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서는 솔로몬 왕의 통치와 그가 죽은 후 이스라엘 국가가 유다 왕국과 이스라엘로 분열된 때로부터의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기록이다. 이 기록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패와 인간 정부의 실패를 나타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세워 다윗의 위대한 후손을 왕으로 삼아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에게 복종하게 하시려는 때가 올 것임에 대한 강조이다. 이 열왕기를 보다 더 잘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사무엘상하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또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의 역사적 상관성을 전제하고 있어야 한다. 한편 본서의 주제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신명기의 주제인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 시니'(참조,
신 6:4)라는 구절과 같은 맥락을 형성한다. 따라서 본 서론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의 맥락에 비추어 이스라엘의 역사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이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를 보다 깊게 이해하기 위하여 열왕기서의 역사적 배경들과 그 특별한 주제들을 다음과 같이 살펴보기로 한다.
제1부 열왕기의 역사적 배경
Ⅰ. 명칭
열왕기에서의 히브리 명칭은<!ykil;me ; 멜라킴>으로서 본래 한 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헬라어로 번역할 때 두루마리의 분량이 너무 방대했기 때문에 2권의 책으로 나누었다. 그리하여 70인 역에서는 사무엘서에 이어 제3, 4왕국서, 혹은 왕국 제3서, 제4서(The Third and Fourth Book of Kingdom)로 불렸다. 그러다가 '봄버그'(Daniel Bomberg)의 성경(1516-1517)에서 최초로 사무엘서와 분리하여 열왕기상하서를 이러한 분류를 영어 성경과 한글 개역 성경 역시 그대로 인용 열왕기상하로 명명하였다. 한편 이러한 '열왕기'라는 명칭은 솔로몬 왕의 통치에서부터 바벨론 유수에 이르기까지의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들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므로 가장 적절한 명칭이라 할 수 있다.
Ⅱ. 저자와 기록연대
1. 저자
유대인의 탈무드 '바바 바트라 15'(Baba Bathra 15a)에 의하면 '예레미야는 예레미야서와 열왕기 및 애가를 기록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학설은 '스타인뮐러'(Steinmueller)에 의해 지지되었는데 그 이유는 실제로 열왕기에는 예레미야서와 비슷한 부분이 많으며
왕하 24:18-25:30은 렘 52장과 퍽 유사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저작설을 가장 강력히 주장하는 '해버닉'(Havernick)은 열왕기서와 예레미야서의 '공통 어구와 표현'에 대한 목록을 작성하여 양서의 유사성과 동일 인물 저작설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본서의 내용 중에 예루살렘 멸망 후의 바벨론 포로 생활에 대한 기록 등을 예레미야의 기록으로 보기는 어렵다(E. J. Young). 왜냐하면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여호와긴 왕이 포로가 되어 투옥된 기사는 분명히 바벨론에서 기록되었으나 당시 예레미야는 애굽으로 끌려갔기 때문이다(참조,
렘 43:1-8).
한편 성경 비판학자들은 열왕기가 신명기적 저자에 의해 편집되었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열왕기의 내용 가운데 이스라엘 왕들이 우상 숭배한 것 때문에 징벌을 받는 내용과 유다 왕들이 산당의 제단을 제거하지 않았을 때 칭찬 받지 못하며, 히스기야나 요시야 왕이 산당을 제거했을 때 찬양 받는 내용 등은 신명기적 맥락에 따라 기록되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Artur Weiser). 그러나 '영'(E. J. Young)박사는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멸망 후 애굽으로 끌려갔고, 열왕기는 예루살렘이 파멸한 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저자가 예레미야가 아닌 동시대의 다른 선지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본서의 저자에 관한 여러 가지 학설을 근거로 해서 살펴볼 때 열왕기의 저자가 예레미야라는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으나 예레미야라는 확증이 없는 고로 본서의 저자는 예레미야와 같은 시대의 바벨론 포로 생활에 익숙한 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정규남).
2. 연대
열왕기의 저작 연대는 그 내용 자체에 의해서 다른 어느 성경보다도 훨씬 쉽고 명확하게 추측할 수 있다. 본서의 저작연대는 B.C. 561년에서 538년 사이로 추정할 수 있는데 이 시기는 바벨론 포로 말기 시대에 해당된다. 본서가 B.C. 561년 이전에 기록되었다고 볼 수 없는 이유는 이 해에 바벨론 왕 에윌므로닥이 등극하여 여호야긴에게 관용을 베풀어 귀환하도록 조처하였는데 이 일이 열왕기하 맨 끝 부분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며, 또 B.C. 538년 이후에 기록되었다고 볼 수 없는 이유는 이 해에 스룹바벨 인도 하에 제1차 포로귀환이 있었는데 열왕기 기자가 이 중요한 사건을 알고 있으면서도 기록하지 않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열왕기서가 B.C. 561년에서 B.C. 538년 사이에 기록되었음을 쉽게 추정할 수 있다.
Ⅲ. 기록목적
1. 역사적인 목적
본서의 내용을 살펴볼 때 열왕기의 역사적인 기록 목적은 단순히 히브리 민족의 역사적인 사실들을 기록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보이지 아니하는 통치자이신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적 맥락에서 삶의 근원적 문제인 신정사를 기록하려는 데 있다. 이에 대해 '쿡(Charles C. Cook)'은 이스라엘이 흥하고 번영을 누렸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신앙과 순종의 결과이며, 반면에 나라가 쇠퇴하고 패망하게 되던 것은 여러 왕들을 비롯하여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우상 숭배한 결과임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단순히 세속사적인 사건은 많이 생략해서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계명과 관계되는 사건과 통치자나 백성들의 도덕적, 종교적 상황에 대해서 장황하게 서술하고 있다'고 말한다.
2. 교리적인 목적
하나님이 선지자로서 자신의 사명에 충실했던 저자는 자기 나라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크게 나타났음을 가르쳤고 의심할 수 없는 사건들, 특히 율법의 약속과 경고들이 하나도 어김없이 성취된 사실들을 기록함으로 백성들이 순전하던 옛 신앙과 순종의 자세로 돌아갈 것을 역설했다. 뿐만 아니라 함께 포로되어 온 동족들에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세우신 그들과의 언약을 준수하고 유일신 하나님을 끝까지 섬기며 신앙할 것을 권면 하고자 하였다.
3. 기독론적 목적
본서가 쓰여진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법, 곧 신명기적 율법과 모세 율법의 완전한 성취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또 따르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 법칙을 이스라엘 역사의 왕정과 백성들의 삶을 통해서 나타내려는 것이다.
Ⅳ. 특징과 구조
1. 특징
열왕기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역사의 핵심부를 신명기적 신학의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으로 이루어지는 역사이며, 또 그것은 궁극적으로 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법칙을 의미하므로 본서에서는 그 어떤 계명보다도 우상 숭배에 대한 계명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으며, 우상 숭배를 가장 극심한 죄악으로 단정하고 있다. 둘째, 본서를 역대기와 비교 검토해 볼 때 마치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관계처럼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역대기에서는 성스러운 계통적 역사, 즉 정통적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 반면에 열왕기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 왕권적 흥망성쇠를 비교적 적나라하게 사실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열왕기와 역대기를 비교해보면 다음 도표와 같다 (참조,
열왕기상하 도표1).
2. 구조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의 열왕기 구조를 살펴볼 때 왕상 전반부는 솔로몬 왕의 통치에 관한 기록이고 그 후반부는 백성들의 불순종과 환난을 기록하면서 남북 두 왕국을 번갈아 서술하고 있으며 엘리야의 사역을 부각시키고 있다. 반면 왕하의 첫째 부분은 분열 왕국의 약 130여년 역사를 말하고 있고(1-17장), 후반부에서는 남은 왕국의 135년간의 역사를 언급하고 있다(18-25장). 이에 자세한 내용적 구조는 아래의 도표 2, 3을 참조하라 (참조,
열왕기상하 도표2), (참조,
열왕기상하 도표3).
제 2 부 특별한 주제들
Ⅰ.솔로몬의 왕권통치
솔로몬의 왕권은 그 배경적 요인에 있어서 다윗의 왕권과는 상당히 다른 차원에서 시작된다. 우선 개인적 상황에 있어서도 다윗은 광야와 들판에서 양을 치며 자랐고 극심한 고난과 망명생활을 경험한 자인데 비하여 솔로몬은 궁중의 호화로운 안락과 평안한 분위기 속에서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이 자란 왕자였다. 따라서 다윗의 성격은 능동적이고, 전투적인 면에서 특별한 유능함을 지녔던 반면에 솔로몬은 수동적이며 사색형의 왕이었다. 이러한 솔로몬은 부왕이 확장한 영토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성전 건축과 그 외의 토목 공사 등으로 내실을 기하였다. 또 그가 그런 정책을 쓰기 위하여서는 자연히 많은 경비와 노동력이 필요했는데, 그러한 것들을 충당시키기 위해서 그는 외국과의 무역을 증진시켰고, 국민에게 많은 세금과 부역을 부담시켰다. 내실을 기하는 정책으로 나라는 크게 번영하였으나 마침내 솔로몬은 영적으로 점점 타락하여 하나님의 책망을 들어야 했고,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결과로 왕국의 분열을 초래하게 됐다.
