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서 전체를 관통하여 흐르고 있는 두 개의 중요한 흐름은 오래 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축복으로 허락하여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의 정복'과 '분할'이다. 여호수아서의 이러한 두 흐름은 '언약의 성취'라는 커다란 주제 아래서 하나로 연합되어 만난다. '언약의 성취'라는 개념, 즉 '하나님께서 창세기로부터 신명기에 이르는 기나긴 역사와 율법을 통해 수차례 반복하여 축복하셨던 가나안 땅에 관한 언약이 여호수아서에 기록된 가나안의 정복과 분할이라는 사건으로 성취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이 본서 여호수아서의 기록 목적이며 연구 과제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서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풍부한 영적 진리의 체득을 위해서는 먼저 여호수아서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역사적 배경과 사상적 배경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며, 그 위에 여호수아서에 나타난 정복과 분할 사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형성되어야 한다. 본문의 서론은 이러한 순서에 따라 먼저 여호수아서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고찰해 본 후, 여호수아서의 제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제1부 여호수아서의 역사적 배경
Ⅰ. 명칭
히브리 마소라 성경에서는 본서 히브리서의 명칭을 본서의 주인공인 '여호수아'의 이름을 본떠 <
['vu/hy] ; 여호수아:'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 명명하였는데 그 이유는 본서의 주제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의 정복과 분할'인데 그러한 사역이 모세의 후계자인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70인역'과 '불가타역'. 그리고 영어 성경에까지 그대로 이어져 '70인역'(LXX)은 <
Ihsou" ; 이에수스>로, '불가타역'(Vulgata)은
로, 그리고 영어 성경에서는 로 명명하였는데 한글 개역 성경 역시 이러한 관점을 그대로 인정 영어 성경을 그대로 본떠 '여호수아'라 칭하였다. 한편 구약에서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의미의 '여호수아'의 히브리 표기를 <['vu/hy] ; 예호수아; 신 3:21>, <['ve/h ; 호쉐아; 신 32:44>, <['ve/hy] ; 예호수아; 수 1:1>, <['Wvy] ; 예수아; 느 8:17>의 네 가지로 표현하였다.
Ⅱ. 저자
여호수아서의 저자가 누구인가에 관한 견해는 크게 다음의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본서가 한 사람의 저자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 의해 저술 편집되었다는 '편집설'과, 둘째는 여러 사람에 의해 편집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본서의 저자를 여호수아가 아닌 여호수아와 함께 했던 '제3의 인물'로 보는 견해, 그리고 셋째는 전통적인 견해로서 여호수아서의 저자를 여호수아 자신으로 보는 견해이다.
1. 편집설 또는 문서설
이러한 학설은 고등 비평가들에 의해 제기된 견해로서 그 요점은 '여호수아서의 저자가 여호수아 한 사람에 의해 저술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 의해 저술된 것을 후대의 사람들이 편집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듯 후대의 편집설을 주장하는 이유는 여호수아서에 기록된 여러 내용들이 서로 상충되며 어긋나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전쟁 기록의 차이
편집설을 주장하는 자들의 첫 번째 근거는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여러 번의 전쟁 기록이 서로 상충된다는 것이다. 즉 1-12장에 나오는 전쟁 기록은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모든 지파가 연합하여 치른 전쟁인 반면에 13-24장에 나오는 전쟁 기록은 이스라엘 지파들이 각기 단독으로 전쟁을 치렀다고 기록되어 이 둘의 전쟁 기록이 서로 일치하지 않고 상충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여호수아서 전체를 이스라엘이 치른 전쟁을 기준으로 하여 전반부와 후반부로 분류한 뒤 전반부의 전쟁 기록은(1-12장) '여호와 문서 기자의 기록'으로 후반부의 전쟁 기록은(
수 13:13; 15:13-19, 63; 16:10; 17:12, 13, 16-18; 19:47) '엘로힘 문서 기자의 기록'이라 규정하고 여호수아서는 '이러한 문서들이 편집된 것'이라 결론지었던 것이다.
2) 아이 성의 전투에 동원된 인원의 차이
편집설을 주장하는 자들의 두 번째 근거는 아이 성의 전투에 동원된 인원이 서로 상충된다는 것이다. 즉 아이성의 전투에 동원된 인원을
수 8:3절에서는 30,00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8:12절에서는 5,00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 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러한 차이점을 볼 때 여호수아서를 한 사람의 기록으로 볼 수 없으며 여호수아서는 여러 저자의 기록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3) 여리고 성의 함락에 관한 기록의 차이
편집설 또는 문서설을 주장하는 자들의 또 다른 주장은 여리고 성의 함락을 위해 그 주위를 돌았던 자들의 신분이 서로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명령대로 여리고 성의 함락을 위해 그 주위를 돌았던 자들을
수 6:3, 7, 10절에서는 '이스라엘 군대'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 6:4, 5절에서는 제사장이 돌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본서 여호수아서의 저자를 여러 사람의 기록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여호수아서가 '여호와 문서 기자'와 '엘로힘 문서 기자', '신명기 편집자'와 '제사 문서' 등이 편집된 것이라 결론짓는다.
2. 편집설에 대한 반박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편집설의 주장은 성경이 의도하는 본래의 의미는 파악하지 못한 채 성경의 외형적 모습과 단편적 사실만을 바라보고 오해한 데서 기인한 잘못된 해석이다. 그들의 눈에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위의 여러 구절들은 오히려 본서의 단일 저작설을 주장하는 것으로서 그 진정한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전쟁 기록의 차이에 대한 재해석
편집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전반부의 전쟁 기록(1-12장)이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일어난 전체적인 전투였던 점에 비해 후반부의 전투 기록(13-24장)은 개별적인 전투였다는 차이점을 주장하지만 이러한 차이점은 여호수아서 전체의 구조와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오해이다. 여호수아서는 그들의 주장대로 1-12장의 전반부와 13-24장의 후반부로 분리된다. 하지만 이러한 분리는 그들의 주장대로 전쟁의 형태에 의한 분류가 아니라 '약속의 땅 가나안의 정복과 분할'이라는 커다란 주제에 의한 분류인데 이러한 사실은 가나안 땅의 '정복시에 있었던 국가적인 전투'와(1-12장) '분할 후의 개별적인 전투'(13-24장)의 양자 모두를 인정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제공한다. 즉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한 1-12장의 전투는 당연히 민족적인 전투여야 하며, 또 민족적인 전투일 수밖에 없으나 가나안을 분할한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서의 전쟁 기록은 편집설을 주장하는 자들의 견해처럼 이해될 것이 아니라 '정복시의 국가적인 전투'와 '분할 후의 개별적인 전투'로 이해되어야 하며, 따라서 전쟁 기록의 차이를 주장하는 그들의 편집설은 인정될 수 없다.
