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계母系로 3대째 권사로서 한 교회를 섬기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결혼을 하면 남편의 교회로 나가는 것이 일반적인 한국 교회 현실에서 이숭리 권사는 새문안교회에서 3대째 신앙을 이어가고 있다. 주부아카데미를 통해 가정과 교회, 사회, 여성의 문제를 입체적으로 보는 눈을 갖게 된 이숭리 권사는, 때로는 교회 안에서 때로는 교회 밖에서 시대의 사명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방향을 제시하며 판을 깔아왔다. 그래서 구순을 넘긴 시어머니는 이숭리 권사를 해결사라고 하지만 스스로는 ‘판을 까는 사람’이란다.
평신도가 교회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개선해 나가도록 권유하는 일은 쉽지 않을 터. 하지만 평신도이기 때문에 오히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단다. 2006년에 교회에서 친교부 부장을 맡으면서 교회 안에서 ‘생명밥상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 한 예다. 기독여성살림문화원(이사장 안미영, 원장 임희숙) 이사로서 여성신학의 이슈를 살림 현장에 어떻게 풀어내고 살아야 하는지가 이숭리 권사의 최대 관심사다.
생명밥상
만물을 창조하고 보전하시는 하나님을 예배한다, 신음하는 피조물을 위하여 기도한다, 자연에서 울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단순 소박하고 불편한 삶을 즐긴다, 일회용품을 줄인다, 가공식품을 줄이고 제철음식을 먹는다, 육식보다 곡식과 채소를 즐긴다, 신음하는 이웃을 생각하며 소식小食한다, 쓰레기 제로 빈그릇운동에 동참한다, 환경주일(매년 6월 첫 주)을 지킨다. 이숭리 권사가 교회에서 생명밥상운동을 전개하며 교회 친교실에 게시한 ‘생명밥상 수칙’ 열 가지로, 2006년 친교부장을 맡으면서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이다.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생명밥상위원회가 제정한 생명밥상 수칙은 원래 12가지인데 교회 실정에 맞게 수정 보완한 것이다.
이숭리 권사는 “밥상은 단순히 먹어치우는 것이 아니라 밥상을 차리고 먹는 모든 과정이 예배다.”라고 말한다. 기독교환경운동연대에서 생명밥상운동을 시작할 때 평신도로 참여해 교육을 받고 생각을 나눠오다가 교회에서 친교부장을 맡으면서 생명밥상운동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인 것. 생명밥상은 밥을 먹으면서 그저 밥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쌀알에 깃든 창조질서를 생각하고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피조물들의 신음소리를 듣자는 것이다. 또한 내가 고기를 먹음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자는 것이다.
“밥상으로 할 수 있는 설교가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요. 종교개혁이 다시 일어난다면 밥상을 갖고 이야기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인 거죠. 강단에 갇힌 설교가 밥상으로, 일상으로 내려올 때 기독교가 새롭게 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겁니다.”
흔히 쌀 한 톨에 우주가 담겨 있다고 한다. 밥상에는 정치, 경제, 환경, 문화가 모두 결부되어 있다. 밥상에는 정치적인 의미, 농촌의 문제, FTA, 대형유통의 문제가 내포되어 있고 이것이 신학의 화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설교만 하신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사셨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로 사는 것이기에 이제는 교회에서 예수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얘기해야 하며, 주일에 모여 그런 얘기를 공유하는 것이 신앙공동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부가 깨어나야
신앙은 모계母系로 내려간다는 것이 이숭리 권사의 생각이다. 그 자신 외할머니, 어머니를 이어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새문안교회는 1987년 교회 창립 100주년을 기해 새문안의 여성복음사역을 정리해 새문안교회여성사 발간을 추진했다. 이숭리 권사는 편집위원으로 동참했다. 그 과정에서 교회 구성원의 60~70%가 여성임에도 여성은 정책 결정과 치리 현장에서 제외되고 소리 없이 봉사하고 헌신해왔음을 재삼 확인했다.
“교회는 딸이 많아야지 며느리가 많으면 활동 에너지가 줄어들어요. 시댁을 따라 교회에 나와 위축이 되면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려워지거든요.”
