달리면서 육도윤회의 괴로움에 빠져있기 때문에 그것을 건져주기 위한 다양한 방편을,
수행법을 쓴 것이지요. 그 수행법을 대표적으로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이라고 하지만. 반야심경에서는 건너가는 그것을 바라밀다,라고 표현을 한 겁니다. 그래서 바라밀다는 저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는 것이구요. 또 이 배를 타고 가는데,
옛날에 이런 비유도 있지요. 뗏목을 타고 간다. 옛날엔 배가 그렇게 좋은 배가 아니었잖아요. 뗏목을 타고 간다. 뗏목을 타고 갔는데 이미 도착했으면 저 피안의 언덕에 발을 딛고 내려야 됩니다. 내려야 되는데
‘야, 이 뗏목이 좋아서 나는 요 뗏목에 살래’ 하면 영영 피안에 내릴 수가 없다는 거지요. 그래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이 방편, 뗏목을 버려야 된다. 방편을 버려야 된다.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모든 말, 언어, 방편. 그래서 방편반야라고 한다.
이랬지요. ‘방편으로 된 모든 문자, 언어에 사로잡히면 안 되고, 그것을 버려야지만 참된 진실에 도착할 수가 있다’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바라밀다,라고 하면 반야를 증득하는 것을 바라밀이라고 하겠지요.
이 언더에서 저 언덕으로 이르려면 반야 지혜가 있어야 되니까. 반야를 증득하면 저절로 바라밀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반야바라밀’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반야바라밀은 어떻게 하는 것이지요. 중도도 마찬가지예요.
“중도를 어떻게 닦는 거예요?”라고 물어보면 우리가 다 염불수행을 어떻게 하면, 설명 잘합니다. “다라니 어떻게 해요?” 그러면 다라니, “아! 천수경을 읽다가 어떻게 어떻게 해서 막 이렇게 하면 돼.” 설명 잘합니다.
“좌선을 어떻게 해?” 하면 좌선하는 방법을 또 알려주고. 방법을 잘 설명합니다. 그런데 “중도를 어떻게 닦아요?” 하면 말문이 막히지요. “반야바라밀을 어떻게 닦아요?” 그러면 말문이 말혀요. 그런데 그렇게 말문이 막히는 게 진짜, 진짜입니다.
그렇게 하는 게 진짜 반야바라밀의 공부지요. 여기(교재) 반야바라밀에 대해서 나온 거에, 보살은 반야바라밀 수행을 하지만 반야바라밀이라는 모양을 취하지 않는다. 취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집착하지 않는다. 왜냐면 반야바라밀은 그 자성이 없어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반야바라밀을 설하고 있는데, “반야바리밀은 어떻게 하는 거예요?” 그 답을 “이거야. 이게 반야바라밀이니까 이것만 하면 돼.” 이렇게 해줄 수 있는 뭔가가 없습니다. 반야 지혜를 증득하면 될 뿐. ‘이것만이 반야바라밀의 구체적인 실천방법이야’
라고 얘기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얘기를 하면 중생들은 너무 당황스러워하다 보니까. 이제 대승불교의 많은 경전에서는 ‘반야바라밀을 증득했을 때, 증득했을 때 이러한 어떤 공덕들이 있더라’라는 것들을 설명을 하거든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좀 닦게 되면 반야바라밀을 닦아가는데 조금 더 도움이 된다’라고 해서 뭐 6가지 바라밀을 얘기하기도 하구요. 육바라밀에서 보시, 지계, 인욕, 선정, 정진, 반야를 설하기도 하고. 거기다가 방편, 원력, 지혜를 포함해서 10바라밀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바라밀을 하나하나 억지로 억지로 닦아가지고, 닦아가지고, 닦은 결과 바라밀에 성공한다. 이런 얘기가 사실은 아닙니다. 억지로 인위적으로 닦아가야 되는 어떤 그런 것이 아니라, 아까 말한 것처럼 중도 수행으로써,
반야바라밀로써, 하되 함이 없는 것으로써, 닦아갈 수 있는 공부인 것이지요. 또 차후에 이제 바라밀에 대해서 또 하나하나 말씀을 드리도록 그렇게 하겠구요. 그래서 이렇게 바라밀이라는 것은 저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는 것이구요.
그래서 마하반야 크나큰 지혜로써 저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는 그 반야 지혜를 설한 가르침. 그것이 이제 반야심경이구요. 여기서 심경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경전이다. 혹은 이 마음을 이제 핵심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해요. 핵심이 되는 경전이다.
혹은 마음의 경전이다. 이렇게도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마음의 경전이라고 한 이유는 우리가 마음을 중생심과 본심? 본래 마음. 뭐 이렇게 표현을 하기도 하잖아요. 중생심, 분별심이 있고. 부처님의 마음은 무분별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보통 선(禪)에서 ‘마음’ 이러면 ‘부처님의 본래 마음’ 이것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본래 마음을 드러낼 수 있도록 본래 마음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가르침. 이렇게도 설명을 할 수가 있어요.