2) 아이 성의 전투에 동원된 인원의 이중적 기록
편집설을 주장하는 자들의 두 번째 근거인 '아이 성 전투에 참가한 인원의 차이, 즉 30,000명(참조,
수 8:3)과 5,000명(참조,
수 8:12)의 차이 역시 편집설의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수 8:3절의 30,000명과 12절의 5,000명 전부를 복병, 또는 공격 인원이라 생각할 것이 아니라 3절의 30,000명은 '아이 성 공격에 동원된 병력의 총수'로 12절의 5,000명은 그중 '매복시킨 복병의 수'로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 외에도 3절과 12절의 사건을 독립된 두 개의 사건, 즉 30,000명을 매복시킨 사건과 5,000명을 매복시킨 서로 다른 두 개의 사건으로 해석하는 설명도 있는데 이 둘 중 어느 해석을 취해도 3절과 12절이 편집설의 근거를 제공하는 말씀으로 생각하게 하지는 않는다.
3) 여리고 성의 함락에 관한 성격적 근거
편집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발견해 낸 '여리고 성 함락의 공로자들' 즉 여리고 성의 주위를 돌았던 자들의 차이 역시 성경에 대한 깊은 연구의 부족에서 온 오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주장하는 6:3, 7, 10절의 '이스라엘 군대'와 6:4, 6절의 '제사장들'은 따로따로 분리되어 돌았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군대 앞에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행했다'는 사실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장 역시 여호수아서의 편집설을 주장할 만한 근거가 못 된다.
3. 제3의 인물 저작설
이 주장은 주로 주석가 '카일'(Keil)에 의해 제기된 주장인데 그 핵심은 '여호수아서의 저자가 여러 사람이 아닌 한 사람임에는 분명하나 그를 여호수아 자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여호수아의 생이 끝난 후의 기록' 즉
수 24:29-33 절의 기록 때문인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여호수아의 생이 끝난 뒤의 기록으로 보아 본서를 여호수아의 저술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카일'(Keil)은 여호수아가 아닌 제3의 인물을 설정하여 그를 여호수아서의 저자로 세우는데 그가 세운 제3의 인물은 '여호수아서의 역사적 사실에 동참하였던 자', 자세히 말해서 '여호수아의 인도 하에 요단을 건너서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들 중의 일원'(참조,
수 5:1)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 역시 정확한 해석이라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제3의 인물'을 지칭하는 '우리'라는 복수의
수 5:1절은 '카일'(Keil)의 말대로 '가나안에 들어간 후대의 사람'을 뜻한다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넜다'는 여호수아의 신앙 고백, 또는 찬양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가 죽은 후의 일들을 기록한
수 24:29-33절이 비록 여호수아의 직접적인 기록으로 불 수 없다 할지라도 위대한 신앙인의 죽음과 그 후의 일에 대한 간략한 언급이 첨가되었다고 해서 그 책 전체의 저자를 문제 삼을 수 없으므로 본서의 저자를 여호수아가 아닌 제3의 인물로 보는 것은 무리이다.
4. 여호수아서의 저작설에 관한 성경적 견해
유대인의 전통적인 견해와 보수주의 학자들은 여호수아서의 저자가 여호수아라는 사실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그들이 이렇듯 본서의 저자를 여호수아라 주장하는 이유는 본서에 기록된 여러 가지 사건들의 기록이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한 자가 아니면 기록할 수 없을 만큼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본서의 여러 가지 정황과 역사적 배경 등이 여호수아 이외의 저자를 인정할 수 없게 하고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고'(참조,
수 24:26)라는 여호수아서의 자증 때문이다. 물론 여호수아 자신이 직접 저작설을 주장한다고 해서
수 24:29-33절의 기록까지도 여호수아의 기록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들 역시
수 24:29-33절까지의 기록은 여호수아의 기록이 아니라 여호수아와 함께 그 사건을 목격한 어느 사람의 기록으로 인정하여 여호수아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수 24:29-31)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이, 엘르아살의 죽음에 관한 기록은(
수 24:33)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기록한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첨가 때문에 '여호수아 저작설' 자체를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 정통적 견해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신명기에 첨가된 모세의 죽음과 사후에 관한 기록(참조,
신 34:1-12) 때문에 '신명기의 모세 저작설'을 부인할 수 없듯이(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서의 제Ⅳ권 신명기 서론 부분을 참조할 것) 여호수아의 죽음과 그 후의 일에 대한 짧은 기록 때문에 '여호수아서의 여호수아 저작설' 전체가 의심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호수아서의 저자는 여호수아서의 여호수아 자신이며 편집설이나 문서설, 또는 제3의 인물 저작설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가 성경의 배경과 사상에 무리하지 않고 일치하는 해석이며, 또한 성경 자체의 증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성경적 견해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서의 저자는 여러 사람이나 제3의 인물이 아닌 '여호수아 자신'으로 받아들이고 믿어야 할 것이다.
Ⅲ. 기록 목적과 연대
1. 기록 목적
여호수아서의 기록 목적은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언약이 성취되는 과정을 보여 주고자 함'이었다. 이러한 여호수아서의 기록 목적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면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것은 '역사적인 목적'과 '교리적인 목적', 그리고 '기독론적인 목적'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역사적인 목적
여호수아서의 역사적인 목적은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에게 가나안 땅을 축복으로 주시리라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큰 민족으로 성장한 이스라엘을 자신의 약속대로 가나안 땅에 인도해 들이는 과정을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 때문에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침입 경로와 전쟁 기록, 그리고 점령지의 분할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던 것이며, 이러한 상세한 기록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얼마나 철저하고 완벽하게 실천하시는가를 보여 주고자 하였던 것이다.
