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왕경(王京) 개성부(開城府)
본래 고구려의 부소갑이다. 신라에서 송악군으로 고쳤다. 태조 2년(919)에 송악의 남쪽에 도읍을 정하여 개주(開州)라 하고 궁궐을 창건하였다.광종 11년(960)에 개경을 황도로 고쳤다.
2)개성현(開城縣)
본래 고구려의 동비홀로, 신라 경덕왕 15년(756)에 개성군으로 고쳤다. 현종 9년(1018)에 개성부를 없애고, 개성현령을 두어..
지리지에서 조선사가들은 끝부분에는 두곳이 다르지 않은곳으로 얼버무려 버렸다. 왕건의 고향 송악 한주를 북한산과 남한산군으로 끌어다붙여 경기도 양주와 광주로 만들어 버렸다.
또한 현종이 거란과 전쟁전 왕도에 있었던 개경이 개주였음을 <요사>와 <고려사>에 동시에 남긴다.
[고려사] 세가 현종2년(1011) 1월1일
辛亥二年 春正月 乙亥朔 契丹主入京城, 焚燒太廟·宮闕·民屋皆盡. 是日, 王次廣州.
신해 2년 봄 정월 을해 초하루 거란주가 개경에 들어가 태묘, 궁궐, 민가를 불살라서 모두 탔다. 이 날 왕은 광주에 묵었다.
거란 성종이 친정하여 개경에 들어가 궁궐과 민가에 불을 지르기전 현종은 이미 내빼서 광주에 와 있었다. 당시 광주는 요녕성에도 있었고 경기도 광주에도 있다. 후세 사가들이 분간을 못하게 만들었다.그러나 남쪽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런데 요사지리지는 한문장으로 개주가 개경임을 알려준다.
[요사] 지리지 동경요양부
開州,鎮國軍,節度。本貊地,高麗爲慶州,渤海爲東京龍原府。有宮殿。(중략) 聖宗伐高麗還,節度;更名鎮國軍。隸東京留守,兵事屬東京統軍司。
거란주 야율융서가 청강까지 와서< 정벌하고 돌아갔다>는 곳이 개주다. <요사> 본기 기록 청강을 고려사는 압록으로 기록했다. 두사서가 일치한다.
곧 압록강 근처에 개경이 있었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거란과 전쟁중인 현종4년(1014)에는 개성에 있는 궁전으로 기록된 명복궁에 기거한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왕의 조상들에게 고유제를 들인다.(고려 475년간 사용된 전각명을 전부 확인한 결과다)
2년후인 현종7년(1016)에 태조 왕건의 헛관(宰宮)을 개성에 있는 현릉에 안치한다. 특히 고려사 기록에는 현종이 1017년 3월부터 11월까지 업무를 폐하고 스스로 자책하며 한탄했다는 기록이 여러번 등장한다.
왕은 왜 스스로의 허물을 자책을 했을까? 조상이 물려준 강토를 온전히 지키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피난지 나주에서 망신을 당해서 일까?
당시 고려는 현재 압록강 이남 한반도를 江南이라고 불렀다. 당시에는 압록강이라고 안했다.이 단어를 보고 고려대륙론을 주장하는 부류들은 중국 강남이라고 하겠다...
[고려사] 세가 현종10년(1019) 2월 1일
二月 己丑朔 丹兵過龜州, 邯贊等邀戰, 大敗之, 生還者僅數千人.
2월 기축 초하루 거란군이 귀주를 지나가는데, 강감찬 등이 맞아 싸워 크게 무찔러서 살아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었다.
<속통감>125 는 이 전쟁으로 거란의 대신과 거란군의 반이상이 죽고 소수만 살아 돌아가서 조정이 마비될 지경이어서 글을 알면 관리로 발탁되었다고 했다.
이로서 1019년 거란과의 크고작은 7번의 전쟁은 끝나고 강감찬에게 원수 칭호를 내리고 논공행상을 마무리 짓는것으로 전쟁은 끝난다.
반대로 거란은 초상집으로 변해 전쟁을 패전으로 만든 소배압은 호된 자아비판을 받고 풀려난다.
[요사] 성종
開泰八年(1019), 詔數排押討高麗罪, 釋之. 加有功將校, 益封戰沒將校之妻, 錄其子弟.
조칙을 내려 소배압이 고려를 토벌하다가 패전한 죄를 낱낱이 책망한 뒤 풀어주었다.
성종은 패장 소배압을 찢어 죽이고 싶었겠지만 왕비족 출신인 어머니 소씨 집안이 온나라에 포진한터라 이정도로 끝났을성 싶다.
1018년 전쟁에서는 무대가 요녕성이지만 1019년은 확실치가 않다. 우리나라 북한의 평안북도 지명으로도 보인다.
1029년에 개성의 나성이 착공된지 21년만에 완공되었음에도 개경으로 표현해서 여긴지 저긴지 혼란을 부추긴다. 이당시 현종의 잠자리는 개성 수창궁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12년 신축(1481,성화 17) 10월17일 (무오)
남원군
양성지가 중국이 개주에
위를 설치한다는 것에 대해 상언하다.
지금
듣건대 중국이 장차 개주(開州)에 위(衛)를
설치하려 한다 하는데, 신이 거듭
생각해 보니 크게 염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개주는
봉황산(鳳凰山)에
의거하여 성(城)을
이루었는데, 산세가
우뚝하고 가운데에 대천(大川)이 있으며, 3면이
대단히 험하고 1면만이
겨우 인마(人馬)가 통하는
이른바 자연히 이루어진 지역이므로, 한
사람이 관(關)을 지키면
1만
명이라고 당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려와 거란이 서로 만만히 보지는 못해서 요하 동부는 고려속지로 인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2019.12.22 .
첫댓글 신라 후기의 韓州와 고리 초기의 開州가 작금 唐山市(서쪽의 韓城과 동쪽의 開平)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왕건이 그 당시 창건했다는 興國寺는 丸都의 順道 肖門寺를 옮겨지은 것이라 합니다. 현재 당산시 중앙의 大城山城 경내에 興國寺遺址가 있다고 구글지도와 중공내비지도에도 나옵니다. 또한 글안 성종 동침시에 거론되는 龍江이 당산시 서쪽에 있읍니다... 이 당산시에서 서쪽의 북경자금성 동북변 10Km 垻河北岸 將台鄕까지의 거리가 150Km쯤이어서 말을 타고 太祖 王建이 뚜벅뚜벅 2박 3일이면 바람쐬려 다닐 만한 거리입니다. 이미 오랑캐들의 사냥터로 변한 평양(서경)의 폐허를 슬퍼하였다죠? 순의공항 서남변에 天竺(天毒)지구가 있으니, 이 또한 설명되어야 할 것으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