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제로 인해 고려 성종때인 993년 거란은 전쟁을 선포하고 고려에 쳐들어오자 할지론과 항복론이 맞서게되나 서희의 강화로 1차전쟁은 종결이 된다.
고려명장 서희의 활약으로 고려는 용감히 맞서 거란이 순순히 물러갔는가?
답은 아니다 이다.
태양은 오직 하나인 전제왕정 시대에 돈들여 쳐들어올때는 이유와 댓가가 있어야 한다. 지금도그렇다.
993년당시 거란왕은 야율융서(성종)이었고 나이가 어려 모후소씨(承天皇太后)가 섭정을 하고 있었고 그녀가 직접 나서서 고려와 거란의 국경을 일방적으로 그어버렸다.
기록상으로 추정컨데 이일이 있기전에 고려의 강역은 대릉하지역인 조양을 포함한 소위 현토지역 이었을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후당으로부터 받은 태조왕건의 작위가 현토주도독이다..
고려 선종5년(1088) 기록
九月 遣太僕少卿金先錫如遼, 乞罷榷場. (중략). 自天皇鶴柱之城, 西收彼岸, 限日子鼈橋之水, 東割我疆.
993년 소태후의 결정에 의해 서쪽으로 요동성을 포함한 자리는 거란에게 떼어주고 추모왕이 강위로 떠오른 자라의 도음으로 강을 건넜다는 고사가 전해지는 압록강(요하)동쪽은 고려의 땅으로 정해졌는데 거란이 이를 넘어들어와서 각장(시장)을 열자 막아달라고 고려에서 사신이 파견되었다.
당시 요하서쪽인 조양과 금주 또한 거란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사이에 태어난 목종을 죽이고 현종을 세우려고 일으킨 강조의 시군반란사건을 빌미로 1010년 어른이 된 거란 성종이 직접 고려를 침략한다.
잘알려진 당시의 강동6주는 교과서에 그려진 평안도가 아닌 요하해구 동쪽에 있었다.
문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