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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독교 미술인가? | ||||||||||||||||||||||||||||||||||||||||||||||||||||||||||||||||||||||||||||||||||||||||||||||||||||||||||||||||||||||||||||||||||||||||||||||||||||||||||||||||||||||||||||||||||||||||||||||||||||||||||||||||||||||||||||||||||||
기독교와 현대미술의 새로운 관계성 찾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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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실린 도판들은 본 기사와 특정한 연관성이없는 참고자료일 뿐이다. 그림이 없이 글 만 올리면 너무 심심할 것 같아 작가들의 동의도 없이 올려봤다. 작가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만약 작가들이 안다고 하더라도 모두 필자의 지인들이라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문제가 생기면...그때 지우리라*[필자주]
우리가 이미 아는바 대로 ‘기독교 미술’이란 용어는 ‘기독교’와 ‘미술’의 합성어이다. 여기서 ‘기독교’의 ‘기독’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우리말 음역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의 존재를 신앙하고 따르는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신학적으로 기독교의 핵심인 ‘기독론’ 즉 ‘그리스도론’에 그 뿌리를 둔다. 그러면 ‘미술’이란 말은 어떤가? ‘미술’은 시각적 미를 추구하는 예술의 한 분야이다.
이렇게 정의 할 때, 여기서 사용하는 ‘기독교 미술’은 바로 ‘기독교’와 ‘현대미술’의 합성어가 된다. 그러나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두 용어의 만남은 아이러니한 면이 있다. 절대적 가치와 보편성을 추구하는 ‘기독교’와 상대적 가치와 개인의 자유와 표현을 주장하고, 대상의 ‘절대적’ 재현을 거부한 ‘현대 미술’이 어떻게 함께 어울릴 수 있을까? 이전에는 ‘기독교 미술’이란 말이 하등 문제가 없었지만 최소한 현대 문명에서는 분명 두 용어의 결합은 어색해 보인다. 현대미술과 기독교의 어색한 관계는 어느 정도 교회의 책임이다
필자는 이러한 혼란이 기독교 미술에 대한 신학의 부재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고, 이에 대해 몇 가지 언급을 하고자 한다. 필자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문화신학자 ‘폴 틸리히’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미리 밝힌다. 오늘날 현대미술과 기독교의 어색한 관계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교회의 책임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개신교의 역사를 돌아보면 종교 개혁 이후, ‘눈의 강조로부터 귀의 강조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 그 한 원인이다. 말씀과 설교가 중심이 된 개신교는 ‘듣는 말씀’, ‘듣는 성갗 등에 너무 의존했다. 그 결과 ‘설교’나 ‘성가'와 같이 ‘귀’와 관련된 것들이 발전하고, 결과적으로 시각적인 부분의 퇴화를 가져온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와 현대 미술의 재회는 다시 가능한가? 이에 대해 틸리히는 매우 긍정적인 전망을 내 놓는다. 현대 예술의 표현적 성향이 기독교 예술의 재탄생을 위한 좋은 기회라고 그는 주장한다. “표현된다면, 그것은 이미 초월된 것이다”. 그의 이러한 표현은 결국 죄인이 죄를 고백하고 의롭다 하심을 받는 기독교적 원리와 상통한다. 죄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짐’을 받는 것은 ‘회개’라는 ‘표현’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표현의 영역에 자리하는 예술은 이미 “궁극적인 존재’와 그 자리를 공유하는 것이다.
‘신성의 원리’는 기독론과 연결되며, 결국 딕슨이 말한 성육신에 대한 ‘교회의 감수성’과도 관련한다. 그러한 ‘감수성’은 교회와 예술이 만나는 한 지점을 형성해 준다. “신성의 원리”가 너무 작가들에게 강조될 때, 교리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성향이 드러나게 되고, 예술가의 창작에 대한 자유는 교리에 의해 철저히 무시된다. 이러한 성향들은 이미 중세 미술을 통해 확인된 바이다.
그러나 “솔직성의 원리” 만으로는 ‘교회의 감수성’에 예술은 결코 응답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솔직성의 원리”는 이미 현대 예술 작가들에게 무한정으로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솔직성의 원리”를 강조하다 보면, 양식적으로나 감수성 면에서 일반적인 현대 미술과 기독교 미술의 구별이 어려워질 수 밖에 없다. 그럴 경우 그냥 현대 미술이라 하면 되지, 굳이 ‘기독교 미술’이란 말을 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주제”는 “형식”에 의해, “형식”은 “양식”에 의해 각각 제한된다. 특히 여기서 “양식”은 한 시대의 많은 창작들을 “하나의 독자적인 방식”으로 정의하는데 유용하다. 그래서 우리는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인상주의’ 등과 같은 분류로 한 시대의 작품들을 양식사적으로 정의한다. 물론 이러한 양식사적 역사 서술이 근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방법이 과거 한 시대의 예술과 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결국 “양식”은 한 시대의 작품들 속에 드러나는 어떤 “보편성”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 “보편성”은 “그 시대의 궁극적 관심”이 무엇이었는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다. 교회는 '솔직성의 원리'를, 작가는 '신성의 원리'를 추구해야
지난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기독교 미술”에 대한 담론과 창작품들 속에서, 우리는 아직도 전체를 아우르는 이러한 “보편적인” 요소들을 발견하기가 힘들다. 공통점이 있다면 작가들의 창작에 대한 ‘신앙고백적’ 진술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두에서 이미 언급한 것 같이 자신들의 관점에서 각자 자신들의 관점만을 말하고,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미술”이란 말에 “기독교”를 덧붙이려면, 우리는 최소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기독론적인” 보편성과 이에 근거한 “교회의 감수성”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성육신 사건)”과 “행하심과 가르치심”, “고난 받으심”, 그리고 “죽으심과 부활하심” 등과 관련한 교회의 고백은 이천 년 동안 기독교 역사 속에서 그 “보편성”과 “정당성”을 지켜왔다. 그 “보편성”은 다른 말로 “복음”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기독교의 핵심축이며, 예배 때 우리의 “감수성”을 움직이는 요소들이다.
