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키아벨리와 그의 시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의 추락과 부활, 사보나롤라의 신권정치와 그후의 처형으로 들썩인 격동기의 피렌체를 살았던 인물이다.
15세기는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개화한 시기이다. 피렌체의 메디치가도 예술이나 문화의 후원자를 자처하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 같은 예술가들을 비호했다.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르네상스는 서구에서는 세 번째였다. 특히 1453년 비잔틴제국이 멸망하면서 콘스탄티노플로부터 유입된 그리스.로마의 고전이 주된 계기로 작용했다. 이 시기 이탈리아는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 나폴리, 교황령 등이 할거하는 소국 난립시대였다. 알프스 이북에서 왕정에 의하나 영역국가가 발전한 것과는 대조적인 상황에서, 마키아벨리는 군사와 외교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를 침입하면서 이탈리아의 정치질서는 큰 혼란을 겪는다. 같은 해에 피렌체에서도 그때까지 실질적으로 통치자 지위를 누렸던 메디치가가 추방되었고, 그후 공화정이 부활한다.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이었던 사보나롤라가 지도자 자리에 올라 신권정치를 확립했으나 머지않아 그 역시 실각하여 처형당했다. 훗날 마키아벨리는 “무기 없는 예언자는 자멸한다”는 말을 남겼다.
메디치가가 사라진 피렌체 공화국에서 마키아벨리는 외교와 군사 면에서 수완을 발휘했다. 멀리 프랑스나 독일로 파견되는 한편, 교황이나 체사레 보르자 같은 인물들과도 접촉했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의 능력과 야심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운명에 의한 악의 서린 일격”으로 실각한 것은 통찰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이처럼 마키아벨리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야심과 욕망에 휘둘리는 인간들의 영고성쇠였다. 그들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거기에서는 마키아벨리는 끝없는 야심과 욕망의 추구에 관한 한 인간은 동물보다도 못한 한낱 야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마키아벨리의 이러한 인간관은 훗날 ‘마키아벨리즘’이라 불리는데, 마치 권모술수나 비도덕적 권력추구를 옹호하는 것처럼 여겨지며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이같은 측면을 마키아벨리 이전 사람들이 미처 몰랐던 것은 아니다.
문제는 마키아벨리가 인간의 그런 현실을 전제로 어떻게 질서를 확립하고 유지할지를 논한 점이다. 마키아벨리의 정치이론은 인간의 사회성을 주어진 것으로 보지 않고, 어떠한 인간성에도 대응할 수 있는 정치구조를 구상한 점에서 사뭇 야심적이었다.
2. 군주론(1532)
마키아벨리에 이르러 정치학의 전통은 큰 변화를 보았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stato'(국가를 가리키는 이탈리아어로, 마키아벨리에 의해서 처음 본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국가state' 대한 일반적 표상의 토대가 된다.)라는 개념이다. 정치적 공동체와 이를 구성하는 자유로운 시민이라는 모델 대신에, 마키아벨리는 사람들을 사실상 지배하는 군주의 힘을 ‘stato'라 하고, 군주와 신민 사이의 지배-복종 관계에 주목했던 것이다.
그러한 마키아벨리가 강조한 것이 ‘덕virutu'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전통적으로 윤리적 덕목으로 이해되어왔는데, ’운명fortuna'과 함께 쓰이는 경우가 많다. 마키아벨리는 이 개념에서 윤리적 측면을 제거하고, 오로지 인간이 상황을 파악하고 과감히 행동함으로써 운명을 제어하는 능력이라고 강조했다.
마키아벨리에게 정치학이란 ‘stato의 기술’일 뿐이었다. <군주론>에서 그는 ‘stato 기술’에 관해, 신민을 어떻게 통찰하고, 다른 군주와 어떻게 교류하며, 군대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하는 세 가지 관점에서 고찰하고 있다.
신민의 통치에 대해 마키아벨리가 강조하는 것은 공포의 힘이다. 군주를 향해 “사랑받기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낫다”고 설파한 마키아벨리는 공포야말로 지배의 최종적 근거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은혜를 알지 못하며 변덕이 심하다. 자발적 복종을 기대하는 것은 부질없으므로 ‘필요성’에 의해 인간을 강제하는 수밖에 없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렇게 말하는 마키아벨리는 정치적 공동체에서의 우애를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나, “지배자는 두려움을 주기보다는 사랑받으라”고 말한 키케로와는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다른 군주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약속을 어디까지 지킬 것인지를 문제 삼는다. 마키아벨리는 신의를 지키는 것이 이익을 가져다주지는 않으며 약속했을 때의 근거가 사라진 듯한 경우라면 오히려 신의를 지키지 않는 편이 현명한 군주의 책무라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그 유명한 ‘여우의 교활함’에 대한 권유가 등장한다.
