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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들과 강연들 (Essais et conferences(Vorträg und Aufsätze) 1954
켈켈(1927-2015), in Les Oeuvres II, Dictionnaire, PUF, 1992, p. 3330-3332(P.4616)
- 켈켈(Arion Lothar Kelkel, 1927-2015) 프랑스 철학자, 하이데거 전문가.
강연들과 시론들(Vorträge und Aufsätze, Essais et conférences 1954)(1936-1953 소품들)(trad. André Préau, préf. Jean Beaufret), Paris, Gallimard, coll. « Tel » (no 52) (1re éd. 1958) - 전집 7권에 포함되어 있다.
I부, (4편)
「기술에 관한 질문(Die Frage nach der Technik (1953), La question de la technique」
「지식과 숙고(Wissenschaft und Besinnung (1953), Science et méditation」
「형이상학의 극복(Überwindung der Metaphysik (1936-1946), Dépassement de la métaphysique」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누구인가?(Wer ist Nietzsches Zarathustra? (1953), Qui est le Zarathoustra de Nietzsche?」
II부, (4편) [삶의 터전과 사물에 대한 사유 그리고 시(詩)]
「‘생각하다’는 무엇을 말하는가?(Was heißt Denken? 1952: Que veut dire penser?(1952)」
「집짓고, 거주하고 사유하다(Bauen Wohnen Denken, 1951: Bâtir, habiter, penser(1951)」
「사물(Das Ding, 1950), La chose (1950)」
「인간은 시적으로 산다("... dichterisch wohnet der Mensch ...", 1951: L'homme habite en poète… (1951)」
III부 . (3편)
「헤라클레이토스 단편 50의 로고스(Logos (Heraklit, Fragment 50, (1951) Logos (1951)」
「파르메니데스 단편 8의 모이라(Moira (Parmenides, Fragment VIII, 34-41) (1952) Moira (1951-52)」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 13의 진리/탈은폐(Aletheia (Heraklit, Fragment 16) (1954) Alèthéia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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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론집의 제2부의 글은 하이데거가 1950년에서 1952년 사이에 강의를 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주제를 보면 산다는 것 중에서 주거를 생각하는 것은 전쟁의 폐허에서 부흥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유럽 부흥 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 ERP) 또는 마셜 플랜(Marshall Plan)은 1948년부터 1951년까지 미국이 원조하여 서유럽을 부흥시켜 소비에트의 공산화를 방어하고자 한 원조 계획이었다. 영국(3,297만달러), 프랑스(2,296), 독일(1,448), 이탈리아(1,204), 네델란드(1,128), 벨기에와 룩셈부르크(777), 오스트리아(488)와 9개국을 더하여 17개국이다(소위 말하는 나토 가입국이다). 하이데거도 이런 부흥이 국제관계에서 무엇 때문인지 알았을 것이다.
삶의 터전으로서 땅에 대한 깊은 숙고(φρόνησις, “practical wisdom”)로 나아가,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앵글로색슨은 미국의 제국화에 보조를 맞출 수 밖에 없었으리라.
<1948년 3월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는 소련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브뤼셀 조약을 맺고 최초의 서유럽 군사동맹인 서유럽동맹(WEU)을 결성한다. 하지만 자유진영의 종주국 미국의 참여없이는 서유럽 공동방위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이듬해 미국과 캐나다를 포괄하는 서방진영 공동방위동맹인 나토를 출범시켰던 것이다. / 1967년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통합사령부로부터 탈퇴를 선언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 주둔 미군은 철수해야 했고 당시 파리에 있던 나토 본부도 부랴부랴 브뤼셀로 옮겨야 했다. 드골의 나토 탈퇴 이유는 “프랑스가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주성을 강화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최연구/국제관계학 박사: 한겨레21 1999 04 08, 제252호
왜 이런 글을 옮기느냐 하면,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독일이 제일 많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공급하는 측면을 나토측면에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2022년 프랑스 대선 1차 선거에서 22%을 얻어, 마크롱과 르펜 다음으로 3위를 한 쪽에서는 나토 반대를 했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세계사는 미국 또는 자본의 지배가 러시아와 중국을 포위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든 평화와 행복에는 자기보존으로 자치와 자주가 있을 때, 자유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평화통일영세~중립코리아. (55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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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4편) p. 3331.