2) 교리적인 목적
여호수아서의 교리적인 목적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으나 대표적인 것은 다음의 세 가지라 할 수 있다. 첫째는 역사적인 목적에서도 밝힌 대로 자신의 약속을 잊지 않고 기억하시며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증거'이고, 둘째는 승리하는 삶, 즉 원수와의 대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오직 하나님 안의 믿음으로 살아갈 때만 가능하다는 '믿음으로의 승리'이며, 셋째는 비록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혜를 아무런 대가 없이 선물로 허락하시지만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믿음의 투쟁'이라는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3) 기독론적인 목적
여호수아서의 기독론적 목적이 지니는 핵심은 '여호수아를 통해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모형론은 여호수아의 이름과 그의 사역에서 분명히 드러나는데 먼저 '구원'을 뜻하는 '여호수아'라는 이름의 헬라어 명칭이 '예수'이며, 그 의미 역시 '구원'이라는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과, 여호수아가 자기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해 들어가는 사역이 구원받은 자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주님의 사역을 거의 완벽하게 예표해 준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따라서 여호수아서를 연구할 때 이러한 모형론 연구에 더욱 중점을 두고 연구한다면 단순한 이스라엘의 역사라는 의미보다 성도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를 통해 얻는 구원과 승리라는 놀라운 영적 진리를 깨닫는 새로운 체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기록 연대
여호수아서의 저작자를 여호수아로 보지 않고 여러 문서들의 편집으로 생각하는 고등 비평가들은 본서의 저술 연대를 B.C. 950년경에서 B.C. 200년경 사이의 긴 세월로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가 활동하던 시대와는 동떨어진 훨씬 후대의 시기로 설정한다. 그들은 이렇듯 여호수아서의 저작 연대를 후대의 시기로 생각하는 이유는 그들의 편집설 때문인데 편집설을 주장하는 그들로서는 많은 문서의 수집과 편집이라는 자신들의 학설 때문에라도 여호수아서의 기록 연대를 그렇게 후대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여호수아가 살아 있던 당시의 시대로 증거하고 있는데 그 증거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생 '라합'의 생존. 성경의 저자는 자신이 여호수아서를 기록하고 있을 때, 즉 성경을 기록하고 있는 '오늘날까지' 라합이 생존하고 있음을 증거하였다(참조,
수 6:25). 만약에 편집설을 주장하는 고등 비평가들의 말대로 '오늘날까지'라는 말을 B.C. 200년경으로 생각한다면 라합은 B.C. 200년까지 생존해 있었다는 커다란 모순이 생긴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기생 라합이 살아 있다'는 말씀은 기생 라합이 생존해 있던 시대, 즉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점령하고 가나안을 정복한 후의 얼마 되지 않아 여호수아서가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둘째, 예루살렘의 본토인들인 '여부스 족속'이 잔존. B.C. 200년 설에 대한 두 번째 반박은 예루살렘에 거하고 있던 '여부스 족속'이 여호수아서의 기자가 여호수아서를 기록할 때까지 남아 있었다는 말씀이다(참조,
수 15:63).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여부스 족속은 다윗 왕 때에 가서야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었다(참조,
삼하 5:5-9).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여부스 족속이 예루살렘이 남아 있었다'는 말씀은 본서의 기록이 다윗 왕 시대 이전에 기록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며, 따라서 여호수아서가 B.C. 200년경에 기록되었다는 고등 비평가들의 주장은 여지없이 반박되고 만다.
셋째, 여러 지명들의 옛 이름 사용. B.C. 200년 설에 대한 세 번째 반박은 여호수아서에 기록된 여러 지명들이 거의 모두 옛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바알라'를 '기럇 여아림'(참조,
수 15:9)으로, '기럇 신나'를 '드빌'(참조,
수 15:49)로, 그리고 '기럇 아르바'를 '헤브론'(참조,
수 15:13)으로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옛 명칭의 사용은 여호수아서의 저자가 B.C. 200년경에 살았던 자가 아닌 여호수아 시대의 사람임을 입증하는 것이며, 따라서 B.C. 200년 설은 인정될 수가 없다.
넷째, 기브온 사람들의 성전 봉사. 여호수아서는 본서가 기록될 때만 해도 기브온 사람들이 성전 곁에서 물을 긷고 나무를 패는 봉사를 하였다고 증거한다(참조,
수 9:27). 그런데
삼하 21:1-9절을 보면 사울 왕의 치세 때에 기브온 사람들이 학살되어 더 이상 여호와의 성막 곁에서 봉사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기브온 사람들이 나무를 패고 물을 길으며, 여호와의 성막 곁에서 봉사하였다'는 말씀은 본서의 저술이 사울 왕의 치세 훨씬 이전에 기록된 것임을 증거하는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증거들을 살펴볼 때 여호수아서의 저술 연대를 B.C. 200년으로 본다는 것은 무리이므로 그보다는 훨씬 이전의 여호수아 당시로 보아야 하는데 출애굽의 시기를 B.C. 1446년으로 생각하고(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서의 제Ⅱ권 출애굽기 서론의 '출애굽 연대' 부분을 참조할 것) 이스라엘의 광야 방랑 40년 후에 시작된 정복과 정복지의 분할을 모두 마친 후의시기로 추정할 때 여호수아서의 기록 연대는 B.C. 14세기 초반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Ⅳ. 특징과 구조
1. 특징
여호수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이스라엘 역사상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전쟁을 치른 '전쟁의 역사'라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 신학자 '얀센'(I. L. Jensen) 박사는 여호수아서를 '가나안 정복이라는 하나의 긴 승리에 관한 이야기'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여호수아서에 나타난 더 큰 특징은 그렇듯 수많은 전쟁 속에서도 아이성 싸움에서 패한 단 한번의 패전 외에는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스라엘의 승리는 그들의 무력이나 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의 승패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 있었다. 즉 '믿음의 순종', 이것만이 그들이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었고 성공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치르는 전투의 외적 지도자는 여호수아였지만 실제로 전투를 치르고 그들을 인도하는 내적 지도자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신약의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영적 지도자인 예수만을 전적으로 의뢰케 하며 승리의 삶을 위한 '믿음의 순종'을 깨닫게 하고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소망을 주는데, 이렇듯 이스라엘의 길고 긴 전쟁의 역사를 통해 신약의 성도들을 영적 전투의 승리자가 되게 하기 위해 새로이 무장시킨다는 점이 바로 여호수아서의 특징이다.
2. 구조
여호수아서의 구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분류될 수 있다. 그 첫째는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허락하신 가나안의 정복과(1-12장), 둘째는 정복한 가나안 땅의 분할(13-24장)이다. 이러한 두 가지의 내용은 다시 네 가지로 분류될 수 있는데 '정복'의 전반부(1-12장)는 '정복을 위한 준비'(1-5장)와 '가나안의 정복'(6-12장)으로, '분할'의 후반부(13-24장)는 '각 지파에게 분할된 기업들'(13-21장)과 '여호수아 생애의 말년에 대한 기록'(22-24장)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이러한 구조와 함께 본서 전체의 맥락을 흐르고 있는 주제는 '정복과 분할을 통한 언약의 성취'이며, 그 주제 성구는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라는
수 11:23의 말씀이다. 이제 이러한 여호수아서의 전체적인 구조를 도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참조,
여호수아 도표1>.
