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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들과 강연들 (Essais et conferences(Vorträg und Aufsätze) 1954
켈켈(1927-2015), in Les Oeuvres II, Dictionnaire, PUF, 1992, p. 3330-3332(P.4616)
- 켈켈(Arion Lothar Kelkel, 1927-2015) 프랑스 철학자, 하이데거 전문가.
하이데거가 그리스철학을 다루는 관점이 이오니아학파에서 엘레아학파 사이에 연속성이 있는 것으로 읽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지리적으로 중간에 있었던 아테네를 중심으로 소크라테스이전의 철학과 그 이후의 철학의 구분과 다른 점이 있다. 아마도 하이데거는 이런 소크라테스이전 철학에서 진리와 의미, 그리고 언어와 존재에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앵글로색슨의 전통에서 의미론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가 브렌타노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른 존재 수용의 다양성에 대하여(De la diversité des acceptions de l'être d'après Aristote (1862)」와 후설의 논리 탐구(Logische Untersuchungen)(1900-1901)에서부터 존재와 논리 연관을 다루었던 것이 아닐까? 그가 존재, 논리, 언어에 연결성에 관심을 가진 것은 ‘진리’라는 개념 설정에 있을 것 같다. 소크라테스가 ‘이뭣꼬’를 다루는 것과는 다른 관점으로 보인다.
나로서는 그리스 고대철학의 이중 양태를 말해야 할 것 같다. 존재는 언어와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우선 존재가 철학사적으로 이중성이 있다. ‘이다’와 ‘있다’. 그리고 자연은 ‘이다’와 ‘있다’에서, 전자에서는 의미론에, 후자에서는 기호론에 가깝다. 더구나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자연(천체와 지구)을 수동적이라고 보는 측면에서는 자연이 도구와 유용성인데 비해, 자연이 자발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이유(raison)이며 분화에 가깝다. 도구의 철학과 이유의 철학은 전혀 다른 경향성과 의향을 지닌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전례적으로 유불선의 합일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보면 이유의 철학이 훨씬 근접했던 것 같은데, 일제와 미제의 영향으로 앵글로색슨철학이 지배하면서 유용성과 실용성을 주목하였던 것이다. 이 영향으로 영미철학의 분석철학과 독일철학의 존재론(본질론)의 철학은 제국의 식민지개척에서 전위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인간의 의식 속에 깊이 흐르고 있었던 기원과 원인에 대한 사유를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이다. 자연의 기호에 대해 탐색하고 탐구하는 실증과학들 각각과 더불어, 그리스 사유에서 플라톤의 주장인 조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접근할 수 있도록, 소은 박홍규가 길을 열어 놓았다는 것은 우리의 행복일 것이다. 그리고 소은 선생은 벩송도 발굴해 냈는데, 들뢰즈가 벩송을 발견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고 중요하다. 전자는 불모의 땅에서 싹과 줄기 넝쿨을 키웠고, 후자는 서양철학이라는 거대한 나무가 시들할 때 생명력을 불어넣고 다양한 학문들로 거름을 주었던 것 같다.
기호론이 백에 70정도 토대가 되고, 새로운 의미를 다루는 것은 10정도가 되면 괜찮을 것이다. 나머지 20정도는 그런 의미를 다루었던 우리 금수강산 속에서 흩어져 있는 이야기들을 길어 올리고, 서로를 엮고 또한 새로이 창안하는 것이다. 그 창안이 70정도의 토대와 흐름과 이어지면서 지속의 드라마를 이제도 아제도 만들어갈 것이다. (55PK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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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들과 시론들(Vorträge und Aufsätze, Essais et conférences 1954)(1936-1953 소품들)(trad. André Préau, préf. Jean Beaufret), Paris, Gallimard, coll. « Tel » (no 52) (1re éd. 1958) - 전집 7권에 포함되어 있다.
