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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법인
<출처 : 상좌불교의 가르침(붓다다사 법문, 강진아 편역)>
삼법인과 사물의 특징
여기서는 모든 사물의 공통된 세 가지 특징인 무상(anicca), 고(dukkha), 무아(anatta)에 대하여 자세히 논하겠습니다. 모든 사물들은 끊임없이 변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안정합니다. 모든 사물들은 만족스럽지 못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물이든 아무 것도 '내 것'으로 취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물의 특징을 보는 사람은 사물에 대한 정견을 가지고 각성과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정견이 부족한 눈으로 보면 사물들은 노예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눈이 밝아지고 분명해져서 확실하게 보면 어떤 사물 속에도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부처님은 무엇보다도 이 세 가지 특징을 강조하였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전체를 요약하면 한마디로 무상, 고, 무아에 대한 통찰입니다. 어떤 때는 분명하게 언급하고 어떤 때는 다른 개념으로 표현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모든 사물들이 무상하다는 것은 부처님 이전에도 이미 가르치고 있었으나, 부처님만큼 깊이 드러내진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도 가르치고 있었으나 완전한 깊이를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의 원인을 다루지도 않았고, 고를 철저하고 완전하게 제거할 수 있는 방법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스승들은 부처님이 깨달은 것만큼 고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반면 무아는 불교에서만 가르쳤습니다. 무아란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완전히 이해하면 어떤 것도 '나' 혹은 '내 것'으로 여길 수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오직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완전하고 철저하게 이해했던 부처님만이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사물의 세 가지 특징을 통찰하기 위한 수행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완전한 정견'을 얻기만 하면 주목할 만한 하나의 사실, 즉 어떤 것도 집착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간단히 말해서 아무 것도 소유할 가치도 없고 어떤 상태로 될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가지거나 어떤 상태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미혹이고 속임수이며 환상에 지나지 않지만, 반대로 그렇게 해야 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무상, 고, 무아에 대한 참된 통찰을 얻게 됩니다. 사람들은 '아니짜 두카 아나타(anicca dukkha anatta)란 구절을 매일 아침 저녁으로 수백 수천만 번 암송하지만 아직도 이들 특징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독송하면서 알게 되는 것은 사물의 참된 특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삼법인과 공
직관적 통찰을 한다거나 '법을 본다는 것'은 결코 이성적인 사고작용이 아닙니다. 이성적 사고로는 결코 법을 볼 수 없습니다. 정견은 오직 참된 내적 깨달음에 의해서만 얻어집니다. 예를 들어 아무 생각없이 사물에 휩쓸렸다가 고통을 당한 상황을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상황이 실제 일어나던 과정을 관찰하다가 그 사물에 넌덜머리가 나서 각성을 했다면 법을 보았거나 정견을 얻은 것입니다. 정견은 완전해질 때까지 다시 말해서 모든 사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힘을 가질 때까지 계속 발전합니다. 어떤 사람이 '아니짜 두카 아나타(anicca dukkha anatta)를 크게 독송하거나 혹은 사물에 대해 각성하기는커녕 사물을 소유하거나 어떤 것이 되고 싶다는 데 집착하여 욕망을 포기하지 않은 채 밤낮으로 이 특징들만 살핀다면 정견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무상, 고, 무아에 대한 통찰은 어떤 것도 소유하거나 어떤 상태로 될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충분히 담고 있는 불교 용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공(순냐따)으로서 텅텅 빈 것, 자아가 빈 것, 온 힘을 다해 '내 것'으로 집착해야 할 것이 사실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물에 집착할 만한 가치가 없음을 깨닫게 하는 관찰은 불교의 정수이며 불교수행의 핵심입니다. 모든 것에 자아가 없다는 것을 명확히 알게 되면 불법을 완전히 알게 됩니다. '자아가 없다'라는 간단한 구절은 무상, 고, 무아라는 단어들을 요약한 것입니다. 사물은 영원히 변화하고 영구불변의 요소가 없기 때문에 빈 것입니다.
각성된 마음으로 보면 집착해야 할 사물이 없다고 표현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아나 본성 같은 어떤 지속적인 요소가 없이 사물의 존재 방식에 따라서 항상 변화한다는 것을 관찰하게 되면 자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공을 인식하게 되면 그 순간 어떤 사물도 소유하거나 어떤 상태로 될 만한 가치가 없다는 깨달음이 일어납니다. 무엇을 소유하거나 어떤 상태로 되려는 욕망이 없다는 느낌은 번뇌나 다른 감정적인 문제의 노예로 전락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이러한 상태를 얻으면 마음이 불건전한 상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것에 말려들거나 혹을 어떤 일을 내치지 않게 됩니다. 또 어떤 방법으로든 어떤 것에 유혹당하거나 사기당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의 마음은 영원히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고통이 없습니다.