1. 정치
부왕에게서 넒은 영토를 물려받은 솔로몬은 그 영토를 잘 보전시키기 위해 외국과의 폭넓은 관계를 맺었는데 그 방법으로 당시에 동맹을 맺는 수단이었던 결혼 정책을 이용하였다. 그가 모압, 암몬, 시돈, 헷 족속 등의 여인들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것은 이 나라 백성들과 동맹을 맺고 있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1) 애굽과의 동맹
애굽과의 동맹 역시 다른 많은 동맹국들처럼 바로의 딸과의 결혼에 의해 이루어졌다(참조,
왕상 3:1). 당시의 근동 정세에서 애굽의 위치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는데 어떤 학자들에 의하면 애굽은 비록 타국의 왕이 청혼한다 할지라도 공주를 출가시키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가 당시의 주변 국가들에게 크게 인정받는 지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동맹은 솔로몬 통치 초기에 있었던 것이고, 바로에 의해서 인정되어진 이 명예는 자신의 업적보다는 다윗 왕이 이루어 놓은 공적의 지대한 영향이었을 것이다. 솔로몬이 바로의 딸을 위하여 특별히 궁전을 지어 준 것을 보면 바로와 맺은 동맹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참조,
왕상 7:8). 그는 또 이 결혼을 통해 '게셀'(Gezer)을 획득하였는데(참조,
왕상 9:16) 후에 솔로몬은 이곳을 므깃도와 함께 국방상 중요한 요충지로 건설하였다. (참조,
왕상 9:15).
2) 두로와의 동맹
솔로몬이 맺은 또 하나의 중요한 동맹은 두로(Tyre)와 히람과의 동맹이었다. 솔로몬의 아내 중 '시돈 여인'은 아마도 히람 왕의 딸이었을 것이다(참조,
왕상 11:1). 당시의 두로는 아크레(Acre)만 북쪽 240km정도의 해안지대를 주관하고 있는 페니키아의 중심지였고, 이 나라는 일찍이 지중해 주변의 많은 지역을 식민지로 갖고 있었으며 다른 나라들과 무역이 활발한 해상 국가였다. 솔로몬은 특별히 이 나라의 백향목과 잣나무를 필요로 했으며, 그 대가로 많은 밀과 맑은 기름을 보내주었다(참조,
왕상 5:2-11). 솔로몬의 히람 왕과의 무역은 목재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솔로몬은 성전 건축과 그 밖의 공사를 위하여 백향목과 잣나무 외에도 금을 제공받았고(참조,
왕상 9:11), 건축 기술자들을 원조 받았다(참조,
왕상 5:18). 솔로몬은 그 대가로 성전과 궁전들이 완성되었을 때 20개의 성읍을 히람에게 주었으나(참조,
왕상 9:11) 히람은 이 성읍에 대해서 불만족을 표시하면서 나중에 다시 돌려준다(참조,
왕상 9:12).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이들 두 나라간의 외교적 관계가 깨어지지는 않았는데 이 사실이 그 이후에 히람이 솔로몬과 합작하여 해상 무역을 실시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충분히 알 수 있다.
3) 스바 여왕의 방문
외국에서 찾아온 솔로몬의 방문객들 중에서 가장 특별한 인물은 아라비아의 남쪽 끝에서 온 스바(Sheba) 여왕이었다. 이 나라는 현대의 '예멘'(Yemen)으로 추측되어지는데 솔로몬의 무역선들이 이 나라의 항구에 들어갔던 것 같다. 이 여왕의 멀고도 긴 여행길의 목적은 대상 통로에 의한 그녀의 무역이 솔로몬의 상업 선에 의해 위험한 지경에 이르게 됨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것이었고, 또 여왕은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솔로몬의 훌륭한 부와 지혜를 보러 온 것이었다. 스바 여왕은 솔로몬에 대한 예물로 금 120달란트를 가져왔고 돌아갈 때는 많은 예물과 함께 자기가 바라던 모든 것을 확약 받고 만족하여 돌아갔다.
2. 경제
솔로몬은 성읍을 요새화하고 많은 상비군과 궁중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풍부한 자금이 필요했는데 그 자금 원을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충당해 갔다.
1) 세금과 공물
솔로몬 왕은 세금과 공물 징수를 위하여 나라를 12군으로 나누어 각 지역마다 관리를 두어 왕과 왕실을 위하여 식물을 준비케 하되 각 지역마다 1개월분씩을 담당케 했다(참조,
왕상 4:7-28). 또 사람들을 위한 양식뿐 아니라 말들을 위하여 보리와 짚도 징수시켰는데 이러한 징수들은 모두 다 강제적인 의무였었다. 이후에 르호보암이 왕위에 올랐을 때 백성들이 세금과 부역을 줄여 줄 것을 강력히 호소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연유한 것이었다(참조,
왕상 12:3, 4).
2) 부역
다윗이 가나안 원주민을 부역으로 동원시켜 말년에는 그 일을 맡는 관리까지 두었던 것처럼(참조,
삼하 20:24), 솔로몬은 아직 그 나라에 살고 있던 많은 가나안인들을 부역에 동원시켰을 뿐 아니라(참조,
왕상 9:21, 22) 이스라엘 삼만이나 부역에 참여시켜 레바논의 백향목을 벌목케 하였다. 이들은 노동의 대가를 받지 않은 정부의 징용군이었다.
3) 외국의 조공물과 예물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은 수입은 외국으로부터 들어오는 공물과 예물이었다. 그 명확한 분량은 알 길이 없으나, 금은 향품과 의복 등이 해마다 들어왔던 것 같다(참조,
왕상 10:25). 하나의 실례로서 스바 여왕이 가져온 예물만도 금이 120달란트이며, 그 외에도 많은 보석과 향품이 있었다(참조,
왕상 10:2, 10).
4) 무역상
솔로몬 왕은 멀리 있는 지역에까지 무역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이 무역상에서 상당한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무역을 위한 통로는 홍해를 통해 남쪽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그는 두로 왕 히람의 도움을 받아 홍해 연안 '에시온 게벨'(Ezion-Gebel)에서 배를 만들어 멀리 '오빌'(Ophir)에까지 왕래하면서 금과 은 상아와 잔나비와 공작을 수입했고(참조,
왕상 9:26-28; 10:22, 23), 귀한 백단목과 보석들을 실어왔다(참조,
왕상 10:12). 또 상당한 분량의 구리 광석이 사해와 아카바 만 사이에 있는 아라바 골짜기에서 생산되었는데 충분한 구리 공급을 위해 솔로몬은 에시온 게벨에 훌륭한 제련소를 세웠으며, 다시스에서 가져오는 많은 철 등은 금속물들을 주조하여 각종 건설에 사용하였다. 솔로몬은 또한 말과 병거에 대한 무역도 수행하였다. 그는 말과 병거를 자신이 쓰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남북 무역 통로라는 전략적 위치를 사용하여 다른 나라들에 중간 무역을 실시하였는데 실제로 애굽과 '쿠에'(Kue)에서 가져다가 헷 족속과 아람 사람들에게 팔았다(참조,
왕상 10:28, 29). (참조,
열왕기상하 도표4)
3. 건축
많은 성 읍들을 요새화하고 훌륭한 제련소를 지은 것 외에도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응대한 건축물을 세웠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성전 건축과 왕궁 건축이었다.
1) 성전건축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다윗은 성전을 건축하기를 열망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거절하셨다. 그러나 그는 거절당한 후에도 성전 건축을 위해 많은 자료와 물자를 비축하였다. 솔로몬도 성전을 짓기 전에 두로와 협상하는 일(참조,
왕상 5:13), 작업의 구체적인 조직(참조,
왕상 5:14-16), 자재를 구입해 성전 지을 장소로 옮기는 일(참조,
왕상 5:17, 18) 등 일체의 준비를 갖추는 데 적어도 삼 년이 소요되었다. 솔로몬이 실질적으로 그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한 것은 즉위한 지 4년째 되는 봄, 즉 B.C. 966년(참조,
왕상 6:1)이었고 7년 후 즉 즉위 11년이 되는 B.C. 959년 가을에 완공하였다. 그리고 그 장소는 모리아산이었는데(참조,
대하 3:1) 이곳은 다윗 시대에 제사를 멈추게 하는 제사를 지냈던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었으며(참조,
삼하 24:16-25), 아주 오래 전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받았던 장소이다(참조,
창 22:2).
