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야중에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하지못한 것을 원망하면서 신라를 외세의 힘을 빌려 민족을 팔아먹은 매국적 집단이라고 욕을 한다.
정말 그럴까?
그같은 프로파겐더는 지극히 북한이 지향해 온 선전선동술이며 지구상 상거지 나라인 그들이 고구려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과대망상적 사관인데 남쪽의 어설픈 역사학도가 이에 놀아난 결과다.
신라는 5세기말 고구려에게, 왜와 연합한 백제에게 이리저리 채이던 내물마립간 부터 뚜렸한 통일의지를 세우고 문무왕에 이르는 약150년간 치밀하고 집요하게 적국 제거 전략을 집행하고 완성한다.
심지어 토사구팽하려는 당의 20만 대군을 맞이하여 70년간 전장에서 근력을 키운 신라군은 그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문무왕 14年 正月(674) 王納髙句麗叛衆,又據百濟故地,使人守之, 唐髙宗大怒, 詔削王官爵. 王弟右驍衛貟外大將軍·臨海郡公仁問在京師, 立以爲新羅王, 使歸國. 以左庶子同中書門下三品劉仁軌爲雞林道大揔管, 衛尉卿李弼·右領軍大將軍李謹行副之, 發兵來討.
왕이 고구려의 배반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한 백제의 옛 땅에 살면서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자, 고종이 크게 화를 내어 조서로 왕의 관작을 깎아 없앴다. 왕의 동생 김인문이 당나라의 서울에 있었는데, [그를] 신라의 왕으로 세우고 귀국하게 하였다. 유인궤를 계림도 대총관으로 삼고,이필과 이근행이 보좌하게 하여 군사를 일으켜와서 쳤다.
성덕왕 34년(735)義忠迴, 勑賜浿江以南地.遣伊湌允忠·思仁·英述, 検察平壌·牛頭二州地勢.
34년 김의충이 신라로 돌아갈 때 현종이 신라에 패강 이남의 땅을 주었다. 윤충,사인,영술 등이 평양주(營口)와 우두주의 지세를 살펴보았다.
200만의 백성을 가진 신라가 5000여만명의 인구와 군사대국 당나라를 40여차례의 전투에서 이겨 물리치고 당나라의 발해 제어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결국 요하 동쪽을 당에서 돌려받았다.
憲德王17年(819) 秋七月, 唐鄆州節度使李師道叛. 憲宗將欲討平, 詔遣楊州節度使趙恭, 徴發我兵馬, 王奉勑旨, 命順天軍將軍金雄元, 率甲兵三萬以助之. (56)
가을 7월에 당의 운주절도사 이사도가 반란을 일으켰다. 헌종이 토벌 평정하고자 조서를 내려 양주절도사 조공을 보내 신라병마를 징발하니, 왕이 칙명을 받들어 순천군 장군 김웅원에게 병사 3만을 이끌고 이를 돕도록 하였다.
당나라 입장에서는 넓고 풍요한 중원땅을 놔두고 굳이 희생을 치루면서 춥고 황량한 북쪽땅을 유지할 여유와 이유가 없었다고 보여진다.
지금7500만 인구가 모여사는 한반도가 작다고 느껴지며 중국땅이 되버린 만주지역을 부러워하지만 1500년전 겨우 200여만명이 살았던 한반도는 당시 그들에게는 큰 땅이었다.
고구려 최전성기때 영토보다는 못하지만 말기 고구려의 영토를 고스란히 되찾았다. 신라 조정의 집요하고 끈질기며 굽힐때와 버틸때를 아는 영악한 통일의지가 초기 신라때 보다 수십배의 영토를 확장했다.
수 만의 장창부대와 5천의 쇠뇌부대가 당군도 두려워한 신라의 가공할 전투체계의 주력군으로 결국 신라도 676년 당군을 몰아내고 통일을 이룩한후 100여년 동안 당과 왜의 해상세력 침입을 우려해 8세기초까지 해안선을 봉금했다.
극필반이라고 했던가? 통일후 200년도 못가 희강왕 즈음 내부의 사치와 기강해이와 함께 반란이 일어나고 안록산과 황소의 난으로 내부적으로 무너진 대륙에서는 200년전 당으로 끌려간 고구려 백제유민의 후예들이 세력가가 되어 고국으로 스며들었다.
그 대표주자가 백제유민의 후예이자 복건성에서 건너온 왕봉규 즉 왕건이었다.
신라인의 국가와 민족적 자부심과 집요함,영민함은 고려에 이어 조선으로 이어지고 현대 한국인의 유전인자로 자리잡는다.
202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