I. 부 (4편) [근대성과 형이상학]
「기술에 관한 질문(Die Frage nach der Technik (1953), La question de la technique」
「지식과 숙고(Wissenschaft und Besinnung (1953), Science et méditation」
「형이상학의 극복(Überwindung der Metaphysik (1936-1946), Dépassement de la métaphysique」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누구인가?(Wer ist Nietzsches Zarathustra? (1953), Qui est le Zarathoustra de Nietzsche?」
II. 부 (4편) [삶의 터전에서 사유]
「‘생각하다’는 무엇을 말하는가?(Was heißt Denken? 1952: Que veut dire penser?(1952)」
「집짓고, 거주하고 사유하다(Bauen Wohnen Denken, 1951: Bâtir, habiter, penser(1951)」
「사물(Das Ding, 1950), La chose (1950)」
「인간은 시적으로 산다("... dichterisch wohnet der Mensch ...", 1951: L'homme habite en poète… (1951)」
III. (3편)
「헤라클레이토스 단편 50의 로고스(Logos (Heraklit, Fragment 50, (1951) Logos (1951)」
「파르메니데스 단편 8의 모이라(Moira (Parmenides, Fragment VIII, 34-41) (1952) Moira (1951-52)」
「헤라클레이토스 단편 16의 진리/탈은폐(Aletheia (Heraklit, Fragment 16) (1954) / Alèthéia (1943 강의의 연속)」
*** III 부, 3편에 대한 해제들 *** pp.3331-3332
* 「헤라클레이토스 단편 50의 로고스(Logos: Heraklit, Fragment 50, (1951) Logos」
[λόγος(로고스) <(단편 50) 나에게서 듣지 않고 로고스에게서 듣고 로고스에 따르면서, 모든 것은 하나라고 하는 것이야말로 현명하다. οὐκ ἐμοῦ, ἀλλὰ τοῦ λόγου ἀκούσαντας ὁμολογεῖν σοφόν ἐστιν ἓν πάντα εἶναι.> - 신남철 역: 50. 내가 하는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말의 법칙(로고스)을 들어서 만유는 하나라는 것을 아는 것은 지혜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 만물은 흐른다(Πάντα ῥεῖ)는 이 명제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들(126개 단편들) 속에는 없다. 후대 사람들이 그의 사상을 설명하기 위한 언술일 것이다.]
강연들과 시론들(1954)의 마지막 3편은 보다 역사적인 보조(une allure, 방식)에 맞추어 쓰여진 것이며,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초기 그리스적 사유의 보호막 아래 위치하는 것이다. 이 세 편은 이 두 철학자들의 근본적 몇몇 말투들(paroles)을 – 서구 사상를 끊임없이 지배해왔던 말투들을 - 성찰하는 것이다. 이 세편 중에서 첫째 편은 로고스(λόγος)라는 제목이 붙어있고, 1951년 강의이며, 1944년 논리학에 관한 한 강의에서 이미 전개했던 주제를 다시 다룬다(이제부터, GA, t. 55).
헤라클레이토스의 말투의 인도를 따르면서(frg. 50), 하이데거는 말투와 언어의 본질적 존재에 관하여 질문한다. 그리고 한 번 더 (그리스어, 라틴어, 게르만어) 입말의 초기 단어들이 그에게 가르쳐준 것에 근거하면서, 그는 의미론적 그물망 속에 λόγος(로고스)를 본래 자리로 차지하게 한다. 의미론적 그물망에서 그리스어 레게인(legein말하다), 라틴어 레게레(legere, 읽다), 독일어 레겐(legen, 두다, 놓다])과 독일어 레젠(lesen, 읽다, 알다, 깨닫다)이, - 이 단어들의 기원적 의미를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 - 서로 연결되어 있다. 로고스(Lόγος)는 일체 통 털어서 전설이자 신화이며, 존재의 은폐이자 폭로이며, 간단히 알레테이아(ἀλήθεια)이며, 그런데 서양에서 지배적인 된 개념작업에는 반대이다.서양의 지배적 개념작업이란 알레테이아를 그 단어 음성학적 현상 또는 그 단어의 의미론적 본질로 환원[축소] 시켰다. 언어의 존재는 존재(l’être: Sein) 그 자체의 본질적 생김(l’advenir, Wesen)이다. ‘말하다(le parler)’는 것은 발성작용(la phonation)의 작동으로 환원되지도 않으며 청각 기관의 연습으로 그것을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말하다는 것)은 “수집하는(recueillir, 집중하다)” 양식이며, 또한 청취에(à l’écoute, hören) 속하는 양식이기도 하고, 결국에서 로고스(λόγος)의 목소리에 의해 말로(se dit, 소문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에 속하는(appartenir, gehören) 양식이다. (55OMH)
[[첨: 로고스가 알레테이아와 같은 개념인데, 논리학적 개념을 착각하고 있다고 하이데거는 여긴다. 그렇게 용어를 사용하는 문화가 문제거리일 것이다.
