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야를 이제 이 책에서도 써놨는데, 반야를 이제 세 가지로 보통 이야기합니다. 실상반야와 그 방편반야. 문자반야,라고 불리는 방편반야. 그리고 그 관조반야. 이렇게 세 가지로 이제 보통 얘기합니다. 이 점이 이제 어찌 보면 좀 중요한 점인데요.
반야의 뭐랄까요. 우리가 보통 최상용이라고 부르잖아요. 본체가 뭐냐? 본체는 실상반야가 이제 본체이고. 상은 관조반야이고. 아! 상은 방편반야, 문자반야로 이렇게 모양으로 해놓은 것이고. 그다음에 이제 관조반야,라고 용(用),쓰임. 용이라고 보통 설명을 합니다.
실상반야,라고 하는 것이 이제 체라고 했는데. 즉,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은 그냥 실상반야이다. 이겁니다. 삶의 어떤 본질, 이 세상의 본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본질은 실상반야다. 즉, 실상이라는 것은 ‘실’ 거짓이 아닌 진실이라는 거지요.
‘실’ 진실 된 모습. 이 모습이라는 건 그냥 이제 우리는 상으로만 모든 것을 보니까. 진실 된 모습은 실상무상이라고 해서 ‘실상’ 진실 된 모습은 사실은 상이 없습니다. ‘무상’ 상이 없어요. 그런데 그것을 굳이 방편으로 표현을 하려고 하다 보니까,
실상반야라고. 허상에 비교해서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방편을 쓰다 보니까, 허상이 아닌 실상이다. 이렇게 표현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은 그냥 실상입니다. 우리는 실상을 보고 있고, 실상을 살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 다만 계속 말씀드리듯이 그 허상이라는 것을 우리가 자꾸 취하고, 만들어서 내 스스로 허상을 만들어서, 내 스스로 만들어낸 그 허상을 취하면서, 실상을 자꾸 놓치고 있다는 것이지요. 실상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놓치고 있다.
그러다 보니까 이제 우리는 허상을 쥐고 살아가다가 실상을 깨닫고자 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나 보니까 이게 이제 부처님 가르침이 2500년이 흘러왔고 그러다 보니까 보통 옛날 사람들, 우리 위인전만 봐도, 수많은 위인전에 보면 옛날 사람들,
위인들은 보면 뭐 태어나는 것부터가 다 신기하게 태어나잖아요. 그럼 태어나자마자 막 그냥 희한한 신통자재함을 부리기도 하고. 남들은 못하는 것들을 뭐 위인전 같은 거 보면, 전기 같은 거 보면 ‘참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신기한 그렇게 이제 역사가 이어오면서 이제 좀 더 뭐랄까. 우상화, 신격화하고 뭐 이런 모습이 있는 것처럼. 불교도 그런 역사.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까 이제 그런 오염? 뭐 그런 것들이 좀 많아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 일대기를 보면 오비구(五比丘)를 만나서 부처님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해주시고, 법이 무엇인지 설명해주시고. 그때 이제 ‘중도’와 ‘사성제’를 설해주시고, ‘연기법’을 설해주시고. 그러구 이제 깨달아요.
그리구 나서 머지않아서 또 30명인가요? 다들 깨닫게 되고. 그래서 이제 ‘한 길로 둘이 같이 가지 마라’하고. 또 이제 전법 여행을 떠나보냅니다. 그리구 나중에는 머지않아서 또 가섭 3형제라고. 그 당시 가장 큰 교단, 가장 큰 교단에 그 최고 뭐랄까,
막강한 실력자. 어떤 교단을 이끌고 있는, 가섭 3형제가 이끌고 있는 천 명의 대중. 천 명의 대중에게 법을 설해서, 그들이 또 아라한을 증득하구요. 또 사리불과 목견련이라고 하는 두 상수 제자가 데리고 있던 또 한 250명의 제자들도 또 아라한과를 증득합니다.
그래서 보통 보면 이제 금강경에서도 처음에 1250인이라고 얘기하는 게, 그 천 명과 250명을 합쳐서 그렇게 1250인이라고 보통 통상적으로 많이 이야기하는데.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금방, 금방 금방 이렇게 깨닫습니다.
그리구 재가신도님들도 법문을 듣고 많이 깨달음을 얻고. 그리구 또 그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막 엄청난 뭔가 막 신이적(神異的)이고 뭐 이렇게 표현하거나 이렇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을 얻을 때 뭔가 막 세상이 확 무너져 내렸고.
뭐 이런 어떤 신통자재함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냥 단순하게 간단하게 얘기를 하시고. 되게 우리가 느끼기에는 ‘너무 엄청난 깨달음을 얻었는데 뭐 이렇게 가볍게 얘기를 하고 넘어갈까’ 이제 이럴 정도로 좀 신기하게. 되게 평범한 것인 거지요.
막 어마어마한 사건이 아니라. 그랬던 것들이 이제 시간이 지나오면서 깨달음은 부처님밖에, 제대로 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없고. 또 깨달음은 엄청난, 엄청난 거라 우리는 범접할 수 없다,라는 이제 상을 우리 머릿속에서 만들어냅니다.
그렇게 만들어내게 되면 그것, 내가 만든 상이잖아요. ‘깨달음은 이런 거야’라는 상을 내가 만들었기 때문에 그 내가 만든 허상에 딱 사로잡힐 수밖에 없고. 거기 사로잡히게 되면 그 상 때문에 진리를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건 진리가 아니야’라고 생각을 합니다.
가만히 보면 문득문득 여러분들도 아마 그러실 겁니다. 저도 가만히 되돌아보면 ‘야, 정말 옛날 그때 어떤 그 경험이 야, 문득 어떤 이 사실을 확인하는 그런 경험이었을 수 있겠구나’ 그런데 그 당신 전혀, 전혀 그럴 수가 없다.
그냥 그렇게만 생각을 해오는 일들이 좀 많으실 겁니다. 왜냐하면 너무 우리 마음속에서 깨달음에 대한 엄청난 환상적인 뭔가가 서있기 때문에. 상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그래서 뭐랄까. 평상심시도라고 하는 평상심. 평상심이 도다.
즉, 실상반야가 뭐냐. 평상심이 바로 실상입니다. 가장 단순한 그 평상심. 있는 그대로의 아무 문제 없는 그냥 우리의 마음. 우리는 뭔가 일을 만들고, 그 일을 해야 되고, 뭔가 원하는 것을 생각하고, 원하는 것을 추구하다가 원하는 걸 이루는.
거기에 이제 익숙하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그냥 맹숭맹숭한 것. 그냥 아무 일없는 삶. 뭐 그런 거에 대해서는 영 찜찜하고, 나를 뭔가 발전시켜주지도 못할 거 같고. 우리의 그런 순간은 많잖아요. 그냥 있는 순간.
뭐 특별히 할 거 없어서 그냥 ‘야, 나는 크게 고민도 없고’ ‘크게 뭐 괴로운 것도 없고’ ‘그렇다고 막 크게 기쁠 것도 없지만’ ‘그냥 이렇게 그냥 아무 일없이 그냥 이렇게 앉아서 아무 일없이 밥을 먹고 나서, 아무 일없이 그냥 커피 한잔 마시면서,
창밖을 바라보면서, 창밖을 바라보다가 이렇게 바람이 불어올 때 나뭇가지가 바람에 이렇게 스쳐올 때, 그냥 그런 것들을 묵연히 그냥 가만히 바라보면서 그냥 아무 일없이 그냥 ‘참 편안하다’ 이렇게’ 이러구 가만히 있을 때도 있거든요.
그런데 이제 그럴 때는 어떻게 생각이 곧장 올라와서 뭐라고 하느냐면, ‘너는 지금 진짜 세상 팔자 좋구나’ ‘넌 어찌 그렇게 아무 일없이 그러구 있느냐’ ‘빨리 뭐 생산적인 뭔가를 해야 안 되느냐’ 빨리 돈을 벌던, ‘자식 공부 걱정을 하든,
뭘 하든 뭔가 공부를 하든, 아님 경전이라도 보든, 뭔가를 해서 뭔가를 채워나가야지’ ‘그렇게 그냥 가만히 있는 시간을 그렇게 즐기면 되느냐’라고 생각이 올라와서 그 아무 일없는 순간을 곧장 방해해버립니다. 저도 가만히 보면요.
