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공 류관의 고손 오(塢)의 사위가 이희겸이고 그 아들이 이수광으로 지붕유설저자인 실학자이며 서울 창신동 낙산공원 자락에 하정공 집을 복원한 비우당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전남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에 하정공후손 사위 관련 일화를 소개합니다
이광사는 대승공 24세 종윤(宗垣)의 사위로 대승공20세 사교당 준의 2남 신오의 고손녀 사위입니다.
이광사 부인 문화류씨는 이광사가 역모로 귀양갔을 때 전처소생 아들 두명의 관직 길을 열어 주려고 자결한 분입니다.
당시 역모에 연루되면 자식들 과거 길이 막히는데 부모가 자결하면 과거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현재 가정이라면 사망한 전처 아들 관직 길을 마련해 주기 위해 자결할 분이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두륜산 대흥사에서 이광사와 김정희의 서예작품 일화
대흥사는 조선후기 명필들이 서예 작품이 있니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가는 길에 대흥사 일지암으로 초의선사를 찾아옵니다.
추사는 대웅보전 현판을 혹평하면서 떼라고 하고 직접 무량수각 현판을 써서 걸게 합니다.
대웅보전 현판은 당대 최고의 명필 원교 이광사의 글씨였는데, 동국진체의 걸작으로 꼽히며 장성 백양사, 승주 송광사 등에서 모각해 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힘차고 강한 글씨를 추구하던 추사는 조형미의 동국진체를 인정하지 않고 "원교는 조선의 글씨를 망친 사람" 이라고 혹평했습니다.
실학이 융성하던 시기에 서예도 중국글씨 모방에서 벗어나 우리 고유의 필체를 찾자는 것이 동국진체로, 성호 이익의 형인 옥동 이서에 의해 시작되고 공재 윤두서를 거쳐 원교 이광사에 의해 완성 됩니다.
이광사는 전주이씨 왕족으로 부친이 예조판서를 지냈지만, 소론이어서 영조의 등극이후에 부친과 백부가 귀양가서 죽고, 본인도 함경도 북청에 8년 유배후 완도 신지도로 또 유배되어 생을 마칩니다.
그는 신지도에서 글씨에만 전념했는데, 그의 글씨를 구하려는 이들이 신지도로 몰려들어서 날을 정해 유배지에서 전시를 하기도 했는데 추사는 원교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추사는 유배지 제주에서 벼루 4개를 닳아 없애는 피나는 노력끝에 독특한 추사체를 완성하였고, 그때서야 원교의 글씨를 인정하게 됩니다.
9년후 추사가 귀양에서 풀려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에 대흥사에 들러 창고에 보관된 원교의 글씨를 칭찬하며 다시 걸게 하였습니다.
해남 대흥사에는 원교와 추사의 친필외에도 국보급 현판이 많습니다.
조선후기불교를 대표하는사찰이기에 조선의 명필 글씨가 많습니다.
대흥사에 가는 기회가 있으면 원교는 침계루 현판을 왜 '잠길침'자가 아니라 '베개침'자를 썼는지, 추사의 무량수각 현판은 왜 '하늘천'자로 쓰고 '없을무'자로 읽는 지도 알아 보시기를~~~~~
대웅보전 원교체 : 이광사의 동국진체 글씨
추사김정희 글씨 : 중국간자체로 无는 없을 무자입니다.천(天)으로 읽지 않습니다.
이광사 글씨 : 침글자가 삼수변에 잠길침자가 아니고 나무목변에 베개침자임
이광사 해탈문 글씨
이광사 천불전 글씨
정조의 표충사 글씨
위 분들외 여러 서예가들 서예 현판이 있으니 대흥사에 가면 꼭 문화류씨 부인의 자식사랑과 자식을 위한 거룩한 정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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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대흥사에 들렸다가 송시열이 제주로 유배길에 완도군 보길면 중통리에 송시열이 쓴 글씐바위에 들려 송시열 글씨도 보십시오.
송시열의 아들 송기태 부인은 대승공21세 신오(사교당 준 아들)의 사위입니다. 그래서 송시열이 모산에 자주 왔고 현판시도 영팔정에 있습니다.
*** 남구만의 손자 남처관은 약재 류상운 영의정 아들 대승공23세 만암 류봉휘 좌의정 사위입니다. 그래서 영팔정에 남구만 글씨가 있고 이율곡, 남이공 글씨를 볼 수 있습니다ㄸ***
문화류씨 사위 발자취를 보시는 것도 자랑스런 일입니다.
시간나서 남도여행을 계획하여 저와 동행을 원하시면 저에게 한달 전(제가 일정이 복집해서)에 연락 주시면 날자와 시간을 조절하여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첫댓글 당시 나주였던 전남 영암군 신북면 모산 작은 마을에 문화류씨 하정공 후손 들이 기축옥사 정여립의 난(1589년)에 선조임금이 류몽정을 만나 정여립을 도와 주었는지 친국하겠다고 했는데 정철이 고문을 심하게 하여 선조와 만나기 못하도록 옥사하게 만들어 정철이 조작한 내용을 선조가 알지 못하도록 차단하여 柳夢井만 피해를 보았으나 모산은 조선 중기 실세인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의 남구만(숙종조 영의정)과 대 유학자 송시열(우의정,판중추부사) 등 수많은 샤대부집안에서 문화류씨 딸을 며느리로 삼았고 이들이 모산에 자주 왔는데 1755년(영조 31) 나주괘서 사건으로 류형원 류수원 등 실학자를 배출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