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영성생활과 꿈의 역할
어떤 이들은 꿈을 대면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꿈이 해로운 무엇인가를 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일이다. 꿈은 그 자체로 결코 위험하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처한 현재 상황과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위험들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깨어있게 하고 위험이 있다면 피하게 한다. 그러니 위험을 암시하는 꿈도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그런 꿈은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제 삶의 방향을 바꾸어 재난이 닥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꿈을 꿈 그 자체가 아니라 현실의 삶으로 가져와 이해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 내면에 강한 저항이 일어나기도 한다. 융의 제자 E. Aeppli는 꿈이 전하는 메시지를 거부하는 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꿈이 담고 있는 통찰을 외면하는지 모른다. 그 깨달음이 세상에서 우리가 맺고 있는 어떤 특정한 관계에 해를 끼칠 수도 있고, 집착했던 삶이나, 일, 태도들을 버리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꿈의 메시지를 거부하곤 한다. 우리는 자신이 지금 좋지 못한 상태라는 것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리는 쪽을 택한다. 우리는 길들여지지 않은 본성과 충동에 의지하여 살고 있음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제는 겁내고 있던 세상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꿈의 강력한 충고를 인식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고 세상이 주는 과제로부터 영원히 도망치려 한다. 그러나 이 때야 말로 우리가 외면하고 있던 것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아주 깊은 데서 나오는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내 삶이 정녕 이렇다면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이 꿈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이다. 꿈에 나타난 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묻고, 무엇보다도 나의 인생을 위해 이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자신에게 질문할 수 있다. 꿈에 옷을 제대로 입지 않고 사람들 앞에 나선다면 그것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모양새가 얼마나 어색하고 불안한지를 나타낸다. 우리의 확신에 찬 외양 뒤에는 내적 가난과 헐벗음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숨어있기 마련이다. 맨발로 성당 같은 곳에 들어가는 꿈을 꾼다면, 그것은 이제 매일의 삶의 단순하고 평범한 진실들을 무시하지 말고 좀 더 진지하게 내가 지닌 자연적인 힘들과 접촉하라는 의미이다.
꿈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똑똑히 말해주지는 않는다. 대개 잠에서 깨어났을 때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앞으로 일어날 일과 관련이 있는 어떤 암시를 감지하기도 한다. 지금 지나치게 과로하고 있다거나, 어떤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어서 하느님과 멀어지고 있다거나... 이런 느낌에 진심으로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무엇인가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이 다시 솟아나는 것이다. 이제 나를 움직이게 하는 힘의 원천이 어디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하느님과 함께 꿈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분은 나를 내면의 샘으로, 그간 내가 진흙탕으로 만들어놓은 그 샘물, 받기를 거절했던 은총의 샘으로 다시 데려가실 것이다.
심리학자들의 연구는 꿈의 언어를 이해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꿈은 영혼이나 무의식의 언어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언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꿈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하시는지 경청해야 한다. 우리는 종종 침묵이나 기도 중에 들려온 소리를 멋대로 왜곡한다. 우리 욕망을 꿈에 투사하기도 하고 거부감이 드는 것은 무시해버린다. 꿈을 통해 보게 된 진실은 종종 불유쾌한 것으로 지금까지 우리가 의식으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성공적으로 차단해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꿈에서 우리 자신의 진실을 보여주시고 우린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꿈에서 우리의 자아는 더 이상 우리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언어를 간과하는 것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치유하시는 그분의 손길로부터 우리 삶의 중요한 영역을 가로막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보면 우리의 영성생활은 진정성과 자유, 사랑과 선함, 생명력의 결핍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인간 영혼의 그림자를 무시하는 영성생활은 위험한 긴장 상태로 치닫게 마련이다. 우리 삶의 한 쪽에는 하느님께 순종하며 사랑을 하려는 선한 의지와 노력이 있지만, 다른 쪽에는 세속적인 필요와 인간적 욕구, 육체적 충동과 그것들의 억압인 그림자가 있게 마련이다. 너무 쉽게 우리는 이 두 영역을 단절시키고 그 사이에서 분열되고 만다. 종교나 교회가 자주 보이는 신경증 증세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랑이라는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가 인간을 혹독하게 대하고 지나친 것을 요구하고 마침내 사람들을 서로 갈라놓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슬프게도 교회는 과거 역사 안에서 자신 안에 감당하기 어려운 긴장을 만들어왔고 많은 사람들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인류 역사와 교회의 풍부한 전통을 새롭게 이해하여 성숙한 영성을 키워가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그리스 신화, 초기 수도승 전통, 이냐시오 영성,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그리고 곧잘 의심과 오해의 표적이 되곤 했던 교회 역사 속의 뛰어난 여성들은 그리스도교 전통의 귀한 보화들이다. 성숙한 영성은 몸을 도외시하지도 꿈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모든 것을 포함한 전체성 안에서 인간을 이해할 때에만 우리는 온전하고 건강한 존재로 성장할 수 있다.
영적 여정에 밤 시간이 제외되지 않는다면 영성생활은 훨씬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은 우리 영혼이 가장 고요히 집에 머무는 밤 동안 더욱 가까이 우리 곁에 계신다. “저를 타일러 주시는 주님을 찬미하오니 밤에도 제 양심이 저를 일깨우나이다. (시편 16,7)” 밤이 되면 우리 영혼은 떠돌기를 멈추고 집으로 돌아오고, 그 때 하느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 마음에 대고 말씀하신다. 시편은 또 말한다. “잠자리에서도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잠잠하여라(시편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