로고스 개념이 헤라클레이토스에서는 존재의 계시 또는 표시에 해당하는데,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이래로 개념작업으로 전환되었을 것이라 한다. 그런데 이오니아학파에서 존재의 자기 생성과 엘레아학파에서 존재의 부동 사이에서 아테네는 생성과 변화를 자연 쪽으로, 부동과 개념쪽을 지성으로 구별하면서, 철학사의 이분법적 구조, 또는 하늘과 땅의 대응적이고 상응적인 관계를 만들었을 것이다. 이 시기가 알렉산드라학파 시대이며, 심층과 상층의 구별이 분명해 질 것이다. - 이 시기 사이에 완전히 디아스포라 된 유대인이 가상의 왕국, 불멸과 부동의 천국을 세우는데 어떤 이론을 토대로 할 것인가에서 뇌피셜처럼 부활을 내세웠다. - 21세기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몰아내고 현실적 제국을 세우는 것은 상층이 심층을 무력과 위협을 국가를 세울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마치 나치와 파쇼가 인민을 위협하고 위험에 빠지게 하면서도 국가주의가 성립했듯이, 상층철학이다.
현재 제국은 자본에 의해 상층이 성립하였는데 하부가 명령에 따라 움직이지 않기에, 20세기 후반에 내내 명령을 따르라는 전쟁을 해왔다. 자원을 차지하고는 빠져나오는 길을 택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러시아의 천연가스와 중국의 값싼 노동력이다. 이 자본제국은 이 두 가지를 차지하려 할 것이고, 그때서야 예루살렘의 ‘알아크사 모스크’를 무너뜨리고, 유대의 성전을 세울 것이다. 상층의 명령이 위협과 전쟁이라고 벩송이 설파하였는데, 유대민족 세계사에서 이런 사고방식으로 나아가는 것은 우려스럽다기보다 위험하다.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가졌기 때문에 보존될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 핵무기가 평화의 수단도 평화유지의 방법도 아니라는 것은 기술 문명이 조금만 더 발달하면 알게 될 것이다.
자본제국에 포로 된 미국, 일본, 우리 극우의 환타지는 착각을 넘어서 망상이라 할 수 있다. 윤정부는 일본에 포획되어서, 은연중에 제국에 투항한 일본에 복속되는 되는 길로 가고 있나니. - 바이든이 거의 한달 후 5월 20일부터 5월 22일 방한할 예정이란다. (55OMH)]]
*「파르메니데스 단편 8의 모이라(Moira (Parmenides, Fragment VIII, 34-41) (1952) Moira (1951-52)」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Fragment VIII, 34-41 - 심플리키오스 (DK28B8)
- 단편8, 34-41. <왜냐하면 결핍된 것이 아니며, 만일 결핍된 것이라면 그것은 모든 것이 결핍된 것일 테니까. 같은 것은 사유되기 위해 있고 또 그것에 의해 사유가 있다. [35] 왜냐하면 있는 것 없이 ([사유가] 표현된 한에서는 그것에 의존하는데) 그대는 사유함을 찾지 못할 것이기에, 왜냐하면 있는 것밖에 다른 아무 것도 있거나 있게 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왜냐하면 모이라(운명[Moira])가 바로 이것을 온전하고 부동의 것이게끔 속박하였기에 그러하다. 이것에 대해 모든 이름들이 붙여져 왔다, 가사자[(可死者)]들이 참되다고 확신하고서 놓은 모든 이름들이, [40] 즉 생겨나고 있음과 소멸되어감, 있음과 있지 않음, 그리고 장소를 바꿈과 밝은 색깔을 맞바꿈 등이.그러나 맨 바깥에 한계가 있기에 그것은 완결된 것, 모든 방면으로부터 잘 둥글려진 공의 덩어리와 흡사하며, 중앙으로부터 모든 곳으로 똑같이 뻗어나와 있는(isopales) 것이다.> ]]
「모이라(Μοῖρα)」라는 제목의 시론은 1952년 「‘생각하다’는 무엇을 말하는가?(Was heißt Denken?1952)」의 강의에서 나온 구절을 다시 다루면서, 하이데거는 “존재이다(être)와 사유하다(penser)”에 관하여, 서양형이상학의 핵심적 문제들 중의 하나를 새로이 성찰(숙고)한다. to gar auto noein estin te kai einai (τὸ γὰρ αὐτὸ νοεῖν ἐστίν τε καὶ εἶναι. “car le même sont penser et être, 왜냐하면 존재이다와 사유하다는 동일하기 때문이다)라는 파르메니데스의 유명한 말로부터 시작하여, 하이데거는 이해하기를 사유의 주동자들(les initiateurs, 발상자들)과 진실한 대화는 끝없는 하나의 대화이라고 제시한다. 그런데 그 하나의 대화는, 진실한 대화가 우리 자신의 것[삶의 터전]이라는 그 터전(lieu, 장소)로부터 나왔다는, 조건에서만 풍부해질 기회를 갖는다. 우리 자신의 터전이란 예전의 사유된 것에 열려져 있기 때문이고, 또한 생각해야하는 호소를 맞이하기 때문이다.
