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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새롭게 시작되는 부분이 우리 한 해가 시작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십원육향(十願六向)이라고 해서 관세음보살님의 천수경에 보면 10가지 관세음보살님의 원(願)이 있습니다. 원력이 있구요. 그리고 6가지 회향부분이 나옵니다. 그래서 오늘 십원육향(十願六向) 중에 십원(十願)에 관련된 부분으로써 관세음보살님의 10가지 서원, 이것이 나오는 부분입니다.
‘나무대비관세음(南無大悲觀世音) 원아속지일체법(願我速知一切法)’ 해서 나무대비관세음 해가지고 계속 원(願)이 나오는 부분, 그게 관세음보살님의 10가지 십 대 원을 의미하는 거구요. ‘나무(南無)’ 하면은 이제 귀의한다,라는 얘기지요. 귀의한다,라는 것은 돌아가서 의지한다. 쉽게 말해서 내가 왔다가 내가 가야 할 곳이 어딘지?
어딘지 내가 가야 할 곳으로 되돌아가겠다,라는 것에 대한 것이 바로 귀의(歸依)이고, 그게 나무(南無)라고 하는 건데요. 이렇게 한 해 한 해가 지나갈 때마다 그런 느낌을 느끼기도 하고. 문득문득 여러분도 그런 거 느끼지 않으십니까? 아마 여러분은 저보다도 훨씬 더 느끼실 수 있을 거 같은데. 인생을 살다 보면은 문득문득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오고 있는 이것이 상당히 좀 낯선,
지금까지 내가 이 모습으로 살아왔고 이런 형색으로 살아왔던 나의 인생이라는 것, 그게 진짜 내가 맞나? 내가 나라고 믿고 살아왔던 요렇게 살아왔던 그 삶, 그것이 내 인생의 전부일까? 그게 진짜 내가 맞나?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혹은 그래서 아마 혼자 여행을 이렇게 하기도 하나 본데요. 혼자 여행을 이렇게 떠나거나,
아니면 혼자 여행까진 아니더라도 그냥 문득, 훌쩍 산에 올라가서 혼자 간다든가 이럴 때, 전 그런 걸 좀 종종 느끼거든요. 제가 20대 땐가 어느 날 처음 강하게 느꼈던 것이, 그냥 혼자서 휴가를 내서 이렇게 차를 가지고 저 남해 쪽으로 며칠을 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날따라 바람이 엄청 불고 막 비바람이 어마어마하게 불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작은 바닷가가 보이는 암자예요. 아주 작은 이름도 모를 암자에 딱 도착했는데, 비바람이 엄청 불더라구요. 그런데 대웅전이 바다를 바라보면서 요렇게 있었는데, 대웅전에 비 안 맞으려고 막 뛰어가서 요렇게 앉아있는데 비가 너무 많이 오니까 꼼짝도 못 하겠고. 뭐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사람이 사는 절인지 싶을 정도로 아무 인적이 없고.
대웅전에 한동안 비가 그칠 동안 앉아서 그냥 바닷가를 바라본 적이 있었는데요. 어떤 느낌이었냐면, 상당히 뭐랄까, 나라는 존재도 되게 낯설고 지금 내가 있는 이곳도 상당히 낯설고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오던 내 인생을 요렇게 인생의 스케줄대로 살아오던 그것이 진짜 나인가? 지금 문득 돌이켜서 보니까 아주 낯선 이 순간이 이렇게 내 앞에 놓여있는데,
참 뭐라고 이렇게 말로 할 순 없지만 그 순간이 상당히 낯설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던 내가 진짜로 내가 맞는가? 그런 어떤 의문에서부터 뭔가 어딘진 모르겠지만, 어딘진 모르겠지만 어떤 근원의 고향 같은 곳에서 뚝 떨어져서 이 지구별이라는 곳의 한 귀퉁이에 육신을 하나 점유하면서 시공간의 하나를 점유하면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만.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까, 지금 이 낯선 자리에 내가 이렇게 있구나! 하는 어떤 느낌? 내가 돌아가야 할 어떤 곳에서 잠시 나와서 이렇게 살다가, 문득 이렇게 정신을 차렸던 거 같은? 지금까지는 내가 부모님과 친구들과 인연과 나의 위치와 이런 모든 것들이, 그것이 나라고 생각하면서 사로잡혀서 살았는데. 문득 돌이켜보니까 그 모든 것이 내가 아닌 거 같은,
어딘지 모를 어떤 영원으로부터 이렇게 뚝 떨어져 있다가 잠시 정신을 차린 것 같은. 제가 히말라야에 갔었을 때도 혼자 한 한 달 가까이 아무 말도 없이 산에서 걷기만 하다가 아주 낯선 황량한, 너무너무 황량한 느낌인데도. 저는 뒤늦게 딴 사람들이 히말라야를 갔다 왔는데, 너무너무 황량해서 막 가슴이 아플 정도로 황량해서 다시는 가고 싶지 않더라는 얘기를 하던데.
저는 거기 있으면서 그 황량하던 풍경이 단 한 번도 황량하다는 느낌을 전혀 가져본 적이 없었거든요. 정말 그 낯선 땅에 이렇게 떨어져 있는데, 그 누구와도 말도 끊고 대화도 끊고 그냥 이 자연과 그냥 하나가 되어서 걷기만 하는데. 아! 너무나도 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포근함 같은 것들을 느끼고 이랬는데. 문득,
문득에 꼭 이렇게 멀리 여행을 떠나서만이 아니라, 문득문득 여러분들도 이렇게 비가 오는 날 가만히 추적추적 떨어지는 빗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물론 요즘엔 아파트라서 이게 떨어지는 맛이 들릴지 모르겠는데. 이렇게 가만히 비를 응시하고 있거나 이럴 때도 문득문득 자기라는 존재가 좀 낯설다 할까요? 그런 것들을 좀 느끼곤 하거든요.