제가 뭐 그렇게 히말라야 갔던 책이라든지 아니면 이런저런 글을 쓸 때도 보면은 늘 그래 왔어요. 그냥 자연과 함께 완전, 교감할 수 있는 순간은 내 마음이 일이 없을 때입니다. 일이 없을 때.
그냥 아무 일이 없을 때 그때는 그냥 가만히 앉아서 그냥 숲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 아무 일이 없이 충분합니다. 뭐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표현한다면 참, 평화라고도 할 수 있고. ‘정말 고요함이다’라고 할 수 있고.
아무 일없는 정말 그런 순간일 수도 있지요. 산길을 이렇게 걷다 가도 바람이 이렇게 불어오면 나뭇잎들이 바람에 탁 불어오는, 꼭 파도 소리처럼 이렇게 들리는 뭔가 그런 것들을 이렇게 홀로 가만히 느끼면서 그냥 거기서 더 이상 아무 일이 없고,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지요. 산길을 빨리 걸어야 되겠다는 생각도 없고, 늦게 걸어야 되겠다는 생각도 없고, 빨리 마치고 빨리 가야 되겠다는 생각도 없고, 그냥 한 발 한 발을 내디디면 그냥 그뿐입니다. 아무 일이 없어요.
‘뭔가 빨리 갔다 와서 뭔 일해야지’ 그러기 시작하면 곧장 막 번잡해지고 빨리 내려가야 되는 목표가 생기면 갑자기 또 급히 내려가야 될 것 같고 그렇거든요. 그런데 그런 일없이 ‘뭔가 해야 된다’라는 이런 일 없이. 그냥 가만히 앉아서 차를 한 잔 마실 수 있습니다.
그냥 차 한 잔이 이렇게 김이 모락모락 올라가는 그 모습을 묵연히 바라보기만 해도 그냥 평화롭다 할까요? 그냥 고요하달까요? 이 햇살이 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을 요렇게 바라보고만 있어도 그 뭔지 모르게,
뭐 이런 것을 또 어떤 사람은 예를 들면 뭐 표현이지만 야, 정말 그냥 그것과 내가 그냥 하나가 된 것 같은. 그냥 그러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린 이런 순간들을 견디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은 비생산적인 순간이고. 빨리 없애버려야 될 순간이고.
‘그런 순간에 오래 있으면 우울증에 걸리지도 몰라’ 아니면 생산적이지 않으니까 뭔가 나는, ‘나는 이 세상에 뭔가 기여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야’ 이런 생각이 올라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완전한 순간을 가만 내버려 두질 못해요.
곧장 무슨 생각을 가지고 새로운 일을 만들어내서 그 일을 추구하고 열심히 하고 노력하고 그런 걸 통해서 뭔가 성취감을 얻는 것을 통해서 ‘야! 내가 살아있음’ 같은 걸 느끼는 것이지요. 성취감을 느끼는 것에서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게 진짜 살아있음인가요? 그냥 지금 이렇게 아무 일없이 있을 때, 아무 일없이 있을 때, 뭔가 알 수 없는 어떤, 어떤 ‘있음’이라고 표현할까요? 그냥 이렇게 존재함. 그냥 살아있음. 뭔가가 이렇게 그냥 이 실상반야라는 있는 그대로의 실상에 그냥 있을 때.
그냥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때. 뭔가 알 수 없는 그런 있음? 뭐 어떤 느낌이랄까요? 그런 게 있거든요. 그게 뭐 굳이 말한다면 정말 이 실상반야. 그 자리인 것인데. 그것을 우리는 그런, 이것은 평상심이라서 아무 일없는 순간이라서
이것은 차라리 그러고 있느니, 차라리 참선을 해서 뭔가 신통자재한 신비체험을 해야만 될 거 같고. 뭔가 그 시간에 염불이나 참선이나 다라니 독송을 해서 뭔가 새로운 어떤 지금의 의식 상태.
이런 아무것도 아닌 아무 일없는 이 평상심의 의식 상태는 싫고. 뭔가 수행이나 기도나 뭔가를 해서 뭔가 새로운 의식 상태로 변화되는 거, 나아가는 거, 그거를 자꾸 추구합니다. 지금 이 의식 상태는 영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애서 재미가 없고.
이거는 공부일 리가 없다. 그래서 뭔가 새로운 의식 상태. 그것도 내가 머릿속으로 그려놓은 의식 상태. ‘뭔가 삼매체험이 일어나면 뭔가 고요해질 거야’ ‘정말 한도 끝도 없이 그냥 착 내려가는 어떤 이런 느낌이 들 거야’
‘뭔가 그냥 확 빠지는 경험이 될 거야’ ‘세상과 내가 하나가 되는 체험이 있을 거야’ 나름대로의 온갖 그림을 그려놓고 그것을 쫓아가는, 이제 그걸 지금까지 공부라고 생각해왔던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까 있는 그대로 이 자리에 늘 있어왔던 아무 문제없이 언제나 확인되는,
이 아무 일없는 순간. 이 실상의 순간. 내가 눈으로 보면, 눈으로 보면 보는 것이 그냥 실상입니다. 보는 것을 그 모양을 쫓아가고 대상을 쫓아가서 해석하지 않고 거기 깊이 개입되지 않는다면. ‘이건 뭐고, 저건 뭐다’ 이렇게 생각하고 해석해서 그걸 해석을 따라가고,
해석을, 내식대로 해석해놓은 그 모양을 따라가지 않고 그냥 보고 있다면. 그냥 보는 경험은 있잖아요. 그 해석된 내용. 이것이 죽비니까, ‘죽비 저것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이런 식의 생각이 나 해석을 따라가지 않고 그냥 이렇게 볼 수 있거든요.
그냥 보는 경험. 이거는 너무 아무것도 아니라서, 이게 이제 우리는 견디질 못하는 겁니다. 그냥 보는 거는 보통 공부 같지가 않은 것이지요. 뭔가 이거를 잘 봐야 될 거 같고. 이거를 뭐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뭐 ‘길다 짧다’
‘이거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이건 대나무인가 뭔가’ 이렇게 생각으로 이걸 만나거나, 생각으로 만나거나. 아니면, 아니면 제가 이걸(죽비) 딱 들 때 저게 실상이라고 하니 저걸 평소에는 저렇게 보다가 뭔가 어느 순간,
내가 깨달음의 경험이 오는 순간에 그냥 왕창 이 속에서 온 우주가 탁 드러난다든지. ‘뭔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할 거야’ 이제 이런 착각을 가지고 보는 것이지요. 그것이 아니라 그냥 이렇게 우리 보는 경험. 그냥 보이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아무런 생각, 해석, 개념을 입히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거든요. 이렇게 있는 그대로 보거든요. 여러분이 그냥 이렇게 있다가도 누가 옆 사람이 내 눈앞에 뭔가 확 확 갖다 들이대거나 하면 갑자기 나도 모르게 그냥 홱 고개 돌릴 겁니다.
눈이 깜빡 감아질 거예요. 이거는 내가 애써서 하거나 노력해서 하는 게 아니지요. 그냥 갑자기 뭐가 앞에 딱 오면 그냥, 그냥 실상반야가 작용을 해버립니다. 실상이 곧장 드러나 곧장 눈을 감거나 고개를 홱 돌리거나,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목이 마르면, 목이 마르면 물을 잘 먹는 방법을 애써 찾지 않고, 목이 마르면 그냥 손이 가서 그냥 마십니다. 이렇게 실상은 그냥 늘 작용하고 있어요. 물 하나 마시는데 이걸 계산하고 따지고 ‘이 물이 좋은 물인가, 나쁜 물인가’
오만가지 생각을 하면서 먹지 않고. 그냥 먹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냥 이렇게 늘 작용하고 있거든요. 보이면 보이는 그대로가 바로 실상입니다. 보이자마자 해석하는 것은 실상이 아니라 허상이고. 왜냐면 해석해서 내 머릿속에 간직하니까.
간직하니까 허상이지요. 이게, 이게 뭐지요? 죽비잖아요. 거지요. 여기 이게 있습니다. 이렇게 딱 보이지요. 거지요. 지금은? (설 법대 밑에 죽비를 감춘다) 지금은 뭡니까? 죽비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게 이제 단순한 것인데.
이렇게 보일 때는 ‘죽비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금은요?” 하면 “죽비가 없어요.” 조금 전에 과거지요. 거지요. 이렇게 보였던 것은 과거입니다. 과거인데, 과거를 머릿속에 딱 박아나요. 상으로 그려놓습니다.
