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준 저, 《신화순례》(미들하우스, 2012) 서평
프레시안, 2012. 9. 21.
잊혀진 신화 찾기, 신화 그리기를 통한 재신화화의 여정
정재서(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신화순례》는 단순한 신화 이해나 설명을 위한 책이 아니다. 그것은 신화에 대한 감동과 깨달음의 비망록이다. 아울러 그것은 답사나 기행이 아닌 ‘순례’라는 말이 암시하듯이 신화에 대한 저자의 지고한 경의와 순정이 바쳐진 기념비이기도 하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무엇이 저자로 하여금 불확실성의 이 시대에 신화에 헌신토록 했는지를.
예술로서 시대의 고통을 극복하려 했던 시절, 뜻하지 않은 병마와의 투쟁, 종족간의 평화를 위한 노력 등 행간의 술회로부터 우리는 신산한 그러나 다의적인 저자의 삶에 대해 알게 된다. 그것은 마치 영웅신화에서 퀘스트(Quest)의 행로를 보는 듯하다. 삶의 행로를 반추하면서 저자는 문득 우리의 잃어버린 삶의 모형 곧 신화에 대해 성찰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의 삶이 언젠가 신화로부터 멀어졌다는 반성, 신화와의 괴리가 야기한 오늘날의 모든 문제들, 신화적 정신의 회복만이 우리의 삶을 원상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는 믿음, 이로부터 재신화화에 대한 저자의 열망이 비롯했을까?
그러나 이러한 논리적 추론은 막상 《신화순례》를 접하는 순간, 맞든 안 맞든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느낌으로 무색해진다. 그렇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책은 신화에 대한 관념적 해설서가 아니라 체득을 통하여 일점일획까지 생생한 신화적 행위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저자의 순례기를 통해 신화에 대한 깨달음과 실천의 여정을 떠나기로 하자.
서론에 이어 제2장 <대자연과 신화순례>에서 저자는 우선 북미 인디안 신화를 찾아간다. 애리조나 중서부 지역과 멕시코 북부 일대에 살았던 호호캄이란 농경족의 유적지를 답사하고 그들이 남긴 질그릇의 문양으로부터 대모신(大母神) 숭배의 증거를 찾으며 인간과 신 사이를 중개하는 카치나라는 정령들의 인형으로부터 호피 세계의 모습을 더듬고 그들의 지하 거주지인 키바를 통해 대지와 여신 숭배의 흔적을 확인한다. 그리고 호피족의 기원신화인 ‘뱀족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축제에 참여하는 등 북미 인디안 신화의 실상을 체험한다.
다음으로 저자는 연해주 깊은 숲속 오지에 사는 우데게이족을 만나러 간다. 이들은 말갈족의 후예이고 곰과 호랑이 신화를 지녔다. 이들이 우리 민족과 혈통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고수레’와 같은 습속에서 확인하고 갤룬 왕의 건국신화를 들으며 세벤이라는 가택신(家宅神), 중국과는 다른 형상의 용 조각품, 고구려 무용총의 벽화를 연상케 하는 춤, 샤먼 등에서 우리 문화 내지 동북아 문화의 원형을 추측한다.
이어서 저자는 연해주 고려인의 아픈 역사를 보듬고 아무르 강변의 암각화에서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와 동류의 형상을 보며 시베리아로 발길을 돌린다. 샤머니즘이 생생히 살아있는 브리야트족의 유물에서 산신과 선녀의 원형을 살피고 지구의 눈물이라는 바이칼 호수 알흔섬의 부르한 바위에서 유라시아의 평화를 염원하는 큰 굿판을 벌인다. 시베리아로의 대장정을 마친 후 저자의 발길은 남하하여 몽골로 향한다. 텡그리를 숭배하는 몽골 샤먼의 의례를 참관하고 그들의 주거인 겔에서의 생활을 체험한 후 호수의 자연신인 나가를 통하여 아시아의 용 신앙에 대해 생각한다.
저자의 신화 여정의 종착지는 한국이다. 태고의 정신을 간직한 북미 인디안, 연해주 우데게이족, 시베리아 브리야트족, 몽골족 등의 신화를 섭렵한 후 우리 신화에서 건국신화, 영웅신화 이전의 잃어버린 원신화(原神話)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제3장 <잃어버린 우리의 신화를 찾아서>에서 저자는 선문대 할망, 웅녀, 유화, 성모천왕, 바리공주 등의 여신 신화에 주목하고 지신밟기 등 무속 및 민속의례에 관심을 기울인다.
궁극적으로 이 다채로운 신화의 여정을 통해 저자는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말하려는가? 제4장 <신화의 부활>에서 저자는 가부장적 신화에 의해 억압된 신석기 시대 대모신 신화의 정신을 부활시킴으로써 인간과 자연간의 괴리, 종족과 종족간의 갈등이 첨예화된 현세를 치유하고 통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저자가 기대고 있는 짐부타스의 가설이 학계에서 정론으로 확립된 것은 아니지만 저자의 신화 체험은 가설 이상의 믿음을 확보하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믿음을 그는 마을 신화의 재건, 다문화 축제, 신화교육 등의 구체적 실천을 통해 현실화시켜 나간다.
주목할 만한 작업은 잊혀진 신화를 찾아내고 그것을 이미지로 재현해내는 ‘신화 그리기’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단절되지 않고 서양 상상력의 원천이 되어 근대 신화학의 정전(正典)이 된 것이 초기의 벽화 이래 르네상스 이후 수많은 작가들에 의해 재현된 이미지에 힘입고 있다는 사실, 오늘날 일본 문화산업의 흥성이 에도 시대 이래 생산된 풍부한 요괴 이미지 자원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동양신화는 고대의 벽화 이후 유교 현실주의의 억압을 받아 제대로 이미지화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이러한 견지에서 저자의 신화 그리기 작업은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할 것이다.
저자는 스스로 밝혔듯이 신화학자가 아니며 이 책 역시 신화학의 저작이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은 신화의 본질이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관통하는지를 보여주는, 나아가 신화를 통해 바람직한 삶을 구현하고자 하는, 신화학 이상의 성찰과 비전을 담은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은 신화에 관심 있는 일반 독자들뿐만 아니라 안락의자에서 신화를 재단하고 분석하는 신화학자들에게도 생동적인 깨달음과 실천의 방안을 제시해 줄 양서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