이러한 여호수아서의 구조 이해는 여호수아서에 흐르고 있는 '언약의 성취'라는 주제를 파악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며, 그로 인해 여호수아서의 좀더 심오하고도 깊은 부분까지의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제2부 여호수아서의 제 문제들
Ⅰ. 여호수아서와 오경과의 관계
여호수아서는 그 역사적 배경과 사상적 배경이 모세 오경에 근거를 두고 있어서 오경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고등 비평가들은 이러한 유사성을 착각하여 아예 여호수아서를 오경의 한 부분으로 포함시키는 이른바 '육경'(Hexateuch)을 주장함으로써 여호수아서의 독자성을 부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경으로서의 위치를 부정하고 말았다. 그러나 비록 여호수아서가 오경과 많은 점에서 비슷하고, 또한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다 할지라도 여호수아서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독립된 정경이며, 하나님의 귀한 뜻을 증거하는 말씀으로 인정되어야 하는데 여호수아서가 독립된 하나의 정경이라는 증거는 다음과 같다.
1) 역사적인 증거들
여호수아서가 오경의 한 부분이 아닌 독립된 정경이라는 사실은 제일 먼저 많은 역사적인 사실들이 증거하고 있다. 첫째는 사마리아인들이 육경이 아닌 오경만을 율법으로 인정하고 사용했다는 점이다. 만약에 여호수아서가 오경과 같이 율법으로 인정되고 포함되었다면 율법을 중요시 여겼던 사마리아인들이 여호수아서를 제외시켰을 리가 만무하다. 그러나 그들은 오경만을 율법으로 사용하였고, 여호수아서는 율법에서 제외시켰다. 둘째는 '70인역'(LXX)의 증거이다, '70인역' 역시 여호수아서를 오경과 구별하여 율법이 아닌 예언서들 중의 한 권에 포함시켰다. 셋째는 구약 외경들의 증거이다. 구약 가경 중의 하나인 '엑크레시아스티커스'(Ecclesiasticus)는 모세 오경과 여호수아서를 구분하되 여호수아서를 율법이 아닌 선지서 중의 하나로 포함시켰다. 넷째는 마소라 사본의 증거이다. 마소라 사본은 오경의 끝 부분의 주에 '율법 가운데 오분의 오가 완성되었다'라고 기록함으로써 오경의 완결성과 함께 선지서와의 구별을 명확히 하였다. 다섯째는 율법을 낭독하는 규례에서의 증거이다. 이스라엘은 매년, 또는 매 3년마다 율법을 낭독한다. 그런데 그 내용은 오직 오경에서만 발췌한 것일 뿐 여호수아서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여호수아서가 오경에 포함되지 않은 뿐만 아니라 선지서의 첫 권으로서 독립된 하나의 정경이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2) 여호수아서에는 나타나지 않은 오경의 독특한 언어학적 특색들
오경과 여호수아서는 서로 다른 문체와 단어, 그리고 문법적 특색들을 지니고 있어서 오경과 여호수아서가 서로 독립된 정경임을 보여 준다. 즉 오경에서 빈번하게 사용되었던 히브리 고어 '하엘'(ha'el)과 '후'(hu)의 용법이 여호수아서에는 나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서에 14번이나 사용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이 오경에서는 심히 드물게 쓰여졌다는 것이다.
3) 문서실 자체의 난제
'육경'(Hexateuch) 사상은 비평설 자체의 테두리 안에서도 해결 못할 난제를 안고 있다. 즉 만일 그들의 주장대로 여호수아서가 오경의 기본 재료인 P문서를 주축으로 형성된 것이라면 어째서 P문서로 보이는 자료들이 여호수아서 전체에서 나타나지 않고 수 12-21장에서만 나타나는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난제는 '영'(Young) 박사의 말대로 그들로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서를 오경과 같은 율법서로 보는 그들의 '육경론'은 인정할 수 없는 하나의 추측에 불과하며 여호수아서와 오경은 분명 서로 다른 목적과 교훈, 그리고 특색을 지닌 독립된 정경으로 봐야 한다.
Ⅱ. 가나안 정복과 주변 여러 나라들의 역사적 배경
가나안 정복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와 기적적인 도우심으로 이루어지기는 했어도 가나안 정복이 시행되고 있을 때에 팔레스틴 주변의 여러 강대국들, 즉 '애굽'과 '블레셋'(Philistines), 그리고 '앗수르'(Assyria)와 '바벨론' 등의 여러 나라들에 팔레스틴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거의 무관심한 태도로 방관만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을 수행하고 있을 때 주변 여러 강대국들의 역사적 상황은 어떠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실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초월적인 역사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1. 세력이 약해진 애굽 왕조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에 '애굽'에 관련된 기사가 거의 없는 것에서 우리는 먼저 팔레스틴에 대한 애굽의 지배력이 상당히 약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애굽의 '쇠퇴'는 팔레스틴의 분봉 왕들이 애굽에 보낸 '텔 엘 아마르나 서신'(Tell el Amarna Letters)에서 더욱 자세히 알 수 있는데 그 서신에는 '하비루'(Habiru)라 불린 이스라엘(Hebrew)이('하비루'족과 '히브리인'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본서의 제2권 '출애굽기 서론' p. 32와 정규남저, '구약개론'의 p.193-195 부분을 참조할 것) 여호수아의 인도 하에 가나안으로 진격해 들어가자 가나안의 여러 분봉 왕들이 애굽의 '아멘호텝 3세'(Amenhotep Ⅲ, B.C. 1408-1372)와 '아멘호텝 4세'(Amenhotep Ⅳ, B.C. 1372-1354)에서 도움을 구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편지를 받은 애굽은 그들을 위해 어떠한 출정도 하지 않았으며 병사를 파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 애굽이 팔레스틴에 어떠한 지배력도 행사하지 못하는 나약한 국가로 전락한 데에는 그 시대의 애굽의 통치자인 '아멘호텝 3세'(Amenhotep Ⅲ, B.C. 1408-1372)와 '아멘호텝 4세'(Amenhotep Ⅳ, B.C. 1372-1354)의 무능력과 주변 국가들 간의 관계 때문이었는데 '미타니 왕국'(The Mitanni)과의 상호 관계 때문에 팔레스틴의 상황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으며 '아멘호텝 4세'(Amenhotep Ⅳ, B.C. 1372-1354)는 그가 도와서 발전시킨 '단일신교'의 철학적 개념에 몰두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애굽은 팔레스틴의 상황에 신경 쓸 수 없었고 이스라엘은 강국의 저항이나 반대 없이 가나안 정복을 시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람세스 2세'(Ramses Ⅱ, B.C. 1290-1224)와 '헷 족속'(Hittites)
