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결을 주소서.절제를 주소서.그러나 아직은 마소서”
돈과 명예,정욕의 사슬에 매여있던 아우구스티누스가 드렸던 이 기도는 죄에서 자유롭기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변화를 원하지 않는 현대인의 심정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그런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느 정원의 무화과나무 아래서 로마서 13장 13∼14절을 읽고 회심하여 자신의 과거와 단절한 얘기는 너무도 유명하다.그 때문인지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떤 인물인지 질문을 던지면 대개 이렇게 대답한다.
“그는 젊었을 때 방탕한 자였으나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어린 기도로 회개해 성자가 된 사람이지요”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그러나 그렇게 간단하게 말하고 넘어가기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교회와 세계에 미친 영향이 너무나 크고도 심오하다.그는 고대교회의 위대한 교부요 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철학자요 역사가 수사학자 심리학자 교육학자였으며 정치철학자였고 저술가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시 로마제국의 일부였던 북아프리카 누미디아 지방 다가스테(현재 알제리 동부의 수카하라스-Souk Ahras)에서 354년 11월13일 태어났다.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에게 자라면서 예수의 이름을 들었다.그러나 북아프리카의 중심도시 카르타고(현 튀니스)에서 공부하던 중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라는 책을 읽으면서 철학적 순례의 길에 빠져든다.선과 악의 문제를 탐구하다 마니교로 개종하는가 했더니 로마에서 수사학을 가르치는 동안 아카데미파라는 회의론자들의 영향으로 마니교의 이원론을 비판하게 됐다.386년 밀라노의 수사학 교수로 보내진 그는 그곳에서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설교를 들으며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을 이해하게 됐다.당시 밀라노에 유행했던 신플라톤주의도 영적인 존재가 있음을 납득케 하는 역할을 했다.그해 초여름 그는 회심의 사건을 경험한다.
교수직을 사임한 그는 이듬해 봄 세례를 받고 388년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에 수도원을 세우고 자활과 명상,독서와 저술활동을 펼친다.391년 지중해 연안 도시 히포를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강제로 사제 안수를 받고 395년 히포의 감독이 된다.
430년 세상을 뜰 때까지 그가 쓴 책은 무려 117권.아우구스티누스를 흠모했던 이시도레는 “그의 책을 다 읽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다.그가 쓴 책중 대표작만 꼽아도 악을 인간 의지의 왜곡으로 본 ‘자유의지론’,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애독된 ‘고백록’,두 도성의 역사와 의미를 쓴 대작 ‘신국론’,기독교 교리의 중심을 확립한 ‘삼위일체론’,성서 해석의 방법론인 ‘그리스도교 교양’,교육철학을 설파한 ‘교사론’,하나님의 은총없이는 인간의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은총과 자유의지’와 ‘영의 문자’‘거짓말 논박’ 등 끝이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학의 주제뿐만 아니라 전쟁과 평화,국가론,사회와 정치,역사 등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어 현대사회에 제기된 거의 모든 학문의 영역을 다 다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의 사상은 중세 1000년은 물론 종교개혁을 거쳐 근·현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모든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얼마나 가깝고 얼마나 거리를 두고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정신학자 다니엘 윌리엄스는 “서양 기독교 사상은 아우구스티누스를 계속 인용하는 주(註)밖에 안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아퀴나스가 인용한 교부의 저술 중 80%가 아우구스티누스의 것이었다.중세 철학의 주제였던 신앙과 이성의 문제에서 “믿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이 중요 모토였다.카롤루스 대제는 신국론을 베개 옆에 두고 늘 읽었다고 한다.
종교개혁가 루터와 칼뱅은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해 구원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의 예정과 은총으로만 가능하다”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지해 로마가톨릭은 물론 인본주의자였던 에라스무스와도 싸웠다.아우구스티누스는 루터 이전의 루터였던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데카르트보다 1200년 앞질러 “내가 모든 것을 의심한다고 할지라도 의심한 나는 의심할 수 없다.고로 내가 의심하면 나는 존재한다”라고 회의론자들을 반박했다.프로이트보다 먼저 인간의 무의식을 분석했고 주지주의에 대항해 인간의 행동과 생각을 이끌고가는 본능(Libido)의 존재를 주장했다.자크 마리탱,카를 바르트,에밀 브루너,니버 형제,파울 틸리히 등 현대의 신학자들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받았다.
현대 생태신학의 한 자락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를 개발과 파괴의 세계관을 내세운 주범으로 지목하는 모양이나 생태계에 대해 그의 고백은 오히려 현대의 감각을 앞선다.
“나는 이런 것들(피조물)이 존재하면 안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이보다 더 좋은 세계를 원하지 않습니다.나는 모든 것을 깊이 생각하고 정확히 판단하여 깨닫게 되었으니(존재의 계층에서) 위에 있는 존재(천국)가 아래에 있는 존재(현세)보다 더 좋으나 모든 피조물이 함께 화합해서 존재한 것이 위층에 있는 존재가 홀로 있는 것보다 훨씬 좋습니다”(고백록 7,1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