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대 소설들
예전에 내가 언급했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 후대에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꾸며서, 나중에 그게 정설처럼 굳어진 이야기들이 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이 설법을 하거나 대중 강론을 하면서 자꾸 잘못 인용함으로써 사람들을 호도한다.
이런 건 좀 고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첫째로 붓다께서 새벽별을 보고 깨달았다는 이야기.
붓다께서 6년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몸을 가눌 수조차 없는 없을 정도로 몸이 여위어지자, 보리수 아래에서 일어나 네란자나 강으로 가서 목욕하고 강가에 서있는 버들나무 가지를 붙잡고 새벽별을 보았을 때 깨달음이 일어났다는 이야기이다.
이건 팩트가 아니고 꾸며진 이야기다.
그럼 진실은 뭔가?
붓다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결가부좌를 하고 마지막 결심바라밀은 한다.
"이 몸이 무너져 가루가 되고, 뼈와 힘줄만 남을지라도 아눗따라 삼마삼보디(anuttara sammāsambodhi)를 깨닫지 못한다면 결코 결가부좌를 풀지 않으리라."라고.
그리고 사선정에 들었다 나와서 천안통과 숙명통을 얻고 마침내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깨달으셨다.
그러니까 진실은 붓다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일어나 네란자나 강변으로 가서 버들가지를 붙잡고 새벽별을 보고 깨달으신 것이 아니고, 보리수 아래에서 결가부좌를 한 상태에서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이야기이다.
둘째로 전등록에 나오는 삼처전심(三處傳心)이다.
삼처전심은 다 아시다시피 염화미소(拈華微笑),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 곽시쌍부(槨示雙趺)이다.
이것도 팩트가 아니다.
염화미소는 초기경전에서 출처가 아예없는 소설임인 틀림없다.(이건 확인해보지 않음.)
다자탑전반분좌는 붓다께서 웰루와나(죽림정사)에 머무실 때, 천안으로 마하깟사빠가 출가하려고 가정을 헤체하고 스스로 머리를 깎고, 고급 비단 가사를 걸치고 웰루와나 쪽으로 오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붓다는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날란다대학 쯤에 가서 다자탑인지, 다자나무인지 그 아래에 앉아있었다. 마하깟사빠는 붓다를 보는 순간 자신의 스승임을 알고 절을 올렸다. 붓다는 그에게 가사가 너무 고급스럽다고 하자, 깟사빠는 자신의 가사를 붓다에게 보시하고 자신은 여기저기 기운 넝마에 가까운 붓다의 가사를 바꿔입었다. 이 이야기를 마치 다자탑 아래에서 전법이 이루어진 것처럼 꾸민 것이다. 이건 붓다와 깟사빠가 처음 만난 자리, 깟사빠가 처음 출가한 자리에서 바로 전법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로 진실이 아니다.
곽시쌍부는 마하깟사빠가 붓다의 다비장에 일주일 늦게 도착해서 붓다의 관 앞에 경배하려고 하자, 붓다께서 관 밖으로 발을 내밀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대열반에 든 붓다께서 아직 유체에 남아 있었다거나, 열반에 들었는데 아직 정신이 남아서 유체를 조종해서 발을 관 밖으로 내밀었다거나 이런 황당무게한 이야기인데 물론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고 팩트가 아니다.
사실은 이렇다.
마하깟사빠가 500제자와 함께 일주일 늦게 붓다의 다비장에 도착했다. 인도 풍습에서는 스승에게 경배를 올릴 때는 발에 이마를 대는 것이 관습이다. 그런데 붓다의 유체는 이미 수천 겹의 천으로 싸여져 관 속에 들어있었다. 그래서 깟사빠는 자신의 신통으로 붓다의 발을 관 밖으로 끄집어내어 발에 이마를 대고 경배를 올렸다. 500제자들도 똑같이 경배를 올렸다. 그러자 장작에 불이 저절로 타오르며 유체를 화장했다. 이게 디가니까야 서문에 실려있는 진실이다.
위대한 영웅들의 전기나 위대한 스승들이 사후에 이야기가 부풀려지고 조작되고 꾸며진다. 그렇다고 전법의 정통성을 입증하려고 없는 이야기를 꾸밀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전법이라는 것이 꼭 스승에게서 스승으로 전해져야 하는 것도 아니다.
대반열반경에서 붓다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사성제 팔정도가 살아있고, 팔정도를 실천하는 한 아라한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붓다께서 대열반에 드시면서 이렇게까지 유언을 하셨는데, 우리는 반야심경을 외우면서 "무고집멸도!"를 소리높여 외쳐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