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가들과 학계의 거짓말 이런 데서 들통이난다.
연나라가 조선을 쳐서 1천리를 물렸다 또는 2천리를 물렸다하는 논쟁과 이로서 조선이 약해졌다는 내용들... 그리고 위만이 연나라 사람이라는 내용과 해석은 모순 투성이다.
朝鮮[正義:潮仙二音. 括地志云高驪都平壤城, 本漢樂浪郡王險城, 又古云朝鮮地也.]王滿者, 故燕人也.[索隱:案 漢書, 滿, 燕人, 姓衛, 擊破朝鮮而自王之.] 自始全燕時[索隱:始全燕時, 謂六國燕方全盛之時.]嘗略屬眞番[集解:徐廣曰 一作莫. 遼東有番汗縣. 番音普寒反.] [索隱: 徐氏據地理志而知也. 番音潘, 又音盤. 汗音寒.] 朝鮮[索隱: 如淳云 燕嘗略二國以屬己也. 應 云 玄 本眞番國.] 爲置吏, 築 塞.
조선[정의: 潮仙 2개음이다. 괄지지에서 말하길, 고구려는 도읍이 평양성이며, 본래,한나라 낙랑군, 왕검성이며 또, 옛부터 말하기를,조선땅이라 한다.]왕'만'은 연나라 사람이다. [색은: 한서에,'만'은 연나라 사람이며, 성은, '위'씨로, 조선을 쳐서 스스로 왕이라 했다.] 처음 연나라가 전성기때 부터[색은: '始全燕時'라함은, '6국'시대에, 연나라의 전성기를 말한다.] '진번 조선'에 속하여 노략질을 일삼더니[집해: 서광이 말하기를, '막(莫)'으로 된 기록도 있고, 요동에, '번한현'이 있다. '번'음은'보한'이 바뀐 것이다.] [색은: 서광은, 지리지에 근거하여, 番(번)의 음이,藩(번),盤(반),으로 바뀌고, 汗이 寒으로 바뀐 것이라 하였다.] [색은: '여순'에,연나라가 속국임에도 두나라를 노략질 하였다. '응소'는, 현토는 본래 '진번국'이다.] 관리가 되어 장새를 쌓았다.
위만이 연나라 사람이나 아니다의 논쟁은 '自始全燕時嘗略屬眞番朝鮮爲置吏築塞.'이라는 문장에서 깔끔하게 연나라가 결국 조선이란 결론이다. (이부분은 지금 까지 번역으로는 연나라가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었다고 되어있다. 같다고 보는 분은 지적해주기 바랍니다.)
사마천이 연나라가 조선이라고 결론지었는데도 당나라 사가들이 이러니 저러니 한 잡설을 가지고 우리도 따라 중국인이라고 애둘러 결론짓는다.
<위서>에는 진나라가 망하고 진승의 대란이 일어나자 조나라,연나라,제나라 백성이 조선으로 도망간 이유가 설명된다. 굳이 연나라가 강할때만 이야기하고 약할때의 상황은 설명하지 않은 의도가 분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진개가 조선을 치기전에 그는 조선(동호,번조선)에 볼모로 잡혀있다가 연나라로 돌아갔는데 그의 출신과 활동시기도 분명치 않아서 한나라가 조선을 치는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를 설정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가공의 인물로 밖에 보지 않는다.
게다가 이러한 사서 내용을 뒷받침 해주는 명도전의 분포자료를 얻은 우리학계에서는 자신의 연구 성과물도 아닌것을 가지고 명도전의 출토범위를 보고 연나라 화폐로 예단하고 있는것이다.
연나라 장수 진개가 조선을 쳐서 1천리를 물렸다고 한들 B.C 223년에 망한 연나라가 고조선지를 차지하고 지속한 기간이 70년도 안되는데 비해 명도전의 분포는 오르도스에서 한반도 까지 너무 광범위하다.
서울시립대 박선미는 중공학자들이 발굴한 명도전의 분포와 명도전을 만들었다는 조폐창의 분포가 역현에서 적봉까지 명백한 고조선지임에도 결론은 오토매틱으로 중국화폐로 결론짓는다. 이게 청맹과니도 아니고 이럴 수 있는가? 고고학은 사서와 반드시 교차 비교하여 결론지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학자연하는 교만과 타성에 젖은 연구태도이다.
명도전의 분포지와 그 중심지에 조폐창으로 추정되는 용범이 발굴된것을 보면 고조선 강역을 그려볼 수가 있다. 연나라가 칭왕하자 조선후도 칭왕했다는 기록 이후 <삼국지> 위지에는 진나라에 의해 조나라,연나라,제나라가 망하자 그백성이 조선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은 과장이 아닌것이다.
명도전 발굴분포는 서쪽으로 오르도스에서 동쪽 한반도까지 분포되어 있고 이는 조나라와 연나라에서도 명도전이 통용되었음을 뜻한다. 가장 중요한 것이 명도전을 제조하는 중심지 즉 조폐창인데 조페창의 분포가 하북 석가장,역현,승덕,적봉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나? 고조선의 행정중심지가 그곳이라는 뜻이다.
무려 하북지역에서만 3군데의 화폐 발행소가 있었다면 전국시대 조선의 중심지는 하북이 되어야 한다.
첫댓글 남당유고 추모경에 나타나는기록
즉 북부여를 계승하는 고구리의 상해 즉 추모 즉 주몽과 그 손자 무휼 즉 대무신제 때까지 회복한 강역과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북부여 후국 황룡국 강역일부와 周를 벗어난 연 소왕의 강역이 겹치는 것으로 보입니다.
月歌會가 燕의 습속이었고 황룡을 거쳐 고구리에 전해지는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읍니다.
통전에는 수나라가 들어서기전 고구려 전성기에 동서6천리로 기록했습니다. 길림에서 지금의 오르도스까지 비정되는데 내몽골 호화호특에 고려판이라는 지명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