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종교 전통과 꿈
옛사람들에게 꿈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자리였다. 희랍 문화와 성서의 영향을 깊이 받은 초대교회는 꿈의 긍정적인 역할을 잘 이해하였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영혼에 관해 쓴 글에서, 꿈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내시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잘 모른다고 하였다.
순교자들의 행적을 보아도 꿈은 특별한 몫을 한다. 뽈리까르뽀Polycarp는 순교하기 삼 일 전 꿈에 그의 베개가 불속에 던져진 것을 보고 자신이 화형될 것을 미리 알았다. 펠리치따스Felicitas와 페르페투아Perpetua의 순교도 꿈과 관련이 있다. 이 두 여인은 꿈을 통해 자신들이 견디어야 할 고통이 어떤 것인지 또 하느님과 함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상급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고, 용감히 순교할 힘을 받았다. 희랍의 교부들 역시 꿈을 존중하는 그 시대 분위기의 영향을 받았다.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azianzus는 자신이 받은 영감의 대부분이 꿈에서 나온 것이라 하였다. 꿈에 관해 매우 광범위한 저술을 남긴 시네시오스Synesios of Cyrene는, 꿈을 해석하여 위험이나 질병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꿈을 기록하라고 권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꿈을 꾸고 보물을 발견하는 것은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글재주라곤 없던 이가 꿈에 뮤즈와 이야기하고 재능 있는 시인이 되어 잠에서 깨어날 수도 있고, 자신이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자는 동안 알게 되기도 하고, 병을 고치는 중요한 처방을 꿈에서 얻기도 한다. 놀랍고 신비로운 일이다. 인간은 잠을 자면서 사물의 참 본질을 깨닫는 아주 완벽한 통찰에 이르기도 한다. 깨어있을 때 우리를 가르치는 것은 사람이지만 자는 동안 우리를 비추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꿈에서 치유를 경험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꿈은 치유의 힘만 가진 것이 아니다. 꿈은 우리가 하느님을 체험하는 자리이다. 우리는 꿈을 꾸면서 하느님의 진리와 하나가 되고 사물의 진정한 본질과도 하나가 될 수 있다. 하느님은 꿈속에서 우리를 가르치신다. 그분은 꿈에서 모든 것의 진실을 보게 해주시고 당신 자신의 신비를 드러내신다. 시네시오스에 의하면 그리스 순례자들에게는 ‘사원에서의 잠temple sleep’ 이라 일컫는 관습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병을 낫게 하는 거룩한 꿈을 꾸기 위해 순례하면서 성스러운 사원에서 잠을 자곤 했는데, 신이 보낸 꿈을 꾸려고 기도와 단식으로 준비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잠에서 깨어나면 꿈을 해석하는 사제들에게 자신들이 지난 밤 꾼 꿈을 가져갔다. 당시 꿈을 해석하는 것은 종교적인 일이었고 이 과정은 오늘날 심리치료의 원리와 상당히 비슷하다.
고대의 심리학자라 부르는 교부 에바그리우스Evagrius Ponticus는 꿈과 영적 여정의 관계를 깊이 통찰하였다. 그는 인간이 도달해야 할 가장 높은 목표는 아파테이아apatheia로, 이는 내적 조화, 격정으로부터의 자유, 마음의 순결, 하느님의 사랑에 몰두하는 것이라 말한다. 융C.G.Jung에 의하면 아파테이아는 성공적인 자기실현self-realization의 표시이다. 에바그리우스는 이 아파테이아에 도달하는 방법과 내적 평화와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표징들을 그의 저술에서 설명한다. 그는 우리가 깨어있는 시간들은 격정과 감정이 주관하며 이것이 꿈에 영향을 준다고 보았다. 분노는 화를 내거나 공격적인 태도를 보일 때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꿈에서도 모습을 나타낸다. 분노하는 사람은 자면서도 기분 나쁜 꿈을 꾸거나 몸이 상하기 쉽다. 분노나 화가 꿈에서까지 얼마나 우리를 조종하는지 알아차려야 한다. 에바그리우스는 나쁜 꿈은 악마가 분노를 통해 하는 짓이라 여겼다. 그러므로 잠자리에 화를 가져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태양이 지기까지 화를 내지 말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악마가 한밤중에 우리 영혼을 공포에 떨게 할 것이고 다음날 우리는 더 겁쟁이가 되어 깨어날 것이다. 꿈의 무시무시한 이미지들은 주로 분노에서 올라온다. 실로 성을 잘 내는 것만큼 영혼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Praktikos 21)
꿈의 이미지들은 분노의 영향을 받고 우리 삶은 다시 이 꿈의 영향을 받는다. 악몽을 꾸고 나면 몹시 지치고 무력해져서 새 날을 힘들게 시작하게 된다. 에바그리우스는 좋은 꿈과 나쁜 꿈이 우리의 영혼 상태를 반영한다고 보았다. 우리는 꿈을 통해 마음의 순결을 향한 영적 여정에서 자신이 얼마나 진보했는지 알 수 있다. 많은 꿈들이 악마로부터 오고 꿈을 통해 악마는 우리를 약하고 병들게 만든다. 어떤 꿈은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떼어놓기까지 한다. 에바그리우스는 그런 꿈을 꾸면 즉시 그리스도 안에 피난처를 찾으라고 충고한다. 무서운 꿈은 그리스도께 되돌아가게 하는 자극이 될 수 있다. 그분은 우리의 약하고 불안한 영혼을 낫게 하고 평화를 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 진정한 평화의 자리를 찾으려면 내면의 격정들과 마주해야 하고 그것들과 싸워야 한다. 자기관찰과 영적 투쟁은 꿈속에서도 계속되는 것이다.