그런 것들이 우리가 누구나, 여러분 요즘 TV 보면은 TV 예능 프로그램 같은 거에도 보면은 어떤 사람이 붕 떠있는 모습을 표현할 때, 그 옆에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 이런 표현들이 자막에 종종 달리면서 웃더라구요. 이 자막 하나 쓰는 것이, 되게 웃음으로써 그걸 쓰지만. 우리는 잠시 멍할 때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하는 것들을 정말 느끼게 되거든요.
이 질문이 상당히 근원적인 질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뭔가 자신의 삶을 관조하는 사람들은 더욱더 그렇지요. 제가 얼마 전인가, 잠깐 TV를 보다가 최불암씨 그분께서 젊은 남자들하고 이렇게 뭘 하는데, 뭐 벽을 보면서 꽃을 안 보이게 해봐라. 이렇게 계속 지속해서 관찰해봐라. 이런 얘기도 하고.
또 언뜻 봤던 게 뭐 술을 먹는데, 술을 왜 드시냐? 술을 먹는 데에 대한 질문을 나는 해본 적이 없는데, 술은 도대체 왜 먹는 것일까? 이런 어떤 질문들을 자꾸 던지는 걸 봤는데. 그렇게 이제 누가 되었던 어떤 사람이 되었던 이건 누구나 그렇거든요. 누구나. 철학가들만이 철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문득문득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리구 그런 것이 뭐랄까? 우린 누구나 어떤 근원적인 의문들이 있거든요. 도대체 내가 여기서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술이나 담배나 아니면 어떤 사람, 어떤 관계, 어떤 돈? 이런 것에 얽매여서 끄달려 있는가? 이거는 정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인가? 내가 왜 이렇게 여기에 끄달려 있고,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지?
나는 여기서 무엇을 도대체 얻고자 하는 것이지?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이것만 얻으면 나는 행복하리라고 여겼는데, 그것을 얻고 나도 그 이후에 또 다른 공허감이 오는 것들을 우리는 충분히 삶 속에서 알거든요. 아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시 무언가를 추구하고, 이런 삶에 목숨을 거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문득문득 정말 내가 누구이지? 내가 어디서 온 걸까?
내가 죽고 나면 어디로 가는 걸까? 지금 이 자리가, 나라는 존재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고. 삶에 대한 이런 질문을 던지거든요. 또 이제 아마 연세가 드시면 더욱더 그러지 않을까 싶은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조금 더 이제 내 인생이 적게 남았다,라는 생각이 들면 들수록 점점 더 내가 어디로 돌아가는 것일까?에 대한 어떤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지요.
그 질문이 이제 가장 근원적이 질문이고, 우리는 그 질문에 답을 하는 것. 왜냐면 이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잖아요. 사람들은, 불교를 믿는 사람만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을 한다,라고 여기는데. 불교는 전혀 뭐랄까, 특정한 종교가 아닙니다. 불교는 종교적인 용어를 하나도 쓰지 않더라도 모든 종교를 믿는 사람들,
모든 종교를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뭐 이런 표현을 쓰면 좀 어떨지 모르겠는데, 어필할 수 있는 종교랄까요? 어필이라는 것이, 왜냐면 이건 특정한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불교를 믿고 안 믿고 와 상관이 없습니다. 부처님을 믿고 안 믿고 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내가 누구인지? 내가 하나님을 왜 믿고 있는지?
하나님은 누구인지를 모르잖아요. 이게 궁금하잖습니까. 내가 죽고 나서 어디로 가는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자기를 찾는, 내가 누구인지를 찾는 이 공부이지. 여기에 어떤 종교적인 요소도 없습니다. 사실은. 불교는 어떤 종교적인 이런 게 아니에요. 내 근원이 무엇인지를 찾는, 그래서 기복 전인 불교를 좀 수준 낮은 불교처럼 불교에서 얘기하는 이유가,
부처님은 전혀 이렇게 기복적이고 이런 것들과는 사실은 좀 거리가 멀거든요. 그런데 역사가 오래 이어오다 보니까, 중생들에게 본질적인 괴로움을 없애주고 본질적으로 괴롭지 않은 근원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게 불교인데. 역사를 이어오면서 이제 당장 그런 것에 관심이 있기보다는 삶 속에 파묻혀서,
파묻혀 있는 그 삶 속에서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가 많다 보니까 그 사람들에게 부응하기 위해서 다양한 어떤 기복적인 신앙 같은 것들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은 부처님이 만든 게 아니라, 후세 사람들이 만들어낸 겁니다. 그래서 본질은 기복적인 것과는 좀 거리가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은 가장 중요한 문제거든요.
내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깨닫고,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는다,라는 문제는 곧 나에게 있는 모든 괴로움을 해소하는 문제와 똑같거든요. 우리는 전혀 괴로워할 필요가 없는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괴로움이 완전히 해소된 적이 없는 괴로움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잖아요.
한번 속고 두 번 속고 세 번 속고 계속해서 괴로움에 속아봤고, 괴로움을 없애고, 없애고 없애 봤는데. 괴로움을 없애고 나도 또 다른 괴로움이 끊임없이 찾아오는 거예요. 우리 인생에. 모든 괴로움을 없애가지고 내가 원하는 거, 사랑, 돈, 집, 뭐 갖고 싶은 걸 다 얻었어요. 다 얻고 날지라도 그 사람은 결코 그것을 다 얻은 게 아닙니다.