이 성전의 규모와 내부 구조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성전의 크기: 길이 27m, 넓이 9m, 높이 13.5m 이며, 전체 길이 3분의 2가 성소, 3분의 1이 지성소로 구분되어졌으며, 성전 전체는 석조로 지어졌지만 백향목으로 된 서까래는 금으로 입혔다. 그리고 성전 벽에는 돌아가며 다락을 만들었고, 다락엔 골방들을 만들었다. ② 지성소에는 속죄소와 두 그룹과 함께 언약궤를 소장시켰다. 두 개의 그룹은 올리브나무를 깎아서 만들었는데 그 외부는 금으로 입혔고 높이가 4.5m이었다(참조,
왕상 6:23-28;
대하 3:10-13). ③성소에는 '정금제단'(참조,
왕상 7:48)과 양쪽에 정금 등대 다섯 개씩(참조,
왕상 7:49), 그리고 진설병이 10개 놓여 있었다(참조,
왕상 7:48;
대하 4:8). ④ 성전의 벽과 뒤에는 3층 높이의 저장실이 있었고(참조,
왕상 6:5-10) 성전 주위에는 뜰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넓이 9m, 높이 4.5m의 큰 놋제단이 있었고, 직경 4.5m의 놋대야와 양쪽에는 5개씩 작은 놋대야가 있었다. ⑤ 성전 입구에 두 개의 큰 기둥이 세워져 잇는데 그 크기는 높이 8.2m, 둘레 5.4m이며, 우편 것을 '야긴', 좌편 것을 '보아스'라고 이름했다. 이 두 기둥은 이 성전의 영원성과 능력을 상징한다 (참조,
열왕기상하 도표5). ⑥ 성전과 성막과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참조,
열왕기상하 도표6).
2) 성전봉헌
솔로몬은 성전을 완공한 후 가장 먼저 다윗이 만든 장막에서 언약궤를 성전의 지성소로 옮겼다. 성전의 다른 것들은 새로 제작한 것들이지만 이 궤는 모세 당시 시내 광야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언약궤를 성전 지성소 안에 넣을 때 그 옛날 그 궤를 성막에 넣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내는 '구름'이 성전에 가득 찼다(참조,
대하 7:1-3). 그 이후 7일 동안 총 이만 이천의 소와 십이만의 양을 제물로 드렸는데(참조,
왕상 8:62-66;
대하 7:4-11) 이 제사를 마친 후 여호와께서는 두 번째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다윗의 행함같이 그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때 축복을 허락할 것임을 약속하셨다(참조,
왕상 9:1-9;
대하 9:1-12).
3) 다른 건축물
성전 근처에 또 다른 건축물들을 세웠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왕궁이었다. 솔로몬은 왕궁을 짓는 데 성전 짓는 기간보다 6년이나 더 걸린 것을 미루어 보아 방대한 규모의 공사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레바논 나무 궁'을 지었는데 그것은 아마 백향목으로 지어졌을 것이고 이 별궁들에는 무기를 저장하였다(참조,
왕상 10:16, 17). 그 외에도 옥좌와 궁들을 잇는 '기둥의 복도', 상아로 만들어 정금으로 입힌 솔로몬의 6층 보좌(솔로몬이 이 보좌에서 재판을 했음), 바로의 딸을 위한 특별 궁들이 있었다. 이렇게 성전 건축과 다른 건축물을 짓는 데만 20년이 걸렸다.
Ⅱ. 왕국 분열의 배경: 솔로몬의 영적인 타락과 징벌
1. 영적인 타락
솔로몬은 이스라엘을 부강하고 번영케 한 능력의 왕이었다. 그의 통치 기간의 대부분은 거의 완전하여서 솔로몬 때처럼 백성이 평안하게 산 적이 과거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솔로몬의 출발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고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으로 지혜와 총명을 받아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끝까지 순전한 마음으로 순종하지 못하고 세월이 흐를수록 그의 신앙이 변질되어 많은 범죄를 저질렀는데 솔로몬의 이러한 영적 타락은 그 나라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가 이토록 신앙을 저버리고 타락한 이유는 이방 여인을 정책적으로 맞아들이는 혼인 정책 때문이었다. 이방 여인들은 솔로몬의 궁에서도 각각 자기들의 신들을 숭상했고 솔로몬 자신도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Chemosh)와 아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Molech)을 위하여 산당을 지었다(참조,
왕상 11:5-8). 이러한 종교적 관용 정책은 이방 국가들의 상당한 호의를 얻었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징벌을 면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그에게서 빼앗을 것을 말씀하셨는데(참조,
왕상 11:11) 그 구체적인 징벌은 다음과 같다.
2. 타락에 대한 징벌
① 하닷: 원래 하닷은 에돔 왕가의 자손으로 다윗 당시 요압이 이곳에서 큰 살육을 감행했을 때 에돔 왕의 신복들이 애굽으로 피신시켰던 유일한 생존자이다. 그는 그 후 계속 애굽에 피신해 있다가 다윗과 요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애굽에서 돌아와 에돔의 왕이 되었는데 그는 늘 솔로몬의 골칫거리로 등장한다. 솔로몬 말기에 그는 더욱더 큰 세력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힌다.
② 르손: 르손은 본시 소바 왕 하닷에셀의 신하였던 자였으나 소바 왕국이 다윗의 정벌로 멸절할 때(참조,
삼하 8:3-12) 그는 남은 자들을 거느리고 다메섹에서 왕이 된 후 솔로몬을 대적하는 북쪽의 강한 세력으로 부각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솔로몬으로부터 쇠퇴해 갈 때부터 솔로몬이 죽을 때까지 에돔과 다메섹 지역은 솔로몬의 권한으로부터 독립되었다.
③ 여로보암: 가장 결정적인 대적자로 나타난 자는 여로보암이었는데 그는 유능한 용사로서 솔로몬의 밀로(Milo)를 지을 때 북방 지파의 감독자로 선발된 자였다. 그런데 어느 날 선지자 아히야(Ahijah)가 나타나 자신의 새 옷을 열두 부분으로 찢어 열 부분을 여로보암에게 주면서 솔로몬이 죽은 후 이스라엘의 열 지파를 그가 다스리게 되는데 만일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지 않으면 큰 축복을 주리라고 약속한다. 그러나 이 소식을 솔로몬이 알게 되고 그를 죽이려 하자 그는 애굽으로 피해 시삭 왕의 보호를 받고 있다가 솔로몬이 죽은 후에 다시 돌아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대저가여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즉위한다.
위에서 언급한 솔로몬의 타락과 그에 대한 징벌로서 일어난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건을 다음과 같은 간단한 도식으로 정리해 보자 (참조,
열왕기상하 도표7).
3. 왕국 분열의 역사적 배경
왕국이 분열하게 된 것이 어떤 특별한 계기를 통하여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이스라엘 지파 사이에 누적되어 있던 불화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한 솔로몬에 의해 비로소 징계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실상 유다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극심한 불화관계에 놓여 있는 사이였는데 유다는 가장 큰 지파로서 광야 생활에서부터 늘 이스라엘의 지도적 위치를 차지해 왔고 이와 반면에 에브라임 지파는 요셉의 후손으로서 야곱에 의해 므낫세의 윗자리에 앉게 되었지만 늘 작은 지파로 소외감을 느꼈었다. 그래서 종종 직접적으로 그 불만을 표면화시켜 기드온(참조,
삿 8:1-3)과 입다(참조,
삿 12:1-6)에게 항의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유다 지파를 향한 이러한 반발은 에브라임 지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사울이 죽은 후 다윗이 왕위에 올랐는데도 불구하고 북방지파들은 다윗을 왕으로 여기지 않고 이스보셋을 마하나임에서 2년간이나 왕으로 섬긴 것과 압살롬의 반역 직후 세바가 이끄는 북방 지파들이 불만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왕위를 계승하는 르호보암은 지파들의 연합에 세심한 관심을 가졌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는 백성들의 탄원을 듣지 않고 잠재되어 있는 반발감을 더욱 격화시켜 결국은 완전한 왕국 분열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
Ⅲ. 북 왕국 이스라엘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대로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의 열 지파를 다스리게 됨으로 이루어지는 북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으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왕(19대) 호세아까지 약 207년간(B. C. 931-724)의 통치기간을 갖는다. 그러나 이들의 역사는 한마디로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역사이고 불순종의 역사였다. 북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에 대해서 설명하여야 하겠지만 본 서론에서는 지면상 각 왕조별로 가장 중요한 왕들의 치세만을 언급하기로 한다.