성인들의 생애에 꿈은 자주 등장한다.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예로니모Jerome는 꿈을 꾸고 세속의 학자에서 그리스도교 학자가 되었다. 파코미우스Pachomius는 그의 새로운 소명을 꿈에서 알아들었다. 은수자였던 그는 어느 날 꿈을 꾸고 회수도승 생활의 창시자가 된다. 그리스도교의 이웃사랑과 은수자의 이상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지 꿈에서 분명하게 깨달았던 것이다. 베네딕도 성인은 제자들의 꿈에 나타나 그들 수도원에 관한 계획을 말한 일도 있다. 그 역시 영적 스승으로 꿈에서도 제자들을 가르치며 길을 인도하였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역시 꿈에서 그의 소명을 깨닫는다. 그는 하느님의 성전 다미아노 성당을 어떻게 재건해야 하는지 꿈에서 보았다.
신비가들은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사랑이 꿈과 환시를 통해 얼마나 더 뜨겁게 타올랐는지 증거한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꿈을 통해 더 쉽게 우리에게 나타난다고 믿었다. 꿈은 그들을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더 열렬히 기도하게 하였고, 더 깊이 사랑하며 충실히 살도록 이끌었다. 인간은 자는 동안 긴장에서 벗어나 더 편안한 상태에 있고 꿈을 꾸면서는 바깥세상의 방해를 덜 받기에 하느님과 영의 세계에 더 많이 열려있게 된다.
그리스도교 영성 안에서 꿈은 줄곧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영적 스승들은 하느님의 뜻이 꿈에서 드러날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었고 하느님의 구체적인 뜻을 찾는 중요한 수단으로 꿈을 존중하였다. 분명 꿈은 하느님을 강력하게 체험하는 자리이다. 기도와 묵상 중에 하느님께 자신을 여는 것은 사실 우리 자신의 일이 아니다. 하느님이 하신다. 하느님은 꿈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말씀하신다. 꿈을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제한된 영적 수고에 매달리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에 기꺼이 마음을 열고 그분께 길을 내어줄 수 있다. 하느님께서 꿈에 당신 치유의 손길로 우리를 어루만지시면 우리는 그분을 아주 가까이 느끼면서 생기 있게 잠에서 깨어나게 된다. 그분은 꿈에서 우리 마음에 대고 말씀하시며 우리가 사랑받는다는 내적 확신을 주신다.
영성사 안에서 볼 수 있는 꿈의 또 다른 의미는 꿈이 우리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하고 더 정직히 자기 자신과 대면하게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꿈에서 우리 자신의 진실을 보게 하신다. 물론 이 진실은 언제나 기분 좋은 것만은 아니다. 초기 수도승 전통에서 꿈의 이런 역할은 매우 강조되었다. 악마들이 꿈 안으로 무시무시한 이미지들을 불러들인다면, 이는 우리 영성생활이 바로 그런 상태라는 것을 말한다. 우리 안에 악습과 결점들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이런 꿈을 꾸고 알아차려야 된다. 우린 이미 오래전에 이 악습들을 물리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적어도 우리 의식 안에 분노와 미움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꿈은 우리가 아직도 과거의 상처로 인한 증오와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꿈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보게 하고 그것을 인정하게 한다. 꿈은 마음의 순결과, 하느님과의 일치, 내적 자유를 가늠케 하는 정직한 지표이다. <계속>
첫댓글 난 하느님의 목소리 해석을 못하고 있는 딸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