이 잡문록의 둘째 부분은 ‘생각하다’는 것, 오늘날 사유의 운명과 임무에 관하여 절반의 철학적, 절반의 시적 성찰 주위에 둘러져 접속되어 있다. 이 부분은 하이데거에 있어서 항상 현실적이기도 하고 단호한 질문과 더불어 시작한다. 즉 「‘생각하다’는 무엇을 말하는가?(Was heißt Denken? 1952)」이다.
# 「‘생각하다’는 무엇을 말하는가?(Was heißt Denken? 1952: Que veut dire penser?」
[중세의 도그마 사유에서 벗어나, 망원경 덕분에 갈릴레이 이래로, 현실로 내려와 구체적 물체를 다루기 시작하여 증기기관, 모터를 다루고, 현미경 덕분에 세포 안에 그리고 화학의 발달 덕분에 분자의 개념과 원자의 개념을 정립하여 물체로서 단위를 미분화하여 갔다. 이런 노력들이 서구의 산업화를 가속화하였고, 기술 문명의 발달로 사람들은 삶의 사유하기보다 생활의 도구 발명과 이용에 치중하였다.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발견과 발명을 하는 쪽은 지성(이성, 논리)의 발달인데, 이에 대한 인간의 의식에 대한 사유는 밀려나 있었다. 하이데거는 ‘사유하다’(Denken, penser)를 깊이 생각했으리라. (55OLG)]
관심을 끌었던 독일어가 허용하는, 의외로[놀라운] 의미론적 접근 덕분에, 우리는 “생각하다에게 부여하는 제일의 것”(Denkenwürdigste, 덴켄뷔르디히스테)에 의하여 ‘생각하다’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배운다. 그 덴켄뷔르디히스테(가치있게 잘 사유하는 것)이란 정당하게도 우리가 세계 속에서 아직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 세계에서 아마도 “수세기 이래로, 인간은 너무 많이 행동하고 너무도 적게 사유했다”는 것이다.
개탄스럽게도 “사유의 부재”는, 인간에게 탓으로 돌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하다’에게 정당하게 부여한 것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리고 옛적부터 인간에 호소하면서 인간으로부터 우회했던(방향을 바꾸었던) 동일한 운동이라는 것으로부터 유래된다. 그러한 것이 “본질적 사건(l’événement, das Ereignis)”이다. 이것의 발현(l’émergence)은 서구의 시초에서부터, 그의 운명과 그의 역사에 대해 결정했다. 그때에 그 사건이 비의적(occulté)으로 또한 사유없이(impensé) 머물고 있을 지라도 말이다.
그 학문(la Science)은, 근대 인간이 학문에 대해 가장 잘 뽐내고 있을 지라도, 사유되지 않고 있다는 주장은 사유를 위한 변명의 파라독스들 중의 가장 적은 것이 아니다. 그때 저자가, “학문(과학)이 사유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기서 과학의 몫에 대한 연약함 또는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더 힘 있고 더 장점이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시 또는 신화와 같은 진실한 사유[생각]은, 즉 기원적 말들(le dit originaire: dis Sage, 이야기, 설화)은 “기억”(la mémoire,Gedächtnis)과 명상(le recueillement, das Andenken, 회상)이다. 우리는 아직 “고유한 양식으로(en mode propre)” 사유[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을 – 현전하고 있는 존재자의 존재가 그 무엇으로 응답하는데도 - 사유하지 않는 한에서 말이다.