‘여기 죽비가 있다’라는 걸, 상으로 그려놓고 이 상을 항상 생각하고 있어요. 기억하고 있다가 이렇게 하면 죽비가 없다. 그냥 지금은 지금 이대로 일뿐이지. 이 죽비가 있거나 없거나가 아니지요. 지금 이 순간으로 본다면.
과거로 개입시켜서 보지 않는다면. 상을 가지고 걸러서 보지 않는다면 그냥 지금 이대로 일뿐이지요. 거지요. ‘죽비가 있고 없다’라는 건, 이렇게 있을 때 바로 지금 없어지면은 바로 과거나 돼버렸어요.
그런데 그 과거를 떠올려서 현재를 해석하는 거지요. 거지요. 과거와 비교된 현재. 이거는 지금 있다가 없어진 현재지만. 그냥 지금 이대로는 그냥 지금 이대로 일뿐이지. 그러니까 이처럼 우리는 자동반사적으로 ‘조금 전에는 있었다가 지금은 없어졌다’ 이런 식으로 과거를 투영해서 현재를 바라봅니다.
“이게 뭐냐?”라고 했을 때 뭐 “펜이다.”라고 얘기한다? 그건 바로 과거에 떨어진 거지요. 모든 머릿속에 들은 개념은 전부다 과거입니다. 과거고, 허망한 허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순간으로 보지 못하고 언제나 과거에 만들어놓았던 허상,
과거에 만들어놓았던 모양, 그거를 지금 머릿속에 잔뜩 부여안고서는 ‘과거에 내가 경험했던 수많은 것들 가운데 지금 이것과 비슷한 게 뭐가 있지’ 해서 지금 이 순간에 등장한, 있는 그대로의 살상을 마주하지 못하고 과거의 기억과 비교해서
‘무엇이다’라고 판단을 해버리는 것이지요. 태어나서 처음 보는 어떤 사람을 만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나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사람인데. 대번에 첫인상이라는 게 뭐 0.1초 만에 느껴진다, 그래요. 첫인상.
그만큼 빠르게 우리는 상대방을 과거의 내 기억이나 이런 것과 바로 해석을 해서 그 사람을 딱 결론짓습니다. 옛날에 나를 차버렸던 그놈하고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딱 눈앞에 있다. 그러면 바로 이제 그 사람이 좀 싫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보자마자 그냥 싫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 사람은 아무 죄도 없는데. 자동반사적으로 너무나 빨리 그 과거의 기억과 이 사람을 비교해서 ‘이 사람은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내 스타일 아니야’ ‘호감 형이야’ 아니면 ‘비 호감 형이야’
이렇게 결론을 내버린다는 것이지요.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이처럼 우리는 지금 이 순간으로 보았을 때는 해석이 개입될 여지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으로 그냥 이렇게 볼 수 있어요. 죽비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바로 과거지요.
죽비라는 개념을 떠올리지 않고 그냥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냥 이렇게 보는 게 진짜지. 이걸 죽비,라고 옛날에 기억해놨던 그 개념. 그걸 가지구 이걸 판단하는 것이 진짜인가. 제가 전에 한 번 말씀드린 거 같은데.
우리 뇌 과학에서도 그럽니다. 뇌는 우리 뇌는 있는 그대로를 딱 보자마자 통으로 기억하지 않고 왜곡해서 기억한다. 내식대로 기억한다. 자기 과거 경험에 따라서, 자기의 업에 따라서, 자기의 업 식? 과거 경험에 따라서 ‘이런 거, 저런 거’라고 기억을 한다는 거죠.
왜냐면 전체를 다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뇌는 효율성을 기해서 딱 내가 보고 싶은 것만 착 착착 선택해서 본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왜곡시켜서 머릿속에 저장을 합니다. 그래놓고 나서 꺼내 쓸 때도 꺼내 쓰는 그 순간의 기분에 따라서 다르게 꺼내 쓴다는 것이지요.
옛날에 분명히 나쁘게 저장된 기억인데 내가 상당히 업 돼있고 기분이 좋고 뭔가 막 마음이 열릴 때는 그 기억을 하면서도 좋게 느끼게 돼요. 내가 엄정 화가 나고 이럴 때는 그 기억을 떠올릴 때 엄청 안 좋은 기억으로 떠오른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을 만날 때나 뭐 이렇게 회사에서 누구를 만나 가지구 큰 딜(deal)을 할 때나 요럴 때, 상대방 기분이 어떤지? 여러분 예를 들어 자재(子弟) 분들 중에도 똑똑한 친구들은‘엄마 기분이 어떤 가’ 이렇게 분위기를 봐서 엄마 기분이 좋을 때
야, 엄마 기분 좋을 때 뭐 하나 탁 얘기를 하면은 그냥 막 해주고 싶잖아요. 그런데 진짜 개념도 없이, 엄마 지금 화딱지 나 죽겠는데 뭘 해달라고 얘기했다가는 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혼나죠, 막. 2배 3배 더 혼납니다.
그렇게까지 혼날 일이 아닌데도 더 혼내죠. 내 상황이 지금 그 상황이 아니니까. 그것처럼 특정한 사람도 내 마음이 어떠냐에 따라서 좋게 느껴질 수도 있고. 또 특정한 사람이 상당히 밉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지요.
과거의 정보 자체가 왜곡되어 있는 데다가 그 정보를 꺼냈을 때 끊임없이 왜곡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지 왜곡이 일어난다. 그 생각은 믿을 게 못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과거를 믿고, 과거를 진짜라고 여겨서 그 과거로 걸러서 지금 이 순간을 본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듯이 과거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실재가 아니잖아요. 우리가 지금 과거를 있다고 하는 것은 생각 속으로만 있습니다. 생각을 떠올릴 때만 있어요. 그러니까 과거는 허상이지요. 과거는 전부다 허상입니다.
그런데 과거를 지금 떠올린다. 과거를 떠올릴 땐 지금이잖아요. 지금 과거의 어떤 기억을 떠올리는 그 작용은 실상의 작용인데. 그 떠오르는 그 내용물은 허상입니다. 과거에서 온 거지요. 그런데 지금, 지금 떠올리고 있으니까 지금 떠올린다는 이것은 실상의 작용이지만.
그래서 항상 매 순간 우리는 보자마자 허상으로 해석하고. 듣자마자 허상으로 해석하고. 그러니까 지금 처음 만난 건데. 이 세상 모든 것을 여러분이, 실제로 제가 “알음알이를 버려라.” “분별심을 버려라.” 이러는데. 알음알이, 분별심을 식이라고 부른다, 이랬습니다.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식. 식 자리가 알 식(識) 자입니다. ‘안다, 모른다’하는 거. ‘봐서 안다’ ‘나는 그 봤기 때문에 알아’ ‘이걸 봤기 때문에 안다’ “법상 스님 알아?” 이래 물어보면 “아이, 내가 잘 알지, 내가. 2년 동안 봤는데.”
하지만 여러분 저를 아실까요? 여러분이 여러분 남편은 아실까요? 여러분, 여러분 자신은 알까요? 내 맘 나도 모르잖아요. 내가 어떻게 자식을 알고, 내가 어떻게 남편을 알 수가 있을까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냥 안다고 생각되는 그 사람에 대한 개념. 내 머릿속에 기억된 개념을 쥐고 내가 안다. 이렇게 하는 것이지. 알 수가 없어요. 매 순간순간은 제행무상으로 끊임없이 변화되거든요. 끊임없이 바뀌고 있거든요. ‘같은 강물에 두 번 손을 씻을 수 없다’
라는 말처럼. 강물만이 아닙니다. 같은 숨을 두 번 쉴 수 없습니다. 호흡이, 똑같은 호흡을 쉬었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다른 공기가 들어가고 나가는 것이지요. 맨 날, 남편을 맨 날 본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맨 날 남편을 볼 수가 없습니다.
뭐 굳이 방편으로 해석을 해본다면 세포의 차원에서는 끊임없이 바뀌고 있지요. 의식의 차원도 계속해서 바뀌고 있습니다. 하다못해 이것조차 계속된다고 생각하지만, 요 안에서는 끊임없이 뭐 미립자니 쿼크(quark)니 아주 쪼개고 쪼개는 차원에서
보면 끊임없이 변화되고 있습니다.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얘도(펜을 들고) 늙은 거지요. 모든 것은 ‘내가 안다’라고 여기면서 ‘그거지’라고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건 하나의 허상일 뿐입니다. 진짜로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가 ‘안다’고 여기잖아요. 다 ‘안다’고 여기잖아요. 내가 돈도 알고, 우리 집이 어딘 줄도 알고, 내가 부자인지 가난한지도 알고, 내가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고, 내 남편이 돈이 많은지 적은지, 자식이 공부를 잘하는지,
친구는 많은지, 다 안다고 여겨요. 그런데 ‘안다’라고 여기는 것이 어리석은 허망함인 줄은 모른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안다고 여길 때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아는 거를 여러분 다시 알 일이 있나요? 아는 거는 알 필요가 없잖아요.
