휫필드는 1714년 영국 남서부의 도시인 글로스터(Gloucester)에서 태어났다. 여관없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청소년 시절은 결코 신앙적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1733년 옥스퍼드의 펨브로크(Pembroke) 칼리지에 입학한 후부터 그의 삶은 급변하고 있었다.
1735년 회심한 그는 홀리 클럽의 회원이 되었고 훗일 함께 복음적인 신앙운동을 전개했던 요한 웨슬리(1703-1791)와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1707-1788) 그리고 테론과 아스파시오(Theron and Aspasio)를 쓴 제임스 허비(James Hervey, 1714-1758), 윌리엄 모건(William Morgan)등을 포함한 친구들과 교제하였는데 이들은 1729년 봄에 시작된 홀리 클럽(Holy Club)을 시작한 창립회원들이었다. 이 모임은 후일 영국과 미국의 부흥운동과 영적 각성운동을 이끌어간 동력원(Power station)이 되었다. 이들의 엄격하고도 철저한 시간관리, 규모있는 생활방식(method) 때문에 메소디스트(Methodists)라고 불린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휫필드에게 큰 변화를 준 책중의 하나는 헨리 스쿠걸(Henry Scougal)이 쓴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The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은 그에게 중생의 필요성과 이에 대한 복음적 견해를 확립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신학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도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36년 6월 20일 성직(副祭)임명을 받으므로 영국 국교회 성직자가 된 그는 자기의 고향인 글로스터의 성 메리 드 크립트교회에서 첫 설교를 했는데 이것은 설교자로서 그의 삶을 이끌어간 중요한 힘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때의 설교에 대한 그 자신의 기록이 보여주듯이 그는 이 첫 설교에서 외적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며 목마른 영혼들에게 끊임없는 영적 해갈을 주었고 이 땅에서의 지친 삶에 새로운 힘을 공급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설교에는 수많은 청중이 모여 들었다. 휫필드에게 있어서 특별한 일은 그가 1739년부터 옥외설교 혹은 야외설교를 시작한 일이었다. 곧 그해 2월 그는 브리스톨 근처 킹스우드(Kingswood)지방 광부들에게 첫 야외설교를 시작하였는데 약 2만명이 운집할 정도로 상당한 효과를 주었다. 이곳은 광산도시로서, 산업혁명 초기 당시 이들은 영국 국교회의 관심밖에 있었다. 휫필드는 영적으로 소외된 이들에게 눈길을 돌려 전도의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두달 뒤인 4월에는 런던에서도 야외설교를 시작하였다. 그는 공터나 들판에서 설교하였는데 때로는 수만 명이 운집하기도 했다. 1739년 4월 29일자 일기에는 "약 3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운집했다"고 했다. 이와같은 옥외설교는 당시 저조한 예배참석에 대한 현실적 대안이기도 했지만 자신을 반대하는 영국 교교회의 벽을 넘는 방안이기도 했다. "길과 산, 물가"로 나가서 전도하며 옥외에서 설교하였던 예수님의 설교는 그의 모범이 되었다. 휫필드의 옥외집회, 야외 설교 그리고 극장 전도, 가정 선교, 도시 선교등은 당시 교회로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그래서 토마스 찰머(Thomas Chalmers, 1780-1847)는 휫필드의 방법을 '공격적 방법'(aggressive system)이라고 불렀다.
휫필드는 1736년 6월 26일 주일 그의 고향인 글로스터에서 첫 설교를 한 후부터 1770년 9월 29일 미국 뉴베리 포트(Newbury Port)에서 56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까지 34년간 그는 오직 한가지 일,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몰두하였다.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 웨일즈에는 복음전도자로서 그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가 인도했던 공중집회는 1만 8천회에 달했고 스코틀란드를 14회나 방문하였다.
지금부터 250년이 넘는 그 당시의 도로, 교통, 통신 시설을 고려해 볼 때, 그것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당시 3-4개월이 소요되는 대서양을 건너 북미대륙을 무려 7번이나 방문한 일 또한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 당시까지 기독교 역사상 그 누구도 그처럼 많은 대중에게 그만큼 많은 설교를 한 일이 없었다. 저명한 전기작가인 루크 타이어만(Luke Tyerman)은 휫필드의 마지막 설교는 익세티 마을에서 죽기 불과 수신간 전에 행한 고린도전서 13장 5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였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로이드존스의 평가는 거짓됨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생애는 하나의 기이한 현상이었다. 영국이나 미국 내에서의 그의 헤라클레스적인 엄청난 노고는 성령의 능력을 언급하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