- [사유한다가 인간의 고유한 양식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럼에도 그 사유가 자연(la Nature)의 한 양식일 것인데, 현존자가 표출(발현)하는 다양한 사건들이 기억과 추억들과 더불어 현전하는 사실들(faits)에 중첩되는 것이다. 이 사실들은 현실에서 삶과의 연관이 있다. 그럼에도 그 내용 또는 의미를 추구할 때,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을 신화나 비의에 의탁하려는 것은 그리스의 신탁에 의존하는 것과 닮았다. 근대를 넘어서 현대는 다양체의 발현에서 각각은 내적으로 리좀이 연결과 더불어 현실에서 선들[계열]들로 생산 또는 창조한다. 기술에 의한 문명의 과학이 할 수 있는 것과 달리, 문화의 다양성은 선들 사이에 이질성으로 되어 있어서 , 기술의 과정처럼 동일성 또는 동질성으로 풀어서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파라독스들이 무수히 많을 수 있다. 그 파라독스의 독해를 언어에서 찾는 것은 언어에 그 의미를 부여하거나 임의적으로 설정 또는 선가정하는 인간의 지성(속좁은 이성)의 오만일 뿐이다. (55OLG)
** 참조: “하이데거의 ‘발현’(Ereignis)론”
하이데거는 “시간”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과 “현존(l’existence)”에 대해서도 벩송을 죽 의식한 것 같다. 벩송의 창조적 진화(1907)에서, 현존은 자연의 자기 “발산”(divergence) 또는 “분출(Jaillissement)”이다. 발산에는 수렴이, 분출에는 확장이 있다. 하이데거가 논문 「형이상학의 극복(1936-1946)」과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철학에의 기여(1936-38)는 칸트의 형이상학 불가능성이래로, 독일의 상층철학이 이 불가능성을 넘어서려는 노력의 인 것으로 보인다. 상층을 넘어서 초월 또는 그 이상의 것으로 올라간다는 것은, 흄의 문화론에 비추어보면, 상상과 공상을 넘어서 망상과 착란으로 이르는 것이리라. 이런 초월과 넘어섬이 ‘전쟁의 철학’이라고 본 벩송의 진단이 돋보일 것이다. 어쩌면 하이데거는 벩송이 쓴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1932)을 곧이곧대로 초월적인 종교의 신비주의로 읽었을 수도 있다. 그는 벩송의 글을 도덕론과 공동체론(새로운 공산주의)으로 읽지 못하였다가, 전쟁이 끝나고 1950년 복직이 되고서야 칸트의 도덕형이상학이 아닌 니체의 새로운 도덕론(가치론)을 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누구인가?, 1953)」를 썼다. 아마도 우리가 보기에 “발현(Ereignis)”는 존재의 발현이 아니라 현존(실존)의 발현(생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55OMC)
<하이데거는 그의 ‘제2의 주저’로 평가되는 1936-38년의 논고 철학에의 기여(»Beiträgen zur Philosophie«, 1936-38)에서 ‘발현(Ereignis)’의 기본적인 연관들이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우리(이수정)는 하이데거가, ‘발현’을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사건’이나 ‘뉴스’와는 다른 뜻으로 이해한다는 것, ‘발현으로서의 존재’라는 표현을 통해 발현을 존재보다도 더욱 근원적인 어떤 현상으로 자리매김한다는 것, ‘발현’과 연관된 여러 표현들을 통해 그 미묘한 여러 국면들을 지시하고자 한다는 것, ‘발현’을 ‘본질’과 관련해서, ‘진리’와 관련해서, ‘현존재’와 관련해서, ‘귀속’과 관련해서, 심도있게 해명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밖에도 ‘거절’, ‘근거’, ‘심연’, ‘역사’ …등 그의 수많은 중요개념들과 연관지어서 다각도로 ‘발현’을 해명하고 있다는 것, 등을 알 수 있다.> - 이수정, “하이데거의 ‘발현’(Ereignis)론: 『철학에의 기여』를 중심으로, 2009”, 현대유럽철학연구. (55OLG)
# 「집짓고, 거주하고, 사유하다(Bauen, Wohnen, Denken, 1951: Bâtir, habiter, penser)」
[글이 1951년이라, 전쟁 이후에 쓰여졌다. 독일 조국이 폐허 위에서 옛 모습을 찾아가던 시기가 아닌가? 는 제목만으로도 요즘의 환경론자에 가깝다. 생태계를 제시하지 않는 것은 존재와 본질을 우선시하는 대부분의 상층 사고이기 때문이다. 삶의 터전을 생활의 수준의 높이로서 주택과 거주로 삼는 것은 후생, 이용, 편리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은 지자들이 환경의 조건을 탐색하는 쪽이 아니라, 현자가 자연 속에서 생태로서 살아가는 양식을 실천하는 것이다. (55OLI)]