애굽이 팔레스틴의 지배권을 다시금 회복할 때는 19왕조의 위대한 정복자 '람세스 2세'(Ramses Ⅱ, B.C. 1290-1224)의 통치 때였다. 그러나 그의 지배력 역시 그의 통치 기간 중 초기에 국한되었을 뿐 애굽은 다시금 팔레스틴에서 자신들의 지배력을 포기해야만 했는데 그것은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한 '헷 족속'의 출현 때문이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B.C. 15세기 초에 나타난 '미타니 왕국'(The Mitanni)은 애굽의 강력한 대적이 되어 오랜 동안 애굽과 전쟁을 치른 적국이었으나 B.C. 1400년경 동쪽에서 밀고 올라온 헷 족속이 '미타니 왕국'(The Mitanni)을 위협하자 애굽과 '미타니 왕국'은 동맹관계로 급선회하여 한때 '아멘호텝 3세'(Amenhotep Ⅲ, B.C. 1408-1372)는 미타니 왕국의 공주와 결혼할 정도로 가까워졌고 이러한 상태로 세 나라는 얼마 동안 평화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는 B.C. 1370년경에 '헷 족속'이 '미타니 왕국'을 점령하고 '수리아'(Syria)에서 애굽의 인접국이 되면서 애굽과 헷 족속 간의 긴장 관계는 고조되었다. 그러나 두 나라는 각기 자국 내의 문제 때문에 서로 충돌하지 않고 얼마간 '긴장된 평화'가 유지되었는데 이러한 관계를 깬 자가 바로 '람세스 2세'(Ramses Ⅱ, B.C. 1290-1224)였던 것이다. 18왕조 후기에 나타난 애굽의 퇴조를 일신하고 외부로의 세력을 확장시키지 시작한 그는 팔레스틴에서의 지배력을 다시금 회복하고자 노력하여 한때 그 지배력을 회복하였으나 '헷 족속'의 강력한 세력은 어찌할 수 없어서 다시금 남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으며 남아 있는 애굽의 세력 역시 팔레스틴에서의 불안정한 통치를 겨우 유지할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팔레스틴은 '헷 족속'의 지배 하에 들어가는 듯했으나 그들 역시 팔레스틴의 통치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으니 그것은 북쪽과 서쪽에서 새로 일어난 '앗수르'(Assyria)와 다른 강대국들의 위협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팔레스틴은 14세기와 13세기 동안 내내 열강의 세력으로부터 제외된 지역으로 남아 있었고,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과 정착이 수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 '앗수르'(Assyria)와 '블레셋'(Philistines), 그리고 '바벨론'과 팔레스틴
'미타니 왕국'(The Mitanni)을 멸망시키고 애굽을 남쪽으로 몰아낸 '헷 왕국'(Hittite Empire)은 B.C. 1200년경, 곧 기드온 시대에 붕괴되었다. 그리하여 고대 근동의 주도권은 '앗수르'(Assyria)에게로 넘어갔고 19왕조 말기와 20왕조의 애굽 역시 앗수르에게 대항할 힘이 없었으므로 고대 근동은 완전 앗수르의 세력 하에 놓이게 되었다. 후에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 후에 북쪽의 이스라엘이 약 B.C. 722년경에 앗수르에 멸망될 정도로 앗수르의 세력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앗수르도 그들의 통치 초기인 B.C. 1200-1100년경에는 '수리아'(Syria) 이남 지역의 팔레스틴 지역까지 다스릴 능력이 없었고, 바벨론 역시 아직까지는 그 힘이 크게 성장하지 않았으므로 팔레스틴은 계속해서 열강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었다. 단지 이스라엘의 출애굽 시대부터 팔레스틴에 거하던(참조,
출 13:17) 블레셋 족속이 점차 크게 증가하여 삼손 시대에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족속으로 대두되었으나 그들 역시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당시에는 큰 세력을 형성하지 않았으므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에 어떤 장애가 되지를 못했다.
4. 가나안 정복과 역사적 배경에 대한 결론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우심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는 단순히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도우신 일만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더 큰 역사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점령을 수월하게 하기 위하여 주변 여러 강대국들의 역사를 주관하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신 일이었다. 그 결과 열강들은 그들 간의 세력 다툼과 내부적 문제 때문에 팔레스틴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손쓸 여유가 없었고 오직 '블레셋 사람들'(Philistines)과 '암몬 사람들'(Amonites), 그리고 '모압 사람'(Moabites)과 '미디안 사람들'(Midianites)과 같은 주위의 작은 민족들만이 이스라엘의 연단을 위한 도구를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여건과 상황 하에서 이스라엘은 점차 큰 민족으로 성장하였고, 다윗 시대에는 블레셋 족속뿐만 아니라 팔레스틴 전지역을 지배하는 강국으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Ⅲ. 가나안에 대한 일반적인 고찰
우리는 위에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서 고찰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가나안과 주변 국가들의 역사적 배경에 관한 고찰일 뿐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축복의 땅 가나안에 대한 고찰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제 가나안에 대한 좀더 세밀한 연구가 필요한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삶의 터전이 될 가나안의 당시 상황이 복잡하고 우상으로 가득 찬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구는 후에 사사 시대와 열왕기 시대에 이스라엘이 섬긴 우상들과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가나안에 대한 연구는 '가나안의 7족속들'과 '가나안의 여러 성읍들' 그리고 '가나안의 우상들'의 순서로 전개하고자 한다.
1. 가나안의 7족속
'가나안'이라는 명칭은 여러 가지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포괄적인 의미이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땅'인 '가나안 땅'을 말하는 동시에 '가나안 땅'에 거하는 '7족속', 곧 '헷 족속'(Hittites), '아모리 족속'(Amorites), '가나안 족속'(Canaanites), '기르가스 족속'(Girgashites), '브리스 족속'(Perizzites), '히위 족속'(Hivites), '여부스 족속'(Jebusites)의 총칭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제 이들 가나안의 7족속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헷 족속(Hittites)
역사상에 나타난 헷 족속은 대개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B.C. 18c경 소아시아의 수리아 지방에 정착한 '핫티 족속'(Hattians)이라 불린 원주민들이며, 둘째는 첫 번째의 헷 족속의 멸망한 후 두발 족속이 '신 헷 족속'으로 불린 자들이며, 셋째는 구약의 족장 시대부터 가나안 점령까지의 기간에 나타나는 '가나안의 헷 족속'으로 본서에 등장하는 헷 족속을 말한다. 이들 중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헷 족속은 '가나안의 헷 족속'으로서 그들의 기원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먼저 헷 족속의 조상인 '헷'은(참조,
창 23:10) 함의 아들인 '가나안'의 아들로서(참조,
창 10:15;
대상 1:13)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를 위해 헷 족속에게서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 밭을 사서 사라를 막벨라굴에 장사하였고(참조,
창 23:3-20), 이삭의 장자 '에서'가 헷 족속의 딸과 통혼하였다(참조,
창 27:46). 이들은 유다 산지에 거하였는데(참조,
민 13:29;
수 11:3) 그들의 땅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시면서(참조,
창 15:18, 20) 그 대신 그들을 진멸하라 명하셨으나(참조,
신 7:1, 2, 24), 완전히 진멸시키지 못하므로(참조,
삿 3:5) 후에 이스라엘이 그들과 통혼하는 죄악의 근원이 되게 하였다(참조,
삿 3:6;
왕상 11:1;
스 9:1, 2).