소유와 상태에 대한 집착과 욕망
'어떤 것도 소유할 만한 가치나 어떤 상태로 될 만한 가치가 없다'라는 말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소유하다(getting)'와 '어떤 상태로 되다(becoming)'란 말은 마음이 미혹되어 있거나 집착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어떤 상태로 되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보편적으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재산, 자녀, 아내, 정원, 밭 등을 필요로 합니다. 사람들은 좋게 되고 싶어하지만 승자와 패자 혹은 이런 상태로 저런 상태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왜 어떤 사물을 소유하거나 어떤 상태로 될 수밖에 없다고 가르칠까요. 대답은 이러합니다. 소유한다거나 어떤 상태로 된다는 것은 전적으로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이 개념들은 무지에 바탕을 둔 세속적 관념들입니다. 깨달음의 차원에서 말하면, 결코 아무것도 가질 수 없으며 어떤 상태로 될 수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소유한다는 행위를 한 사람이나 소유를 당한 사물이나 모두 무상하고 고이고 무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식하지 못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이것은 내 소유이다. 내가 이것을 가졌다....나는 (이러저러) 하다.'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역시 아주 자연스럽게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고통과 불행의 원천입니다. 어떤 것을 소유하거나 어떤 상태로 되는 것은 욕망의 한 형태입니다. 어떤 것을 소유하거나 어떤 상태로 되는 과정 속에서 소멸되거나 파괴되지 않으려는 욕망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고통은 소유하고 싶은 욕망과 어떤 상태로 되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일어납니다.
욕망은 본래 모든 사물을 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물을 원할 수 있다는 그릇된 사상은 젖먹이부터 있던 본능적인 습관처럼 일어나서 욕망의 원인이 되었었습니다. 욕망에 따라서 이러저러한 결과가 일어나는데 그 욕망은 이루어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원했던 결과를 얻으면 더 큰 욕망이 일어날 것입니다. 원했던 결과를 얻지 못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 싸우고 노력하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렇게 계속하다 보면 악순환에 걸려듭니다. 윤회(삼사라)의 바퀴, 즉 행위-결과-행위-결과의 과정에 빠집니다. 여기서 윤회란 육체가 겪는 끊임없는 순환을 일컫는 것이 아닙니다. 윤회는 욕망, 욕망을 이루려는 행위, 그 행위의 결과라는 세 가지 사건의 악순환입니다. 즉 욕망을 멈출 수 없어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되고 그에 따른 또 다른 결과가 생기며 나아가 더 많은 욕망이 일어나고.... 등등 끊임없습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돌면서 굴러가기 때문에 부처님은 이것을 '윤회의 바퀴'라고 했습니다.
윤회의 바퀴는 고통을 견뎌내야만 하는 바퀴입니다. 이 악순환을 끊어 버리는 데 성공하면 모든 형태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 즉 열반을 얻는 것입니다. 거지든 백만장자든 왕이든 황제든 천상적 존재든 신이든 무엇이든지 악순환에 걸려들기만 하면 자기 욕망에 매달려 이런저런 고통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윤회의 바퀴에는 정말 너무 많은 고통의 짐이 실려 있다고들 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바로잡으려면 도덕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지고의 원리인 법에 의존해야만 합니다.
욕망의 종류
고통의 원인은 욕망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처님이 두 번째 성제인 집제에서 말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종류의 욕망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감각적 욕망(sensual desire)으로서 형태, 색깔, 소리, 냄새, 맛 등 만질 수 있는 대상에서 기쁨을 갈구하고 찾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욕망은 무엇이 되려는 욕망(desire for becoming), 자기가 원하는 것에 따라서 이것 혹은 저것이 되려는 욕망입니다. 세 번째는 무엇이 되지 않으려는 욕망(deseir not to become), 즉 이것 혹은 저것이 되지 않으려는 욕망입니다. 누구든 이러한 욕망에 도전받고 있습니다. 물론 세 가지 말고 다른 종류의 욕망도 드러납니다.
