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정보 – 문지방 신앙 12월호 원고
우리가 신앙 교리보다는 마음의 평화를 먼저 찾는 이유는?
송용민 신부
(인천교구 삼산동 주임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한국 사회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종교들이 혼재되어 있어도 종교 간의 갈등이 서구 유럽에서처럼 이념적 투쟁에 이르는 심각하고 광범위한 현상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한국의 전통 종교인 유불선(儒佛仙), 즉 유교, 불교, 도교의 전통이 고대로부터 생생하게 살아서 한국인의 마음에 살아 있고, 이들 종교들 간의 상호 습합과 공존의 전통을 지켜온 이유도 있다. 가령 도교전통이 한국 무교(巫敎)와 습합하여 불교에 영향을 준 점이나, 불교가 민간신앙의 전통들을 습합한 점들, 그리고 유교적 질서에도 불구하고 무당을 중심으로 한 무교의 정신이 서민들과 궁중 여인들 사이에서는 종교로서 강력한 기능을 발휘했다는 점들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그런데 이들 전통 종교들은 한결 같이 한국인의 마음에 깊이 새겨진 종교적 갈망을 채워주는 종교적 기능에 충실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도교는 인간이 세상에 살면서 신선(神仙)의 세계를 갈망하며 복잡한 세상을 넘어 있는 영의 세계에 대한 갈망을 채워주었고, 불교는 한민족이 역사 속에서 수없이 겪었던 삶의 모순과 고통의 현실을 수행과 참선을 통하여 초월할 수 있는 해탈의 길을 보여주었다. 유교는 사회적 윤리질서를 지키는 것이 곧 하늘의 뜻이라는 윤리적 삶의 본질을 일깨워주었다. 이 가운데에서 한국인의 종교 심성을 가장 기층적으로 지배해온 것은 이른바 ‘무(巫)’의 정신이다. 흔히 ‘무속(巫俗)’, 무당(巫堂)으로 지칭되는 한국 무교(巫敎)의 정신은 보편적인 샤머니즘의 세계와는 다른 한국인의 독특한 종교심성을 형성해온 것으로 많은 학자들은 보고 있다. 한국인의 신앙 감각을 연구해온 필자로서도 한국 무(巫)의 정신이 오늘날의 우리의 종교적 심성을 형성하는 기층적 역할을 해왔음을 지적한 바 있다.
한국 무(巫)의 정신은 인간의 고통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면서 현실의 삶의 모순을 극복해보려는 강력한 종교적 기능을 발휘해왔다. 특히 한국인의 마음에 맺혀진 이른바 ‘한(恨)’이라고 불리는 공통된 삶의 모순 체험을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감성적으로 풀어내려는 종교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인간 삶에서 겪게 되는 병과 죽음의 문제, 미움과 질투, 오해와 시기 등을 통해 벌어지는 관계의 단절과 상처, 피할 수 없는 현실의 벽 앞에서 통곡하지도 못하고 가슴속에 맺혀 버린 수많은 삶의 문제가 가슴에 맺혀서 생긴 ‘한(恨)’을 풀고, 현실에서 ‘복(福)’을 누리고자 하는 한국인의 종교심성의 뿌리가 된 셈이다.
이런 한국 무의 정신은 그리스도교가 들어오기 이전까지는 전통 종교인 불교 정신에 유입되어 불쌍한 중생들을 위해 공덕을 나눠주는 ‘보살’들에 대한 신앙이나 민간신앙의 신령들에 대한 대중신앙으로 명맥을 유지해왔다. 비록 조선시대에 유교정책으로 인해 불교가 탄압을 받고, 무당들이 백성들을 미혹으로 이끈다고 해서 금지되기도 했지만, 유교가 풀어주지 못하는 인간 삶의 문제에 대해 한국 무교는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한국인의 종교심성을 이끌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인의 종교심성을 이끌고 있는 무의 정신을 학자들은 크게 두 가지로 이해한다.