2) 아모리 족속(Amorites)
'아모리 족속'의 명칭은 '산악인들'이라는 뜻으로(Ewald) 때때로 가나안 족속 전체를 지칭하는 통칭으로 쓰이기도 하였다(참조,
창 15:16;
수 24:18;
삿 6:10;
삼하 21:2). 그들의 거주지는 한곳에 정해져 있지 않고 여러 군데 흩어져 있었는데 유다 산지와(참조,
수 11:3)사해 서부의 산악 지대(참조,
창 14:7, 13), 그리고 세겜 근방과 '길르앗과 바산'에 있는 시혼과 옥의 왕국의 유다 동쪽 등이었다(참조,
민 32:33, 39;
신 2:26-36). 이스라엘의 가나안 영토 진입을 막기 위해 다섯 왕이 기브온에 집결했을 때 하나님께서 우박으로 흩으신 사건이었다(참조,
수 10:1-21). 그러나 그들 역시 완전히 진멸되지 아니하였고(참조,
삿 1:34-36), 그리하여 그들이 섬기던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이스라엘이 좇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3) 가나안 족속(Canaanites)
'가나안 족속'은 가나안 땅에 거하는 '일곱 족속' 전체를 통칭하는 말인 동시에 '가나안의 7족속 중의 한 족속인 가나안 족속'을 뜻하기도 하는 말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가나안 족속'은 '요단 강변을 잇따르는 한 민족'을 말하는 것으로(참조,
민 13:29;
신 11:30;
수 5:1; 11:3) 그들은 주로 '게셀'에 거했다(참조,
수 16:10). 그들에 관한 기록은 성경에 많이 언급되지 않아서 자세한 그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만 단지 가나안의 7족속과 함께 이스라엘에게 정복당한 민족이며 완전히 진멸되지는 않아서 후대에 얼마간 그 종족이 계속되었을 것이라는 것밖에는 알려진 사실이 없다(참조,
수 16:10).
4) 기르가스 족속(Girgashites)
'게세니우스'(Gesenius)는 '기르가스 족속'을 '진흙땅에 거하는 자들'이라고 말하였으나 그들의 거주지가 어디였는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족속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기에 그들의 거주지가 '카르키사'(Karkisha)라 불리는 성읍이라는 설과, 수메르가 섬긴 '광명의 신'인 '게쉬닌'의 부하가 기르가스라는 설 등 여러 가지 추측들이 난무하는데 이러한 추측에 의존하기 보다는 성경에 증거하는 그대로 '이스라엘이 쫓아낸 가나안 종속 중의 하나'로만 이해하는 것이 더욱 좋을 듯하다.
5) 히위 족속(Hivites)
'가나안'의 아들 중 하나로서(참조,
창 10:17) '레바논 산지'(참조,
삿 3:3)와 '헬몬 산'(참조,
수 11:3), 그리고 '세겜'과 '기브온 성읍'(참조,
수 9:7; 11:19) 등에 거하였다. 이들 역시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에 의해 가나안으로부터 축출되었는데 이들 족속과 족장들과의 대표적인 관련성은 야곱의 딸 디나를 욕보인 '하몰'의 아들 '세겜'의 강간과 죽음인데 그들 '하몰'과 '세겜'이 바로 히위 사람이었던 것이다(참조,
창 34:2).
6) 브리스 족속(Perizzites)
이들은 '시골 사람', '미개인'이라는 뜻으로 산악 지대에 살면서 가나안 족속들과 함께 거한 족속들이다(참조,
수 11:3;
삿 1:4, 5). 이들의 기원은 꽤 오래 되어 아브라함 때에도 약속의 땅 가나안에 거주하고 있었고(참조,
창 13:7; 15:18, 20) 야곱이 두려워한 족속이었다(참조,
창 34:30). 이스라엘의 정복 때 패한 이들은 완전히 진멸되지 않고 남아 있다가 유다 족속에게 많은 수가 죽임을 당하였고(참조,
삿 1:4, 5) 후에는 솔로몬이 노예로 삼은 족속이었다(참조,
왕상 9:20, 21).
7) 여부스 족속(Jebusites)
예루살렘의 산악 지대에 거한 민족으로서(참조,
민 13:29), 후에 이들이 거한 지역은 예루살렘 성전이 자리 잡아 이스라엘의 도읍이 되었다. 즉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을 실시할 때 여부스 족속을 다스리던 자는 '아도니세덱'이었는데(참조,
수 10:1-5) 여호수아가 '아도니세덱'을 죽이기는 했어도 땅을 뺏지 못한 이곳을(참조,
수 10:23-26) 다윗이 요압을 시켜 정복한 후(참조,
대상 11:6) 도읍으로 정하고 이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것이다(참조,
삼하 5:4, 5). 그 후 솔로몬 시대부터 시디기야 시대까지 이스라엘의 열왕들은 이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위해 여부스 족속을 부역시켰다(참조,
왕상 9:20, 21).