반드시 병들 것이고 반드시 늙을 것이고 반드시 죽음으로 돌아갈 것이거든요. 그럼 생로병사,라는 가장 중대한 중차대한 생사와 언젠가는 대적할 날이 눈앞에 딱 당도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아이, 그거는 나중에 오겠지. 하고 지금 당장에 달콤한 이것을 가지고 산다면,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거냐는 말이지요.
그래서 이 괴로움의 문제를 영원히 끝장낼 수 있는 공부를 마음속에 어렵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이렇게 하겠다. 내가 이생에 태어났는데 죽기 전까지,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이 생에서 아무리 가치 있는 것도 죽고 나면 끝이잖아요. 자식이, 죽고 나면 나랑 같이 가줄 건가요?
뭐 인도에 가니까, 남편이 죽으면 아내를, 살아있는 아내를 같이 막 집어넣든지, 아니면 같이 이렇게 막 불에 태우기도 하고 이러더라구요. 근자까지도. 실제로 그랬답니다. 그게 풍습이었다고 이래요. 그렇게 한다고 같이 가는 거냐? 같이 가는 것도 아니고 죽으면 같이 가는 것도 아닌데.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서 한 번쯤은 진지하게 돌아봐야 되는 것이지요.
내가 온 곳이 어디냐? 그걸 찾는 게 바로 귀의거든요? 내가 되돌아갈 곳. 되돌아가서 진정으로 내가 의지해야 할 곳이 어디냐? 이 육신? 육신은 아니라는 거지요. 이거 육신은 무너지는 거니까, 여기 의지해야 될 게 아니잖아요. 돈? 돈은 무너지잖아요. 반드시. 내가 죽을 때 돈도 같이 죽지요. 자식, 마누라, 남편, 내가 죽는 순간 인연 끝입니다.
그 어떤 게 나랑 영원한 친구가 될 수 있겠어요. 생겨난 모든 것 내가 가진 모든 것 살아있으면서 얻은 모든 것들은 반드시 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나의 영원한 벗이 될 수가 없어요. 나를 영원하게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것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온전히 내가 돌아가야 할 곳. 돌아가서 의지해야 할 곳. 내가 이것에 의지하면, 전혀 이것은 불생불멸하는 것이구나.
태어났다 사라지는 이런 허망한 게 아니구나. 허망한 게 아니라, 진실한 거에 의지를 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 진실한 게 뭐냐? 볼 수 있거나 들을 수 있거나 만질 수 있거나 냄새 맡을 수 있거나 눈귀코혀몸뜻이라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각의 도구를 가지고 만지거나 접촉할 수 있는 무언가는 아니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보고 듣고 만지고 이렇게 견문각지 하는,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이런 어떤 대상인 것은 아니지만, 대상을 넘어서 이 세상에서 내가 보거나 들을 수 있는 무언가는 아니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우리 근원의 배경처럼, 바탕처럼 이루고 있는 나의 참된 진실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 세상 모든 것은 허상이거든요. 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모든 걸 허상이라 이럽니다. 생겨나면 사라지는 거니까, 헛된 상이다.
잠깐 인연 따라 생겼다 인연 따라 사라지는 허상일 뿐이다. 옛날에 누군가를 막 꿈결처럼, 젊은 날에 사랑을 했어요. 막 사랑을 했다가 내가 차였던 내가 찼던 한 1, 2년 꿈처럼 사랑을 했다가 그 사랑만이 최고의 가치인 것처럼 사랑을 했다가 이제 물거품이 됐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물론 이제 그걸 지금까지 가지고 있으면서 그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그걸 환상이라고 못 느끼지요.
지금까지도 뭔가 마음속에 아! 그 사람의 아련한, 그 사람의 사랑을 가지고 있을 수 있겠지요. 그 사람은 아직 이걸 깨지 못한 사람이고. 그러다 나중에 나이 한 50, 60, 70 됐는데 그 사람을 다시 멀리서 봤는데, 내가 마음속에 상상하던 그 백마 탄 왕자가 아니라 쭈글쭈글하고 볼품없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연세 드신 할머님들께서 하는 얘기들이 되게 감동스러운 얘기가,
평생 이렇게 살아보니 남자 뭐해봐야 거기서 거기다. 다 똑같다. 뭘 그렇게 대단하게 젊은 날에는 생각했지만, 다 거기서 거기 다 똑같은 놈들이고. 다 똑같지요. 사람에 대해 의지하고 집착할 게 없는 것이지요. 또 사실 자식, 며느리, 사위에 대해서 사랑은 하되 과도하게 집착할 필요는 없는 것이, 제가 이렇게 만나서 상담했던 어떤 분들 중에는,
평범하신 분들은 그렇지 않은데. 갑자기 어마어마한 돈을 벌게 되신 분들 같은 경우에는 사이좋던 자식 며느리가 이 돈을 내가 물려주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막 사이가 너무 안 좋아지고, 이런 모습을 보며 되게 가슴 아파하는 이런 분들도 뵀었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조건들이라는 것 자체가 이렇게 허망하게, 허망하게 왔다가 가는 것일 뿐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근원적인 것. 나의 근원은 이렇게 생멸하는, 이 몸뚱아리도 생멸하고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마음, 느낌, 감정 뭐 이런 것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거잖아요. 한낱 한여름 밤의 꿈과 같은 거란 말이지요. 옛날 한때에 사로잡혀있지만, 그게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한때 사로잡혀 있던 건데, 이 모든 것이,
물질적인 모든 것 정신적인 모든 것 내가 추구하고 욕망하는 모든 것들이 한때의 하룻밤의 꿈과 같은 것에 불과하다. 그럼 그 꿈과 같지 않은 것은 무엇이냐? 꿈 깬 삶이 있다는 것이지요. 꿈 깨는 삶. 그래서 그게 무엇이냐? 바로 나의 근원이고. 나의 본질이고. 나의 본성이고. 나라는 존재는 그렇게 이 육신에 얽매이는 나약하고 비좁은 존재가 아니라,
광대무변하고 온 우주에 온 우주 전체와 내가 둘이 아닌 법신으로서의 존재라는 것이지요. 나와 둘로 나뉘는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것이 어떤 삶의 진실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진실을 모르고 이 허망한 물질적인 대상 이 상들을 진실로 아니까, 그거 하나하나를 나와 비교하고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면서 서로 분별하는 생각 때문에 서로 괴로워하는 것일 뿐이다.