그리구 반야심경은 짧은 경전이잖아요. 그러니까 핵심이 되는 것만 딱 뽑아놓은 경전. 이렇게 해석을 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공부를 하게 되면 우리가 중생의, 우리라는 존재가 ‘어떻게 하면 저 언덕에 이를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실상반야를 증득할 수 있는지’ 그 구체적인 방법이 나오게 되구요. 여기에 보면 부처님께서 설명해주신 방법이 고스란히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많은 제자들을 아라한과를 증득하도록 했을 때,
뭐를 통해서 했느냐면 아함경, 니까야 다 읽어보세요. 전부다 오온에 대한 설법을 통해서 깨닫게 했어요. 오온에 대해서 법문을 해주셨는데 깨달았습니다. 12처 18계를 설명했는데 깨달았습니다. 사성제를 설명했는데 깨달았구요.
팔정도를 설했고 12연기를 설했고 또 사념처를 설했습니다. 여기 고스란히 그 얘기가 나옵니다. 무아를 설했구요. 그 얘기가 전부다 여기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기불교 경전을 보면 우리가 딱 느끼는 것이 ‘이상하다’ 기존에 우리가 기도하던 것만 익숙해 있던 사람들은 초기불교 경전을 보면서 갸우뚱합니다.
지금 우리 불교에서 우리한테 가르쳐주는 것처럼 ‘염불해라’ ‘독경해라’ ‘다라니 해라’ ‘몇십 분 동안 앉아서 좌선해라’ 이런 방법론. 우리 방법론 엄청 많이 알잖아요. 집에서 기도할 때는 삼귀의하고 천수경 한번 독송하고 절 한번 하고 뭘 한번 하고 한 시간을 해라.
사시불공에 동참하면 사시불공에 가서 한 시간 동안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기도를 따라 해라. 이런 식으로 방법론을 착착 착착 우리한테 주고 있잖아요. ‘그렇지, 이 방법대로 하면 깨닫는 거지’ 이렇게 하고 우린 살았잖아요.
그런데 초기불교 경전을 보면서 되게 당황합니다. 부처님을 신뢰할 수가 없어요. 지금 스님들은 다들 훌륭하셔가지고 딱, ‘이렇게 수행하면 이렇게 깨닫는다’고 방법을 알려주니까, 딱 손에 잡히는 뭔가가 있잖아요.
그런데 초기불교 경전을 읽으면 부처님이 좀 이상하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뭔가 딱 손에 잡히게 쥐여주는 게 없으니까. 그리구 경전을 보면 이해가 안 됩니다. ‘오온개공을 가지고 내가 어떻게 깨닫지’
‘12처가 공하다는 걸 가지고 내가 어떻게 깨닫지’ ‘내가 어떻게 실상을 볼 수 있지?’ 이런 생각이 들어요. ‘사념처나 팔정도나 바르게 보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생각해라’ ‘뭐 어쩌라는 거야’ ‘어떻게 하는 게 바른 건데’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중도! 그러니까 중도를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건데’ 이런 질문이 자꾸 나오는 거예요. ‘중도를 실천해라 하면, 중도를 어떻게 실천하냐고’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쳐주세요’라고 하는 게 우리는 익숙해 있다 보니까. 그 익숙한 것들은 전부다 뭐겠습니까? 분별법입니다.
분별법은 구체적인 방법을 얘기해줘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구체적인 방법을 설명해줘야 얘가 알아듣고 얘가 안주합니다. 그런데 이 공부는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는 법이잖아요. 머물지 않는 법입니다. 어디에도 안주해선 안 되는 법이에요.
‘오케이! 여기만 안주하면 되는구나’ 이런 게 있으면 진짜 법이 아닙니다. ‘아, 이렇게만 하면 되는구나’ 해서 거기를 딱 쥐게 되면 거기 집착하는 거지. 그게 어떻게 닦는 거겠어요. 어디에도 집착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어디에도 발을 내딛지 못하게 만들어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게 만듭니다. 그게 중도의 목적입니다. 반야심경 공부를 할 때 계속해서 그러한 참된 중도, 참된 바라밀, 참된 반야바라밀은 지금 이렇게 제가 지난주, 이번 주 두 번에 거쳐서 계속 반야바라밀을 얘기했는데.
‘어쩌란 거야’(웃음) 명확하게 구체적인 방법이 없는데.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에요. 없는 건 아니지요. 분명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방법 아닌 방법인 것이지요. 길 없는 길이고. 하되 함이 없이 해야 하는 길인 것이지요. 이게 진짜 공부입니다.
그런데 이 공부는 하는 거 같지가 않아요. 여러분 공부가 지금 어찌 보면 그 어느 때보다 더 바른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 10년 전에 내가 하루에 염불 3시간씩 했을 때, 다라니 막 108독씩 외웠을 때,
하루에 막 천 배씩 하고 이랬을 때, 그때는 공부 되게 많이 하는 거 같았는데. 지금은 별로 공부를 하는 것 같지가 않을 수도 있고. 또 숙제라도 내주던지.(웃음) ‘집에 가서 이렇게 이렇게 좀 공부해 와라’ 그것도 없으니까 일주일에 한 번씩 여기 오는 거밖에 없으니까 공부하는 거 같지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좋아요.(웃음)
전 옛날에 스트레스 엄청 받았거든요. 기도해야 되니까. 염불해야 되고 뭐 독송해야 되고 뭘 할 게 많고. 그걸 또 단계별로 나눠가지고 이 단계 딱 끝나면, 그다음 단계 공부, 수행 막 만들어놓은 절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거 계속 시키는 거예요.