사유의 문제가 겉으로 가장 산문적인 문제들 중의 한 문제와, 그리고 오늘날 이런 주거(住居)의 위기의 시대에 거주하는 인간의 세속적(terre à terre, 물질적) 문제와, 어떤 연관을 갖는가? 이러한 것이 「집짓고, 거주하고, 사유하다(1951)」라는 독특한 제목을 지닌 시론이 성찰하는 질문이다. 이 시론은, 집짓다와 거주하다는 이 둘 모두가 존재(être)[현존(l‘existence)와 동일한 것을 말하기를[의미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하여, 기원적인 말하기에서 입말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듣도록 한 번 더 우리를 초대한다: [시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늘 아래와 땅위에, 또한 죽는 자들 가운데와 신적인 자들 앞에서, 체류하는 차비를 갖춘다(s‘aménager)는 것이다. 특이한 성좌의 단순성으로 통합한 모든 네 가지를 하이데거는 게피르트(Geviert, 사분율, le Quadriparti)라는 기이한 단어로 지칭한다. 전쟁 다음날에 유럽을 놀라게 한 주거지(une habitation)의 진실한 위기는 인간의 뿌리뽑힘(déracinement)에 있고, 그 위기는 인간이 인간들의 땅위에 거주하기를 배우지 못했다는 – 또는 잊고 있었다는(désapprendre) - 것에 기인한다. (55OMC)
# 「사물(Das Ding, 1950)」 : en. the Thing = deu. das Ding – fr. la chose
[나로서는 딩(das Ding)이, 고대 이오니아학파의 휠레이며, 플라톤의 아페이론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이며, 중세의 물질이며, 스피노자에서 자연이며, 벩송에서 생명(영혼)이라 생각한다. 그 딩은 우주 속에, 자연 속에, 신체 속에, 두뇌 속에 작동할 수 있는데 이 4분율은 일직선 위에 네 등분도 아니고, 플라톤처럼 온 우주속에 축소된 겹겹으로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각각은 위상을 달리하며 자신과 함께 온세계(온우주)를 표현하고, 더 나아가 온세계를 변형, 변질, 변화를 담지하고 있다. 이 4분율이 땅위에 사는 현존자이며, 특이성을 지닌 개인이다. 우주와 함께 변화를 하고 소멸할 줄 아는 현존이 보살이라 할 수 있다. (55OMC)] .
「사물(Das Ding, 1950), La chose」이란 대수롭지 않은 제목의 시론은, 거리없는 무차별적이고 획일적인 공간에서 인간들의 안주(l’installation, 거주, 설치)에 관하여, 이번에는 가장 현실적인 것과 가장 평범한 것에 대한 겉보기 고찰들을 전개한다. [인간들은] 이를 감수해야 한다. 모든 거리를 폐기하는 소통의 놀라운 기술들이, 가장 천박한 사물들에 비하여, 진실한 “근접”을 인간들에게 재발견하게 하지 않는다. 이 천박한 사물들은, 과학적 인식이나 기술적 생산이라는 대상의 지위에 환원됨이 없이, 자신들의 사물 존재로서 유지한다.
과학적 분석보다 더 나은 것으로, 오래된 게르만 단어 띵(thing, 사물)은 딩(Ding)의 기원적 의미를 밝힌다. 사물(la chose)은 네 가지(les Quatre réunis)를 – 땅과 하늘, 신적인 것과 죽는 것- 그 자체 속에서 닮으면서 유지한다. 4분율(le Quadriparti) 거울 놀이는 “온세계(le Monde)”(Welt-Geviert, 사분세계) 라고 이름 지어진다. 온세계 즉 사분세계는 이론적 인식의 단순한 대상을 제외한 전체이다. 이 거울 놀이(le jeu de miroir)는, 작가 하나의 정식으로 환기시킬 때, 작가의 순수한 은유(métaphore)가 아니다[실재성이다]. 그의 정식이란, 그 정식의 본질 속에 당연한 것을 단어의 임의적 놀이로서 아무것도 아니다: [그 정식이란] “온세계는 세계로 배열되어 있다”(Le Monde s’ordonne en monde, Welt weltet) (55OMC)
# 「인간은 시적으로 산다("... dichterisch wohnet der Mensch ...", 1951: L'homme habite en poète… (1951)」
마찬 가지의 음색(tonalité)로, 1950년에 발언한 강의가 있는데, Hölderlin, 1770-1843)의 말년의 시에서 빌려온 「인간은 시적으로 산다("... dichterisch wohnet der Mensch ...", 1951)」이다. “장점으로 가득하며 시인으로, 인간은 땅 위에 산다”.
한 번 더 근대 인간의 ‘거주하다’의 문제에 접근하면서, 하이데거는 인간 조건의 역설에 관하여 진실로 성찰한다. 오늘날 모든 시가 그 인간 조건에 결함이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인간의 현존을 자기의 ‘거주하다(habiter)’로부터 그리고 진실한 “건축하다(bâtir집짓다)”로부터 생각한다면, - 시(詩)가 공통의 표상에 비추어서 이것들(거주하다와 집짓다)의 낯설고 불가사의한 척도를 제공하고, 찬란한 시적 말투의 의미를 제공한다. 작가가 찬양한 시(詩)라는 것은, 소위 말해서 땅 위에 인간적인 ‘거주하다’에 대한 근본적 잠재력(능력)이며, 시에게 건축술의 척도를 빌려주는 그것[능력]의 진실한 ‘집짓다’이다.