욕망이 있는 곳에 근심이 있다는 것은 누구든지 관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욕망을 이루려는 행위를 하려고 할 때 그 행위에 따라서 또 고통스러워집니다. 욕망은 결과를 얻어도 그칠 줄 모르고 곧 무엇인가를 또 원합니다. 어쩔 수 없이 계속 고통을 체험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지 욕망으로부터 자유스럽지 않아서가 아니라 욕망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은 악한 행위를 하고 싶어해서 그에 따르는 고통을 경험하고 악하게 됩니다. 반면, 선한 사람은 선하게 행위하길 원해서 거기에 따르는 고통을 체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선한 행위를 포기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너무 좋기만해서 감지하기 어려운 고통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다음과 같은 충고에 따라 행위해야 합니다. 즉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려면 단지 선행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선행을 초탈하여 있는 것, 다시 말하면 욕망의 노예가 된 상태로부터 마음을 자유스럽게 해주는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정수입니다. 세계의 어떤 종교의 가르침도 이보다 나을 수도 이와 같을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아주 주의깊게 기억해야만 합니다. 세가지 형태의 욕망을 극복하는 데 성공하면 고통으로부터 완전한 해탈을 얻습니다.
욕망의 극복 방법 : 정견과 그 결과
어떻게 욕망을 효과적으로 근절시킬 수 있을까. 이것에 대한 대답은 간단합니다. 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 때까지 무상, 고, 무아에 주의를 기울여 관찰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소유하거나 어떤 상태로 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어떤 것을 가지거나 어떤 상태로 되었을 때 고통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있을까. 이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져 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근심과 걱정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을 계속 심사 숙고해야 합니다.
아내와 자녀를 가져서 자유와 쾌활한 마음을 얻었는가 아니면 온갖 책임을 지니게 되었는가. 높은 지위나 명성을 얻는 것이 평화와 적정을 가져다 주었는가 아니면 무거운 의무만을 지게 되었는가. 이러한 방식으로 보면 모든 사물들은 부담과 책임만을 지운다는 사실을 기꺼이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왜 그런가. 어떤 것이든 무상, 고, 무아의 특징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을 소유하게 되면 항상 자기 옆에 있어야 하며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하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물은 본래 무상이며 고이며 무아입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의 목적이나 기대에 순응할 수 없습니다. 단지 자기 특징대로 변할 뿐입니다. 따라서 모든 노력들은 변화의 원리에 어긋난 것이며 그것을 무시한 태도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사물들을 움직이고 싶어하기 때문에 삶은 어려움과 고통으로 지치게 됩니다.
어떤 것을 소유하거나 어떤 상태로 될 만한 가치가 전혀 없다는 깨달음을 일으키는 기술이 있습니다. 그 기술은 사물들을 충분히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갈망이 있을 때는 무엇을 소유하거나 무엇이 되려고 하는 감정이 있다는 것과, 갈망이 완전히 사라져 사물의 특징을 통찰할 때는 사물에 대한 태도가 다소 달라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간단한 예로 '먹기'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갈망하여 먹는 것은 정견에 따라서 먹는 것과 아주 다릅니다. 두 가지는 먹는 방법도 다르고, 먹는 동안의 감정도 다르며, 먹고 난 후 일어난 결과도 다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맛있는 음식에 대한 갈망이 없어도 역시 먹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처님과 아라한들은 갈애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지만 여전히 행위를 했으며 어떤 상태로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욕망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행위의 결과로서 생기는 이것 혹은 저것으로 되고 싶은 욕망이나 갈애와 상반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참된 사물의 특징에 대한 명확하고 철저한 지혜의 힘(정견)에 의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우리는 욕망에 따라 동기를 부여받기 때문에 그 결과 계속 고통의 지배를 당합니다.
갈애로부터의 해탈은 여러 가지 뜻하지 않은 유익함(benefit)을 가져다 줍니다. 갈애를 벗어난 몸과 마음은 전처럼 욕망이 아니라 지혜로운 통찰에 의해 자극을 받아 음식을 원하거나 먹을 수 있습니다. 만약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부처님과 아라한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다면, 갈애가 아니라 정견을 가지고 행위하도록 스스로 단련해야 합니다.