그럼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디냐? 뭔지 모르지만,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뭔지 이미지를 그려낼 수는 없는데. 그려낼 수 있다면 그거는 진짜 부처가 아닙니다. 진짜 내가 아니고. 몰라요, 하여간. 알 수는 없는데, 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이 삶의 진실이 있다. 나라는, 내가 누군 인지에 대한 어떤 답이 있다는 것이지요.
내가 돌아가야 할 자리가 있다는 것이지요. 어디 있느냐? 온 우주 전체에 편만해 있다. 나라는 이 육신은 아니지만, 육신 속에 법신이 같이 있는 것이고. 색즉시공이라고 해서 색이 있는 그 자리에 곧바로 진실이 있다는 것이지요. 실상은 모든 허상이 있는 그 자리에 실상도 함께 있다. 즉 나라는 존재가 어리석은 중생이지만, 동시에 완전한 부처라는 것이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의 조건이 때로는 괴로운 조건이고 서글픈 조건이고 슬픈 조건이고 힘들고 괴로운 조건이지만, 동시에 완전한 삶의 조건일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이 생각과 분별 망상 때문에 그 삶의 진실을 보지 못할 뿐이지. 그래서 이제 아주 어려운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뭐냐 하면, 내가, 내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되겠다.
이 생에서 죽기 전까지는 내가 꼭 확인하고야만 말겠다. 하는 발심을 해봐야 된다는 것이지요. 내가 지금 하나하나 느끼고 있는 이 괴로움, 이 괴로움을 영원히 끝낼 수 있는 그런 삶을 나는 이생에 한번 살아봐야 되겠다. 여기에 대한 발심을 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이제 큰 결심을 하고 나면, 이 중간의 자잘한 일들은 저절로 이루어지잖아요. 쉽게 말해서,
우리가 공부를 할 때 대학원 수학 공부를 한 사람들은 중학교, 고등학교 수학 정도야 눈 감고도 풀잖아요. 그것처럼 내 인생 전체에 대한 모든 괴로움을 내가 해결하겠다,라는 발심을, 진정한 발심. 이 괴로움에 대한 발심. 사성제를 깨닫겠다,라는 모든 괴로움을 없애겠다,라는 이 큰 발심을 하게 되면, 그 발심을 향해 나아가게 되면 저절로 분별심이 사라지게 되고,
분별심이 나도 모르게 이렇게 줄어들게 되고. 그 분별심이 저절로 줄어들게 되면 세상에서 느끼는 크고 작은 자잘한 괴로움들은 금방 그쳐버립니다. 이게 이제 이 세상에서 가르쳐주는 어떤 힐링이니 무슨 마음치유이니 뭐 이런 수많은 것들 있잖아요. 그런 것들도 도움은 돼요. 저도 이제 우리 군종을 하다 보니까,
목사 신부님 스님들 대상으로 그런 교육을 많이 해줘서 많이 다녀봤어요. 온갖 심리치유나 다양한 어떤 치유방식들을 다 해봤는데, 물론 도움이 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효과적인 도움이 되는 것들이 많아요. 왜냐면 자신들의 트라우마 같은 것들을 치유해주고 괴로운 일들을 딱딱 치유해주니까.
그런데 그것이 뭐냐 하면요. 우리의 괴로움은 우리의 번뇌가 팔만 가지가 넘는다고 팔만대장경이라고 얘기하듯이 수만 가지가 넘는데, 그 하나하나의 번뇌를 그 치유법 하나를 때로는 일주일, 한 달, 일 년 해가지고 어렵게, 어렵게 해가지고 그 번뇌 하나를 치유해야 되는 겁니다. 번뇌가 무수히 많이 생겨나는데, 이것에 치유를 하나하나 하나 하려면 언제 그 번뇌를 다 해결하겠습니까.
이 불법이라는 것은 그렇게 하나하나의 괴로움을 문제 삼는 게 아니에요. 그게 괴로우면 내버려 둬도 좋습니다. 뭐 명상이 안 됩니다. 생각이 자꾸 올라와서 힘듭니다. 그런 거 가지고 뭐 쪼잔하게 생각 하나 올라오는 거 가지고 싸울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내 인생에서 하나하나의 문제 가지고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일일이. 힘들게. 큰 발원을 해서 큰 결심.