누구의 며느리, 누구의 아내로 이름 매겨지면서 주체로 서기가 힘들다는 얘기다.
이숭리 권사의 외할머니는 해주에서 살다가 서울로 왔다. 딸을 경성사범에 진학시키기 위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시댁에서 나와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서울에 와서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바로 새문안교회였다. 이숭리 권사의 부모는 새문안교회에서 만나 결혼을 했다. 이숭리 권사도 마찬가지다.
“유년주일학교부터 새문안에 다녀 지금까지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요. 고등학교 시절, 처음 교회에 나온 친구들은 질문을 많이 하는데 그런 모습이 오히려 부러웠지요. 기본적으로 갖는 의문들이었고 여전히 해결 받지 못한 문제였거든요.”
66학번이 주축이 되어 1967년에 새문안 대학부를 만들고 작은오빠가 초대 회장을 맡았다. 대학생들이 새문안으로 모이면서 기독청년들이 학생운동의 주축을 이루었다. 교회 안에서 에큐메니컬 진영의 외부강사를 초청해 강의를 듣고 사회에 대한 교회의 책임에 눈을 떴다.
살림하는 사람들도 발달단계가 있는 법인데 교회가 여성 교육을 등한시하는 것에 실망하고 있을 즈음, 지인의 추천으로 크리스천아카데미에서 진행하는 기독여성아카데미에 참여하게 되고 사고思考가 열리기 시작했다. 사회와 교회, 개인이 입체적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 크리스천아카데미가 유신 정권 하에서 용공으로 몰리게 되면서 기독여성아카데미는 중단되고 경동교회에서 교육을 이어갔다. 주부를 대상으로 13주 과정의 주부아카데미 교육이 이루어졌다. 교육을 받은 주부들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매 맞는 여성이 사회문제화 되면서 여성의전화를, 공해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공해반대시민운동협의회 발기에 앞장섰다. 교육문제로 자살하는 학생이 늘어나는 것을 보고 인간교육실현학부모연대를 세워 초대 공동대표를 맡았다. 먹거리에 대한 농약 과잉 살포, 유전자 조작 등 불만이 터져 나오고 농부들이 주부들에게 호소하면서 한살림소비자생활협동조합 설립에 동참하고 부이사장을 맡아 일했다.
이 모든 일들은 주부들을 교육하지 않았으면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교육을 통해 우주가, 사회가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행동으로 옮기게 된 결실들이다.
사람이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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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7년~1997년 새문안교회 여성들의 역사를 담아 2012년 11월에 발간했다. 이숭리 권사는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
이숭리 권사는 기독여성아카데미를 만나기 전과 후로 인생이 나누어졌다고 한다. 교회 안에서 여성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느끼고는 40대 후반의 나이에 이화여대 기독교학대학원에 진학했다. 교회여성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대학에서 약학을 전공했기에 대학원 공부는 쉽지 않았다. 대학원에서 진화한 신학을 배우고 여성의 눈으로 새롭게 성경을 보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여성신학은 깨달음의 신학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쳤다.
1997년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한국여신학자협의회에 가입했다. 예배 속에 여성신학적인 요소를 가미해 절기 예배를 개발하는 일에 힘을 보탰다. 신학이 학문에 머물러 있어서는 힘을 발휘할 수 없다. 그래서 여성신학의 이슈를 살림 현장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 것인지 연구하고 적용하도록 돕는 일을 한다. 이숭리 권사는 “사람을 모으고 사람이 일하고 사람을 크게 하는 것이 운동”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한국 교회가 여성들의 에너지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조직화 되면서 여성들은 하수인이 되어버렸어요. 힘의 균형이 깨어지면 폭력이 생기는 법이에요. 교회나 사회나 역동적인 에너지를 힘으로 잘못 쓰는 일이 없어야 하지 않을까요. 특히 교회에는 믿음의 에너지, 깨달음의 에너지가 충만해야 한다고 봅니다.”
교회는 그 시대에 해야 할 소명이 분명히 있는데 그것을 하지 않으면 직무유기라는 이숭리 권사. 교회에서 앞서가는 신학을 가르칠 때 교회는 더 큰 에너지가 나올 것이라며, 교인들이 어떻게 예수를 살아낼 것인가 고민하게 해야 한다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