마키아벨리가 이런 논의를 펼친 배경에는, 군주의 지배는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며 전통적 도덕을 거슬러서라도 질서를 세우고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신념이 깔려 있었다. 바로 여기에서 군주의 이익보다도 질서유지라는 공공의 이익을 강조하는 ‘국가이성론’이 싹튼 것이다.
군사정책은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공포로써 질서를 실현하고자 하는 이상, 사람들을 강제할 만한 군사력이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대의 중핵인 용병들은 보수 문제로 배신할 가능성도 있어 적합하지 않았다.
이에 서기관 시절의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주변에서 농민들을 모아 국민군을 창설하려고 했다. 그러나 신민을 힘으로 억누르면서 한편으로는 그 신민을 모아 군대를 조직한다는 것은 모순이었던 까닭에 마키아벨리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3. 로마사 논고(1531)
마키아벨리의 또 하나의 대표작으로 <로마사 논고>가 있다. 그 책에서 마키아벨리는 눈길을 돌려 로마에 주목한다. 왜 공화정 로마는 대제국의 자리에까지 올라선 것인가? 공화정의 운명이나 자유의 유지에 관심을 둔 인문주의자들과 교류하던 마키아벨리는 공화정 로마를 보는 독특한 관점을 세운다.
마키아벨리는 ‘확대되는 공화국’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로마의 공화정을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나 동시대의 베네치아와 비교하면서 그 특징을 말한 것이다. 스파르타나 동시대의 베네치아와 비교하면서 그 특징을 말한 것이다. 스파르타나 베네치아는 분명 안정된 공화국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도시국가인데다 폐쇄적이었다. 하지만 공화정 로마는 귀족과 평민의 대립이 끊이지 않아서 내란의 위험성이 상존했던 반면, 결국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이 대목에서 마키아벨리는 내부에 대립이 있더라도 그것을 잘 조직하면 오히려 강대한 군사적 에너지를 도출할 수 있다는 교훈을 이끌어낸다. 차분하고 닫힌 공화국보다 상황에 따라 색다른 인간이 나타나는 공화국 쪽이 군사적으로도 바람직하다. 이는 시민들 사이의 이해관계 대립이 반드시 분열을 뜻하지는 않으며, 갈등이나 대립에 적극적 의미가 있다는 식의 혁신적 발상이었다.
이렇듯 로마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평가는 군사력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군주론>에서 맞닥뜨린 난관을 극복하는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보다도 공화국이 주체일 때 ‘stato'는 확대된다고 보았다. <로마사 논고>는 공화국 자체를 하나의 군주로 보고 공화국의 주변 국가들에 대한 ’stato'의 유지 및 확대를 논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이러한 결과를 얻기 위한 조건으로 종교를 활용하는 것도 제안했다. 신에게 품는 두려움을 활용하여 사람들이 공화국을 위해 움직이게 만든다는 마키아벨리의 발상은 종교를 정치에 종속시키는 논의의 전형이다. 마키아벨리는 또 대외전쟁을 지속시킴으로써 시민을 긴장 상태에 두며, 아울러 경제적 여유를 갖지 못하게 하라고 주문했다. 요컨대 마키아벨리는 단순한 군주정 지지자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공화정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여긴 사람이었다. 그러나 동시대의 다른 인문주의자들과는 관점이 달랐는데, 공화정에서의 자유보다는 오히려 공화정의 군사적 확대 능력에 무게를 두었다는 점에 마키아벨리의 특징이 있다. 그를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든, 마키아벨리가 고전고대의 정치학을 후세의 서구사회에 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1월 독서토론을 마키아벨리 <군주론>으로 마치고 난 후유증(?)에서인지 서가에서 우노 시게키의 <서양 정치사상사 산책>이 눈에 띄었다. 고대 그리스 소크라테스에서 센델까지 다루는 목차 중에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으로 마키아벨리를 다룬 부분을 발췌해 보았다.
마키아벨리가 어떤 시대에 살았고 그의 마음을 물들인 것이 어떠한 세계관이었는가를 공감하는데 좋은 자료였고, 마키아벨리즘에 갇힌 권모술수가의 오명을 불식 시키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