만일 근대인들이 존재(l’esse)를 지각된 것(le percipi)에 환원하면서, 존재(l’être)를 사유(la pensée, 생각된 것)에 복종시켰다면, 반면에 파르메니데스는 우리에게 ‘생각하다’가 ‘존재하다’와 공통-자연적(connaturel)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면서, 생각된 것(la pensée)을 있다(l’être)에 위탁하였다. 초기의[입문적인] 그리스 사유에서 묘사된 관점들(les perspectives, 전망들)의 각각은 근대 형이상학에서 재론되고 변신되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근대 형이상학은 이렇게 각각이 자기의 기원에서부터 운명이고 베풀기(dispensation, 분배하기)이였다는 것을, 즉 존재의 역사(histoire de l’être) 또는 존재와 존재자의 접힘(le pli, 주름)의 역사였다는 것을 완수할 것이다. (55PKB) [접혀서 마주보게 된다면, 대응일 것이고, 둘 사이가 별개이면서도 마주보면 이원론과 평행론일 것이다. 서양에서 왜 인간은 하늘과 땅의 문제를 영혼과 신체의 문제에서 투사법(le perspectif)처럼 생각했을까? 근대에까지 ‘안다’는 문제가 체계를 갖는다고 생각하기에는 어딘가 모자람과 난제(apori)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현대에도 자연과 인간에 대해 안다는 것은 한정된 범위 안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우주 전부는 안다 또는 인간 자신을 안다는 아직 요원하다고 해야 하나...]
*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 16의 진리/탈은폐(Aletheia, (Heraklit, Fragment 16) (1943강의, 1954)
[[Aletheia, ἀλήθεια, <헤라클레이토스 단편(16) τὸ μὴ δῦνόν ποτε πῶς ἄν τις λάθοι; -신남철 역: 16. 어떻게 하면 사람은 소멸하지 않는 것의 앞에서 숨어서 살아남아 있을 수가 있을가!. ★ 모든 것은 흐른다는 그의 사상으로부터 생각하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 단편이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헤라클레이토스 단편(123) φύσις κρύπτεσθαι φιλεῖ. - 신남철 역, 123. 자연은 은닉하기를 좋아한다.>]]
이 잡문집의 마지막 시론은 진리/탈은폐(Aletheia, ἀλήθεια)라는 제목 하에서, 하이데거에 따르면 소위 모호한 인물(l’Obscur)인 헤라클레이토스에 관해 1943년 강의(GA, t, 55)의 발췌를 다시 다룬다.왜냐하면 그가 밝혀진 것과 밝히는 것을, 즉 정확히 말하면 진리(Aletheia, ἀλήθεια)를 향하여 의문을 제기하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 단편 16과 123을 상기하면서, 하이데거는 한 번 더 사유의 핵심 개념에로, 즉 진리(la vérité)로 되돌아온다. 그 진리를 지칭하기 위한 고대 그리스 단어, 즉 알레테이아(ἀλήθεια)는 폭로하는 것인데, - 사람들이 그 단어 자체를 상세히 검토한다면, - 진리(알레테이아)란 사유의 확실성도 실재에 부합하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출현(émergence)”처럼 생각된 자연(φύσις)과 보다 내밀한 연관이 있다는 것이고, 알레테이아는 이것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런 연관은 너울을 벗기는 것과 동시에 너울을 씌우는 것이며, 헤라클레이토스의 말투에 의해 - ‛Η φύσις κρύπτεσθαι φιλεῖ(자연은 스스로 감추기를 좋아한다: 123) - 암시된 의미에 따르면 숨기(l’abri, 은닉)에서 벗어나기와 동시에 숨기(은닉)하기 이다. (5:09, 55PK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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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0 헤라클레이토스(Hrakleitos, Ἡράκλειτος 전540경-) 그리스 철학자. 에페소스의 왕가 출신. 불이 만물의 근원. 만물은 변화하고 멎지 않는다. <모든 것은 흐른다>
540-450 파르메니데스(Parménide, Παρμενίδης, 기원전 540-450) 존재가 있다(L'Etre est) / fr.Wiki 520/510 - vers 450/448[2]. [소크라테스 20살에 파르메니데스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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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강연과 논문(이기상, 신상희, 박찬국 옮김, 이학사, 2008, P.508) 이 책 속에, 이기상의 「현대 기술의 본질: 도발과 닦달」, 신상희의 사방세계 안에 거주함, 박찬국의 하이데거와 니힐리즘의 극복.