학생이라 해도 그릇된 것에서 옳은 것을, 나쁜 것에서 좋은 것을 식별해 낼 수 있는 방법을 배운다면, 공부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만족해 할 것입니다. 만약 어떤 직업을 가졌더라도 그릇된 것에서 옳은 것을, 나쁜 것에서 좋은 것을 식별해 내는 방법을 배운다면, 그 직업은 자신이 하고 있는 최선의 것이며 유익한 것이라고 스스로 만족해 할 것입니다. 따라서 잘만 수행한다면 정견은 청정함과 적정한 마음을 가져다 줍니다.
어떤 것을 행할 때 욕망의 자극을 받으면 그것을 행하는 동안에도 근심스럽고 그 일이 끝나도 근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정견의 힘이 지시하는 대로 일을 한다면 결코 근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견이 가져온 유익함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사실 무상이고 고이며 무아라는 것, 다시 말해서 어떤 것을 소유하거나 어떤 상태로 될 가치도 없다는 것을 항상 의식하고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물들과 관계를 가질 때 정견을 가지고 한다면 행위는 욕망으로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지혜롭게 처신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고통으로부터 자유스럽습니다. 마음은 어떤 사물들을 소유할 가치가 있거나 어떤 상태로 될 가치가 있다고 여겨 맹목적으로 집착하거나 얽매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확실히 깨어 행위할 것이고 전통이나 관습 혹은 법에 따라서 처리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땅과 재산을 소유한다고 해도 탐욕스러운 감정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재산이 부담이 되어 마음을 짓누르고 고통스러울 만큼 집착할 필요도 없습니다. 법은 그 땅 마지기가 자기 소유임을 증명합니다. 따라서 땅에 대해 근심 걱정하며 고통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지도 사라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 쫓아와서 그것을 강탈해 간다 해도 우리는 확고하고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화를 내거나 미움의 불꽃으로 달아오르지 않아도 대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스럽지 않게 법에 의존하여 저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재산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자제력을 벗어나서 감정적이 되면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물들은 무상하고 영원히 변합니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상태로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상태가 이렇게 혹은 저렇게 된다는 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만족할 만한 상황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물들은 이런저런 종류의 고통을 일으킵니다. 진리를 참으로 실천하는 방법인 정견은 세밀한 내적 관찰로서 어떤 상태로 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없으며, 실제로 만족할 만한 상태도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 줍니다.
다음과 같은 질문들은 살펴봅시다. 과연 만족할 만한 상태를 찾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 보도록 해야 합니다. 아들은? 부모는? 남편? 아내? 스승? 하인? 이것들 중 어느 것인가? 모험가? 권력가? 승리자? 이들은 받아들일 수 있는가? 어떤 인간의 상태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천상적 존재나 신의 존재는 받아들일 수 있는가? 만약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알게 되면 어느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분별없이 어떤 것을 소유하거나 어떤 상태가 되고자 합니다. 왜 생명을 위태롭게까지 하면서 욕망에 따라 맹목적으로 행동할까요? 우리는 사물을 이해하여 지혜롭게 그리고 고통을 최소한 적게 일으키는 방식으로 사물과 관계를 가지며 살 필요가 있습니다.
삼법인과 참된 불자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다면 친구, 특히 친척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사물의 특징을 이해시킨다면 우리와 같은 정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가정, 마을, 국가, 궁극적으로 전세계가 파괴되지 않을 것입니다. 개인의 마음은 욕망이 일지 않아 어느 것에도 휩쓸리지 않고 집착하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 모든 이들의 삶은 정견, 즉 실제로 집착하거나 매달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일괄성 있고 명확한 통찰력에 의해 인도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무상이며 고이고 자아가 없어서 어느 것도 미혹될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물을 포기하는 감각을 가지고 정견을 일으켜 부처님의 가르침을 고수할 수 있는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이것을 수행하는 자가 진정한 불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비록 계를 받지 않았어도 실제로 불법승에 귀의한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불법승과 같습니다. 단지 어떤 것을 소유하거나 어떤 상태로 될 가치가 없어서 사물에 집착하지 않으니 마음이 더럽혀지지 않을 것이고 깨달음을 적정해 얻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도 소유하거나 어떤 상태로 될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무상, 고, 무아를 계속해서 관찰하고 인식하는 사람은 참으로 완전하게 성숙한 불자가 될 것입니다.
가장 수준 낮은 형태의 악은 무엇을 얻거나 어떤 것이 되고 싶은 욕망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습니다. 중간 형태의 악은 덜 강한 욕망에 자극을 받은 행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장 악하지 않은 행위는 선한 것을 욕망의 바탕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지고한 형태의 선 역시 욕망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단지 욕망이 적은 편이어서 나쁜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 뿐입니다.