첫째는 하늘을 향한 인간의 초월적 심성인데, 그것은 늘 세상에 살면서도 하늘이 상징하는 신령들의 세계를 동경하면서 그들의 초월적 힘을 빌려 세상의 문제들을 풀어보려는 의지이다. 무당들이 섬기는 다양한 신들은 대부분 세상에서 한을 품고 살다고 떠난 위인들이거나 신성을 지닌 신령들이라 인간들의 삶에 다양한 형태로 영향을 미친다고 믿어진다. 그래서 세상의 모순은 그런 신성을 어지럽게 만든 인간의 탓에 있기에 그들을 위로하고 빌면 인간의 잘못을 용서하고 세속적 어려움을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무당이 스스로 무병(無病)을 앓고 신내림을 받아 굿판에서 벌이는 화해와 치유의 역할은 스스로 한(恨)을 몸에 담아 사람들의 한(恨)을 읽어주고 신에게 그런 한(恨)의 원인을 고해서 풀어달라는 한(恨)의 사제적 기능을 하는 셈이다.
둘째는 모든 관계에서 생기는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상생과 조화의 심성이다. 한국인은 본성적으로 자기 주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아를 형성해주는 타자와의 관계를 중요시 여긴다. 나는 언제나 나 아닌 ‘너’라는 존재와의 관계에서 규정되기 때문에 가족과 이웃, 사회적 연결망에서 살아가는 지혜를 중요시 여긴다. 모든 삶의 문제는 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사회악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관계를 단절시키는 액운들을 쫓아내고, 이성이 아닌 감성의 영역에서 문제들을 풀어내려는 성향을 갖고 있다. 한마디로 진리에 대한 탐구보다는 관계의 회복과 흔히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표현처럼 합리적이지는 않지만 원만한 관계의 회복을 위해 감성적인 화해와 치유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무교의 정신은 오늘날 대부분의 종교인들 마음속에 자리 잡고 각자의 종교적 삶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첫째는 한국인의 종교 심성에는 어떤 특정한 교리나 종교적 진리에 대한 관심과 열정보다는 마음에 맺힌 한을 풀어주는 실천적 지침들에 대한 더 큰 갈망이 들어있다. 한국인들이 종교를 선택하는 이유를 보면 대개 어떤 특정한 교리나 종교적 가르침에 대한 지식보다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혹은 ‘영적인 도움을 받기 위해서’ 종교를 찾는 것이 대부분이다. 지적인 영역은 종교의 본질이라기보다는 종교를 이해하는 영역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종교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교리의 내용보다는 그 종교적 삶이 자신의 내적 평화에 도움을 주는 것을 선호한다. 그래서 교리공부나 성경공부보다는 영성적 삶에 관심이 많고, 때로 종교가 지나치게 윤리적 지침들을 강요할 때 부담을 느끼거나 종교생활로부터 이탈하려는 경향이 있다.
둘째는 한국인들은 인격적 절대신에 대한 믿음행위보다는 그 믿음의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종교생활에서 더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한 믿음은 결국 보이는 것들을 통한 확신과 증거의 삶을 선호하는 종교적 특성에 기인한다. 그래서 아무리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신에 대한 헌신을 강조해도 종교 생활에서 신자들 간의 갈등이나 상처가 생기거나, 종교 지도자와의 문제가 발생하면 종교 생활을 포기하거나 다른 종교로 신념을 바꾸는 일도 자주 일어난다.
이러한 종교 생활의 양태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지 않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흔히 신앙생활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한 하느님의 구원적 사랑에 대한 신뢰행위를 뜻하지만, 한국인들은 그런 신앙의 본질적인 관계에 대한 물음보다는 그런 신앙을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고,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을 잘못 이해하다보면 한 분이신 하느님께 대한 오롯한 신앙보다는 어떤 종교이든 상관없이 자신의 영적인 삶에 도움을 주는 종교라면 선택적으로 찾아가는 편이적인 신앙 행태가 나타날 수 있다.