1. 초대 왕 여로보암(B.C. 931-B.C. 910)
1) 그의 정책
열 지파를 다스리게 된 새 왕 여로보암이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으로 국가를 이끌어 나갔는지는 자료와 기록의 미비상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르호보암의 폭정에 반발하여 세워진 나라인 만큼 세심한 배려를 가지고 치리 하여 세금과 부역 문제를 보다 신중하게 다루었을 것으로 추정된 그는 왕위에 오르면서 우선 세겜을 수도로 정하였고 나중에 요단 강 동쪽에 위치한 부느엘로 옮긴 듯하다(참조,
왕상 12:25). 그러다 결국에는 디르사(참조,
왕상 14:17; 15:21; 33:16)를 항구적인 수도로 삼았는데 이곳은 세겜에서 북동으로 약 9.6km되는 곳으로 현대의 텔 엘 파라(Tell-el-Farah)로 생각된다. 새 왕국을 다스려야 하는 여로보암은 큰 근심거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절기 때마다 성전이 잇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국가나 왕위 권위보다도 종교적 권위 앞에 더욱 순종적인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예배드리러 갔다가 종교적 감화로 인해 동요되어 자신의 북 이스라엘 통치가 위협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해결책으로 남쪽의 벧엘과 북쪽의 단에 새 예배 장소를 세워 그곳에 각각 금송아지와 제단을 설치하고 레위인이 아닌 보통 사람들로 제사장을 삼아 절기 때마다 백성들의 예루살렘 예배를 대신케 했다.
2) 여로보암의 범죄와 그에 대한 징벌
그는 북쪽과 남쪽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그것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참조,
왕상 12:28, 29)이라 말할 뿐 아니라 바알까지 섬겼다(참조,
왕상 14:9; 14:15). 이렇듯 하나님을 향한 참된 예배를 이방의 제사 의식과 혼합하는 죄악의 허용은 이후에 아합과 이세벨이 바알신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배하도록 하게 하는 길을 열어 준 셈이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통하여 여로보암에게 심판을 경고하시는데 다윗 가문에 요시야라고 하는 아들이 나와 여로보암의 제사장들의 뼈를 불사를 것이라 말한다(참조,
왕상 13:1-3;
왕하 23:15, 16). 그러자 여로보암은 손을 펴서 선지자를 잡으라고 명하려 했으나 그 편 손이 말라 거두지 못하고 비로소 선지자에게 간청하여 회복되었으나 그 예언만은 나중에 그대로 이루어졌다(참조,
왕상 23:15, 16). 한편 이와는 달리 아히야 선지자도 아들을 고치러 온 여로보암의 부인에게 여로보암의 큰 죄를 꾸짖고 그 가문이 완전히 멸할 것을 예언하는데 이 예언 역시 그대로 이루어져 그의 22년간의 통치 기간 후 왕에 오른 아들 나답은 위에 올라 2년을 지내다가 바아사에게 피살된다.
2. 바아사 왕과 그 왕가
나답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바아사는 24년이란 통치를 하였으나 선왕들의 죄악들을 답습하고 평생을 전쟁으로만 일관했다는 기록(참조,
왕상 15:28-34)뿐이다. 다음 왕 엘라도 2년간을 통치하다가 시므리에 의해 피살당하고 만다.
3. 오므리 왕조(B.C. 885-B.C. 841)
1) 오므리의 통일
엘라 왕 당시에 오므리는 깁브돈에 출정하였는데(참조,
왕상 16:16, 17) 이때 후방에 남아 있던 시므리가 반란을 일으켜 왕이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오므리는 깁브돈에서 왕이 되어 본국의 수도인 디르사에 돌아와 성을 포위하여 함락시키는데 성이 함락됨을 본 시므리는 7일 통치기간을 마감하고 왕궁에 불을 놓고 자살한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쪽으로 갈라져 절반을 '디브니'를 좇고 절반은 오므리를 좇으나 이런 상태가 4년간 지속되다가 결국은 오므리는 디브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새 왕조를 세운다.
2) 오므리 왕의 통치(B. C.885-B. C.874)
시므리를 죽이고 왕이 된 오므리가 국가를 통치하면서 북 이스라엘 왕국은 안정을 누리기 시작한다. 오므리 왕조는 오므리, 아합, 아하시야, 여호람인데 이들은 근 44년에 걸쳐서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이중에서 특히 오므리는 강력한 군왕으로서 1세기 후 생존했던 앗시리아 통치자들도 이스라엘을 '오므리의 땅'으로 부를 정도로 북 이스라엘 전체에서 가장 유능하고 전투적인 왕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공적은 남겼다.
(1) 사마리아를 새 수도로 삼음
성경 상에 언급되는 오므리 왕의 업적은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겼다는 것뿐 인데 그는 세멜에게서 산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을 건축하고 그 건축한 성 이름을 사마리아라고 일컬었다(참조,
왕상 16:24). 그가 수도를 옮기고 새로 성읍을 건축한 가장 큰 동기는 외부의 군사적 공격에 대비하려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사마리아는 거의 공격이 불가능한 난공불락의 요새였었다. 이 성읍은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계속 이스라엘의 수도로 사용되었다.
(2) 모압 정벌
오므리 왕은 다윗과 솔로몬 왕이 지배했던 영토를 다시 확장해 갔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모압을 속국으로 하여 요단 동편 땅의 남부를 지배하게 된 일이다. 모압은 남부 지역의 요충지였는데 그곳은 북부에서 아라비아와 홍해에 이르는 무역로가 있을 뿐 아니라 모압 계곡은 비옥한 땅이어서 기름진 농토로 적합하였으며 동에서 서로 뻗어 있는 광야는 목축지로 적합한 곳이었다. 이렇게 지정학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좋은 조건을 갖춘 지역인 모압 땅은 이스라엘의 세력 확장을 위해서 상당히 긴요한 곳이었다.
(3) 페니키아(베니게)와의 동맹
그는 자기 아들 아합과 페니키아 공주 이세벨을 결혼시킴으로 말미암아 페니키아의 엣바알(Ethbaal)과 동맹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이스라엘은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비롯한 많은 상품을 수입해 오고 페니키아 인들은 남쪽으로 가는 무역로를 제공받고 이스라엘로부터 곡식과 올리브기름을 수입해 갔다. 또 이들 각 나라는 다메섹의 아람 세력을 대항하기 위하여 군사, 정치적인 동맹 체제를 유지했다. 이 동맹이 당시에는 현명한 정치적 판단이었으나 이스라엘에게는 바알 숭배의 길을 넓게 열어주는 패역에의 문이었다. 이같이 오므리 왕은 강력한 정치적 역량으로 이스라엘을 번성케 했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크게 패역하여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한 시대의 왕이었다. 때문에 성경에서는 그에 대한 6, 7절의 기록밖에는 특별한 언급이 없다(참조,
왕상 16:23-28). 오므리의 아들 아합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기록이 있으나 주로 하나님 앞에서의 범죄한 부분들이고 아합의 두 아들 아하시야와 여호람에 대해서도 성경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성경 기자는 이스라엘의 정치사보다는 종교적인 면의 타락상을 크게 부각시켜 오히려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열왕기의 저자가, 신명기적 관점, 즉 '하나님 앞에서의 순종적 삶'의 관점에서 본서를 기록했다고 말할 수 있다.
3) 아합 왕의 통치 (B.C. 874-B.C. 853)
아합 왕은 부왕 오므리를 이어 강력한 정책으로 영토를 확장시키기 위하여 요단 동편 땅을 계속 지배하려고 힘썼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큰 장애물인 다메섹을 공략하여야 했다. 그래서 아합 왕은 베니게와 동맹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다메섹을 대항해 나가려 했으며 남방 유다와도 전략적으로 화친하여 아람을 견제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국가적 확장을 위하여 동맹 관계를 맺은 아합 왕의 부인인 베니게의 이세벨은 바알신의 열광적 신봉자였으며 급기야는 이스라엘을 바알화 하려는 자였기에 이스라엘은 큰 종교적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1) 바알 숭배 사상
북 왕국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특징적인 인물은 아합과 이세벨이었는데 이들이 이토록 유명한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도말 되었던 바알 숭배가 이세벨을 통하여 이스라엘에 다시금 만연하게 된 것이다. 표독스럽고 고집 센 이세벨은 자신의 종교와 여호와와 공존하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없었기에 바알 숭배만을 이스라엘의 국교로 삼으려 했으며 그 정책을 위해서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살해하였다(참조,
왕상 18:4). 앞서 언급한 바대로 여로보암의 금송아지 숭배를 시초로 점점 더 극악하고 비윤리적인 우상 숭배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깊게 부패시켜 갔는데 그것은 바알을 예배하는 의식은 종교적 매춘 행위를 포함한 말로 다할 수 없는 타락을 초래케 했기 때문이다. '바알 선지 450인과 아세라 선지 400인은 모두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자'(참조,
왕상 18:19)라고 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세벨의 궁전은 바알 선지자를 대량 양산하는 일종의 학교였는데 이것은 당시의 이스라엘의 종교적 혼란과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지를 말해 준다.