큰 발심을 하나 딱 해놓고 나면, 나머지 자잘한 문제들은 저절로 소멸이 되기 시작해요. 나도 모르게. 이 법에 대한 공부를 하면. 이 진리를 공부하면. 제가 이제 진리에 대한, 공부에 대한, 깨달음에 대한 얘기를 자꾸 하니까, 어떤 분들은 아니, 우리는 당장 괴로운 거를 해결해주는, 당장 힘든 걸 하나하나 해결해주는 게 더 좋지,
크게 깨달음에 대한 얘기 해봐야 우리는 공감이 안 됩니다,라고 얘기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진짜 큰 공부를 하게 되면요. 작은 괴로움은 저절로 해소가 된다니까요. 그래서 큰 발심을 하기만 하면 되고,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했던 힘들게 고행하는 것들은 그건 진짜 공부가 아니에요.
부처님은 6년 동안 고행을 하고 나서 아, 고행은 진짜 공부가 아니구나!라고 딱 폐기처분했잖아요. 버리자마자 깨달았잖아요. 그 이전에, 고행을 6년 하기 전에 선정주의라고 해가지고 명상 수행 참선 엄청 열심히 했고, 최고 단계의 삼매에 이르렀는데, 그건 진짜가 아니라고 해서 딱 버렸단 말이지요. 지금 한국불교는 전부다 명상해서 삼매를 증득해야 된다.
열심히 절하고 뭐 앉아가지고 꼼짝도 안 하고 금강경 7독을 해야 된다. 뭐 엄청 고행 위주로 가르친단 말이지요. 앉아서 ‘장좌불와’ 눕지 않고 곳곳 하게 앉아가지고 하루를 보내야 된다. 부처님이 버린 겁니다. 그런데 2500년이 지나다 보니까 부처님이 버린 걸 이제 주워 담고 있는 거예요. 그게 중생들이 할 수 있는, 중생들의 분별심이 갈 수 있는 공부가 뻔하거든요.
2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뻔하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지금도 그 찌꺼기를 붙잡고 있는 거지요. 마음공부라고 하잖아요. 마음으로 하는 거지, 몸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옛날에 선사 스님들이 몸으로 하는 공부가 아니다,라는 얘기를 그렇게 많이 강조를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나무’ 나의 본성으로 돌아가겠다. 내 근원이 무엇인지 찾겠다. 내가 누구인지 찾겠다.라는 발심만 하면 돼요.
이걸 하나의 숙제처럼 가지고만 있으면 됩니다. 풀리지 않는 숙제. 그러니까 일반 학생들이 하는 숙제는 숙제를 막 해야 되잖아요. 숙제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가슴속에 의문을 안고만 있으면 됩니다. 안고 있고 뭐만 중간에 하면 되냐면, 지금 여러분이 하는 것만 하면 됩니다. 뭐? 이렇게 가끔 한 번씩 법회에 나오는 거예요. 일요법회도 나오고 제일 법회도 나오고,
자꾸 법문을 들으러 나오는 거지요. 그게 숙제하는 겁니다. 이 마음속에 뭔가 숙제 같은, 뭔가 열심히 할 필요는 없지만 마음속에 뭔가 내가, 내가 누구인지를 한번 찾고야 말리라. 이 괴로움의 자잘한 것들 하나하나 싸울 게 아니라, 그 괴로움의 근원의 구조를 완전히 타파해버리겠다. 이런 발심을 하는 것. 그래서 내가 나의 본성이 무엇인지,
나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야 되겠다,라고 발심을 해야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무대비관세음’이라는 것은 ‘나무’ 돌아가겠습니다. 대자대비하신, 왜 대자 대비하다고 하느냐면, 온 우주법계 전체가 둘이 아닌 하나면 상대를 돕는 것이 나를 돕는 것과 똑같지요. 상대와 내가 둘이라고 생각하니까, 내가 너를 도우면 내 돈이 없어진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사실은 너와 내가 똑같습니다. 그래서 이게 끌어당김의 법칙이니 절에서 복을 많이 지으라느니. 절에서 복을 많이 지어라 보시를 많이 해라 하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하나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를 깨달으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데, 온 우주 전체가 하나야. 이 소리를 하면 사람들이 너무 어렵다 하니까, 그래? 그러면 하나임을 실천해라. 어떻게 실천하는데요?
보시를 해라. 상대방에게 보시를 하면 상대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니까 그 공덕이 나에게 돌아오거든요. 이 세상에 보시를 하고 이 법에 보시를 하고 하게 됐을 때 그게 나에게로 돌아오니까. 그러니까 복을 많이 지으면 신기하게 내가 더 잘 되고 더 잘 풀리고 더 부자가 되고 한단 말이지요. 왜 그러겠어요?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니까,
이 세상에 기여를 하면 나에게 기여가 되는 거예요. 진정한. 세상을 돕는 것이 진정 나를 돕는 것이지요. 그게 하나라는 동체대비라는 불이법이라고 하는 불이중도라고 하는 하나의 진리를 깨달으라고 하는 얘기를, 구체적인 실천을 얘기한 게 보시입니다. 자비이고. 억지로 자비를 실천하려고 노력하라는 게 아니에요.
이 공부에 마음을 관심을 기울이고 나서 결국에 내가 깨달음을 딱 얻는 순간, 완전한 자비가 저절로 갖추어지지요. 너와 내가 둘이 아니게 되니까. 그래서 ‘대비’ 큰 자비라는 것은 하나임을 깨달았을 때 저절로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크게 자비로우신 누구에게? 관세음보살님께. 관세음보살님이 누구입니까? 관세음보살님이 바깥에 어디에 따로 계신가?
