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가 언제 창업되어 668년까지 지속되었는지 설이 분분하다. 한단고기까지 들이대가며 해모수의 B.C 23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주몽이 창업하고 부여계열과의 지리한 왕위계승을 이어가다 보니 태조왕처럼 119년간 살아있는 왕도 발견된다. 차대왕이나 신대왕은 76세에 왕위에 오른다. 있을수 있지만 가능한 사건들은 아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알려져온 고구려 존속 년대 기록을 정리하기로 한다.
제일 먼저 김부식이 정리한 고구려의 창업과 멸망년대를 보면
1)<삼국사기>고구려본기 동명성왕
國號髙句麗, 因以髙爲氏 一云, “朱蒙至卒本扶餘, 王無子, 見朱蒙知非常人, 以其女妻之. 王薨, 朱蒙嗣位.” . 時朱蒙年二十二歳, 是漢孝元帝建昭二年, 新羅始祖赫居丗二十一年, 甲申歳也.
주몽왕이 22세 되는해인 B.C37년에 고구려를 건국하였고 당 총장 원년 무진년(668)에 망해 705년 동안 존속했다고 썼다.
2)<삼국사기>신라본기 문무왕7년
遣沙湌須彌山, 封安勝爲髙勾麗王. 其冊曰, “維咸亨元年歳次庚午秋八月一日辛丑, 新羅王致命髙勾麗嗣子安勝. 公大祖中牟王, 積徳比山, 立㓛南海, 威風振於青丘, 仁教被於玄菟. 子孫相継, 夲攴不絶, 開地千里, 年將八百. 至於津·産兄弟, 禍起蕭墻, 釁成骨肉, 家國破亡, 宗社湮滅, 生人波蕩, 無所託心.
문무왕이 670년 안승에게 고구려왕 작위를 내리면서 ‘자손이 대를 이어 본지가 끊어지지 않고 천리 땅을 개척하여 800년이 가까웠는데 남건 남산 형제에 이르러..’
3)광개토대왕비문
‘광개토왕이 추모왕의 17세손’이라 하였는데 따라서 3대가 없어져 버렸다. 고씨와 부여씨인 해씨와의 왕위계승 전쟁이 신대왕까지 이어지면서 3명이상의 왕이 없어져 버렸다. 그중에 한사람이 발기이다.
4) <신당서>동이열전 고구려
唐 高宗 乾封3年(668) 2月 且高麗祕記曰: 『不及九百年,註 304 當有八十大將滅之.』 高氏自漢有國, 今九百年, 勣年八十矣.
가언충이 인용한 高句麗秘記에 900년이 안되어 80세 된 대장이 나라를 멸한다.
5) <한단고기>는 북부여기에서 B.C 239년 해모수까지 언급하며 북부여 말왕 고무서왕이 추모왕의 장인이라고 했다. 이때 정변이 일어나 주몽이 동부여로 피신했다고 기록했다.
6) 마지막으로 최근에 중공에서 출토된 <고자묘지명>의 기록은 매우 구체적이고 정확한 서술을 하고있다.
高慈墓誌銘(大周高壯武將軍行左豹韜衛郎將贈玉金今衛將軍) 700년제작
先祖隨朱蒙王,平海東諸夷,建高麗國, 已後代爲公侯宰相,至後漢末,高麗與燕慕容戰大敗,國幾將滅,二十代祖密,當提戈獨入,斬首尤多.因破燕軍,重存本國.賜封爲王.三讓不受,因賜姓高,食邑三千戶.仍賜金文鐵券曰,宜令高密子孫.代代封侯,自非烏頭白,鴨淥竭,承襲不絶,自高麗初立至國破以來七百八年三十餘代.代位公侯將相不絶.
그의 선조가 주몽왕을 따라 해동의 여러 이족을 평정하고 고려국을 세웠다.후세에 이르러 제후와 재상이 되었는데 후한말에 이르러 고려와 연나라의 모용과 전쟁에서 크게 패하여 나라가 장차 망하려고 하자 이십대조인 이밀이 창을 끌고 홀로 적진에 들어가 수많은 적군을 죽였다.이로 인해 후하게 상이 내려져 왕으로 봉하였으나 세번 사양하여 성을 고씨로 바꾸고 식읍으로 3천호를 받았다. 이후 고밀의 자손이 되어 대대로 제후에 봉해졌으며 까마귀 머리 희어지고 압록강이 마르도록 그 지위가 이어졌다. 고려가 세워진후 나라가 망할때 까지 칠백팔년에 삼십여대가 되도록 제후와 재상이 끊이지 않았다.
그의 묘비명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708년만에 망했다고 했고 이에따라 그 창업 년도는 B.C 40년이다. 이같은 1차사료에 신뢰를 둔다면 일설에서 말하는 김부식이 신라를 중하게 여겨서 신라가 제일 일찍 건국한것으로 기록했다는 몇몇 재야들의 입방아를 틀어막은 것이 된다.
삼국사기와 1차 사료의 차이는 불과 3년 인데 22세에 창업한 추모왕이 실제로는 B.C 40년인 전한 효원제 영광4년에 건국한것이 된다.
첫댓글 이미 중국에서 유엔에 인류문화유산 제출에서 고구려는 기원전 288년 건국하였다고 발표되었다. 천년 구구려를 말하며 이미 당성에 기록된 평양성을 함락한 이세적이 "천년 고구려를 멸하였다고" 장계를 올린 기록을 보면 고구려는 천년 고구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