[하에데거는 인간이 먹고 사는 풍토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라기보다, 폐허 위에 다시 주거하고 건축하여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데 관심인 것 같다. 인민의 자급자족과 자치에서부터 사유한다면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 공동체의 상부상조로서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는 관심이 없었을까? 하이데거가 쟈리(Jarry, 1873–1907)를 잘 못 이해한 것은 단지 쟈리에게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발상과 창안이 있었다는 것 뿐이었을까. / 그럼에도 하이데거가 자국의 피폐한 토지(땅)에서 다시 살아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며, 백성에게 힘을 불어넣게 위해 자국의 시와 언어를 돋보이게 하려는 노력을 보면, 이런 생각은 하이데게의 애국자의 발로였을 것이다. (55OME)]
* 인명록**
1770 횔덜린(Friedrich Hölderlin, 1770-1843), 독일의 시인, 소설 《히페리온》, 미완성 비극 《엠페도클레스》, 시 <하이델베르크>, <라인강>, <다도해>, <빵과 포도주> 등이 있다.
1889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독일 철학자.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1927)(이기상 번역, 까치 / 소광희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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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윤병렬(尹炳熱, 1954-) 홍익대 초빙교수, <Der Wandel des Wahrheitsverstaendnisses im Denken Heideggers, 1996, Rheinischen Friedrich - Wilhelms - University Bonn, Gerhart Schmidt.>
1958 노희직(1958-) 외대 독문학과 강사, 독일 시 전공 <Expressionismus als Durchbruch zur aesthetischen Moderne. Dichtung und Wirklichkeit in der expressionistischen Grossstadtlyrik Georg Heyms und Georg Trakls(미적 근대로의 발현으로서의 표현주의. 게오르크 하임과 게오르크 트라클의 대도시에서의 시와 현실), 2001, Eberhard - Karls - Univ. Tuebingen. Juergen Schroeder.> “하이데거의 횔덜린 해석, 2005, 외국문학연구 제19호.>
1960 신상희(申尙憙, 1960-) 건국대 학사, 독일 박사. 하이데거 전공 <Wahrheitsfrage und Kehre bei M. Heidegger(하이데거의 진리물음과 전회) 1992, Albert-Ludwigs Univ. Freiburg, 프리드리히 폰 헤르만.>
1975 조홍준(趙洪浚, 1975-) 동아대 교수. <Zwiespalt der zeit und Zweiheit der Zeitlichkeit: Betrachtung von Aristoteles' und Heideggers Beantwortungen der Frage nach dem Sein der Zeit(시간의 분열과 시간성의 이원: 시간 존재 물음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와 하이데거의 응답에 대한 고찰), 2017, Albert-Ludwigs Freiburg Univ. Wilhelm Metz.>
1976 박현정(朴賢貞, 1976-) 서울대 강사 <하이데거 존재 사유에서 유한성의 문제, 2012, 서울대, 박찬국.>
(6:30, 55OME)
# 덧글 **
「집짓고, 거주하고, 사유하다(Bauen, Wohnen, Denken, 1951)」의 변이(變異)
아파트를 높이 올리는 시대는 이번 대장동 사건으로 마감할 것 같다. 윤석열이 이를 파헤치든 파헤치지 않던, 높이 올리면서 공공 이익이 누구의 것이 되었는가는 자산 불평등이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부동산 가격을 끊임없는 상승에는 강남이 있다는 것도 잘 알게 되었다. 강남 3구는 전라도 전체보다 투표수가 많으며, 이 강남 3구가 90%로 윤석열을 지지했다. 집을 짓고, 거주하고, 사유하다는 문명사적, 기계론적 사고의 한계가, 노동 수입에 의한 불평등과 전혀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인민의 삶에 대한 사유는 허무주의의 극복이 아니라, 불평등에 대한 준안정 상태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건강에서 좋고 나쁨이나 도덕은 선악도은 현존 속에 양자가 복합적으로 있음에도 준안정상태를 유지하는 조화를 찾는 길일 것이다. 코로나19의 생태계가 보여준 사실이기도 한다.