그분의 생애가 어떤가? 관세음보살님의 역사와 일대기를 한번 읽어 봐야지. 다 의미 없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은 내가 바로 관세음보살님이에요. 나의 본성 나의 본래 자리 참나를 찾는다면, 그게 바로 관세음보살님이고. 관세음보살님과 지장 보살님과 아미타부처님과 석가모니 부처님과 따로따로따로 떨어진 어떤 뭔가 있다,라고 생각하면, 그거는 방편에 치우친 사람이지요.
지금까지는 그렇게 배웠잖아요. 뭐 아미타부처님을 염불하는 게 더 좋다. 관세음보살, 야, 보살을 부르지 말고 부처님을 바로 불러라. 이래서 아미타불을 불러라,라고 하고. 그래도 보살님이 더 직접적으로 우리와 가까운 사람이니까 보살님을 불러야 내가 힘들 때 진짜 도와준다. 이런 얘기도 하고, 다 방편이었습니다. 전부다 방편이지요. 모든 무수히 많은 방편을,
하나로써 귀결시키는 방편을, 딱 깨뜨려서 하나로. 그게 뭐냐면 수많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버리고 달 자체를 가리키도록 하는 거예요. 관세음보살님이 따로 있고 지장 보살님이 따로 있다. 나는 저 영가천도를 하고 싶은데 난 지금까지 관세음보살만했는데, 아, 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지장보살을 진작 할걸. 이렇게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관세음보살님이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에 내가 나를 그리워하고, 내가 나의 본성을 나의 본래 자리를 찾겠다.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겠다,라고 발심하는 것이 나무대비관세음 하는 겁니다.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에게 귀의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이 내 바깥에 있으니까, 관세음보살님이 나를 도와주겠지.
저 바깥에 있는 관세음보살님을 열심히 염불하고 관세음보살님이 우리에게 내준 숙제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열심히 독송하면 관세음보살님이 숙제를 잘했다고 나에게 상을 주겠지. 나에게 돈도 벌게 해주고 병도 낫게 해주고 다 도와주시겠지. 이게 이제 방편의 가르침이구요. 방편을 넘어서 본질로 돌아간다면 관세음보살님이 나이고.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왜 독송하라 이러고 관세음보살 염불을 왜 하라 그러겠어요? 관세음보살 염불할 때 그 관세음보살 염불하는 그놈이 누구냐? 그걸 확인하라는 겁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독송할 때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여기 무슨 뜻이 있느냐? 불교는 뭐 이상하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이런 것만 자꾸 하느냐? 왜 말도 안 되는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이런 걸 하라겠어요?
말 되는 것을 하면요, 사람들이 말뜻을 따라가거든요. 깨달음은 말뜻을 따라 가가 지고는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의미를 생각해서는 안 되고, 의미를 깨뜨려버려야 돼요. 말뜻, 의미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말뜻의 너머. 말머리 화두라는 게 말 이전이거든요. 말 이전. 말뜻을 따라가기 이전. 그러니까 큰 스님들이 “도가 무엇입니까?” 마른 똥막대기다.
어, 그럼 똥막대기가 왜 부처이지? 하고 똥막대기라는 이미지를 따라가면 그거는 법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말뜻 따라가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해요. 그래서 큰 스님들의 화두나 선문답을 보면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얘기를 하잖아요. 뜬금없는 얘기를 하세요. 도가 무엇입니까? 차나 한잔해라. 도가 무엇입니까? 이거는 컵 뚜껑이다. 도가 무엇입니까?
뭐 마 삼근이다. 야, 날씨가 좋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해요. 맥락이 없는 얘기를 한단 말이지요. 왜 그러겠습니까? 생각으로 이해하지 말라는 얘기예요. 생각이, 이해가 딱 멈춰야 된다는 소립니다. 그걸 듣고 생각을 따라가면 깨달을 수 없다는 거예요. 왜? 생각이 움직이는 순간 그건 벌써 분별이기 때문에, 생각이 움직였다면 중생의 습관이 발동한 거예요.
이게(죽비소리) 도(道)다. 이렇게 얘기했을 때, 어, 이 소리가 왜 도(道) 지? 저 소리 속에 도(道)가 있나? 이렇게 생각을 하면 이미 끝났다는 거예요. 그거는 일단 중생의 습성을 따라가는 거니까. 이게(죽비소리) 도(道)다. 이렇게 얘기할 때는 아, 모르겠다. 난 모르겠다. 그냥 모르겠다 하고 딱 있으면 됩니다. 모르겠다. 왜냐하면 알겠다 이러면 생각이니까.
알아볼까 하는 것도 생각이니까. 그냥 난 모른다. 모른다. 똥막대기다 이러면 똥막대기가 뭔지를 막 알아야지? 하는 게 화두라고 생각해요. 그건 화두가 아닙니다. 그건 죽은 화두에요. 똥막대기가 부처다 이러면 모르겠다 모르겠다 어떤 법문을 들어도 그냥 모르겠다. 왜? 법을 드러내야 되는데, 법을 드러내는 수많은 방법들이 있어요.
대비주 독송을 해라. 대비주 왜 독송을 하라 그러겠어요? 대비주는 뜻이 없잖아요. ‘나모라 다나나라 야야’ 뜻이 없습니다. 뜻이 없으니까, 뜻을 따라갈 확률이 훨씬 줄어들겠지요. ‘옴 마니 반메훔’ 아무 뜻이 없어요. 도가 무엇이냐? 옴 마니 반메훔. 뜻이 없습니다. 그냥 옴 마니 반메훔일 뿐이지. 그래서 소리를 뻑 하고 지르기도 하고 이렇게(죽비를 치며) 딱 때리기도 하고 그럴 뿐이다. 그 말은 뭐냐면,
그냥 생각을 딱 멈추고 생각은 움직이지 않게 하고 그냥 모르겠다. 그래서 숭산 스님은 ‘오직 모를 뿐’ 이걸 화두라고 생각하고, 스님이 늘 법문할 때마다 알겠다 하고 들으면은 그 사람은 정말 불교를 모르는 사람이다. ‘오직 모를 뿐’ 모른다 하고 공부를 해야 된다 그러지요.