최근 뉴에이지를 비롯한 신흥영성운동을 벌이는 이들이나 이단과 사이비 논쟁에 빠져 있는 종교들은 인간 삶에 중요한 신앙의 가치를 지나치게 현세적인 욕구나 내세적인 희망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보다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적행위나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자처하는 이들을 추앙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인들이 가진 종교심성의 양면성은 그리스도교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토착화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영성적 기반이 되었지만, 동시에 신앙생활의 위기를 느끼게 해줄 정도로 냉담신자의 양산과 세상 속의 교회 정신을 수용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패거리 문화를 교회 안에서 일으킨 문제도 없지 않다.
참된 종교심성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방적인 신뢰행위나 현세적 욕구를 채우는 기복적 신앙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종교심은 인간이 자신의 고통과 죽음으로 대변되는 유한한 실존에 대한 체험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해야 한다. 이를 초극하기 위한 종교적 태도 역시 현실을 외면하고 내세만을 고집하거나, 현실적인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신에게 물량 공세를 펴는 그런 미성숙한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 속에서 하느님의 내재적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갖고 삶을 긍정하고, 그 안에서 희망을 잃지 않으면서도 이웃들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서로 바라보며 살아가는 복음적 사랑에 뿌리를 두어여 한다.
오늘날 가톨릭 신자들 안에서 마음의 평화만을 찾는 신앙은 언제나 왜곡된 신심과 편견을 만들어내기 쉽다. 교회는 이러한 한국인의 종교심성을 성숙시키고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 토착화시키는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는 셈이다.
첫댓글 신부님은 참 해박하시고 체계적이시네요. 신부님 글 읽으면서 신부님은 성경 뿐만이 아니라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여 저희들에게 알려주시니 하느님께 귀하게 쓰임받는 그릇이란 생각이 듭니다. 감탄스러워요.
한국인의교적 심성에 관한 통찰력 혜안이십니다
심님에 대한 관심이 이런 고급의 신학관련 논조의 글을 읽게 만들고 읽다보니 많은것을 깨우치게 되어 넘 감사드립니다....^^
신부님의 귀한 글을 읽으며 저의 종교적인 심성은 어떠한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가끔 개신교의 예배 모습을 보면 저는 솔직히 식겁하거든요~
울며 불며 기도하고 온 몸으로 찬양하는 열정적인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말 가무를 좋아하는 민족이 맞다 싶기도 합니다.
처음 천주교 신앙인으로 살기엔 저는 영적인 갈증으로 목말라 했는데 어느새 가랑비에 옷젖듯 저에게 스며 들었나봐요.
이젠 열광적인 표현이 오히려 거부감이 드는걸 보면 말이에요 ㅎㅎ
밤이면 불야성을 이루는 예배당의 십자가 불빛들,산모롱이 마다 넘쳐나는 절집들~
과연 참 신앙인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신부님의 감동적인 글을 읽으며
가톨릭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불러주신 그분의 섭리에 감격하고 감사할따름입니다.
험난한 인생길~그분을 목자로 삼아 행복하게 살겠음을 다시금 다짐해봅니다.
신부님,고맙습니다.
모자란 제 신앙이 늘 신부님 덕분에 날로 성장해지고 성숙해짐을 느낀답니다.
감사드려요^^
무속신앙의 뿌리에 대하여 잘 배웠습니다.
복음적인 신앙이 우리 마음깊이 자리 잡아야 할것 같습니다.
심님
감사합니다.
무속신앙에 젖은 집안 분위기에서 유년을 산 전, 신부님의 이 글 읽으며, 제게 미친 그 무속적 분위기의 영향은 무얼까? 짚어 보았습니다. 사실 스스로 가톨릭에 귀의하고 한 10년 동안은 가톨릭 분위기 배우는 일이 참 어려웠지 싶습니다. ^^ 이건 고백같은 이야기구요, ^^ 사랑의 임마누엘 하느님을 굳게 믿고, 어떤 상황에서도 굳굳하고, 겸손되이 사랑의 삶을 살리라 다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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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의 좋은 글 잘 읽고 제 카페로 모셔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