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동사람들을 보면 한국인들과 모양새가 제일 가깝다. 고구려인 이정기가 제나라를 세우고 손자 이사도까지 50여년간 통치하자 당조정은 신라에 요청하여 이사도 정벌에 신라군 3만을 투입했다.
신라는 정벌의 댓가로 어지러운 당나라와 Deal을 해서 땅을 얻었다.성덕왕때에 신라는 산동절도사를 두었다. <삼국사기>는 이같은 사실을 숨기려고 글자를 덧붙여놔 긴가민가 하게 변조했다.
그러나 이후 신라는 관리를 파견하고 거류민들을 통제했는데 신라말기에 벌어진 진성왕 이후 희강왕때의 궁중대란으로 신라의 고관들이 신라방으로 도망가고.. 해상왕 장보고 등은 중국땅에 있었던 신라방 사람이 아니라 신라 산동 영유지 사람이다.
2019년 산동성 일조시에서 4000년전 수장이 관리하는 성터에서 수백구의 유골이 발굴되었는데 이사람들은 농사를 지었다. 그 증거로 탄화된 콩,쌀,조가 나왔고 충치가 있는 유골이 20%였다.
더 기가 막힌것은 검은색 도기의 모양이 신라,가야,백제의 도기의 선조 쯤 되듯이 도기굽에는 다른 지역과 달리 구멍이 뚫려 있고 두께는 달걀 껍데기 정도밖에 안된다. 높이 25cm의 그릇이 무게는 81 gr밖에 안된다. 대단한 기술이다.
산동 용산문화는 대단한 아름다움과 나름대로의 글자를 가지고 있었고 모르긴 몰라도 홍산인들이 요녕반도에서 산동반도에 이어지는 섬을 따라 안전하게 배로 이동해와 문명을 일군것으로 보인다.
이사람들과 산서성 도사발굴 유적의 인골과 관련이 있다. 문화와 문명은 단방향이 아닌 다방향에서 교류하고 형성되어 이루어진다.
2021.4.23.
첫댓글 一名 新羅史抄라고도 하는 南堂遺稿의 諸尼師今紀 및 諸王紀 기록들에 따르면,
사로/시림/계림/신라는 일찍부터 겨울철에 임금이 日池 인근으로 추정되는 海宅(海宮;城山南壤地境추정)이 있었고, 그 海宮의 別宮도 인근(高興鎭地境추정)에 있었다고 합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孝恭王十年(AD906)條에 [三月,前入唐及第金文蔚,官至工部員外郞沂王府諮議叅軍,充冊命使而還.]라는 기록이 있는 바, 이는 "唐조정이 新羅조정(高麗地名으로 慶州)이 바로 沂水(沂河) 땅에 있다는 의미인 沂王府로 稱하였음"을 末期新羅의 位置 관련하여 沒覺하여 왔다고 봅니다. 日照市 東港區 중간의 大古城村 小古城村 大古城九隊 등, 東海岸 奎山南隣의 大王廟와 이 圭山의 모양 등등이 火葬散骨한 文武大王陵原과 겹쳐지는 것은, 또 하나의 역사지명 위치비정을 위한 큰 표석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