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시73편28절)
요즘 제 입에서는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 주께로 날마다 더 가까이 저 하늘나라 나 올라가 구주의 품 안에 늘 안기어 영생의 복 받기 원합니다’하는 찬송이 끊이질 않습니다. 나의 기도겠지요. 어쩜 남의 육체의 때에 계속이 될 염원이 아니겠습니까? 주 안에 안기어 아버지께 가까이 날마다 더 가까이...독백이 되고, 신음이 되고, 간구가 되고, 애타는 노래가 되어 나를 아버지께 더 가까이 갈 수만 있다면 그게 남은 육신의 때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시편 기자라면 적어도 하늘에 속한 성도들입니다. 그럼에도 아삽이라는 분은 그 당시의 세대를 보고는 넘어지고 미끄러질 뻔 했습니다(시73:2) 그 이유는 악인들 곧 진리를 알고 주님께 집중하지 않아도 너무 잘 되고 잘 돌아가는 사람들이 부러워 질투를 했기 때문입니다(시73:3)
세상을 보면 자신이 너무 작아 보이고 하나님이 유명무실해 보일 때가 있잖아요? 세상 돌아가는 것에 정신이 팔리면 신은 죽었다고 하는 니체의 말이 맞을 것 같아요. 하나님 없이도 백층이 넘는 빌딩을 짓고, 하나님 없이도 너무 풍성하고 행복한 것 같이 돌아가고 있잖아요? 어안이 벙벙합니다. 대신 그리스도만 붙잡고 있는 자신은 너무 초라하고 구닥다리고... 저는 7-8년 전 나 이제 이만큼 했으니 그만 하고 돈 좀 벌어서 나를 따르는 사람들을 부양을 좀 해야겠다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도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시편기자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이고 여러분들의 이야깁니다. 만약 같은 시간 속에서도 세상의 세대와 하나님의 아들들의 세대가 다르다는 사실을 모르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저도 진리를 따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 까지 나아가는 성소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영원히 세상을 질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소멸하는 별똥별이 되고 말았을 겁니다. 음녀들처럼 또는 광야에서 스러져 간 이스라엘처럼 말입니다. 만약 율법 아래에 우리가 놓여 있다면 니체처럼 진짜 하나님은 죽은 것 같습니다. 의로 인한 성령의 역사가 없고, 살아계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생명의 공급이 없고, 그 생명에 의한 형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나아가는 복이 없다면 상천하지에 주 밖에 사모할 자가 없다(시73:25)고 노래할 수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꼭 붙잡고 자신 안에 모시고 그 언약을 지키므로 진리의 성령의 역사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의 세대(시73:15) 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확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와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와 기도를 성공하는 성소신자가 되어야 합니다(시73:17) 뜰 밖에 선 구경꾼이나 마당만 밟고 되는 것처럼 보이는 자리에서 철저히 돌아서서 복음을 듣고 자신의 확증을 받은 후에 천국을 침노하고 또 해야 합니다. 회개 세례 죄 사함 성령의 선물, 그리스도 피 안에 있는 한 생명,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화목, 그리스도와 한 몸 한 영이 되어 아버지께 더 가까이 날마다 더 가까이...이게 복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영과 생명이 나의 양식과 옷과 장막이 되기 때문입니다. 피난처입니다. 그로 인해 그리스도에 대해 할 말이 많아집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구심력의 사람은 그 길에서 할 이야기가 너무 많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간증이며 찬송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