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을 울려라 迎鼓
북 고 鼓 와 북칠 고 鼔 자는 모두 힌옷을 입은 유목민 백적 (白狄)이 즐기던 북을 뜻한 글자다. 목동 견우의 악기라고도 했다. 백익을 저늙은이라고 펌하한 이기씨(伊耆氏造鼓)가 만들었다 . 옛적부터 북(鼓)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다.
<시경>에 실린 고종벌고(鼓鍾伐鼛)에 큰 종 (鼛; 鼓 下:咎) 이라고 풀이한 시문을 모시정의에서는 “격종벌고어준상 (擊鐘伐鼛於淮上)이라, 즉 종을 치며 회淮하 상류에서 큰북 (鼛)을 가진 자와 싸우는 장면을 읊었다”고 풀이 했다 . 큰 북(鼛)을 가진자는 백익 또는 그를 따르던 사람들을 뜻한 글자다.
<설문해자>에는 鼛:大鼓也。从鼓咎聲。《詩》曰:「鼛鼓不勝。」라 하나 시경에는 鼛鼓不勝 는 없고, 문왕지십에 “鼛鼓弗勝”란 문구가 있다. 음이 같은 不勝이란 시구가 상송 현조에 있다.
단군왕검 백익이 북 (Drum)을 고안 했다. 옛부터 큰 행사에는 북을 사용 했다. 부여에서는 정월에 하늘에 제사하고 나라 사람들이 크게 모여서 연일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 축제를 영고(迎鼓)라고 했다. 개천절 행사를 묘사했다.
<시경>에는 고종(詩經 小雅 鼓鍾)이란 시문이 있다. <통전>에는 옛 기주땅(古冀州)에 북을 치던 사람(鼓子國)이 살던 고성(鼓城)이 있다 . 당풍 양지수(唐風 揚之水)에 붉은 동정을 단 소복 (素衣朱襮, 素衣朱繡)입고 기러기우는 소리(鵠, 鴻鵠)를 따르다란 시구가 있다. 진 소공 (晉昭公)에 비유한 시문이라 한다 .
곡옥 (曲沃)이 평양 가까이 (南徙居曲沃,近平陽焉)에 있었다 . 곡옥(曲沃)은 음이 같은 고을 곡자를 바꾸어 만든 지명이다. 그 고을에 백익의 후손들이 살아 해를 숭상하던 사람들이 살던 고을(谿; 奚, 谷)을 다음사전에는 “시내 계, 다툴 혜 谿”이라 했다. 현제 쓰는 계곡 (谿谷)의 어원이다.
<한시외전 (韓詩外傳)>에는 공자와의 대화에서 악기에 관한 예기가 많이 실렸다 . 하루는 그자 제자들과 같이 북적이 사는 곳(戎山之上)에 가서 흰옷에 붉는 동정을 달고 종과 북을 치는 사람(擊鐘鼓者)을 제자는 소의호관(素衣縞冠)이라고 했다. 모두 전형적 한복을 묘사 했다. 백의 민족의 시원이 그곳이다.
그곳이< 잠부론>에 나오는 고성(苦城)이 있었다. 단군왕검 백익과 관련된 곳이다 . 옛부터 전해오던 3000여수의 시문을 공자가 정리하여 오늘의 시경이 나왔다고 하지만, 공자 이후는 물론 하고 한무제 이후에도 시경의 글자를 많이 조작 했다.
끝
모솔 이돈성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