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원공대외이도
윗지도에 혼동강이 압록강이라는 것이고 이것을 다시 정렬해서 그린 고지도를 보자.
황조일통지도 부분도(1844)
광녕까지 고려영토로 기록한 만주원류고에 등장하는 廣寧이 대릉하 윗부분에 등장한다.
(물론 산서북부에도 광녕이 있지만 안호상박사가 주장한 고려영토를 그곳까지 보는데는 당시 한-중사서가 서로 연결되지 않아 추정에 무리가 있다. 그쪽은 연운16주로서 거란이 차지했었다.)
資治通鑑
卷275
契丹主攻勃海拔其夫餘城.即唐髙麗之夫餘城也.時髙麗王王建有國限混同江而守之混同江之西不能有也.故夫餘城屬勃海國混同江即鴨緑水夫音扶 更命曰東丹國.
고려왕 왕건은 나라의 한계를 혼동강으로 하였는데 그 서쪽은 차지할 수 없었다.
고려 태조가 차지했던 요하 서쪽 광령을 경계로 한다고 만주원류고가 기록한것인데, 요사에 의하면 거란 성종의 어머니 蕭太后가 일방적으로 획정한 국경으로 인해 고려는 요하서쪽을 빼앗기고 요하 동쪽을 영토로 삼게된다. 교과서에 밑도 끝도없이 설명된 萬夫橋 事件은 태조비의 집안인 발해를 망가뜨리고 자신의 땅까지 빼앗은 거란에 치가떨려 일으킨 사건이다.
교과서나 통설과 달리 거란의 전성기때에도 요하 동쪽에 거란의 중요 유적이 없는데 이는 결국 요하동쪽 지역이 신라,발해,고려의 영역이었음을 말하는것이다.
결과적으로 요하 동쪽 고려의 접경지역에 강동 6주가 위치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을 거란의 성종이 침입하여 고려초기의 수도 개경(개주,봉성)을 침공하는데 海城 윗쪽 대청하를 고려가 압록강으로 부른곳이다. 요하를 중국에서는 압록으로 칭하고 거란 침공이후 고려는 압록강을 대청하로 구분지었다.
현종은 1012년 현재의 개성으로 왕실을 옮기고 거란군은 현재의 압록강까지 현종을 쫒아왔다가 되돌아간다. 요사는 이때의 압록강의 남쪽을 가리켜 江南이라고 기록하였다. 遼陽(서경)은 이때 빼앗기고 거란이 국경지대로 삼다가 고려에게 다시 빼앗겼다.
[고려사] 顯宗 원년(1010)
丹兵先鋒,已至昌化,拱辰等,具陳前意,丹兵,問國王安在,答曰,今向江南,不知所在,又問遠近,答曰,江南太遠,不知幾萬里,追兵乃還.
거란병이
(중략) 국왕이
안전하게 있는지 묻자,왕은 지금
강남을 향하고 있어 어디 있는지 모른다.또
어디에 있냐 물으니 강남은 무척 멀어서 몇 만리나 되는지 모른다 하자 추격하던
병사가 이내 돌아갔다.
이때 현종은 나주까지 피난으로 내려갔다가 신하에게 큰수모를 당한다.
『高麗史』卷64禮6
-睿宗二年(1107)十月壬寅 命尹瓘爲元帥, 吳延寵副之,往伐女眞.
동여진이 난을 일으켜 정벌하고 동북방 공험진을
확보하다.
1107년 아율아보기가 일어나 금나라를 세울즈음 동여진이 반란을 일으켜 고려의 동북쪽을 침범하여 빼앗자 망해가는 거란을 조종하여 윤관 장군으로 하여금 중-소국경인 경박호 지역을 개척하고 고려경계를 확정한다. 이곳이 수분하가 흐르는 흑룡강성 東寧鎭이다. (고려령으로 존재)
고려령이 있는 지역은 흑룡강성의 송화강지류인 수분하가 흐르는 동령진이라는 곳이다. 러시아와 국경을 같이하는 경박호 동남방이다.
고려사도 마찬가지이지만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옛 고려북계지역을 상고하여 마치 조선의 지배 영역인냥 길림과 흑룡강성 지역을 관할지역으로 서술하고 있다. 옛땅을 잃고 고려에게서 물려받은 지리정보를 베껴쓴것으로 본다. 따라서 조선왕조의 허세가 섞여 있어 속으면 안된다.
조선 세종초 정치학자 양성지와 15세기중반 명나라를 종단하여 북쪽으로 귀환한 최부의 기록을 보면 명나라가 압록강 북쪽에 대해 조선인 봉금조치를 내렸던것을 보면 알수있다.
원나라때 동녕부가 고려 수비책임자 이연령등의 반란으로 쿠빌라이에게 바쳐져 압록강 북쪽을 다시 빼앗겼지만 몽골에 종속화되면서 봉금이 풀려지고 충렬왕,충선왕등이 요양과 심양에 거처하면서 공민왕에 이르러 1360년에 심양과 요양,철령 등을 수복하였으나 몽골이 망할즈음 북원의 요양성행장 유익이 명나라의 회유에 넘어가 요녕성 남부지휘권(해주,개주,복주등..)을 들고 명나라에 귀부하는 바람에 1388년에 다시 빼앗겨 현재에 이르게 된다.
13세기 <추리도>에 대릉하 동쪽이 고려 신라 발해땅이라고 그려놓았다.
『高麗史』列傳 禑王14年(1388)
今欽見奉, ‘鐵嶺迆北迆東迆西, 元屬開元, 所管軍民, 仍屬遼東. 欽此.’ 鐵嶺之山距王京, 僅三百里, 公嶮之鎭, 限邊界, 非一二年.
윗기록에서 철령의산에서 왕경까지 300리 거리에 대한 해석을 식민사학은 함경남도 남쪽 고개를 철령으로 하여 300리지점이 개성이라고 정의하고 이것이 통설이되었고, 요녕성 철령을 문헌에 등장한 철령으로 할 경우 요양이 도읍이 된다. 정황상 우왕은 명나라에 대해 고려의 오랜영토 요녕성 철령을 말한것이다.
유익이 고려조정에 사신을 보내 명나라의 회유사실을 알렸을때 고려조정에서는 답변이 없었다. 이것이 왜? 누구에 의해서 묵살되었는지 밝히는것이 한민족 영토사의 최대숙제이다.
이상.
주)요하 서쪽을 내어준 고려를 참고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