이미 내가 아는 거면은 굳이 내가 다시 가서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 봐서 알아’ 뭐 우리 여행지 같은 데 가면, 어디 멀리 여행을 왔는데. 그까지 한참 걸어가야 되는데. 걸어갔다 오는데. 여러 사람이 “야, 나는 옛날에 가서, 봤어 알아.
너네끼리 갔다 와.” 가기 싫으니까 이제 본인은 이렇게 있고, 갔다 오라 이런단 말이에요. 그러면 안다고 여기는 거지요. 옛날에 한번 봤기 때문에. 이처럼 안다고 여기면 다시 경험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구 다시 경험하려고 해도 옛날에 빗대어서 옛날의 경험, 생각, 그거에 빗대어서 자꾸 보게 되고. 그래서 안다고 여길 때 문제는 뭐냐면 모르는 것은 새롭잖아요. 새로운 거는 생경한 눈으로 보게 됩니다.
뭔가 새로운 눈. ‘야! 신기하다’고 있는 그대로의 어떤 생경한 눈으로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보게 되거든요. 그랬을 때 우리 마음이 뭐랄까?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때. 즉 안다는 생각 없이 새롭게 볼 때. 그럴 때 우리가 상당히 뭐랄까.
고요하고 평화롭고 좋습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자꾸 여행을 떠나고 싶은 이유가. 또 모르는 여행지를 자꾸 여행을 떠나고 싶은 이유? 또는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은 이유는. 외국으로 여행을 가면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들,
모든 게 다 새롭고, 보는 것들이 전부다 생경하고 그러니까 다들 아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새롭게, 새롭게 이렇게 바라봅니다. 모르니까. 모르니까, 다 이렇게 보거든요. 그런데 우리 동네는 그렇게 새롭게 생경하게 안 봐요.
우리 동네는 다 안다고 생각하니까. 이처럼 안다고 여기면 삶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대충 보게 됩니다. 왜냐면 난 아니까. 내 머릿속에 이미 딱 한 번 거르는 거죠. 그러니까 '난 아는 거니까 볼 필요조차 없어' 내 머릿속에 ‘이미 다 알아'
'다 봤어' '보고 느끼고 경험해서 다 알아' 다 아니까 대충 보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또 아는 걸 다시 볼 때는 보면서도 관심이 없어요. 왜냐면 머릿속에 이미 한번 걸러지는 거지요. '그건 뭐다' '그건 이런 거야' '그건 저런 거야'
제가 예를 들어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좀 옛날에 들었던 얘기를 또 한다. 그러면 이제 재미가 없잖아요. ‘아, 저것 또 들었던 얘기야’ 그러니까 ‘저 얘기 하는 동안 내가 잠깐 딴 생각 해야지’하고 나도 모르게 똑같은 얘기할 때는 딴 생각을 하고 있기가 쉽다는 거지요.
아는 거니까. 아는 거니까. 이처럼 내가 안다고 여기게 될 때 그걸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 없고. 그것을 내 과거에 내가 생각해놓았던 내가 알 식(識) 자, 알음알이로 분별해서 기억해놓았던 그거를 가지고 나는 저걸 아니까.
여기 이미 아는 게, 앎이 여기 있으니까 저걸 다시 알 필요가 없는 거예요. 저걸 다시 경험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야, 내 말 좀 들어줘, 들어줘” 해도 “야, 그런데 다 아는 건데 뭘 자꾸 듣느냐” 하거나 아니면 귀찮다는 듯이 이렇게 듣게 되지요.
있는 그대로 못 듣게 됩니다. 얼마나 큰 인지 왜곡인가요?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 머릿속에 있는 것만 자꾸 다시 되새김질해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새로운 게 없습니다. 인생에 재미난 게 없어요. 새로울 게 하나도 없습니다.
맨 날 그날이 그날 같고. 그날이 그날 같고. 그러니까 삶이 재미가 없고 심심합니다. 거사님들 중에 예를 들어 아니면 자식들이나 거사님들이 반찬 투정을 한다. 똑같은 반찬이 나오면 난 그래도 아는 반찬이고 다 먹어본 반찬이고 그러니까 별 관심이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반찬을, 똑같은 반찬을 매일 먹는데. 매일 먹는데. 그걸 내가 알까요? 우리는 밥 먹는 거에 대해 관심이 없잖아요. 그래서 명상 같은 걸 할 때 보면은 뭐 음식을 먹는 명상, 차 마시는 명상, 호흡하는 명상, 모든 거. 요가 명상,
모든 거에 전부다 명상 ‘자’를 갖다 붙이는 이유가 그걸 그냥 지금 이 순간으로서 실상으로서 그걸 경험해 보라는 겁니다. 안다고 생각해서 습관적으로 그냥 넘겨버리는 현재의 경험. 현재의 경험 자체가 실상인데.
알 식자가 나를 가로막아서 현재의 경험을 그대로 하지 못하고 알음알이로 경험을 대충 해버리고 넘겨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삶이 재미도 없고, 새롭지가 않아요. 밥 먹을 때, 밥 먹을 때 여러분, 있는 그대로 밥 먹는 실상,
밥 먹는 실상작용을 그대로 경험하시나요? 경험하지 않습니다. 밥 먹는 것은 사실은 실상으로서 밥을 먹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허상으로써 밥을 먹고 있어요. 밥 먹는 거 내가 다 아는 거니까. 밥 먹으면서 기본적으로 TV를 틀어놓습니다.
TV 보면서 밥을 먹어야지. 밥만 먹으면 시간 아깝다. 다 아는 거니까. 그 밥, 내가 다 먹어본 것이고. 그러니까. 밥을 먹을 때 보면 밥을 먹고 나서요. 뭐 찌개를 먹습니다. 목이 텁텁하니까 찌개를 먹어요.
찌개를 먹고 나면 짭짤하니까 나도 모르게 이렇게 심심한 반찬을, 또 나물 같은 거 먹습니다. 심심한 반찬을 먹고 나면 또 약간 짭짤한 게 땡기니까 또 약간 짠 거를 먹습니다. 또 짠 거를 먹고 나면 또, 또 물을 먹고 싶어서 물을 먹고.
물을 먹고 나면 다시 또 이제 약간 짭조름한 거 먹고 싶어서 또, 이게 내가 계산하지 않아도, 계산하지 않아도 저절로 손이 알아서 가요. 알아서. 내가 생각하고 계산해서 가는 게 아니라 저절로 갑니다. 실상에서 그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에 그래요.
그냥 그 실상으로 배고프면 먹는 거. 그게 평상심입니다. 그게 부처가 살아가는 방식. 부처님도 배고프면 먹는 거지요. 이게 땡기면 이걸 먹고. 저게 땡기면 저걸 먹는 겁니다. 그런데 실상이라는 것은 뭐냐면. 우린 먹을 때 이미 다 알아.
아니까 먹는 건 관심이 없고 그냥 대충 때우거나 딴 거 하면서 먹지만, 그냥 지금 이 순간 그게 이제 먹는 명상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이지요. 과거의 개념을 입히지 말고 그냥 지금 먹어보는 것이지요. 그 나물 반찬을 평소처럼 드시지 말고,
그냥 실상의 자리에서 위빠사나라고 알려진, 조금 있다가 말하는 관조반야라고 알려진. 실상반야의 자리에서 실상반야를 쓰기 위해선 관조반야를 통해서 실상반야를 현실에서 쓴다는 건, 하나의 용(用) 이지요.
수행이라고 한다면 관조반야가 수행입니다. 실상반야를 관조반야로 쓰는 것. 그런데 그것을 하도록 방법이 나오는 게 문자반야, 경전이고. 그걸 설명해주는 게 법문이잖아요.