(2) 아합 왕 때의 전쟁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아합 왕의 대적은 벤하닷이었다. 그들은 요단 동편 땅을 놓고 늘 긴장 상태에 있었는데 열왕기상 20장에 의하면 아람 왕 벤하닷이 그에게 속한 열 왕들을 거느리고 먼저 사마리아를 공격해 왔으나 벤하닷은 이 공격에 실패하였고 재차 대오를 정열 하여 공격하였을 때에도 사마리아의 동북방 아벡에서 대패하고 만다(참조,
왕상 20:22-34). 그 이후로는 그 세력이 꺾어져 당분간 두 나라 사이에는 전쟁이 없었다. 아벨을 정복한 아합은 삼 년 후 남쪽도시 길르앗 라못을 점령하기 위하여 아람 군대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남유다 왕 여호사밧도 협공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아합은 전사하고 이때에 이스라엘의 지배 하에 있던 모압까지도 독립하게 된다. 이처럼 아합 시대에는 요단 동편을 중심으로 아람과 모압과 더불어 각축을 벌이던 시대였으나 그 중에서도 아합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4) 엘리야의 사역
아합 왕의 통치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뛰어난 선지자가 있었는데 바로 엘리야였다. 아합 왕과 이세벨의 여러 기록들과 그 후의 기록들은 이 선지자의 사역을 보여 주기 위한 하나의 배경적 사건이라 할 정도로 성경은 많은 지면을 엘리야의 사역을 기록하는데 할애하였다. 엘리야는 길르앗에 거하고 있는 디셉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그의 개인적 신상에 대해서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다(참조,
왕상 17:1).
① 그의 첫 사역은 우상 숭배로 인해 극악한 죄악 중에 잇는 이스라엘에 큰 기근을 내리실 것이라고 아합 왕에게 선포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명령대로 아합 왕에게 하나님의 저주를 선포한 후에 아합의 보복을 피해 42개월 동안 그릿 시냇가에 피신해 있었는데 그 기간에 하나님께서는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엘리야에게 제공하였고 엘리야는 시돈 땅 사르밧 과부에게 기적을 베푼다.
② 두 번째 사역은 그 후 3년이 지난 때의 일로서 유명한 갈멜 산상에서의 우상 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엘리야는 하나님만이 참신임을 이스라엘 전체에게 선포하고 3년 이상 계속되었던 가뭄을 해소시켰으며 바알 선지자 450인을 죽이는 대승을 거둔다.
그러나 이러한 기적과 승리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자신을 죽이겠다는 이세벨의 위협에 두려움을 느끼고 호렙산으로 가는 도중에 심신이 피로하고 좌절하여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는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로하시며(
왕상 19:4-7), 호렙산에 이르렀을 때에는 '크고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이 차례로 지나간 후에 '세미한 소리'로 그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신다(참조,
왕상 19:12).
그리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소유한 엘리야는 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며, 또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뒤를 잇게 하라는 분부를 받는다(참조,
왕상 19:15, 16). 이 외에도 나봇의 포도원 사건(참조,
왕상 21:1-29), 아하시야의 병을 바알세붑에게 묻는 행위를 꾸짖는 사건 등의 사역을 행한 후에 마지막에 엘리사를 후계자로 세우고 승천한다(참조,
왕하 2:1-11).
5) 오므리 왕가의 최후
오므리 왕가의 마지막 왕 요람 왕은 예후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데 이것은 20년 전에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통하여 행했던 예언의 성취였다(참조,
왕상 19:15-19; 21:21-24). 나중에 선지자 엘리사는 선지자의 아들 중에 한 사람을 보내어 여호람 대신 예후에게 기름을 붓고 아합의 집을 숙청하여 지상에서 멸할 것을 지시한다(참조,
왕하 9:1-10). 이에 예후는 길르앗 라못에서 자기가 왕이 되었음을 선포하고 아람 왕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이스르엘에서 치료받고 있는 요람 왕을 죽이고 요람 왕을 문안 왔던 유다 왕 아하시야도 므깃도에서 죽인다. 그리고 곧 이스라엘로 돌아와서 이세벨을 죽였다(참조,
왕하 9:30-37). 그 후 사마리아에 있는 지도자들이 예후를 두려워하여 70인의 아합 왕자 모두를 살해하고 그 머리를 그 앞에 가져옴으로 오므리 왕가는 전멸하였고 오므리 왕가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예언이 성취된다 (
열왕기상하 도표8).
4. 예후 왕조(B.C. 841-B.C. 753)
오므리 왕가를 이은 예후 왕가는 5대에 걸쳐서 이스라엘 왕국을 다스린 왕조였다. 그들의 통치 기간은 도합 89년간이었으나 오므리 왕가보다 강력한 통치를 이루지는 못하였으며 바알을 제거하는 데에 힘을 쓰는 등 종교적인 차원에서 새바람을 일으켰지만 근본적인 개혁을 일으키지는 못하였다.
1) 예후의 통치(B.C. 841-B.C. 814)
왕위에 오른 예후는 '거룩한 대회'를 개최한다는 모략을 써서 바알의 모든 선지자를 구별한 후 한 사람도 남김없이 멸절시켰으며(참조,
왕하 10:19-24), 바알의 모든 목상을 불사르고 바알의 산당을 파괴하여 변소로 만들었다(
왕하 10:27). 이렇게 종교적인 유혈 숙청을 감행하여 우상을 정화한 것은 악한 가문에 대한 징계인 동시에 우상 제단의 파괴였으므로 여호와께서는 4대가 그를 이어 왕위에 오를 것을 축복하셨으나 그 역시 여로보암이 세운 벧엘과 단에서의 제단을 계속 지속시킴으로 온전한 개혁을 이루지 못해 결국 수난의 역사를 겪게 된다. 이러한 범죄 외에도 예후 왕가가 약화된 이유는 그의 숙청이 너무 과도했다는 데 있었다. 즉 그는 아합의 친족들만 숙청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도와 줄 수 있는 고급 관리들까지도 숙청해 버림으로 스스로 자신을 고립시켜 버렸고 또 숙청의 잔인함을 보고 다른 유능한 사람들도 그에게 등을 돌려 버렸던 것이다.
(1) 다메섹 왕 하사엘의 침공
하나님 앞에 범죄한 예후 왕에 대한 징계로 하나님께서는 아람 왕 하사엘을 사용하셨다(참조,
왕하 10:32, 33). 하사엘이 어떤 정치적인 동기로 이스라엘을 공격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하사엘은 갓 지파와 르우벤, 므낫세의 모든 땅과 길르앗과 밧산을 점령했으며(참조,
왕하 10:23-32), 요단 서편의 이스라엘 본토까지도 공격해 왔던 것 같다. 또 이 하사엘은 여호아하스(B.C. 814-B.C. 798)때도 이스라엘을 크게 위협했고 유다까지 쳐들어가 요아스를 통하여 황금을 조공으로 바치게 했다. 이러한 사실들을 미루어 보아 이때의 이스라엘은 침략을 고스란히 감수해야 할 만큼 나약한 상태였었음이 틀림없다.
(2) 앗수르 왕 살만에셀의 침공
예후는 앗수르의 침공을 받고 앗수르의 살만에셀에게 많은 조공을 바쳐야만 했다. 이러한 기록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고 있으나 살만에셀의 기념탑에 공물이 적혀 있고 이스라엘 왕이 굴복하는 자세로 공물을 바치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 것을 근거로 충분히 추론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 기념비에서 예후를 가리켜 '오므리의 아들'이라 칭한 것은 아마도 앗수르 왕이 오므리 시대에 받은 압박을 염두에 두고 이제는 그러한 압박과 수치를 회복하였음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듯하다.
2) 요아스 왕의 통치(B.C. 798-B.C. 782)
왕위에 오른 요아스는 이스라엘 국력을 점차적으로 회복시켜 나갔다. 그 역시도 통치 기간 중 우상을 섬기는 악한 길을 걸었으나 선지자 엘리사가 죽을병이 걸렸을 때에 찾아가서 통곡하기도 했다. 그때 엘리사는 그에게 활을 잡고 동편 창을 열어 쏘라고 말하면서 그것은 아람을 진멸하는 활이기에 아벡에서 아람을 크게 대파할 것이라 예언했다(참조,
왕하 13:16, 17). 그리고 난 후 활로 땅을 치라고 했는데 이에 요아스 왕은 땅을 세 번만 치자 엘리사는 그를 꾸짖으며 왜 5, 6번을 치지 않았느냐 그리하였다면 아람을 진멸할 것인데 그렇지 못하였은즉 세 번만 이길 것이라고 예언한다(참조,
왕하 13:18, 19). 그 후 그는 엘리사의 예언대로 잃었던 영토들을 벤하닷 2세에게서 빼앗아 국세를 회복하고 벤하닷을 세 번 쳐 승리한다. 또 그는 유다 왕 아마샤의 공격을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벧세메스에서 유다를 이겨서 아마샤를 생포하고 예루살렘의 성전과 궁궐의 보물들과 많은 포로들을 인질로 잡아갔다(참조,
대하 25:22-24).
