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생활자의 수기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
세 번의 충격
아직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처음 읽고 받은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첫 번째의 충격은 내가 갖고 있던 문학관과 관련된다. 문학이 인간에 관한 이야기라면 그 이야기가 미사여구로 꾸며진 달콤한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두 번째의 충격은 보다 본질적인 것이었다. 인간의 어두운 심연에서만 찾을 수 있는 적나라한 인간적 진리, 아니 ‘나 자신’의 야생적 진실과의 만남이었다. 나는 아직까지 아무도 얘기하지 않은 사실, 아니 어느 작가나 철학자도 알지 못했거나 혹은 알고 있어도 감추려 했던 진실을 발견했다고 확신했다. 세 번째 충격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 바로 ‘나’라는 생각이었다. 진실을 발견하는 기쁨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그러한 진실이 무서웠다. 이 소설보다 나의 실존적 지각 변동을 의식하게 한 작품을 나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결코 만나보지 못했다.
이런 충격은 당시 내가 허무주의에 빠져있었던, 건강이 좋지 않은 문학소년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소설에서 다루는 문제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의식 있는 모든 인간의 보편적 문제이며, 이 소설의 주인공은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인간 내면의 진실한 모습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원래 러시아어로 ‘마룻바닥 및 쥐구멍으로부터의 수기’라는 제목이 붙은 이 중편소설은 스스로를 ‘병자이고 마음이 고약한 놈’이라고 칭하는 40세 주인공의 고백 형식으로 되어 있다. 1부는 과거 20여 년 동안 자신의 내면, 즉 정신적 지하실에서 생각해 왔던 관념적 소용돌이의 독백이다. 2부는 20년 전, 그가 근무했던 사무실 직원들, 동창생, 창녀 리자와의 관계에서 갖게 된 구체적 경험과 그에 대한 – 정신적으로 ‘병든 자’ 로서의 – 회고다.
도대체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인가?
스스로를 ‘병자’, ‘악질’, ‘웃기는 사람’, ‘미친 몸’ 등으로 표현하는 주인공은 오히려 가장 지적인 자이고 진실을 알고자 하는 자이다. 누구보다도 정신이 반짝이는 진지한 철학자이다. 주인공이 살고 있는 지하실 ‘마루 밑 쥐구멍’은 음침하거나 어두운 곳이 아니다. 피상적 세계의 본질을 대상과 거리를 두고 조용히 관찰하고 조명할 수 있게 해주는, 그래서 예리한 반성을 이끌어내는 공간이다.
성격이 까다롭고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소설의 주인공이 ‘병자’, ‘악질’, ‘웃기는 사람’, ‘미친 놈’으로 보이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그의 삶이 ‘정상적’ 기준에 맞추어 작동하는 공리적 사회와 그 규범 안에서 ‘관성적’으로 생존하는 대중의 가치관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 ‘다른’ 가치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이 말하는 ‘정상적’ 삶이란 타의에 의해 부여된 가치를 위한 삶이고, 그들의 관점에서 주인공의 삶은 오히려 ‘비정상적’일 수밖에 없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성적 사고를 중시하는 과학적 세계관이 승리를 거두고 그런 근대 문명에 힘입어 유럽의 세계 식민화가 절정에 이르렀던 19세기에 작품 활동을 했던 작가다. 근대 문명의 진보는 기계적. 인과적 법칙에 의해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과학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다. 거기에는 마르크스의 사회철학도 포함되는데,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세계를 ‘수정궁전’이라 부르고, 그러한 세계 속에서의 개인을 ‘개미집의 개미’에 비유한다. 그는 그런 세계에서의 삶을 ‘피아노의 키’라고 지칭하는데, 여기에는 ‘피아노의 키’에 지나지 않게 되어버린 삶의 방식에 대한 강렬한 거부감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소설의 주인공은 이성의 산물인 과학과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에 저항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모든 이성이여, 꺼져라!”라고 소리치며 과학에 반대하고, 일률적인 삶의 방식을 거부한다. “자신이 피아노의 키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임을 매 순간마다 자신에게 증명할 수 있음으로써만 개인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 주인공은 “인간이 정말 원하는 것은 자신의 실용적 이익이 아니라 모든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어떤 것에도 종속되지 않으려는 의지, 즉 자유”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가 과학적 사고에 바탕을 둔 공산주의사회라는 인류 공동체의 유토피아를 주장했던 바로 같은 시대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실존적 자유에 천착했던 것이다. 그는 공동체의 문제에 앞서 실존적 개인의 문제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보고, 진보의 의미를 경제적 발전이 아닌 실존적 자유의 확보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반 근대적인 실존주의자 키에르케고르, 개인주의자 니체 같은 동시대의 사상가들과 일맥상통하는 점이다. 그는 과학적 세계관과 근대 문명이 지닌 불합리와 대항해서 싸웠던 사상적 낭만주의자였다. 그의 사상은 19세기 어느 사상가보다 포스트모더니즘에 가까웠고, 그만큼 시대를 앞선 인물이었다.
야생의 고독과 만나는 공간
탈마법적 근대세계는 그가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거처일 수 없었다. 그는 근대 문명에 대해 어느 사상가들보다도 불편을 느꼈다. 대인관계에서 괴팍했기에 그 자신이 주변인들에게 ‘병자’, ‘웃기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가 주인공의 입을 빌려 말하는 생활과 감정 상태는 그래서 생생한 묘사가 가능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문학적 의미는 말끔한 옷에 가려 있는 인간의 몸, 즉 의학적으로 건전한 몸속에 존재하는 어둡고 깊은 내면세계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프로이트보다 몇 십 년 앞선 무의식의 발견자, 정신분석학의 개발자이다. “내 나이 24살 때까지 우울하고, 무질서하고, 고독한 은둔자의 삶을 살았다.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려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정말 완전히 혼자다. 나는 인간들과의 동지애와 친구에 대한 필요성을 느낀다”고 고백하는 주인공에게서 우리는 스스로의 모습을 비춰보게 된다.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해 자부심과 우월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연민과 고통을 느끼는 주인공은 이중적 인간의 깊은 의식 세계를 보여준다.
도스토예프스키 의식의 지하실에서 우리는 과학적 공식이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복잡한 정신적 진실과 만난다. 이 한 편의 소설은 보다 깊은 자기 이해로 건너가는 다리가 되어 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조금은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주인공이며, 저자 도스토예프스키의 그림자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