사실 선행은 고통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사람(아라한)은 욕망에 따르는 행위가 멈추었으므로 악한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그의 행위는 선이나 악이라는 개념을 초탈하여 있습니다. 그의 마음은 자유롭고 선과 악의 한계를 초탈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이 원리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방법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래의 어느 날 꼭 원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악을 완전히 포기하고 최대한도로 선을 행한다 할지라도 마음은 여전히 여러 가지 종류의 미소한 욕망으로 부담을 느낍니다. 이 욕망들을 제거하는 방법은 욕망의 힘을 초탈하려는 노력 이외에 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류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져 열반을 얻으려면 욕망이 아주 완전히 없어져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궁극적인 의미에서 사물의 특징을 안다는 것은 모든 것을 무상, 고, 무아로 보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이것을 알면 마음은 어떤 것을 소유하거나 어떤 상태로 되려고 집착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물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욕망이 아니라 정견에 의해 지혜롭게 사물과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행동하면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붓다께서 마지막으로 우리들에게 하신 말씀
(붓다다사)
http://blog.daum.net/hojanyun/ 의 담마문답 카테고리에서
사람이 죽을 때는 보통 마지막 말, 즉 유언을 한다는 것을 모두 잘 압니다. 붓다께서 돌아가실 때에는 마지막으로 다음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든 형성된 것들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주의 깊은 알아차림을 갖추도록 하라." 모든 것은 단지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태, 즉 (자아가) 빈 상태입니다. 모든 것은 아닛짜(anicca)이고, 끊임없이 변하며, 끝없이 흘러 갑니다. 이 끊임없는 흐름에는 어떠한 자아도 없고 자아에 속하는 것도 없습니다. 주의깊게 잘 알아차리십시오. 다른 말로 하면, 어리석지 말고, 만물에 혹하여 빠지지 말고, 어떤 것도 움켜쥐거나 집착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어떤 것에 집착하여 부주의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주의 깊은 알아차림의 의미입니다. 이런 주의깊은 알아차림을 항상 잘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문제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얼마나 완전히 부주의한지 보십시오. 모든 종류의 사물을 전적으로 바람직하고 움켜쥐고 집착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마음에 들거나 미워하는 것으로 만물에 집착하는 것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궁극적으로 괴로움의 원천입니다. 이런 사람은 붓다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가르침을 따르지 않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고 불교 가문에 태어난 유익한 상태를 허비하고 있습니다. 붓다의 유언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나이 어린 사람이든 나이 많은 사람이든 우리 모두는 붓다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주의 깊은 알아차림을 유지합시다. 부주의하게 만물을 움켜쥐거나 집착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항상 세상을 어떤 자아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 비어 있는 것으로 보도록 합시다. 그러면 마음은 집착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갈망, 미워함, 및 미혹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상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즉 모든 문제(둑카)가 그칠 것입니다. 이것(둑카가 그침)이 거기에 있는 모두입니다.
붓다께서는 다음과 같은 다른 마지막 가르침도 주셨습니다. "가서, 처음도, 중간도, 끝도 훌륭한 담마를 잘 가르쳐라." 이 말씀은, 각 레벨의 사람들에게 그에 맞게 무집착의 가르침을 펴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청소년들에게는 초급수준으로, 성인들에게는 중급수준으로, 더 높은 상태가 없는 최상의 상태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최고급 수준으로 무집착의 가르침을 펴라는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다른 것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오직 무집착을 가르쳤습니다. 이 가르침은 소년, 중년, 및 노년의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수준으로 가르칠 수 있습니다. 