3) 여로보암 2세의 통치(B.C. 793-B.C. 753)
여로보암 2세는 40년이라는 장기간을 통치하면서 이스라엘을 지중해 연안의 실제적인 중심세력으로 부각시켰다. 그가 지배하던 지역은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였는데 이것은 솔로몬 시대의 세력을 거의 회복한 것이었다(참조,
왕상 8:65). 그는 다메섹을 완전히 장악하여 속국으로 삼고 요단 동편의 모든 땅을 차지하였다. 이처럼 여로보암 2세가 강력한 국가를 형성할 수 있었던 몇 가지 요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스라엘의 가장 숙적이었던 다메섹은 앗수르의 공격으로 심히 약화되었으며, 둘째, 다메섹을 공격했던 앗수르는 북방의 신흥세력인 '우라르트'를 막기 위해서 몰두하고 있었던 때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앗수르 왕들이 계속 미약한 자들이었으므로 앗수르는 국외에 신경 쓸 틈이 없었고, 셋째 여로보암 자신이 훌륭한 통치력을 소유한 유능한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면에는 이스라엘을 돕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했었는데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참조,
왕하 14:26, 27)를 잊어버리고 오히려 나라가 부강해져 감에 따라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악된 길로 치닫는다. 그리하여 여로보암 2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스가랴가 왕위에 오르나 6개월 만에 살룸에 의해서 죽고 이스라엘은 급속도로 쇠퇴해져간다 (참조,
열왕기상하 도표9).
4) 엘리사의 사역
엘리사의 사역은 엘리야의 사역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사역, 즉 바알을 물리치는 일이었다. 엘리야가 그를 만났을 때 그가 열두 겨리의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았다고(참조,
왕상 19:19)한 것으로 보아 그의 가정은 매우 부농이었던 것 같다. 엘리사의 활동 기간은 엘리야보다 더 길었는데 그는 여호람의 재임 초기에서 예후, 여호아하스, 요아스 시대까지 약 50년간 활동한다. 그는 사역에 있어서도 엘리야와는 다른 방식으로 임했는데 그는 자기 성읍이나 때로는 왕궁의 왕족들과 함께 거하기도 하였다. 또 엘리야는 감정의 기복이 상당히 심해 용기를 가지고 활동을 하다가도 금세 좌절하고는 했던 반면에 엘리사는 자제력과 침착한 기질을 소유한 자로서 극적인 전환점이나 변화가 없었다. 또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가 만난 사람들을 도와주고 위로해 주는 자상한 면도 보여 주었다.
그의 사역들은 여러 가지 있는데 중요한 것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차고 넘친 과부의 기름병(참조,
왕하 4:1-7). ② 아들을 얻은 수넴 여인(참조,
왕하 4:8-17). ③ 되살아난 수넴여인의 아들(참조,
왕하 4:18-37). ④ 독이 들은 국을 깨끗케 함(참조,
왕하 4:38-41). ⑤ 일백 명을 먹임(참조,
왕하 4:42-44). ⑥ 문둥병자 나아만을 고침(참조,
왕하 5:1-19). ⑦ 게하시의 죄와 심판(참조,
왕하 5:20-27). ⑧ 잃어버린 도끼를 도로 찾음(참조,
왕하 6:1-9). ⑨벤하닷의 계획을 밝힘(참조,
왕하 6:8-12). ⑩ 아람 군대를 사로잡음(참조,
왕하 6:14-23). ⑪ 포위되어 멸망의 위기에 처한 사마리아를 구함(참조,
왕하 6:24-7:20).
5. 북이스라엘의 쇠퇴와 패망
스가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살룸은 한 달이 지난 후 다시 므나헴에 의해 피살되고 만다. 므나헴의 통치 기간 중 앗수르가 다시 한 번 세력을 떨치는데 디글랏빌레셋 3세가 왕위에 올라 앗수르의 제국적 위치를 회복하였다. 디글랏빌레셋의 B.C. 743년의 원정은 이스라엘까지 영향을 미치어 므나헴에게 공물을 바치도록 하였고 이로써 므나헴은 앗수르의 봉신이 되었다(참조,
왕하 15:19, 20). 므나헴이 죽자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계승하였으나 그 역시 2년 뒤 베가에 의해 암살당한다. 베가는 그 뒤 20년 동안 통치하는데 이 통치 기간 동안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셋 3세가 이스라엘을 공격해 와서 요단 동편과 납달리 땅을 점령하고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간다.
그 후 그는 앗수르의 보호를 받은 호세아에 의해 왕위를 찬탈 당하고 이스라엘은 결정적으로 앗수르에 완전히 점령당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앗수르가 갈릴리와 요단 동편을 점령하려 통합하였고, 호세아 자신도 요단 서편 산지만을 통치하는 봉신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호세아는 살만에셀 5세가 즉위하자마자 애굽과 손잡고 반란을 기도하지만 불행히도 애굽은 분열되어 약화된 상태였기 때문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해 실패로 돌아갔고, 이에 살만에셀 5세는 호세아를 포로로 잡고 강력히 저항하는 사마리아 성을 점령함으로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킨다(B.C. 722).
이스라엘은 B.C. 931-722년까지 약 2세기 동안 9개 왕조 19대 왕이 집권하였다. 그 중에 8명은 암살당하거나 자살하고 대체로 금송아지를 숭배하거나 바알의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었기에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한 왕은 하나도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 그리고 호세아와 아모스 등을 통하여 경고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나 그들은 돌이키지 않다가 마침내는 멸망당하고 만다. 이제 이러한 이스라엘의 열왕들을 도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참조,
열왕기상하 도표10)
Ⅳ. 남유다 왕국
B.C. 722년 북이스라엘이 패망한 후에도 남유다는 586년까지 존속되었다. 유다 왕국의 역사정 배경은 북이스라엘과 거의 비슷하여서 계속적으로 앗수르의 위협을 받았고 남북 관계와 그 나라의 선지자들의 활동도 북이스라엘과 별 차이가 없었다. 남유다와 에돔과의 관계는 마치 북이스라엘과 다메섹과의 관계와 유사하였고 북이스라엘은 9차례나 왕조가 바뀐 데 비해 남유다는 다윗 왕가로 끝까지 일관하였다. 우리는 편의상 유다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 이스라엘과의 투쟁 시대(B.C. 931-B.C. 870)
2. 이스라엘과의 동맹 시대(B.C. 873-B.C. 835)
3. 이스라엘과의 평행 시대(B.C. 835-B.C. 722)
4. 이스라엘 멸망 후의 유다 왕국 (B.C. 722-B.C. 586)
1. 투쟁 시대의 유다 왕국(B.C. 931-B.C. 870)
왕상 12:20에 의하면 왕국이 처음 분열할 때에 르호보암을 추종한 지파는 유다뿐이었다. 그러나 여로보암이 다스릴 지파를 열 지파라고 하였음을 미루어 보건대 다른 한 지파가 유다를 좇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중에 유다에 포함된 지파는 베냐민 지파였는데 그들은 처음에 북쪽에 있었으나(참조,
왕상 12:20), 유다와 인접한 지리적 여건과 르호보암의 정치적 압력에 의해서 남 유다로 넘어가게 된 것 같다. 또 그 뿐만 아니라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곳을 예배지로 삼았기 때문에 레위인들이 불평을 토로하자 여로보암은 제사장을 비레위인으로 삼았고, 이러한 악행을 본 제사장들은 많은 수가 르호보암에게로 돌아왔고 그밖에 경건한 무리들도 레위 족속과 함께 유다로 넘어왔음으로 르호보암의 세력은 점차 강화되었다(참조,
대하 11:13-17).
1) 르호보암의 통치 (B.C. 931-B.C. 913)
르호보암은 41세에 즉위하여 17년간을 통치했다. 그는 신앙적인 측면에서 조부인 다윗을 따르기보다는 아버지인 솔로몬 말기의 종교적인 타락을 본받아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세웠으며 남색 하는 자들을 허용하였다(참조,
왕상 14:23, 24). 그는 왕위에 즉위하면서부터 북이스라엘과 늘 전쟁 상태에 있었다(참조,
왕상 14:30). 그는 즉위 초기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용사들을 뽑아 북이스라엘을 쳐서 통일 제국을 꾀하려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스마야를 통하여 여로보암의 국가는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밝히면서 금하심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이후 그는 유다와 베냐민 지역에 15개의 성읍을 건설하였는데 주로 이 요새들이 남쪽과 서쪽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북이스라엘보다는 블레셋을 염두에 두고 방비한 것 같다. 르호보암의 초기 3년은 북이스라엘에서 온 경건한 무리들과 레위 족들의 도움으로 경건한 신앙의 길을 걸었고 그 동안 유다는 강대해졌다. 그러나 곧 그는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율례를 버리고 범죄 하였기 때문에(참조,
대하 12:1, 2) 하나님께서는 르호보암 5년에 애굽의 시삭 왕을 통하여 징계하셨다. 시삭 왕은 리비아 사람으로 애굽의 22왕조의 창시자였으며, 이전에 여로보암이 솔로몬으로부터 피신할 때 피신처를 제공한 자였었다(참조,
왕상 11:40). 그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왔을 때 르호보암은 성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은 물론이요, 솔로몬의 금 방패까지도 빼앗겼다(참조,
왕상 14:26). 르호보암은 이렇게 조공을 바침으로 간신히 유다의 독립을 유지했고, 예루살렘에서 적들이 물러갔으나 이 당시의 유다는 극심한 곤경에 처하게 된다. 한편 시삭 왕은 유다뿐 아니라 이스라엘도 공격했었는데 시삭의 전승비가 므깃도에 세워진 것을 보아 충분히 짐작 할 수 있다. 르호보암의 통치 후 그 아들 아비야가 왕이 되어 유다를 3년간 다스린다(B.C. 913-B.C. 911).