1954 서정욱(徐正旭, 1954), 배재대학 심리상담 교수, <logic and metaphysik of knowledge[인지논리학과 인지형이상학], Ruprecht-Karls Univ. Heidelberg, 1993. Reiner Wiehl>, 「헤라클레이토스에 있어서 자연법과 로고스의 문제(A Study on the Nomos and Logos in Heraclitus), 2002」(대동철학: 대동철학회, 2002)
1955 이종희(李鍾熙, 1955-) 광주카톨릭대, 신학전공, <[미기재] 오스트리아, Leopold- Franzens Universitaet Innsbruck,> “아르케에 관한 자연철학자들의 이해”(신학전망, 1994).
1960 박찬국(朴贊國, 1960-) 서울대 교수. <Die seinsgeschichtliche Ubersindung des Nihilismus im Denken Heideggers, 1993, Bayerische - Julius - Maximilian Univ. Wuerzburg Heinrich Rombach>, 「모이라(Moira: 운명): 파르메니데스 단편 Ⅷ, 34-41, 2002」(존재론연구, pp. 341-374)
1960 신상희(申尙憙, 1960-) 건국대 학사, 독일 박사. 하이데거 전공 <Wahrheitsfrage und Kehre bei M. Heidegger(하이데거의 진리물음과 전회) 1992, Albert-Ludwigs Univ. Freiburg, 프리드리히 폰 헤르만.>
1964 서동은(1964-) 경희대교수, “M. 하이데거의 있음(존재) 이해: <형이상학 입문>을 중심으로”, 대동철학회: 대동철학 제50호, 2010, 185-212 (28 pages): “und”를 다룬다. /
1966 이서규(1966-) 제주대 교수, <Existenz und Ereignis. Eine Untersuchung zur Entwicklung der Philosophie Heideggers(하이데거의 실존과 생기사상), 1999, Bayerische - Julius - Maximilian Univ. Wuerzburg, K.-H. Lembeck.> 「하이데거에서의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대한 고찰, 2002」(철학논총: 새한철학회)
(6:23, 55PKD) (6:33, 55PKE)
참조: *** “시간관념의 역사”에서
# 누스(νοῦς)와 로고스(λόγος)
누스는 아낙시만드로스가 기계적으로 쓴데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이 있다.
스토아에서, λόγος ἐν σπέρματι(로고스 엔 스페르마티), 즉 생성적 근거(la raison)
Noûs fr.wiki : Le noûs (νοῦς) est, en philosophie et dans l’Antiquité grecque, l'esprit, la raison, l'intellect. Cette notion, introduite pour la première fois dans un système cosmologique par Anaxagore de Clazomènes, au milieu du ve siècle av. J.-C., a été enrichie et profondément renouvelée chez Platon, Aristote et Plotin. Par la suite, cette notion a connu une fortune et un développement considérables dans les domaines de l’éthique, de la gnoséologie, de la noétique, et en particulier dans l'histoire de la métaphysique. À travers Plotin, elle a inspiré saint Augustin, elle est reprise par saint Thomas d'Aquin qui en fait l’Intelligence ordonnatrice du monde, et devient une source d’inspiration pour les Pères de l'Église. Dans la philosophie moderne, elle sous-tend le courant idéaliste, particulièrement chez Hegel qui affirme s'inscrire dans cette tradition en citant Anaxagore dans ses Leçons sur la philosophie de l'histoire : « Le Grec Anaxagore a dit le premier que le Noûs, l'Intelligence en général, ou la Raison, gouverne le monde. » Hegel reprend notamment l’idée d’Aristote selon laquelle « le penser et ce qui est pensé ne font qu’un », affirmation dans laquelle il voit « le moment principal de la philosophie aristotélicienne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