이 법문을 통해서 방편반야, 문자반야,라는 이 설법이라는 방편반야의 법문을 통해서 내가 아, 실상반야와 관조반야에 눈뜨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실상반야의 자리에 서서. 그럼 그 실상반야의 자리에 늘 있지 못하게 되니까,
그게 실상반야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연습, 공부, 수행. 중도의 수행을 하는 것이지요. 그 수행이라고 한다면 그게 바로 관조반야라는 것이지요. 관조라는 것은 뭘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저도 이제 그런 표현을 많이 썼어요.
처음에 주로 여러분들과 처음 만났을 땐 제가 수행은 필요 없다. 수행할 필요 없다 수행해서 깨닫는 게 아니다,라고 얘기를 좀 강하게 했던 이유는 기존에 수행 아니면 절대 안 된다,라고 머릿속에 고정관념으로 있던, 잘못된 수행법을 쥐고 있던 마음을 깨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드린 것이고.
왜 수행이 필요가 없겠습니까. 바른 수행을 해야 된다,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삿된 수행을 했기 때문에 그런 수행은 필요 없다,라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 제가 수행은 필요 없다,라고 얘기를 한 것이지만.
진짜 수행은 수행이라고 이름 붙일 수가 없을 만큼 하되 함이 없이 하는 거예요.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수행은 수행 아닌 것이 수행이에요. 그게 바로 중도의 길입니다. 불법에서 수행이라는 것은 곧 중도잖아요. 그런데 중도는 "뭘 해라."
이게 아닙니다. 뭘 하라는 게 중도가 아니에요. 하더라도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중도이지. 어떤 이것만 하면 어떤 길에 오를 수 있다. 이것만 하면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렇게 딱 정해놓는 것이 아니고.
특히나 그 수행법을 통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애쓰고 고행하는 것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그걸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수행은 중도. 중도라는 것은 무위법이거든요. 무위법. 중도 수행은 무위법입니다.
애쓰지 않는 거예요. 애쓸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너무 애쓰는 삶만을 살아왔다 보니까 애쓰다가 애쓰지 않으면 되는데. 이제는 애쓰다 보니까 애쓰지 않는 노력을 막 해야 되는 줄 알아요. 그렇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계속 페달을 밟으면서 가다가 따로 브레이크를 잡으려고 막 애쓸 필요는 없고. 그냥 페달을 밟던 것만 그냥 탁 멈춰, 나버리면 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달려가던 그 속도에 의해서 어느 정도는 계속 가요.
그러니까 우리가 마음공부를 해서 좀 예를 들면, 뭐 깨달음이 있다 할지라도 자기 습대로 그대로 갑니다. 어느 정도. 그러면서 조금 조금씩 차차차차 조금 조금씩 바뀌어요. 우리가 뭐 수행을 한다. 아까 제가 관조반야를 얘기했는데 관조를 한다.
있는 그대로 실상자리에 돌아온다. 그런다고 해서 갑자기 지금 현재 있는 문제가 확 사라지거나 이러지 않습니다. 더 이상의 문제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이지요. 더 이상의 문제를 만들어내지 않고 거기 힘을 실어주지 않으면 페달을 자꾸 밟지 않으니까 이제 곧 서게 됩니다.
서는 일만 남은 거예요. 그러나 예를 들어 감기가 걸리면 뭐 수행을 하거나 약을 먹는다고 감기가 그 자리에서 똑떨어지진 않잖아요. 그냥 아플 만큼 아프다 보면 그냥 저절로 이렇게 떨어지는 것처럼.
그래서 실상반야,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이 실상반야구나’ ‘실상의 자리에서 늘 살고 있구나’ 이 사실을. 늘 그 자리에 서있어야 되는데. 그렇게 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그럼 어떻게 하느냐?
이제 관조반야. 초기불교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위빠사나.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본다. 위빠사나는 그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있는 그대로를 내식대로 왜곡하고 내식대로 안다고 여기는 생각,
식 때문에. ‘알아’ 이 마음 때문에 있는 그대로 경험하지 못하는 겁니다. 내가 아는 거니까 대충 경험하고 넘겨버려요. 밥을 먹을 때 대충 먹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반찬 투정도 하는 것이지요. 반찬 투정을 사실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내가 먹는 반찬은 태어나서 처음 먹는 반찬이에요. 항상. 맞잖아요. 지금 김치를 먹는데 그 김치를 먹어 본 적이 있습니까? 그 김치는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김치에요. 모든 김치는 다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김치입니다.
모든 경험은 태어나서 처음 하는 경험밖에 없어요. 두 번 세 번 네 번 해봤다,라는 걸 느끼는 것은 생각입니다. 식입니다. 알 식자. 그거 나 다 경험해봐서 다 알아. 알음알이로 그걸 경험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 이 순간 그 생각이 없으면, ‘나는 그걸 알아’라는 생각이 없으면, ‘난 한 번 경험해 본 거야’라는 생각이 없으면, 과거에 만들어진 상을 가지고 현재를 재해석할 마음이 없으면. 과거를 현재로 가져와서 과거로 보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으로 볼 수 있다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는 경험은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일어나라’라는 아마 책 제목도 있는데. 날마다 새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매 순간 새로울 수밖에 없는 겁니다.
틱낫한 스님께서 첫사랑과 관련된 책을 내셨는데. 그 책에 그런 게 있어요. 내가 하는 사랑은 언제나 첫사랑이다. 여러분 뭐 이제는 그럴 때가 지나셨겠지만. ‘자기, 내가 첫사랑 맞아’ 이러면 그냥 ‘맞다’ 이러시면 됩니다. 사실은 언제나 첫사랑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 사람과 사랑하다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서 사랑하더라도 그것도 첫사랑입니다. 그 과거를 개입시키지 않고. 과거에 ‘이랬다, 저랬다’라는 걸 생각, 해석을 개입시키지 않고. ‘내가 사랑을 해봐서 알아’ ‘사랑은 이런 거야’
‘나는 절대 사랑은 안 해’ 자기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을 개입시키지 않으면 모든 것은 지금 이 순간 새롭게 보는 것이구요. 첫사랑이라는 얘기를 틱낫한 스님께서도, 저도 굳이 하는 이유는 뭐 사랑, 애정, 이런 걸 얘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으로 보잖아요? 이 순간으로 관조하고. 그래서 실상을 실상 그대로, 있는 그대로 보아서 정견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뭐와 비교하지 않지요. 과거와 비교하지 않고 봅니다.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그 사람을 봅니다.
아들을 어제의 이 아들과 비교하지 않고 이 순간의 아들을 봅니다. 뭐가 스마트폰을 보면서 이렇게 웃으면서 보고 있어요. 그러면 100% 엄마들은 화를 버럭 내면서 ‘저 또 게임하고 있다’라고 생각을 하겠지만.
어쩌면 그 아이가 좀 전까진 게임을 했을지 몰라도, 방금 전부터 영어 문제를 풀고 있던지. 요즘엔 공부 앱도 많잖아요. 그렇게 할 수도 있는데, 나는 전에 생각으로 ‘또 게임하겠지’하고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단 말이지요.
그런데 지금 이 순간으로 보게 되었을 때,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었을 때는, 그냥 이 순간으로만 보게 됩니다. 그렇게 됐을 때 아무런 생각과 개념과 해석이 개입되지 않고, 개입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만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접촉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 순간이 바로 내가 깨어있는 순간이고, 알아차림의 순간이고, 그게 이제 불교에서 말하는 뭐 위빠사나니 지관이니, 뭐 이런 어떤 공부의 순간인데. 그럴 때는 날마다 새롭게 접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모든 순간을. 그렇게 새롭게 볼 때,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하지 않고 볼 때,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때,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관조하는 상태. 그래서 실상반야로서 관조반야로써 있는 그대로를 보는 상태. 그 상태를 다른 말로,
예를 들면 그거를 관하는 상태라고도 할 수 있구요. 그게 지혜의 상태라고도 할 수 있구요. 그게 텅 빈 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공의 상태. 왜냐면 어떤 생각과 개념으로 보는 게 아니라 텅 빈 채 생각과 개념을 입히지 않고 보는 거잖아요.
있는 그대로를 보니까 공으로 보는 거지요. 그게 정견. 있는 그대로 본다. 팔정도의 정견이구요. 그리고 그 상태가 동체대비의 상태입니다. 자비의 상태입니다. 이 사람을 볼 때 ‘난 저 사람을 사랑해’ ‘난 저 사람을 자비롭게 바라봐’
이 사람은 자비롭게 보는데 저 사람은 자비롭게 안 보거나, 이 사람은 사랑하는데 저 사람은 사랑하지 않거나, 그거는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비교 대상이 되는 거는 그냥 차별심이에요. 그건 사랑이 아니고.