2) 아사 왕의 통치(B.C. 911-B.C. 870)
아사 왕은 즉위하여 41년간 유다를 통치했는데 처음으로 종교적인 개혁을 단행한 왕이었다.
(1) 종교적 개혁 운동
그는 열조의 모든 우상들과 남색하는 자들을 제거하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 불살라 버렸으며(참조,
왕상 15:13), 그의 어머니가 아세라 목상을 숭상하였다는 이유로 어머니의 우상 숭배를 크게 꾸짖고, 황태후의 위(位)까지도 폐위 시켜 버릴 정도로 단호한 개혁을 시행했다. 애굽 군대를 대파하고 돌아오는 아사 왕에게 선지자 아사랴는 그를 영접하여 격려하면서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 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 바 되시려니와'(참조,
왕상 15:2)라고 말하는데 그는 아사랴의 말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여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게 성회를 선포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새롭게 한다. 이때의 이러한 개혁은 북이스라엘에게까지도 영향을 미쳐 에브라임과 므낫세, 시므온 지파 사람들이 유다로 많이 돌아 왔다.
(2) 아사 왕의 전쟁
아사 왕은 통치 기간 중 두 번의 큰 전쟁을 치렀는데 첫 번째는 애굽과의 전쟁이다. 애굽 왕 오사르콘 1세의 군대 장관인 에티오피아의 세라가 애굽 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으나 아사 왕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 군대를 대파하여 많은 전리품을 얻는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과의 전쟁이었다. 세라의 군대에게 승리를 거둔 아사 왕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식어져 교만해진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베냐민 땅 라마에 요새를 건축하여 백성들이 유다로 건너가지 못하게 하려 한 데서 시작되었는데 이때 아사 왕은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다메섹의 벤하닷 1세에게 원군을 요청하여 이스라엘을 물리치고 라마 성을 건축하던 자재들을 가지고 게바와 미스바에 성을 건축한다. 이러한 아사 왕의 행동에 대해 하나니 선지자가 나타나 왕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를 의지한 것에 대해 책망하지만 도리어 아사 왕은 노여움을 드러냈고 이에 선지자는 이 일로 인하여 유다가 외세의 힘에 의하여 많은 갈등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2. 이스라엘의 동맹 시대(B.C. 870-B.C. 835)
아사 왕의 아들인 여호사밧이 즉위하면서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상당히 개선되었다. 이 당시의 이스라엘 왕들은 아합을 비롯하여 아하시야, 여호람 등이었다.
1) 여호사밧의 통치(B.C. 872-B.C. 848)
(1) 여호사밧의 정책과 신앙
아사의 뒤를 이어 유다의 4대 왕으로 즉위한 여호사밧은 25년간 유다를 통치한다. 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이미 3년간을 부왕의 병으로 인해 섭정 하였던 여호사밧은 아버지의 뒤를 따라 산당과 아세라 목상을 제거하고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과 방백들을 선출해서 각 성읍을 순회하면서 백성들에게 율법책을 가르치도록 했다(참조,
대하 17:7-9). 그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율법책으로 교육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똑바로 알고 있었다. 이러한 여호사밧의 신앙은 모압과 암몬과 에돔의 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 확실히 나타났는데 그는 이때 실망하지 않고 온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여 기도하게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응답하시고 승리를 주신다. 이들의 종교는 곧 모든 방면의 실생활인 고로 여호사밧은 중요한 성읍에 재판관을 임명함으로써 지방 재판소를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재판에 공정을 기하도록 하고 예루살렘에는 제사장과 레위인 들로 중앙 재판소를 운영케 하였다.
(2) 이스라엘과의 관계
여호사밧은 이스라엘과 동맹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 여호람과 아합의 딸 아달랴를 혼인시킨다. 이 혼인으로 유다는 이스라엘과 밀접한 관계를 이룩하여 정치, 경제적으로 상호 협조적인 체제를 이루었는데 이는 모두가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이스라엘과 공동으로 배를 만들어 다시스와 무역을 재개하려고 했으나 그 배가 첫 항해를 떠나기도 전에 파선하였고, 길르앗 라못에서는 아합 왕을 도와 벤하닷과 싸우다가 죽을 뻔하였으며, 아합의 둘째아들 여호람과 연합하여 모압을 칠 때는 7일 동안 물을 먹지 못해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결국 그의 동맹은 정치적으로는 유용한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종교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올바른 태도가 아니었다.
2) 여호람과 아하시야, 그리고 아달랴(B.C. 848-B.C. 835)
왕위에 오른 아마샤 왕은 요아스 말기 때부터 쇠약하여진 유다를 정비하여 바로 세운 후 제일 먼저 자기 아버지를 죽인 자들을 처벌한다. 또 국방력을 증강 시켜 여호람 당시에 반란으로 잃었던 에돔을 공격하기 위하여 30만의 군대를 조직하고 이스라엘에서 은 100달란트를 주고 10만 명의 용병을 고용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이 용병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돌려보낸 후 계획대로 에돔을 공격해서(참조,
왕하 14:7) 큰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이러한 아마샤 역시 에돔의 우상을 자기의 신으로 삼고 경배함으로 열조들이 저지른 죄악에 빠져들고 만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선지자는 '자기의 백성을 왕의 손에서 능히 구원하지 못하였거늘 왕은 어찌하여 그 신들에게 구하나이까'(참조,
대하 25:15)라고 권고했으나 오히려 왕은 그 말을 듣지 않는다. 그 후 아마샤는 교만하여 이스라엘의 요아스 왕을 공격하지만 그 결과는 아마샤의 대패로 끝난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요아스 왕은 예루살렘 성을 파괴하고, 많은 물품들을 약탈하며, 포로들을 잡아갔는데, 그 속에 아마샤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 역대기 기자는 이 사건에 대해서 아마샤가 에돔의 신들을 구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 이후 그는 예루살렘에 들어오지만 자기 백성들의 모반에 의해 피살되고 재위 29년을 종결짓는다.
3) 웃시야 왕의 통치(B.C. 767-B.C. 739)
아마샤 왕의 아들 웃시야는 아사랴라고도 하는데 이 두 이름은 의미가 비슷하여서 서로 번갈아 사용하였다. 웃시야는 16세에 왕이 되어 52년간(섭정 기간 포함)을 다스렸는데 그는 유다 왕들 중에 가장 강력하고도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의 통치는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린 시기와 거의 일치하며, 이 두 왕이 나라를 다스릴 때 지배한 영토는 다윗과 솔로몬 당시의 치세와 거의 맞먹는 정도였다. 남쪽으로는 부왕 아마샤가 되찾은 에돔을 계속 지배하였으며 무역을 목적으로 홍해 북부 연안에 있는 '엘랏'(Elath)에 항구를 건설했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아람을 지배했고 서쪽으로는 블레셋의 여러 성읍을 관장하였는데 그중에는 아마샤가 포로로 있을 당시 하사엘에게 빼앗겼던 가드(Gath)도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웃시야는 본국의 기지를 강화하는 일 외에도 사해 동쪽과 남쪽으로 중요한 아카바만을 남서쪽으로는 애굽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을 통치했다.
이렇게 웃시야가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가 죽은 뒤의 일이다. 당시 북방의 강력한 세력이었던 다메섹은 신흥 앗수르에 꺾여 약해진 데다가 앗수르도 북방의 아라랏의 공격을 받아 그것을 방어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때를 잘 이용하여 여로보암 2세는 국가를 강력하게 다져 강력한 나라로 부강 시켰는데 그가 죽자 내부적인 혼란으로 국력이 약화되었고 한참 팽창하고 있던 유다의 웃시야 왕이 앗수르를 견제하는 새 강국으로 부상한 것이다. 그러나 웃시야 왕은 나라가 부강해지면서 심히 교만하여져서 마침내는 제사장의 직분까지도 무시하여 제사장의 권고를 듣지 않고 개인적으로 성전에서 분향하려 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문둥병이 들어 별궁에 살면서 그 아들 요담을 왕정에 동참케 해야만 했다.