[자본의 제국화: 이스라엘이 자본과 핵무기를 가지고, 공공연하게 팔레스타인 인들에게 질서라는 이름으로 무력을 행사하며 펠레스타인 영토 거의 90% 통치하에 두고 있다고 외신들은 전한다. 유사하게 미국이 자본과 핵무기의 우월로 동유럽에서 동진하여 러시아를 압박하고, 다른 한편 중국을 포위하려는 전략을 구사한다. 미국이 중국을 제외하고 모든 지역에서 에너지(석탄, 석유, 천연가스)를 지배하면서, 달러 본위제를 세계화하려고 한다. 21세기 패권은 금융의 단일체제(un régime)일 것이다. - 우크라이나 폐허 위에 독일과 더불어 동유럽의 나토화(미제국화)의 길을 가속화할 것이다. 전쟁비용으로 러시아가 전쟁이 끝나더라도 천연가를 값싸게 동유럽에 공급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 미국의 전략인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직접 군대를 파견하지 않지만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속국이 될 정도의 완전 패배를 막으면서, 전쟁을 지연하며 독일 등을 앞세워서(동아시아에서 일본을 앞세우듯이) 우크라이나를 폐허에 가깝게 만들면, 우크라이나 인민들과 농업생산을 값싸게 동구로 보내 러시아에 대항할 전선을 동유럽만으로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예전에 독일을 경계로 구축한 전략 전선에 비해 훨씬 동쪽으로 이동한 것이 되리라. 미국이 보기에는 이스라엘의 안전망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긴다. - 자본 제국은 값싼 노동력을 하부에 두는 것인데, 우선 러시아 인민을 그리고 다음으로 중국인민을 하부생산지로 복속시킬 것이다. 인도가 문제일 것이다. 미국은 지금은 파키스탄을 인도의 체제 복속의 도구로 삼을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인도 공략을 위한 새로운 시도는 영국을 통로로 하여 남아공화국과 오스트레일리아를 통해서 시행할 것으로 보이는데, 에너지 자원이 아닌 인민의 노동력이라는 문제는 자본의 확장에 난제를 안길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인도와 중국의 상호호혜의 경계를 그을 것이다. 자본 제국의 다음과제 일 것이다. - 반도의 고착화는 중국이 버티는 한에서 이다. 둘 사이에 비례의 불균형이 세계사적으로 드러날 때, 통일은 갑자기 올 수 있다. 우리 자주와 자립으로 길은 인민의 교감과 공감에서 찾아야 할 것이며, 그리고 공동체를 창안하는 합의와 계약을 다시 해야 할 것이다. 문재인대통령 시절에 우리들 속에서 합의와 계약을 하려했던 노력은 소중했다. (55O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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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세계 안에 거주함: 자연친화적 삶의 방식에 대한 모색
Das Wohnen im Weltgevierte Heideggers
신상희, 철학과 현상학 연구 제29집 2006. 61 - 87 (27 pages)
[초록] 논자는 이 글에서 현대인의 고향상실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 거주함의 본질의미에 대해 숙고해보고자 시도한다. 거주한다는 것은 단순히 숙식 문제의 해결이나 주택의 소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이 이 땅 위에서 죽을 자들로서 거주한다는 것은, 인간이 땅과 하늘, 신적인 것들과 죽을 자들, 이 넷이 하나로 포개져 펼쳐지는 사방세계 안에서 탈자적-개방적-상생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거주함의 근본특성은 소중히 보살핌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가 그 안에 존재하는 사방세계를 그것의 본질 속으로 소중히 보살피는 탈자적 방식으로 거주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사방세계 안에 거주한다는 것은 사중적 방식을 갖는다. 즉 죽을 자들은 땅을 구원하고, 하늘을 하늘로서 받아들이고, 신적인 것들을 신적인 것들로서 기다리며, 죽을 자들을 인도하는 한에서 인간답게 거주한다. 이에 논자는 먼저 죽을 자들이 사방세계 안에 거주하는 사중적 방식들 각각에 대해 순차적으로 살펴보는 가운데, 이 넷이 하나로 포개지는 근원적 통일성으로부터 세계가 세계화하는 전일적인 현상방식에 대해 사유한다. 그런데 사방 세계의 사중적 보살핌으로서의 거주함의 본질적 의미는 사방세계의 네 방역들을 자기 안에 모아들이며 사물화하는 그런 사물들 곁에 체류함으로써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이런 점에서 논자는 사물들 곁에 체류하며 사방세계 안에 거주하는 것이 야말로 거주함의 본질차원에로 귀속해 들어가는 것이며, 이런 자연친화적인 삶의 방식을 통해서 오늘날 고향을 상실한 현대인들은 비로소 자신의 망각된 고유한 본질을 회복하는 동시에 시원적인 삶의 밑바탕에로 귀환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55OM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