또는 이 가르침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가르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거나 살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낮은 수준으로, 다른 세상에 살거나 살 자들의 이익을 위해 중간 수준으로, 세상을 초월하고자 하는 자들의 최상의 이익을 위해 최고급 수준으로 담마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가르침의 전체 핵심은 무집착을 통해 고(둑카)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아나 자아에 속하는 어떠한 것도 없다는 무집착이 가장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이 한 단어를 마음에 잘 새기십시오. 바로 한 음절 '왕(waang, 빔, 공, 해방)', 팔리어로 순냐따(sunnata)가 불교의 핵심이고 본체이며 모든 담마를 나타냅니다. '찌트 왕(cit waang, 자아 관념에서 해방된 마음)이 없으므로 계율을 어깁니다. '찌트 왕'이 없으므로 집중하지 못합니다. '찌트 왕'이 없으므로 통찰력이 없습니다. 붓다께는 찌트 왕이 있습니다. 찌트 왕은 바로 깨달음의 표시입니다. 담마는 바로 '찌트 왕'의 가르침이고, '찌트 왕'으로 이끄는 실천의 가르침이며, 실천의 결실, 즉 찌트 왕과 궁극적 닙바나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상가(sangha, 승가)는 '찌트 왕'을 얻기 위해 '붓다의 실천 체계'를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붓다, 담마, 및 상가는 '왕(waang)'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움켜쥠과 집착을 절제하여 계율을 잘 지킬 수 있고, (정신적) 오염원에서 해방되어 움켜쥠과 집착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찌트 왕이 있을 때, 오염원이 없으며 집중이 최상의 상태에 있습니다. 사물(세상)을 빈 것으로 볼 때, 세상의 어떤 것도 움켜쥐거나 집착하지 않으며 통찰력으로 차 있습니다. 닙바나(열반)의 길과 결실은 '빔(空)'을 알고 계속하여 빔의 결실을 얻어 최고조의 상태로 오르는 것입니다. 자비, 덕목, 귀의(붓다, 담마, 및 상가에), 집중, 통찰, 도(길)와 과(결실), 및 닙바나(열반) 등 이 모든 것은 '왕(waang, 빔)'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붓다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따타가따(붓다)는 빔(공空)을 가르친다. 빔(공空)을 다루지 않는 가르침은 다른 자의 가르침이고, 후대의 제자들에 의한 비정통의 가르침이다. 따타가따가 말한 모든 법문은 심오하고 깊은 의미가 있으며, 세상을 초월하는 수단이며, 기본적으로 빔(순냐따, sunnata)을 다룬다." 이것은 붓다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인이나 학식있는 사람에 의해, 작시되고, 시적이며, 미려하고, 소리와 음절이 음악적인 어떠한 법문도 '빔(공空)'과 관련없다면,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러한 두 종류의 법문이 있습니다. '순냐따(sunnata, 빔)'를 다루는 법문은 붓다의 말씀이고, 순냐따(sunnata, 빔)를 다루지 않는 것은 후대 제자들의 법문입니다.
그러므로 붓다께서는 순냐따(빔)를 고려했으며, 그 법문은 불교의 참 핵심인 순냐따(빔)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순냐따(빔, sunnata)'의 가르침이 사라지고 아무도 더 그것(순냐따)에 관심이 없다면, 그 때에는 담마의 참 핵심이 없어질 것이다."
담마의 참 핵심이 없어지는 것은, 대대로 전수되어 고대에 '다사하라 왕'이 소유하고 있는 북과 같습니다. 그 북은 닳아 헤지고 낡으면 그때마다 다시 깁고 수선하기를 오랜 기간에 걸쳐 하였으므로, 결국 모든 것이 새로운 재질로 바뀌었습니다. 원래의 진짜 재질은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승려가 공부하고 실천해야 할 순냐따(빔)에 관해 공부하지않고 듣지 않는 시대가 오면, 그 때에는 북의 예와 같이 불교의 원재질이 완전히 없어져 새로운 재질, 즉 후대 제자들의 법문만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붓다께서는 움켜쥐지 않음과 집착하지 않음을 통해 처음과 중간과 끝이 모두 다 훌륭한 담마를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불교의 상황은 어떨까요? 원재가 있는 북과 같을까요? 아니면 기워서 새로운 재질만 있는 북과 같을까요? 사람들이 순냐따(빔)에 관심을 갖고 실천하는지 아닌지만 보고 검토해 보면 우리 스스로 불교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붓다께서 제자들에게 한 마지막 가르침이었습니다. 즉, 이 가르침을 주의깊게 실천하고, 널리 알리고, 순냐따(빔)를 공부하여 부패한 상태를 신선하고 유익한 상태로 복원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이 가르침에 대한 이해가 생겨 가르침이 원상태로 복원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파고들고 조사하고 공부하고 토의하는 과정을 통해 달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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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글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한번 볼까요?
"모든 사물들이 무상하다"
모든 사물이무상하다느것은 과학자들이 더잘 압니다
과연 그 과학자들을 붓다라 하느냐는 겁니다
부처님이 무상하다 하는것은 오취온=팔정도를 벗어난 행동이 그렇다 합니다
그러기에 붓다라 한것이지 다른게 아니라는 겁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감사합니다
사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