육조 혜능 스님이 그 당시 신수 스님 같은 교수사 스님 공부를 엄청 많이 했던 수많은 스님들이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육조 혜능 스님은 행자였을 뿐 아니라 문자를 몰랐어요. 글자를 못 읽었어요. 무식했지요. 쉽게 말해서. 아는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깨달은 거지요. 그래서. 아는 게 없으니까 아는 걸로 법문을 헤아릴 필요도 없었고,
아는 걸 가지고 해석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막 알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가슴속에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알고는 싶지만, 나는 알 수가 없다. 뭔 방법을 써도 알 수는 없다. 그러니까 직지인심을 하는 이 법을 가리키는 법문을 들을 뿐.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제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게 발심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나무대비관세음이라는 것도 대자대비하신 관세음, 누구? 내 안에 있는 대자대비하신 관세음. 내 안에 있는 둘이 아닌 하나의 참된 성품, 불성, 자성, 본래면목, 그리로 돌아가겠다. 돌아가겠다,라는 발심을 하고 나서 ‘원아속지일체법’ 원컨대 내가 속히 알아지이다. 일체법을 알아지이다. 첫 번째 관세음보살님의 발원입니다.
귀의를 한 다음에 발원을 하는 것이지요. 내가 본래의 나로 돌아가겠다.라는 귀의를 하고. 그러고 나서 발원을 하는데, 어떤 발원을 하느냐? 첫 번째 내가 속히 일체법을 깨닫겠습니다. 여기서 사실은 끝난 거예요. 나머지는 다 같은 얘기이고. ‘원아속지일체법’ 원컨대 내가 속히 일체법을 깨달아지이다 하고 발원을 하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오늘 이제 정초 기도하는 이 첫째 날. 한 해를 시작하는 첫째 날. 마음의 발심을 내가 일체법. 일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 또 일체법이라는, 법이라는 말은 진리라는 말이기도 하고 존재라는 말이기도 해요. 일체 모든 존재. 나라는 존재. 온 우주라는 존재. 모든 두두 만물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의 진실을 알겠다. 일체 모든 존재의 진실을 알아야 되겠다.
일체 모든 진리를 알아야 되겠다. 그 두 가지가 하나니까, 일체법의 진실을 내가 반드시 깨닫겠습니다. 반드시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는 발심을 하라는 거지요. 그런 발심을 하고 나면, 나는 쉽게 말해서 진리를 깨닫겠습니다.라는 건데. 진리를 깨닫겠습니다 하고 발심을 했는데, 진리를 못 깨달았단 말이지요. 부처님은 계속해서 내가 이렇게 나라는 존재 자체가 진리이다.
내가 이렇게 길을 걷는 것이 진리이고. 숨을 쉬는 것이 진리이고. 말을 하는 것이 진리이고. 보는 것이 진리이고. 듣는 것이 진리이고. 진리를 벗어나서는 살 수가 없다. 진리가 아니고서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다. 바람이 부는 것도 진리이고. 해가 떠 있는 것도 진리이고. 모든 것이 다 진리 아닌 것이 없는데, 내 눈에는 진리처럼 안 보이고 다 물질 대상으로 보이잖아요.
이건 죽비로 보이고 시계로 보이고 공기로 보이고 바람으로 보이고 다 따로따로 떨어진 별게의 사물로 보이잖아요. 그게 이제 중생의 시각이거든요. 다 따로따로 떨어져서 보는 것. 그런데 나는 여전히 그렇게 보이잖아요. 온 우주 만물 전체가 하나로 보이지 않잖아요. 그럼 된 겁니다. 모르는 거예요. 그냥. 나는 다 따로따로 보이니까 모르는 거지요. 그냥. 진리가 뭐냐?
그냥 모른다. 이게 공부입니다. 이게.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알긴 알아야 되겠다.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만 확인하면 생사문제가 해결이 된다니까요. 생사문제를 끝낼 수 있는 공부가 이 공부다. 그래서 화두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지금 사실은 절에 나오면서, 여러분들 간화선이라고 들어 보셨잖아요. 간화선은 앉아가지고 장좌불와하면서 오랫동안 앉아서 막 화두와 싸워야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전혀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이게(죽비소리) 부처입니다. 아시겠어요? 모르겠지요? 모르겠으면 공부를 하고 있는 겁니다. 모르겠으면. 단순하잖아요. 모르잖아요 그냥. 모르잖아요. 당연히 모르잖아요. 그게 공부라는 거지요. 모른다 하는 게. 그리고 계속 모르겠다 하고. 그런데 알고는 싶은데, 이걸 머리로 막 계산해서 알려고 하는 게 아니라,
뭔지 모르게 그냥 이게 숙제처럼 집에 있을 때도 그냥 먼 하늘을 보면서 하! 참 뭘까? 이걸 뭐라고 분명히 하는데, 이게 뭔지 참 모르겠네. 참 모르겠다. 이런 답답함. 풀리지 않는 숙제. 풀리지 않는 숙제의 답답함을 그냥 안고 있는 겁니다. 모든 문제는 그렇게 내 안에 안고 있을 때 해결이 됩니다. 세속적인 것도 마찬가지거든요. 내가 이렇게 해야 될지 저렇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내 자식이 이렇게 하는 게 좋을지 저렇게 하는 게 좋을지 모르겠다. 내가 이걸 투잡 하는 게 좋은지 안 하는 게 좋을지 모르겠다. 뭐 모든 삶의 궁금증이 있다. 그럼 모르는 게 정답이에요. 모르겠다 하고 그냥 턱 내맡겨놓는 겁니다. 모르겠다 하고 턱 내맡겨놓으면요, 답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이 머리는 머리는 진정한 답을 알 수가 없어요. 가슴이 알거든요.