애착하는 거나 애착하지 않거나. 이런 거,입니다. 진짜 사랑은, 진짜 동체대비라는 것은, ‘동체’ 둘이 아닌 하나이기 때문에 비교 분별할 게 없다는 겁니다. 불이법.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사랑이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진정한 자비입니다.
이 사람을, 자식을 볼 때 남편을 볼 때 있는 그대로 봐주는 것. ‘당신 또 뭐 이래이래 해서, 또 뭐 이렇게 잘못한 거 아니야’ 이렇게 보지 않고 그냥 이 순간으로 봐주는 것. 그게 진정한, 그 사람을 향한 자비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자비라는 것을 이제 상당히 착각하고 있는 게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사랑하지 않는 걸 자비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자비가 아니에요. 불교의 자비는, 다른 종교나 다른 사상이나 이런 데서의 자비와 사랑은 딱 정해져 있잖아요.
자비의 상태, 사랑의 상태가. 그러데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는 그런 차별심이 있는 것은 전혀 자비가 아닙니다. 온 우주법계를 대평등심으로, 있는 그대로, 동체로서, 불이로서, 하나로서 보는 거예요.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전혀 생각과 개념을 입히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게 진정한 자비입니다.
옛날에 제가 어떤 글에서 “이 우주법계는 이 세상은 온통 자비밖에 없다. 온통 자비로 이루어져 있고 온통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비가 가득 차있는 곳이다. 그리고 우리 삶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 걱정할 것이 없다.
나는 언제나 자비밖에 없고 이 우주법계도 자비밖에 없고 사랑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자비에서 결코 소외당할 수가 없다. 둘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누가 나를 미워하지 않을까’ ‘지옥에 있는 염라대왕이 나를 나쁘게 벌을 주지 않을까’ ‘뭔가 인과응보로 내가 나쁜 걸 당해서 나중에 죽고 나서 지옥 가지 않을까’ ‘누구한테 복수를 당하지 않을까’ 미래에 대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뭐 인과응보로써, 현실에서 내가 인과응보로써 받는 건 있겠지만. 이 우주에, 어떤 저 하늘나라에서 어떤 신이 됐던 부처가 됐던 어떤 특별한 존재가 잘잘못을 따져서 ‘저 괘심한 놈’ 하면서 우리가 아무리 잘못해도 ‘저 쳐 죽일 놈 말이지’
해가지구 번개를 탁 내려서 그 사람만 확 죽이거나 그 사람만 꽉 잡아다가 지옥에 딱 빠트리거나. 그런 종류의 신, 그런 종류의 부처, 그런 종류의 어떤 염라대왕? 그런 존재는 없습니다. 이 우주에. 그런 존재가 있다,라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지요.
그렇게 내 스스로 만든, 내 스스로 번뇌 망상을 만들어서 그 스스로 빠져서 괴로워할 순 있지요. 내가 나쁜 사람한테 나쁜 짓을 해서 인과응보로 내가 그걸 받을 순 있겠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어떤 원리가 있어서 ‘야, 신도 나를 버려서’ ‘부처님도 나를 버려서’ 그런 건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죄의식이 거기에서 옵니다. ‘저 고귀하신 저 하늘에 계신 저분조차 저 부처님조차 나를 버렸을 거야’ 왜? ‘난 나쁜 짓을 했으니까’ 심지어 이 절에 와서 해부(解剖)를 하거나 교회 가서 깽판을 쳤다.
그랬을 때 죄의식은 더 크겠지요. 이 성스러운 곳에 가서 내가 잘못을 했으니까 더 큰 죄의식에 사로잡힙니다. 그럼 내가 ‘야, 내가 저 부처님 하느님을 상대로 내가 이런 나쁜 짓을 했단 말이야’ 이런 엄청난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포기해버립니다.
어차피 한번 버린 몸. ‘어차피 나는 이제 하느님, 부처님도 나를 미워하실 거니까’ 하고 더 나쁜 짓을 할 수도 있지요. 그런데 전혀 오판한 것이지요. 부처님과 하느님이 누군지를 오판한 거지요. 그분들이 계신다면 그분들은 잘잘못을 따져서 옳고 그름을 따져서 판단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겁니다. 그 사람이 잘못을 했으면 그건 이미 지나간 과거잖아요. 지금 참회하고 있다면 이미 지나간 과거를 붙잡고 있는 거잖아요. 이미 지나간 과거는 실상이 아니라니까요. 실상반야가 부처거든요.
실상이 부처이지. 허상이 부처겠습니까. 이미 지나간 과거가 부처겠어요. 지나간 과거는 실상이 아니라 허상입니다. 여러분들이 과거에 그 어떤 잘못을 했다 할지라도 그건 허상이에요. 거기에 사로잡혀서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두려움에 떨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실재는 지금 이 순간, 지금 이대로 밖에 없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이것밖에 없기 때문에. 지금 내가 참된 자비를 베풀고 마음공부를 통해서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대평등심으로 자비심으로 있는 그대로 보는 실상반야, 관조반야로써 본다면 그 순간 부처인 것이지.
그래서 불교에서도 참회하라고 하지요. 참회를 통해서 내가 과거에 얽매여 있는 이 분별 망상, 이것을 내려놓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 천년 동안 어두웠던 동굴이 한번 불을, 성냥불을 딱 켜면 곧장 밝아지는 것처럼.
이 실상반야 자리에 딱 서게 되면 이 실상반야 자리 이 자리에 딱 있게 되면 그 어떤 과거, 허상이 사라져버립니다. 그 순간. 허상은 진짜가 아니기 때문에.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생각으로 붙잡아서 생각으로 견고히 하면서 생각으로 진짜라고 믿었기 때문에.
내가 믿는 만큼 그 믿는 힘을 부여해주면 얘는 진짜 힘을 가지게 됩니다. 즉, 여러분들이 ‘나는 과거에 잘못을 했기 때문에 나는 큰 벌을 받을 거야’ 혹은 ‘나는 분명히 나중에 뭔가 큰 병에 걸릴 거야’
‘나는 뭔가 뭐로부터 아주 큰, 염라대왕이 절대 나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고 그걸 믿게 되면 실제 그것 때문에 인과응보가 벌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힘을 실어줬기 때문에. 이 허상을 가지고,
허상이지만 허상의 마음, 분별심도 중생심이지만. 이 중생심도 에너지를 가지기 때문에 중생심으로 일으킨 모든 것들은 현실 속에서 현실이 됩니다. 이 허망한 현실 속에서 현실, 즉, 꿈속에서와 같이 꿈속에서 인과응보가 벌어진단 말이지요.
꿈을 깨면 끝나는 것이지만. 꿈을 깨면 끝나는 것이지만. 꿈속에서 인과응보는 벌어지는 것처럼. 내가 그렇게 믿으면 그렇게 됩니다. ‘내 미래가 아주 행복할 거야’라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살면 현실이 행복하게 바뀌어갑니다.
막 부정적인 마인드로 살면 현실이 부정적으로 바뀌어갑니다. 그런데 좋게도 해석하지 않고 나쁘게도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면 해탈하게 됩니다. 선행은 선의 과보. 극락의 과보를 가지고 오고, 악행은 지옥의 과보를 가져오지만,
선도 악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게 됐을 때, 해탈이라는 건 뭐겠어요? 모든 것으로부터 풀려난다는 거예요. 극락, 지옥, 그 모든 것, 그 어떤 것도 나를 구속시키지 못하는 상태. 그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
극락세계 가는 것도 골치 아픈 일이거든요. 극락세계 가면 언젠가 떨어져야 된다잖아요. 언젠가 떨어져야 되니까, 여러분도 즐거운 일이 있으면 골치 아프잖아요. 즐거운 일 있으면 두려워지거든요.
