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주서
百濟者,其先蓋馬韓之屬國,夫餘之別種.有仇台者,始國於帶方.故其地界東極新羅,北接高句麗,西南俱限大海.東西四百五十里,南北九百餘里.治固麻城.其外更有五方:中方曰古沙城.東方曰得安城,南方曰久知下城,西方曰刀先城,北方曰熊津城.
王姓夫餘氏,號於羅瑕,民呼為鞬吉支,夏言竝王也.妻號於陸,夏言妃也.(중략)其衣服,男子畧同於高麗.若朝拜祭祀,其冠兩廂加翅,戎事則不.拜謁之禮,以兩手據地為敬.婦人衣〈(以)〉〔似〕袍,而袖微大.在室者,編髮盤於首,後垂一道為飾;出嫁者,乃分為兩道焉.兵有弓箭刀矟.俗重騎射,兼愛墳史.其秀異者,頗解屬文.又解陰陽五行.用宋元嘉曆,以建寅月為歲首.亦解醫藥卜筮占相之術.有投壺,樗蒲等雜戲,然尤尚奕棊.僧尼寺塔甚多,而無道士.賦稅以布絹絲麻及米等,量歲豐儉,差等輸之.其刑罰:反叛,退軍及殺人者,斬;盜者,流,其贓兩倍徵之;婦人犯姦者,沒入夫家為婢.婚娶之禮,畧同華俗.父母及夫死者,三年治服;餘親,則葬訖除之.土田下濕,氣候溫暖.五穀雜果菜蔬及酒醴餚饌藥品之屬,多同於內地.唯無駞驢騾羊鵝鴨等.其王以四仲之月,祭天及五帝之神.又每歲四祠其始祖仇台之廟.
自晉,宋,齊,梁據江左,後魏宅中原,竝遣使稱藩,兼受封拜.齊氏擅東夏,其王隆亦通使焉.隆死,子昌立.建德六年,齊滅,昌始遣使獻方物.宣政元年,又遣使來獻.
위구태가 대방에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고 했는데 그가 바로 공손도이다. 현토태수 였다가 요동왕이된 공손도가 대륙백제(온조백제)의 왕이다.
주서에 기록된 6세기 백제관련 내용을 보면;
"백제왕의 성씨는 부여씨인데 어라하라고 부른다. 백성들은 왕을 건길지라고 부르는데 하나라 말을 같이 쓴다. 왕의 부인을 어륙이라고 하는데 하어로 비(妃)라는 뜻이다. "라고 했다.
백제는 송,제,양,진때에 양자강 동쪽에 자리 잡았고 후위때 중원에 있었다(북위가 중원에 있었다가 아님). 북제가 동하를 핍박하자 그 왕 부여융(무령왕)이 사신을 보내 교빙했다. 융이 죽자 그아들 창(창왕)이 왕위를 이었다. 제나라가 북주에 의해 망하자 창이 처음으로 북주에 방물을 바쳤다. 선정 원년에도 사신을 보냈다.
이 내용을 학계에서는 알 수 없이 이상하다고 한다. 한반도에 있어야 되는 백제로 상정하는한 이러한 암호는 해독되지 않는다. 즉 북제의 황제 고환이 세력을 잡아 공손도로 비롯된 대륙백제를 손아귀에 넣고 핍박하였는데 이때 대륙백제는 문주, 삼근, 동성왕의 동하인(東夏人)의 백제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었다.
운영자가 누누히 강조하지만 475년 부여씨 개로왕가가 전멸한후 백제의 부흥을 위해서 부여씨 백제왕가는 일본열도로 피신하여 전열을 가다듬은 뒤 공손씨 백제를 이은 모용씨중에서 그들을 대륙백제를 관리할 용병으로 삼는다. 이들의 성씨가 모(牟)씨가 그러한 이유이다. 그들의 이름은 부여모대라고 부르지만 모대로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동하인 출신 동성왕이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백제 왕비족에 의해 처결당한뒤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조상이 현토태수였던 백제계인 고환이 세력을 키워 동하를 차지하고 창왕을 수하에 두고 백제를 휘두르다가 선비족 우문옹의 북주에게 망하게 되자 창왕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면서 역성(歷城)에서 사로잡혀 전사하는 내용이 북주서에 기록되어 있고, 이때문에 북제서에는 백제 창왕 막다루(莫多婁)가 뜬금없이 등장하는 유왕(幼王)으로 기록된 것이다.
북제가 없어진뒤 독립한 창왕이 북주 우문옹에게 사절을 보냈다는 것은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며, 이후 창왕도 북주와 전쟁에서 패하여 전사하게 된다. 좀더 스토리를 연결하자면 대륙에 남아있던 백제왕족 임성태자가 사태를 수습하고 대만으로 넘어가서 최종적으로 일본열도로 귀환하게 된다. 이는 임성태자 족보에 나와있는 내용이다.
梁書 百濟傳
天監元年(502년) 進太號征東將軍 尋為高句驪所破 衰弱者累年 遷居南韓地.
아마도 이런 결과를 두고 동성왕 이후 백제가 쇠약해져 남한으로 그 본거지를 옮겼다고 기록한 것이다.
2020.6.1
첫댓글 좀 더 연구검증이 필요하지만,유추가 가능함으로 동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