가슴이라는 것은, 그래서 이 공부는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이 짧은 거리라고 그래요. 우리는 계속 머리를 움직이는데, 머리를 움직이지 않고 가슴으로 턱 내맡겨놓는 거예요. 부처님께 그냥 턱 맡겨놓는 거지요. 그러다 보니까 이제 화두가 나중에 의정이 된다,라는 얘기가 뭐냐면. 모르겠는데, 처음엔 머리가 모르겠다가 나중엔 그냥 머리는 모르겠고 그냥 가슴이 답답한 거지요. 이게 이제 의정입니다.
감정화되는것. 모르겠음이 감정화되는 것. 이게 이제 의정이라고 하거든요. 삶에 있는 모든 궁금증도 이런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뭐 화두 같다는 얘기를 일반적으로 쓰는 것도 그래서 그래요. 삶의 모든 궁금증이 있을 때, 그걸 내가 풀려고 하면 머리가 분별할 수밖에 없어요. 내가 풀려고 하면 머리가 분별하는 거지, 정답이 아닙니다.
물론 정답을 낼 수도 있겠지만 더 좋은 방법 더 효과적인, 더 막막하지만 더 효과적인 방법. 막막해야지 효과적인 방법이 나와요. 더 효율성이 나옵니다. 내가 알겠다고 해가지고 뭔가 선명하고 분명한 걸 우리는 원하잖아요. 머리로 선택해서 온갖 공부를 하고 인터넷을 찾아보고 해가지고 전문가들 얘기를 다 들어보고 그런 다음에 결론을 내잖아요.
그거는 더 효과적인 것 같은데, 그게 더 막막한 겁니다. 이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나 모르겠다. 부처님 당신이 알아서 하십시오. 턱 맡겨놓는 거예요. 내가 아프다. 병이 나을지 안 나을지 내가 모르잖아요. 부처님 당신이 알아서 하십시오. 나는 그냥 내 인생, 내 공부 하면서 살 뿐이다. 내 인생 어떻게 될지, 내가 어떻게 아는가? 난 모른다. 모르는 게 진실이거든요.
내일 어떻게 될지 알 수 있습니까? 하나도 알 수 없어요. 내일 어떻게 될지를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안다고 생각하고, 내일은 뭐 해야지 모레는 뭐 해야지 글피는 뭐 해야지 다 계획해놓잖아요. 그 계획이 틀어지면 스트레스받잖아요. 계획에 집착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 만든, 묶어놓는 자승자박. 스스로 묶어놓는 거거든요. 묶는 게 없으면, 괴로울 게 없습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난 모르니까, 부처님이 알아서 하십시오. 내 안에 있는 부처에게 모든 걸 다 맡기겠으니, 내 안에 있는 부처가 알아서 끌고 가십시오. 하고 턱 내맡겨놓는 겁니다. 오늘 정초 기도 첫째 날인데, 내가 일체법을 깨닫겠다. 내가 일체법을 깨닫겠다.라는 말은 곧 내가 괴로움을 없애겠다.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하겠다.
아, 자잘하게 이런저런 문제에 하나하나 꿰면서 인생 살지 않고, 내 인생 전체 모든 문제를 한방에 해결하는 그런 공부를 내가 하겠다. 몰록, 돈오하는 이 공부를 내가 하겠다고 발심, 간절히 발심만 하면 되니까, 어려운 공부를 하라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어렵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 어렵게 하지 않아야 공부가 되지,
막 열심히 애쓰고 노력하면 공부가 안 돼요. 유위법으로 하면 공부가 안 됩니다. 무위법으로 그냥 해야지 돼지. 그래서 지금 사실은 이 불교계의 큰 병통이 억지로 억지로 어렵게 어렵게 하려고 하는 게 사실은 오히려 병통이 돼버려요. 그래서 중도라고 하잖아요. 그러나 또 안 해버리면 안 되고, 간절한 마음은 있으니까 절에는 와야 되겠고, 법문을 자꾸 들어야 되겠고, 하는 마음으로 하십시오.
첫댓글 읽기전에
하이얀마음부처님
수희공덕예경찬탄 합니다♡
덕분에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이 생에서
죽기 전까지는
내가 꼭
확인하고야만말겠다.하는
발심을 해봐야 된다는 것이지요.
내가 지금
하나하나 느끼고 있는
이 괴로움,
이 괴로움을
영원히 끝낼 수 있는
그런 삶을
나는 이생에
한번 살아봐야 되겠다.
여기에 대한 발심을
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이제 큰 결심을 하고 나면,
이 중간의 자잘한 일들은
저절로 이루어지잖아요.
쉽게 말해서,
하이얀부처님
본문글 좌악~~드래그 할 수 있게 열어 놔 주셔서
고맙습니다
간혹~~ '무단복사금지'
이런거 좀 그래요~~
부처님 말씀 써 놓고는
....^^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도전!
이라 쓰고 지움. _()_
ㅋㅋ 미소가 절로 ... 아--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