진도 빨리 나가면 훌륭한 수행자고 진도 안 나가면 아주 비참한 수행자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봤을 땐. 여러분들이 이 먼 곳을 지하철도 먼, 뭐 그리 멀진 않대요. 지난주 걸어가 보니까.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멀리서 이렇게까지 어렵게 힘들게 여까지. 또 이제 우리나라 한국불교 신도님들의 정서가 땅에다가 기와 올려가지고 절을 딱 놓으면 여기는 좋은 절이고. 이렇게 뭐 빌딩 하나에 한 층 이렇게 하면은 ‘여기는 이상해’
이렇게 생각하는 정서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열심히 찾아오시고 하는 것이, 사실은 이것이 제가 항상 뵈면 뵐 때마다 음! 참 감동적이고 놀랍습니다. 당연히 놀랍지요. 야, 이 공부에 대해서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이렇게 귀하게 여기고
이 공부를 이렇게 하고자 하는 분들이 계신다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면 지금의 시대가, 이게 귀하게 대접받는 시대가 아니거든요. 뭔가 돈이 나오는 뭔가도 아니고. 그런데 ‘이 공부를 하겠다’라는 그 마음을 내고 발심을 한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정말 놀라운 일이고.
경전이나 이런 어떤 방편을 비유해서 본다면, 뭐 어찌 보면 지금 이렇게 공부하는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는 이런 회상에서, 앉아서 공부하는 이것이요, 내 인생 80년, 100년 살아가는 인생에서 너무나도 귀한 순간들. 그 어떤 성취의 순간보다,
그 어떤, 어떤 순간들 보다 더 귀한 이런 순간일 수가 있습니다. 다만, 이제 힘은 드실 것 같애요. 다리도 아프고, 막 무릎도 아프고 하실 텐데. “아, 우리 보살님 진짜 훌륭한 수행자 시다,” 아〜 저렇게 다리를 쭉 뻗고 이렇게 들어주시면 돼요.
다리를 이렇게 탁 뻗으시고. 진짜로 불교는 부처님께서 바로 깨닫기 직전에, 아! 깨닫기 직전에 포기한 게 고행주의잖아요. 고행주의는 불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동안 지금까지 고행주의를 불교라고 생각해서 삼천 배 하고,
앉아서 곳곳 하게 앉아야 되는 걸 수행이라고 생각하고. 곳곳 하게 앉아서 한 치도 흔들림 없는 거는 수행이 아닙니다. 수행자 다운 행동이 아니에요. 실상은 어때요. 이거 허상을 쥐고 내가 곳곳 하게 버티고 있는 거잖아요.
내가 이렇게 곳곳 하게 있으면 뒷사람이 나를 좀 거룩하게 볼 거야. 내가 자꾸만 이렇게 움직이고 흔들고 하면은 ‘아, 저 사람, 수행을 한다는 사람이’ 이렇게 보지 않을까 하는 허상일 수도 있고.
물론 그냥 이렇게 딱 앉아있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서 앉아계시는 분은 아니구요. 아프신 분들은 몸도 왔다 갔다 하고, 다리도 펴고, 다리도 움직이고, 그게 실상 작용에 그대로 응하는 겁니다. 실상? 실상에 다리가 아프니까 다리 펴고 싶은 게 저절로,
내가 억지로 애써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저절로 펴고 싶잖아요. 그럼 저절로 펴면 됩니다. 저절로 움직이고 싶으면 저절로 움직이면 돼요. 그게 그냥 실상을 실천하는 것이지. ‘억지로 난 절대 다리 펴면 안 돼’ 그거는 허상을 좇아가는 겁니다.
고행주의자가 되는 거예요. 고행주의자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삶에 반응하면서 살면 되는 것일 뿐이지요. 그래서 이런 어찌 보면 참, 이렇게 두 시간 앉아계시는 게 정말 힘드신데. 이 정도의 뭐 고행까지는 아니잖아요. 거지요.(웃음)
‘이 정도의 중도적인, 이 정도의 좀 애씀, 노력과 이 정도의 시간 투자하는 것을 가지고 그래도 이렇게 귀한 공부를 한다’라는 마음을 가지시고서 이렇게 공부를 해가신다면, ‘정말 마하반야바라밀 할 수 있는 그런 어떤 공부가 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박수
첫댓글 그러니까 모든 불법은 방편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정도의 중도적인, 이 정도의 좀 애씀, 노력과 이 정도의 시간 투자하는 것을 가지고 그래도 이렇게 귀한 공부를 한다’라는 마음을 가지시고서 이렇게 공부를 해가신다면, ‘정말 마하반야바라밀 할 수 있는 그런 어떤 공부가 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박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매번 받기만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