2. 가나안의 성읍들
성읍들에 대한 고찰은 매우 광범위한 분야이다. 왜냐하면 그 지역의 고대적 상황으로부터 현대적인 상황까지를 살펴보아야 하며 지리적 상황과 고고학적인 증거, 그리고 성경에서의 역사까지도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광범위한 분야를 다 생각하기에는 무리이므로 본 서론에서는 각성의 지리적인 위치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되 때때로 고고학적인 증거와 성경에서의 역사도 살펴봄으로써 여호수아서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1) 여리고
'여리고'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거주 지역 중의 하나로서 구약의 여리고와 신약의 여리고로 분류된다. 이중 본문과 관계된 구약의 여리고는 오늘날의 신시가지 북서쪽 변두리에 위치한 '텔 에스 술탄'(Tell-es-Sultan)이라고 증명되었는데 이곳은 사해의 하구에서 북서쪽으로 약 16km 떨어져 있으며, 예루살렘의 동북쪽으로 약 27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 땅에는 수천 년간 사람들이 거주해 왔기 때문에 지면 위 50피트 높이의 알 모양의 언덕을 형성하였고, 오늘날의 오아시스에 물을 공급해 주고 있는 '아인 에스 술탄'(Ain-es-Sultan)의 샘이 있다. 이곳은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넌 후 최초로 공격하여 점령한 곳이었고(참조,
수 5:8-10), 후에 베냐민의 소유지가 된 곳이었다(참조,
수 18:21).
2) 아이성
'아이'는 '무더기', '폐허'라는 뜻으로서 '벧아웬'에 이웃하고 있었으며(참조,
수 7:2), '믹마스'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참조,
사 10:28). 이곳은 현재의 '엗 텔'(Et-Tell; 무더기, 언덕)인데 벧엘에서 남동쪽으로 3km 지점에 있는 곳이다. 일찍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온 후 최초로 장막을 치고 제단을 쌓은 곳이 바로 아이와 벧엘 사이였으며(참조,
창 12:8; 13:3),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 시에 패한 유일한 장소가 바로 '아이성'이었다(참조,
수 7:2-5; 8:1-29). '아이 성'은 여호수아에 의해 멸망당한 후에도 다시 한 번 재건되었으나, '앗수르'에 의해 또 다시 공격당하는 비운을 겪기도 한 도시이다(참조,
사 10:28).
3) 라기스와 드빌
'라기스'는 가나안 남부의 중요한 요새로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대로의 요충지였다. 오늘날의 '텔 에드 드베이르'(Tell-ed-Duweir)라 불리는 이곳은 헤브론에서 서쪽으로 24km 지점에 위치하였으며, 고대의 '엘류데로폴리스'(Eleutheropolis)인 '베이트 지브린'(Beit Jibrin)에서 서남쪽으로 8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곳의 발굴은 1932-1938년에 '마스톤'(Wellcome Marston)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 발굴 결과로 인해 후기 청동기 시대(B.C. 약 1600-1200) 중기에 불에 타 멸망한 두꺼운 재의 층이 발견되었고, 또 공격당한 흔적도 발견됨으로써 여호수아에 의한 멸망이 증명되었다. 이곳은 후에 유다의 성읍으로 주어졌다가(참조,
수 10:31-33; 15:1, 39) 르호보암이 유다 방비를 위해 견고한 성읍으로 건축하였다(참조,
대하 11:5, 9). 한편 '드빌'은 유대 남부에 있는 도시로서 '기럇 세벨'(참조,
수 15:15;
삿 1:11)이라 불리기도 하였는데 아론 자손에게 주어진 성읍이었다(참조,
수 21:15). 이곳의 고고학적 발굴은 1924년 유명한 고고학 교수 '올브라이트'(Albright) 교수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드빌'은 헤브론 남서쪽 약 19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오늘날의 '텔 베이트 밀심'(Tell-Beit-Mirsim)이라고 알려졌다.
4) 하솔
'정착'이라는 뜻의 '하솔'은 납달리 지파 지경에 속하는 북부 팔레스틴 성읍 중의 하나로서 '훌레'(Heleh) 호수 서남쪽 8km와 갈릴리 바다 서북쪽 16km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텔 엘 케다'(Tell-el-Qedah)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은 '가스탕'(Garstang) 교수와 '이가엘 diels'(Yigael Yadin) 교수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그들의 오랜 발굴 작업은 성경의 기사가 모두 사실이었음을 증거하였다. 후에 이곳은 솔로몬에 의해 재건되었으나(참조,
왕상 9:15),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에게 점령당하였다(참조,
왕하 15:29).
3. 가나안의 우상들
1) 최고의 신 '엘'(El)
가나안 만신전(Pantheon;판테온)의 명목상의 우두머리는 '멀리 있는 높은 신'으로서 세상사에는 거의 간섭하지 않는 '엘'(El)이었다. '엘'(El) 신은 그의 자녀들 중에 싸움이 있을 때 최종 판결자가 될 권리만을 소유하고 있을 뿐 그 외의 권리를 자식들에게 위임해 버린 신이었다. 가나안 신화에서는 그가 북극 지방에서 모인 신들의 회의를 사회 본 장소가 북쪽의 '사폰산'(Mount Saphon)이었다고 하는데 이 산과 셈족인들의 관계는 마치 헬라인과 '올림푸스산'(Mount Olympus)과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2) '엘'(El)의 배우자 '아세라트'(Asherat)
우가릿 본문들에 의하면 '엘'(El)의 아내는 '아세라트'(Asherat)로 표기되고 있는데 그녀는 '바다의 여신'(Lady of the Sea)을 의미하였다. '아세라트'(Asherat)는 '아세라'(Ashera)라는 형태로 구약성경 중 약 40번 가량 나타나는데 이 우상은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통렬히 비난했던 다산 의식 때에 바알 제단 앞에 세워졌었다.
3) 가장 중요했던 우상 '바알'(Baal)
비록 '엘'(El)이 가나안 만신전의 최고신이었으나, 실제적으로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많이 섬겼던 신은 '바알'(Baal)이었다. 그는 '주인'이라는 뜻으로서 폭풍의 신 '하닷'(Hadad)과 동일시되며 주로 곡물의 발아와 성장, 양떼와 소떼의 증가 및 종족의 생산력을 허락하는 '다산의 신'으로 숭배되었다. '바알 숭배'는 엄청난 간음과 매춘을 동반한 의식이었는데 '바알'을 섬기는 산당에는 남창과 여창들이 득실댔고 그들이 간음할 수 있는 여러 개의 방들이 마련되어 있었다(참조,
왕상 14:23, 24;
왕하 23:7). 한편 '바알'은 숭배의 방법과 대상에 따라 여러 가지의 형태로 분산 발전되었는데, 그 대표적이 것들은 바알 브올'(Baal-Peor;
민 25:3-5), '바알 갓'(Baal-Gad;
수 11:17), '바알 세붑'(Baal-Zebub;
왕하 1:2), '에스 바알'(Esh-Baal;
대상 8:33) 등이다.