웃시야의 아들 요담 왕(B.C. 739-B.C. 731)은 부왕의 생존시 왕정에 동참하였고, 비교적 경건한 왕이어서 그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정도를 구하려고 애쓰며 영토도 잘 관할하였으나 백성들이 죄악의 길을 가는 것에 대해서는 강력히 제지하지 못한 나약한 왕이었다. 요담 왕 말년에는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셋 3세가 강대해지자 다메섹의 르신과 이스라엘의 베가가 앗수르를 대항하고자 요담에게 군사적 동맹을 맺으라는 압력을 가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요담은 죽고 그의 아들 아하스가 왕위에 올라 16년간을 통치하나 이 기간 동안 북쪽에서는 다메섹과 이스라엘의 압력이 심해지고 남쪽에서는 블레셋과 에돔의 공격이 그치지 않는다. 그래서 진퇴양난에 빠진 아하스 왕은 앗수르를 의존하여 친 앗수르 정책을 쓰나 오히려 앗수르는 유다를 괴롭힌다. 이 아하스는 선왕들의 종교 정책과는 반대로 바알 우상을 만들고 어린 자녀들을 불살라 태우는 몰록 제사를 일삼았다.
4. 이스라엘 멸망 후의 유다 왕국(B.C. 722-B.C. 586)
1) 히스기야 왕의 통치(B.C. 725-B.C. 697)
아하스의 쇠퇴한 정권을 이어받아 왕이 된 히스기야는 29년을 통치했는데 그는 하나님이 보실 때 유다의 가장 훌륭한 왕이었다. 그는 다윗과 같이 행했다는 극찬을 들었으며 모든 유다 왕 중에서 가장 하나님을 의지하였다고 말하여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종교적인 측면에서나 정치, 군사적 측면 등 모든 방면에서 그를 형통케 하셨다.
(1) 히스기야의 개혁 정치
히스기야는 즉위하는 즉시 그의 아버지가 폐쇄했던 성전을 열어 정결케 하고 모세의 법에 따라 제단을 쌓음으로 유다 왕국이 하나님께 돌아갈 것을 분명히 선포했다. 또 그 이전 왕들에게 오랫동안 경시되어 왔던 유월절 준수를 다시 선포하고 북이스라엘의 사람들까지도 초청하여 함께 하기를 원했다(참조,
대하 30:1). 이에 북쪽의 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여 와서 온 이스라엘이 기뻐했는데 솔로몬 이후 이러한 일이 없었다. 그는 종교 개혁은 너무나 철저하여서 모든 산당들을 파괴하고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의 형상을 본뜬 우상까지도 '느후스단'이라고 말하며 분쇄해 버렸다.
(2) 앗수르와 히스기야 왕의 관계
히스기야는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처음부터 반 앗수르 적인 정책을 썼다. 그러나 사르곤 2세가 통치하는 기간 동안에는 직접적으로 대항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사르곤 2세가 자신이 정복할 나라의 국민들을 서로 다른 곳에 이주시켜 의도적인 통합 제국을 만들려는 탁월한 정치가였기 때문이다.
(3) 산헤립의 침략
사르곤의 아들 산헤립이 왕위에 오르자 히스기야는 때를 놓치지 않고 강력한 반 앗수르 정책을 써 애굽과 두로 아스글론가 에글론과 함께 반 앗수르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산헤립이 동맹 국가들을 차례로 파하고 예루살렘에는 부하 랍사게를 보내어 히스기야의 항복을 강요했다. 이에 히스기야는 은 3백과 금 30달란트를 바치고 화해를 요청했으나 산헤립은 만족하지 않고 계속 대군으로 위협하며 항복할 것을 종용했다. 이렇게 곤궁한 위기에 처한 히스기야 왕은 이사야의 예언에 힘입어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 앗수르 병사 18만 5천이 죽는 기적과 함께 산헤립을 물리치게 된다(참조,
왕하 19:29-31, 35).
히스기야의 죽을병은 이 전쟁 기간 중에 되어진 일인데 그가 간절하게 회개의 기도로 간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앗수르로부터의 구원을 주심과 동시에 15년간의 삶도 허락하셨던 것이다. 이 시대에는 특히 선지자 이사야와 미가가 활동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선지서에서 언급하기로 한다.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B.C. 686-B.C. 642)는 55년간을 통치하였으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극한 범죄를 저지르고 마침내는 앗수르 왕의 포롤 잡혀갔다. 그는 거기서 회개하여 하나님의 은총으로 유다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 이후에 그는 성전에서 이방 제단을 제거하고 진실한 예배에 임한다. 므낫세의 아들은 2년간 통치 후 암살당한다.
요시야가 8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할 때 니느웨는 몰락 상태에 있었고 더 이상 앗수르는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었다. 한편 그때부터 바벨론이 서서히 부상할 때이지만 그것은 거의 요시야 말기의 일이기에 요시야는 평화로운 가운데 정치에 임할 수 있었다. 요시야가 30년간 통치할 때는 유다의 역사상 가장 큰 태평성대를 누리는 시기였다. 이 당시는 외부와의 전쟁도 없고 평화와 번영과 개혁의 때였는데 그것은 그를 섬기는 자들이 참으로 경건한 무리였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그는 통치 8년, 즉 16세가 되었을 때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가졌고 20세가 되었을 때는 온 유다와 이스라엘 북방까지의 모든 우상과 산당을 제거해 버렸는데 이 개혁을 무려 6년 동안 줄기차게 단행하였다. 참으로 이 개혁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전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개혁이었는데 이러한 개혁의 의지는 모세의 율법책을 발견함으로써 더욱 강하게 시행될 수 있었다. 즉 성전을 수리하는 동안 대제사장 힐기야가 율법책을 발견하여 서기관을 통하여 읽게 하니 왕은 옷을 찢으며 회개했고, 온 백성과 더불어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워 오로지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서약하였던 것이다(참조,
대하 34:29-38).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은 요시야는 철두철미한 개혁과 정화를 단행하여 그때까지 잔존해 있던 모든 우상과 산당과 힌놈 골짜기의 몰렉 제사(어린아이를 제물로 드리는 제사)와 남색 등을 분쇄하고 이방의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들의 뼈를 불살랐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끝난 후 율법의 규례를 따라 유월절을 거룩하게 지키는데 이렇게 거룩하고 성대한 유월절 준수는 사사시대 이후 처음이었다고 성경은 증거하였다(참조,
왕하 23:22).
신흥 바벨론과 메대의 연합군에 의해 몰락해 가는 앗수르가 다시 마지막 힘을 가다듬어 하란을 탈환하려는 전쟁을 벌였을 때 바벨론을 견제하기 위하여 애굽의 느고는 하람에서 앗수르를 도우려고 군대를 파견하였고 이때 반 앗수르 요시야는 애굽 군대와 충돌하여 므깃도에서 접전하던 중에 전사해버린다. 요시야를 뒤이은 여호아하스(B.C. 609)는 애굽 왕에게 폐위 당하고 그 뒤를 이은 여호야김(B.C. 609-B.C. 597)은 애굽 왕 느고에 의해서 세워진 괴뢰 정부로 많은 의인들을 살해했으며, 급기야는 예레미야의 두루마기를 태우고 예레미야를 죽이려 했던 악정의 왕이었다 (참조,
열왕기상하 도표12).
3) 바벨론의 대두와 유다의 멸망
느고가 바벨론과 접전했던 B.C. 609년에는 바벨론이 아직 지중해 국가들을 지배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B.C. 605년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갈그미스 전투에서 늙은 아비를 대신해서 출전한 느부갓네살이 애굽을 대파함으로 바벨론은 드디어 전 팔레스타인과 지중해 연안을 통치하는 대제국으로 부상해 가기 시작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느부갓네살 2세는 애굽의 원조를 구하여 반란을 꾀하는 여호와김을 예루살렘에서 죽인다. 또 그 이후 B.C, 597년 다시 공격을 받은 여호와긴 왕은 모든 왕족들과 함께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고, 느부갓네살이 돌아가면서 요시야의 셋째아들 맛다니야, 즉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운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반 바벨론 운동을 거세게 일으킨다. 시드기야는 결국 반 바벨론 자들에게 설득을 당하여 애굽에게 원조를 청해 반란을 일으키나 B.C. 588년 느부갓네살이 다시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포위하니 포위 2년 후인 B.C. 586년 예루살렘은 함락된다. 그 후 바벨론 왕은 유다의 백성들을 포로 잡혀가고 남은 자들을 위해 그달리야를 총독으로 세운다(참조,
왕하 25:22).이로써 유다 왕조는 20대 시드기야를 마지막으로 340여 년 간의 왕국 통치를 마감하게 된다 (참조,
열왕기상하 도표13).
* 본 서론의 도표는 어빙 L. 젠센(I. L. Jensen)의 '열왕기상하'에 삽입된 도표를 지도는 요하난 아하로니(Yohanan Aharoni)와 미카엘 아비요나(Michael Abiyonah)의 '성서 지도'에서 인용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