‘이게 언제 또 없어지겠지’ ‘이 행복이 영원하겠어’ ‘영원하지 않을 거야’ 그래서 두려움에 떱니다. 돈이 갑자기 많이 생겨도 두려움에 떨어요. ‘이게 언젠가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거 때문에. 반드시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실상자리에서 선악도 취하지 않고, 선을 취하거나 악을 버리려고 하는 취사간택심을 일으키지 않고, 그냥 지금 이대로. 지금 있는 그대로라는 여러분의 삶이 벌어지고 있는 이 법신 부처님의 장에서,
이 법계라는 이 놀라운 깨달음의 장에서, 그냥 나는 지금 이대로로서 이 진리로서 내 알음알이 ‘식’으로 ‘안다’ ‘안다’ ‘안다’는 착각을 버리고. 그냥 ‘모를 뿐’ ‘오직 모를 뿐’ 하는 마음으로 이 순간을 살게 되면 날마다 새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벚꽃이 부산에는 제일 먼저 핀다는 벚꽃이 두 그루가 있더라구요. 거기는 벚꽃이 벌써 피었습니다. 보니까, 얼마 전에 어떤 보살님이 진달래가 폈다고. 또 이렇게 사진도 보내주시고 하던데. 남쪽에는 벌써 이제 봄의 기운들이 확 올라오고 있거든요.
봄꽃을 바라볼 때 ‘작년에 바라봤기 때문에 다 알아’ 이렇게 생각하고 바라보지 않아도 됩니다. 참 저두 옛날에 그때는 그게 뭔지도 몰랐는데. 어느 순간 20대 때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거든요. 뭐라고 말로 할 수 없지만.
꽃 한 송이를 바라보는 경험이었습니다. 그저. 그런데 그 꽃 한 송이를 바라보는 그 경험이 제 인생에 엄청 큰 전환점이 된 경험이었어요. 그전과 후, 제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단지 꽃 한 송이가, 봤을 뿐인데.
그전에는 맨 날 아는 꽃, 맨 날 별로 관심 없는 꽃, 이랬는데. 그 꽃 한 송이를 그냥 있는 그대로 마주하게 되는 것이지요. 있는 그대로 마주하게 되면서 그때부터는 꽃 한 송이만이 그렇게 실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잠시 정신없이 바쁘더라도 잠시 내려놓고 그냥 무언가 잠시 가만있을 때, 차 한 잔을 마시고 있을 때, 혹은 숲으로 잠깐 가 있을 때, 그때 늘 그 평화랄까요? 전 그런 느낌이 듭니다. 20대 때 제가 저기, 그때 기억나는 게 경기도 양주에 있는 조만한 절에 있을 땐데.
비룡사라는 절에 있을 땐데. 거기 제 방도 좁았어요. 거기 조만한 다실, 차 판 하나 놔두고 창문, 방문을 항상 열어놓으면 법당 앞에 이렇게 탑이 있고 잔디밭이 있고 법당이 하루 종일 조용했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을 땐 제가 뭐 일할 때,
일만 하고 오면은 법당 그 방안에 이렇게 차 한잔 혼자 마시면서 저 밖을 이렇게 묵연히 바라보고 있는데. 사람들이 이제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고 뭐 이렇게 하잖아요. 그런데 참 뭐랄까? 이 마음속에 있는 이것을 뭐 어떻게 얘기를 해줄 수가 없는 거예요.
얘기를 해주려고 한두 명한테 이 고요함, 이 평화, 이것을 이렇게 설명을 해주다 보니까 이게 너무너무 왜소해지는 거예요. 말로 표현되는 것은 너무 왜소한 겁니다. 말로 표현하면은 바로 그 사라져버리는 느낌? 이건 진짜가 아니다,라는.
그러니까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게 뭐 뭐라고 얘기하거나 이럴 수도 없는 것이지만. 그러니까 야, 뭔가 그때 그 느낌이 그랬어요. 제 마음속에서. ‘야, 이건 뭔지 알 수 없는 이, 이것을 왜 이렇게 말도 할 수가 없지’ ‘저 사람들은 저렇게, 이렇게 막 이거를 모를 텐데’ 그런데 그냥,
그냥 막연하게. 그런데 그것이 뭔지도 몰랐고. 그것이 오히려 바른 것 같은. 뭔가 규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라는 것은 첫 경험입니다. 매 순간의 첫 경험.
매 순간 처음 만나는, 처음 마시는 물이구요. 매 순간 처음 먹는 밥이고. 매 순간 처음 들이쉬는 숨이고. 바람이 불어올 때 몸을 적셔주는 이 감각, 감촉도 처음 느끼는 감촉입니다, 사실. 뭐 억지로 그러려고 과도하게 애쓸 필요는 없지만.
잠시 이 실상자리로 돌아와서 내가 늘 쓰고 있는 게 실상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실상은 일어나고 있잖아요. 집에 가려고 여기서 신발만 딱 신으면 자동으로 집을 향해서 몸이 알아서 가게 되거든요. 계산하지 않아도.
실상이 저절로 이렇게 나를 끌고 간단 말이지요. 그런데 이제 실상이 나를 끌고 가는데. 그 실상은 관심 없고 머릿속에서 오만 생각을 가지고 ‘오늘 집에 가서 뭔 반찬 할까’ ‘자식은 뭐 이거 했나’ ‘남편은 저거 했나’ ‘내일은 뭐 할까’
‘모래는 뭐 할까’ 이 생각을 껴안고 아니면 스마트폰을 껴안고 이러면서 가니까. 번잡해지는 것일 뿐이지. 매 순간 매 순간 실상으로서 우리는 매 순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큰 스님들이 말씀하신 것처럼 잠을 자도 부처와 함께 자고,
눈을 감아도 부처가 보이고, 부처를 안 보려고 뭐 눈을 탁 감으면 여기 검은 곳에 부처가 막 드러난다. 이런 표현도 써요. 항상 부처와 함께 먹고 자고 산다는 게 늘 실상으로서 있다는 거예요. 그 실상을 ‘뭔가 일 거야’라고 상을 짓지만 말아 보시란 말입니다.
그러고 그냥 지금 이 순간 생각으로 지금 이 경험을 해석하지 않고 지금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경험들을 ‘안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걸 해석하지 않고, 그냥 맨 느낌으로 그냥 경험하는 거예요. 지금 이대로. 그냥 살고 있는 이대로. 보이는 이대로.
들리면 들리는 그대로. 느끼면 느끼는 그대로. 그 느끼는 거에 이건 좋은 느낌, 싫은 느낌. 해석하지 않고 그냥 느끼는 게 진짜지. 좋은 느낌하고 느끼면 이게 좋은 쪽으로 해석이 돼요. 싫은 느낌하고 느끼면 싫은 쪽으로 해석이 됩니다.
그냥 그 느낌일 뿐이지요. 밥을 먹을 때 그냥 그걸 먹을 뿐이지. 그게 맛있는지 맛없는지 그건 생각이지요. 제가 생야채 같은 것들을 이제 먹는데. 생야채를 먹을 때 이렇게 쌈장에 항상 찍어서 먹잖아요.
그런데 이걸 쌈장에 찍어 먹지 않게 되면 그냥 그 야채 본연의 것을 먹게 되는데. 안다는 마음으로 생각을 가지고 먹게 되면 이게 맛이 없어 가지구, 이걸 먹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그냥 입에 넣고 그냥 가만히 그걸 이렇게 그냥, 그냥 이대로 먹는 거예요.
해석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고 그냥 먹게 되면 그냥 그것일 뿐이지. 이게 좋거나 나쁜 개념이 붙지가 않아요. 그냥 그걸 씹을 뿐이지. 누가 이제 그런 걸 물어봐요. “그러면은 스님 저 우리가 불자로써 고기를 먹어야 됩니까? 먹지 말아야 됩니까?”
먹는 게 실상입니까? 먹지 않는 게 실상입니까? ‘나는 고기 먹을 때마다 자꾸 죄의식이 든다’ ‘고기 먹을 때마다 그래도 불자면 될 수 있으면 안 먹어야 되는데. 이걸 이렇게 먹으면 되겠나’ 이런 마음으로 먹으니까 자꾸 막 스트레스받고.
그래서 어느 순간 ‘야, 이걸 어떻게 해야 되나’ 이러면서 먹을 때마다 뭐 그런 생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이 실상으로 봤을 때 고기를 먹을 때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요? 부처님께서, 부처님께서 탁발해서 드셨잖아요?
부처님은 탁발할 때 안 가려서 먹었죠. 주는 대로 먹는 게 원칙이었습니다. 일종식을 할 때, 일곱 집만 그냥 가서 주는 대로 먹는 거예요. 그 집에 가서. 그럼 거기서, 인도는 카레 문화잖아요. 고기가 덩어리가 썩으니까 이렇게 좀 쟁여놓기도 하고 이걸 카레로 해서 먹기도 하는데.
그럼 고기 다 빼고 뭐 빼고 뭐 빼고 이렇게 먹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고 오히려 고기 같은 게 있으면 이제 내가 오늘 고기가 많으면 옆에 기력이 쇠한 도반들에게 나눠주고 먹구, 이러라고 시키거든요.