4) '바알'의 배우자 '아나트'(Anat)
가나안 종교의 가장 중요한 신이었던 '바알'(Baal)의 누이요 배우자인 '아나트'(Anat)는 비록 '동정녀'(Virgin)라는 의미의 별명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녀는 오히려 적극적이고 파괴적인 정열의 여신이었다. 그녀는 전쟁의 여신이요 섹스(Sex)의 여신이었다. 먼저 그녀는 과격한 '전쟁의 여신'이었다. 그녀는 '바알'(Baal)의 원수들과 싸우며 그들을 때려죽이고 그들의 피 가운데로 걸어 다니며 심지어 그 피에 자기 손을 씻는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바알'을 사로잡아 간 '사망의 신 모트'(Mot)를 공격하여 모트를 칼로 쪼개고 갈아서 그를 땅속에 심을 정도로 매우 과격한 전쟁의 신이었다. 둘째로 그녀는 정열적인 '섹스(Sex)의 신'이었다. 비록 '바알'이 다산의 신으로 숭배되기는 했으나 실제적으로 다산의 일을 책임진 것은 바로 이 아나트 여신이었다. 이러한 아나트 숭배의 음란한 성격은 팔레스틴 지역에서 발굴된 B.C. 2000년대의 나체 아나트의 작은 입상과 토기 액자로부터 잘 알 수 있다.
5) 섹스(Sex)의 신 '아스타르테'(Astarte)
'아세라'(Asherah)나 '아나트'(Anat)와 같이 '아스타르테'(Astarte) 역시 본래 '성'(Sex)에 관계된 신이었다. 그녀에게는 '포도스'(Pothos; 성적 욕망)와 '에로스'(Eros; 성적 사랑)의 두 아들이 있을 정도로 그녀의 애정은 강하고 정열적이었다. 이러한 가나안의 여러 신들은 서로 혼합되어 나타나기도 하였는데 애굽에서는 아나트와 아스타르테가 '안타르트'(Antart)라는 하나의 여신으로 통합되기도 하였다.
6) 자연계를 신으로 섬긴 여러 우상들
가나안의 만신전 '판테온'(Pantheon)에는 자연계를 신격화하여 섬긴 다수의 신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다음과 같다.
① 태양의 신 '쉐메쉬'(Shemesh)
그들이 섬긴 자연신의 으뜸은 역시 '태양의 신'을 상징하는 '쉐메쉬'(Shemesh)였는데 이 '쉐메쉬'는 고대 근동에 널리 퍼져 있어서 성경에 기록된 네 개의 성읍만도 '태양의 궁전'을 의미하는 '베이트 쉐메쉬'(Beth-Shemesh; 성경에서는 '벧세메스'로 표기되었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즉 유대의 세벨라에 있던 성읍(참조,
수 15:10)과 잇사갈의 성읍(
수 19:22), 그리고 납달리 지파에게 분배된 성읍(참조,
수 15:10)과 잇사갈의 성읍(
수 19:22), 그리고 납달리 지파에게 분배된 성읍(참조,
수 19:38), 그리고 애굽 땅에 있던 성읍(참조,
렘 43:13)이 그것이었다.
② 달의 신 '야레아'(Yareah)
가나안이 섬긴 자연 현상의 두 번째 우상은 '달의 신' '야레아'(Yareah)였는데 혹자에 의하면 '여리고'(Jericho) 성의 이름이 달의 신 야레아에서 유래되었으며, 아브라함 시대의 '우르'(Ur)와 '하란'(Haran)에서도 야레아 신이 숭배되었다고 한다.
③ 쉐메쉬와 야레아 외의 자연신들은 태양신의 신봉자인 '체덱'(Sedeg; 의)과 '미숄'(Mishor; 공평), 그리고 새벽과 일몰을 뜻하는 동시에 '하늘에 있는 분들'로 불리는 '샤할'(Shahar)과 '샤렘'(Shalem) 등이다.
7) 곡물의 신 '다곤'(Dagon)
가나안의 신 중에서 '곡물의 신'이요 '농작물의 수호신'으로 숭배된 신은 '다곤'(Dagon)이었다. 하지만 다곤은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더 숭배되었는데 그들은 '가사'(Gaza)와 '아스돗'(Ashdod)에 다곤을 위해 신전들을 세워 숭배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그들은 길보아 산 전투에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죽인 후에도 사울 왕의 머리를 취하여 '벳산'(Beth-Shan)에 있는 '다곤 신전'에 매달았다(참조,
대상 10:10).
8) 사망의 신 '모트'(Mot)
지하계와 땅의 황무지, 그리고 사망을 주관하는 가나안의 또 다른 신은 '모트'(Mot)였다. 사망은 생명의 원수인 고로, 모트 신은 바알의 특별한 원수로 여겨졌으며 약탈자로 나타날 때는 '재앙과 역병의 신'이 되었다. 또한 그는 '지옥에 속한 자'(He of the Pit)라는 의미의 '호론'(Horon)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는데
수 10:8-11절에 언급되어 있는 아얄론 골짜기의 '벧 호론'(Beth-Horon)이 이와 연관된 의미로 해석된다.
9) 바다의 지배자 '얌'(Yam)
바다는 '얌'(Yam)이 지배하였다. 그는 바다뿐만 아니라 땅의 지배권까지도 차지하기 위해 바알과 투쟁하였기 때문에 바알의 또 다른 원수이기도 했다. 그는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깊음의 괴물인 '로탄'(Lotan)이라는 명칭으로도 나타나는데 구약성경에서는 '리바이어던'(Leviathan;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악어로 표기됨)이라 표기되었다(참조,
시 74:13-14).
10) 어린이 희생 제사의 '몰렉'(Molech)
가나안 우상의 가장 사악한 형태는 '암몬'(Ammon)이 '국가신'으로 섬겼던 '몰렉'(Molech), 혹은 '밀곰'(Milcom)이었다. 그는 맹세와 엄한 '서약'의 신이었기에 서약의 신성함에 대한 가장 엄하고 구속력 있는 보증물로서 어린이들의 생명을 요구하였고, 따라서 그에게는 항상 어린이가 희생으로 드려졌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몰렉 숭배는 오래 전 모세의 율법에서부터 금지되었으나(참조,
레 18:21; 20:1-5), 불행하게도 솔로몬 시대부터(참조,
왕상 11:7) 예레미야와 에스겔 시대까지(
렘 7:27-34;
겔 16:20, 21; 20:28, 31; 23:37-39) 이스라엘에서도 시행되었었다.
Ⅳ. 가나안의 정복과 분할에 관한 도표
가나안의 정복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시행되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땅을 거의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그러한 정복만으로 완벽하게 성취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약속은 정복한 땅의 분할이 끝난 뒤에야 완벽하게 성취되었는데 정복지의 분할을 도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참조,
여호수아 도표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