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코린토 1서 15,1-8 요한 14,6-14
복음서를 읽다 보면 잘 이해되지 않는 말씀을 만나기도 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물론 성경 또는 교의 신학적으로 그 의문들에 대한 정답을 이미
알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음속에 생긴 의구심들이 말끔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저는 신앙심이 깊었던 어머니 덕에 태어난 지 단 이틀 만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뒤 신자로, 신학생으로, 사제로 살아온 것이 제 인생입니다. 그렇게 신앙인으로 살아오면서
늘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 바로 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도저히 온전히는 따라할 수 없는 일이 아니던가요?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기만 하면 당신께서 하신 것보다 훨씬 큰 일도 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시니, 이 말씀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의 생애를 복음과 연결하여
묵상하다가 이 말씀이 조금 이해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야고보 사도는 이집트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분노에 찬 이교인들에게 몽둥이로 매를 맞아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필립보 사도도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는데, 십자가에 매달린 것도 모자라
그 상태로 다시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사도들이 이렇게 모진 수난을 겪으면서도
복음을 증언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 복음 말씀대로 자신의 힘이 아니라,
그들 안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힘에 온전히 의탁하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 그리고 그렇게 나 자신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우리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아니 그보다 더 큰 일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두 성인의 삶과 복음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 자신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굳게 믿고
또 그분의 힘으로 예수님처럼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오늘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주교구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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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원 베드로 신부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코린토 1서 15,1-8 요한 14,6-14
필립보는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함께 일찍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1,40-46 참조).
필립보가 예수님께 나타나엘을 인도하고(1,45-46 참조) 그분을 뵙기를 바라는 그리스 사람들을
데려온 일은(12,20-23 참조) 선교사의 탁월한 자질을 드러냅니다.
특히 예수님을 만나기를 머뭇거리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라고 말할 만큼,
‘누구든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진리를 깨닫고 믿음을 가질 수 있다!’라는 신념을 가진 제자입니다.
그런 필립보가 정작 ‘나를 알게 된 이는 아버지를 이미 뵌 것이고, 그분을 알게 된다.’는 말씀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앞둔 마지막 저녁까지도, 그분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른다던 토마스와(14,5 참조), 그저 성부를 직접 뵙게만 해 주시면 충분하겠다던 필립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리석고 나약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고(13,1 참조),
그들이 앞으로 더 큰 일도 하리라 믿으셨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필립보는 스키티아와 프리기아 지방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달려
돌에 맞아 순교하였습니다. 소 야고보는 다른 사도들보다 먼저 언급될 만큼(제1독서; 갈라 2,9 참조)
사도단의 맏형 구실을 한 이(예루살렘의 초대 주교)로, 시리아와 이집트까지 가서 선교하다가
신전 지붕에서 내던져져 몽둥이에 맞아 순교하였다고 전합니다.
한때의 사도들처럼, 알아듣기 힘든 신비와 삶의 우여곡절 속에 믿음과 오해를 되풀이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나를 믿으시는 주님 곁에 머물며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간다면,
어느덧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더 큰 일’을 이루는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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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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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코린토 1서 15,1-8 요한 14,6-14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5대째 천주교를 믿는 ‘구교우’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부모님께 물려받은 신앙은
관념이 아니었고, 교리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부모님께 물려받은 신앙은 생활이었고,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부엌에서 밥을 푸시면서 성호경을 그으셨습니다.
이름은 세례명을 불렀습니다. 생일에는 본당에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기일에는 가족이 모여서 연도를 바쳤습니다. 길게 줄을 서서 부활, 성탄 판공을 보았습니다.
교무금, 헌금은 꼭 챙겼습니다. 아침, 저녁기도를 바쳤습니다. 삼종기도를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길 기도, 묵주기도를 하였습니다.
성당에서 하는 피정, 교육은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습니다.
본당 신축헌금을 냈고, 형편이 어려우면 노력봉사를 하였습니다. 9일기도, 54일 기도를 하셨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어디 여행을 가면 제일먼저 주변에 있는 성당을 찾아보았습니다.
주일미사는 물론이고 평일미사에도 참례하였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물려받았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를 존중하고,
존경하였습니다. 저는 신앙을 교리에서 배우기 전에, 교회에서 배우기 전에 먼저 집에서 배웠습니다.
신학교의 가르침은 집에서 하는 신앙생활의 연장이었고, 집에서 하는 신앙생활이
교회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는 확인이었습니다.
80년대부터 신자의 수가 급격하게 늘었습니다. 매 10년마다 100만 명씩 신자가 늘었습니다.
가정에서 신앙생활을 배우는 신자의 수보다는 성당에서 교리를 배워 신자가 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늘어나는 신자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성전을 신축해야 했고,
본당은 분가해야 했습니다. 1년을 배워야 하는 교리는 6개월로 단축해서 배우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영성의 깊이를 채우는 것보다 친교와 활동을 넓히는 것에 치중했습니다.
주일미사의 참례 수가 80%가 넘었는데 신자가 늘어나면서 주일미사 참례 수가 점점
낮아졌습니다. 20%을 유지하기도 어려워졌고, 팬데믹으로 그마저도 힘들어졌습니다.
도시생활과 핵가족으로 가정에서 신앙이 전수되기도 어려워졌습니다.
믿음, 희망, 사랑으로 덕을 쌓아 영원한 생명을 얻기보다는 재물, 권력, 명예로 현세해서
성공하는 삶을 먼저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정에서 기도하는 삶을 보여주기 보다는 대학만 갈 수 있다면, 성공할 수 있다면
잠시 성당에 가지 않아도 기다려주는 배려(?)가 있었습니다.
성직자와 신자는 늘어났지만 성직자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성직자도 늘어났습니다.
냉담자도 늘어났습니다. 뿌리가 깊지 않는 나무가 바람에 쉽게 넘어지듯이,
샘이 깊지 않으면 가뭄에 곧 말라버리듯이 교회에 활력이 떨어지고,
젊은이들이 떠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이미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그리스도가 내 생의
전부입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다만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포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무엇이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떼어 놓을 수 있습니까? 환난도, 칼도, 죽음도, 세상의 권신도, 천신도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가 전해 준 복음입니다.
이것이 우리 초대교회의 신앙 선조들에게 전해 진 복음입니다.
이것이 저의 부모님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
오늘은 그 복음을 우리에게 전해준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사도들은 복음을 충실하게 전하였고, 신앙의 별이 되었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 삶의 중심이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한 삶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 복음의 빛이 이웃에게 전해 질 것이고,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가 참된 행복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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