개신교가 “우상숭배”와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그 동안 “눈의 예술”을 멀리 했지만, 이제 “돌아온 탕자(?)”를 품듯이 교회가 “미술”을 다시 품어야 할 시기가 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교회와 미술의 재회에는 교회와 미술가들에게 동일한 책임이 요청된다. 교회는 “중세 교회”의 미술에 드러난 교리적-전체주의적 성격을 다시 답습하지 않기 위해 작가들의 “솔직성의 원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반대로 작가들은 “신성의 원리”를 어떻게 자신의 창작 속에 적용할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맹목적으로 교회의 요구에 끌려갈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고유한 창조성에 입각하여, 자신의 신앙적 양심에 “솔직한” 창작을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교회 또한 작가들의 “솔직성의 원리”를 적극 수용하여 이를 “신성의 원리”에 적용할 길을 모색해야 한다. 존재의 위기를 그대로 반영한 현대미술은 '신앙적'
즉 현대 미술은 이 시대의 존재의 위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한스 로크마커는 “현대 예술과 문화의 죽음”에서, 현대 미술(또는 예술)의 “신비주의적 요소”와 “허무주의적 요소”를 비판하면서 (물론 그의 신비주의에 대한 비판은 신비주의와 주술신앙을 혼동한 신학적 무지에서 오는 것이지만), 이러한 현대 미술의 ‘급진성’을 현대 예술의 “죽음”이란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비판한 바 있다. 그는 톨스토이와 유사하게 “좋은 예술”과 “나쁜 예술”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기독교가 인간의 삶을 갱신하듯이 기독교 미술이 “나쁜 예술”을 갱신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 예술가들이 우리에게 준 우리의 극한 상황의 이미지들과 상징들은 성령의 ‘전도된(inverted)’ 상징들이다.” 그의 이 같은 표현에는 강도 맞아 상처받은 이를 품었던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상처받은’ 현대 예술을 품고자 하는 소망이 들어있다. “성스러움의 변증법”이라 할까……그는 짙은 어둠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의 희망을, 즉 기독교 미술의 가능성을 현대 미술 속에서 찾는다. 그에 앞선 폴 틸리히도 현대 미술의 ‘표현적’ 성향 속에서 기독교 미술의 가능성을 피력한바 있다.
그는 현대 미술의 표현적 요소가 기독교와 만날 특별한 지점이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현대 미술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감수성과 아픔들, 그리고 상처받고 메마른 영혼들의 존재론적 위기를 우리들에게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현대인의 존재의 위기를 우리는 그 속에서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곳이 바로 우리가 품어야 하는 선교적 비전의 장임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이와 같이 현대 미술을 거시적이고 ‘계시적인 차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계시적’이라 함은 이 시대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성령의 역사’와 관계한다. 통합적이고 총체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현대 미술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새로운 가능성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미술”은 “현대 미술”을 품에 안고, 그 속에서 발견된 동시대의 보편적인 요소의 지점에서 “기독교”와의 만남을 시도해야 한다. 미술에 대한 개신교의 관심과 창작 지원이 아쉬워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 탈합리주의, 탈중심, 신자본주의, 신제국주의 시대에 새롭게 ‘영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사람들의 영성에 대한 관심이 ‘기독교’에 집중되지 않고, 다른 종교로 옮겨가고 있는 실정이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그 만큼 종교나 영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 현대 예술은 이러한 사람들의 갈증에 끊임없이 응답하면서 자신들의 위치를 확보해가고 있다.
개신교가 미술에 소홀했었던 만큼 이제 관심을 기울일 때가 아닐까? 현대 예술이 ‘어두움’이나 ‘죽음(?)’ 가운데 있다면, 이제 새로운 희망을 그 재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교회가 예술가들의 창작을 지원하고, 예술가들은 현대 예술의 장 속에서 자신들의 창작의 영역을 넓혀가며, 또 역으로 교회는 그러한 작가들의 작품들을 교회 내에 적극 수용하는 그런 시스템의 구축은 과연 한 사람의 이상으로만 남을 것인가? 채창완(진흥아트홀 부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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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02월 02일 |
첫댓글 예술감상은작가와의대화로작품이주는메세지를나의언어로이해하면되는데개인의상상력을더하면더욱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