부처님 당시 ‘고기 먹지 마라’거나 이런 얘기가 일체 없었습니다. 대승불교 경전에 넘어오면서 고기 먹지 마라,라는 이런 것들이 생겼죠. 그러면 문제는 먹어야 되느냐, 먹지 말아야 되느냐. 이게 정해진 실체적인 진실은 없습니다. 당연히.
먹어야 되는 게 진실이거나 먹지 말아야 되는 게 진실이거나 딱 정해진 건 없지요. 실상만 보면 됩니다. 지금 이 순간 직접 경험 가능한 실상. 내가 실상으로 먹고 있느냐? 허상으로 먹고 있느냐?
이걸 먹으면서 머릿속에서 ‘하, 고기를 먹으면 죄를 지을 텐데’ 뭐 이런 생각으로 먹으면 그 상, 모양, 개념, 허상을 껴안고 먹는 거지요. 그 생각을 취하면서 먹는 거지요. 그럼 그 생각이 자기를 허상에 놓이게 만들어 버려요.
특히나 부처님 당시에 이랬지요. 고기가 이렇게 세 집을 건너온 거는 상관없다. 청정한 고기다 이래가지고 먹어도 된다. 내가 직접 죽여서 직접 잡아먹고 이러지 마라. 이랬단 말이지요. 이제 예를 들어 회를, 남들 우르르 다 가서 먹는데.
“이건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나기 때문에 절대 안 먹습니다.” 하고 이렇게 얘기를 하면, 뭐 좀 그렇다 싶을 때. 그럴 때 그럼 어떻게 먹어야 되느냐? 이제 이런 질문들을 하세요. 가만 보세요. ‘고기다’ ‘채소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먹는 건 알 식자, 의식을 가지고 먹는 것이지요.
그냥 지금 이 순간으로 먹게 되면 이 실상은 뭐만 있느냐면. 그냥 입에서 씹는 것만 있습니다. ‘이게 아, 고기야’라고 씹는 건 생각이지요. 의식이지요. 그냥 씹으면 이건 그냥, 그냥 이대로 일뿐이지. 이걸 고기,라고 해석하지 않아도 씹을 수 있지요.
약간 콩으로 만든 콩고기가 있어요. 콩고기를 먹으면 먹을 때는 고기인지 아닌지, 양념을 희한하게 맛있게 하면은 이게 고기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먹어요. 그러다 나중에 콩고기,라고 얘기해주면 깜짝 놀라는 경우도 계시거든요.
그분들은 분명히 콩을 드셨는데 고기라 생각하고 드셨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처럼 먹을 때 내가 ‘뭐다’라는 생각, 개념, 이것을 가지고 먹었을 때는 그 생각을 가지고 먹는 것이지요. 그런데 꼭 그것을 가지고 먹어야 되나요?
지금 이 순간에 그냥 씹을 뿐, 씹으면서 그 씹어지는 이 경험. 이대로 해석하지 않고 그냥 먹을 수 있지요. 그러나 계율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진리이기 때문에 계율을 정한 것이 아니라. 대중이 살다 보면 대중이 함께 지켜야 될 룰이라는 것을 해놨을 때 방패막이가 된단 말이지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그런 걸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께서 뭐 고기를 드시거나 하실 때 더 중요한 핵심은 이게 고기냐 아니나, 먹어도 되나 안 되나,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먹게 되면 먹고.
안 먹게 되면 안 먹고. 뭐 굳이 내가 찾아먹기가 좀 그러면 안 먹으면 되고. 그리고 자식을 위해서라도 먹어야 되겠다 싶으면 좀 드시면 되고. 그런데 그 먹고 안 먹고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순간 실상반야로서 그 순간 관조하면서 그 순간 그냥 먹을 뿐이냐?
해석하지 않고 그냥 먹을 뿐이고. 그냥 씹을 뿐이면 그냥 지금 이 순간 이대로인 겁니다. 거긴 아무런 허물이 없어요. 거기에 만약에 허물이 있다면 호랑이는 천하의 범죄자고 죽일 놈이에요. 호랑이는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평생을 짐승들을 죽여야 되잖아요.
그럼 호랑이는 절대적인 죄인이 돼버리거든요. 사람도 한 명의 자연입니다. 우리도 그냥 자연이에요.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자연 그대로,라는 걸 실상 그대로,라는 걸 모르니까 죄의식에 시달려요. 여러분 화가 나고 싶어서 나나요?
화가 그냥 나지 않나요? 인연이 딱 맞으면 화가 그냥 나요. 물론 경험에 따라서 더 많이 내는 사람. 적게 내는 사람이 있겠지만. 화라는 것이 일어나는 그 자체는 그냥 자연 그대로 실상으로서 일어납니다. 인연이 화합하면 일어나는 거거든요.
나를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연 따라 그냥 그렇게 살고 있을 뿐이거든요. 그래서 어, 이렇게 실상반야가 우리의 본성이구요. 언제나 실상반야를 쓰고 있고. 그것을, 방편반야,라는 것을 통해서 법문, 경전, 어록,
이런 것들을 통해서 방편반야를 공부해서 내가 실상반야와 그야말로 ‘하나’ 계합이 되는 이런 것이 이제 이 공부라면. ‘그걸 내가 그럼 구체적으로 현실에서 어떻게 수행할 수 있느냐’ 그게 이제 관조반야. ‘관’은 있는 그대로 본다는 거구요.
‘조’는 비추어 보는 겁니다. 뭐 해석하지 않고 비추어 보는 것. 그래서 관조반야,라는 것이 바로 중도입니다. 중도는, 중도는 뭔가 하는 게 아니라 그랬죠. 관조반야 하기 위해서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볼 때 그냥 보지 않나요?
그냥 보이지 않습니까? 막 보려고 애써야지만 보는 게 아니고, 그냥 보이잖아요. 이거 그냥 다 보이잖아요. 보려고 애써서 보는 게 아닙니다. 그냥 보입니다. 그냥 보는 거예요. 이게 힘든 일이 아닙니다.
이 소리(죽비를 손바닥에 치며)를 힘들여야 들을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들리거든요. 그냥 들려요. 그냥 들으면 된다니까요. 이게 뭔 힘이 들어요. 전혀, 힘든 게 관조반야가 아닙니다. 위빠사나가, 이거 듣기 위해서 막 귀를 쫑긋 세우는 게 위빠사나가 아니고.
자연스럽게 듣는 겁니다. 자연스럽게. 그런데 뭐만 안 하고. 듣고, 보고, 해석하면서 막 내가 알고 어쩌고저쩌고 막 오만가지 생각이 일어나는 그것만 그냥 안 하면 되는 건데. 그걸 안 하려고 애쓰는 게 아니고.
그냥 막 하던 걸 그냥, 그냥, 그냥 안 하면 됩니다. 내버려 두면 되는 겁니다. 새롭게 할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거지요. 페달을 밟다가 페달에서 발을 떼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는 게 없는 거지요. 그러면 관조가, 위빠사나가, 수행하는 겁니까?
그냥 두는 거예요, 그냥. 다만, 내가 하던 것만 그냥 애써서 하던 것만 그냥 안 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새롭게 뭔가 할 건 없습니다. 그래서 이걸 무위법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런 관조반야,
라는 어떤 중도의 수행을 통해서 우리가 보다 실상반야에 가까이 갈 수가 있고. 또 실상반야를 체득했다 할지라도 늘 이 습에 얽매이던, 오랜 습 때문에 늘 있는 그대로 관조함으로써 매 순간순간을 공부로 삼아야 되는 것이지요.
그럼으로써 점점 더 내가 이 공부에 안착이 되고 조금 더 정말, 이 공부가 좀 깊어지고 이제 그럴 수 있는 공부가 되는 것이지요. 잠깐 쉬었다가 또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 박수
첫댓글 _()_
그런데 그런 일없이 ‘뭔가 해야 된다’라는 이런 일 없이. 그냥 가만히 앉아서 차를 한 잔 마실 수 있습니다.
그냥 차 한 잔이 이렇게 김이 모락모락 올라가는 그 모습을 묵연히 바라보기만 해도 그냥 평화롭다 할까요?
그냥 고요하달까요?
이 햇살이 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을 요렇게 바라보고만 있어도 그 뭔지 모르게,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꾸벅.
ㅋㅋ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_()_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