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와 윤회
향봉 스님이 실상사에서 '윤회는 없다.'라고 주제로 발표했다는데. . .
노스님께서 4,50년을 출가자로 사시면서 내린 결론이 '윤회는 없다'는 것이었다는 이야기인데. . .
일단은 어이가 없지만
그렇다고 이게 그분만의 견해가 아니고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이 매우 많은 것이 한국 불교의 현실이니까 또 이해는 간다.
그분의 견해가 '중도는 연기고 공이다'라는 깨깨묵은 대승의 중관철학이라는 바탕에서 나온 것라는 뻔한 스토리이므로
빈약한 두뇌의 탓이라고 묻고 더블로, 아니 묻고 제갈길로 가면 될 일이다.
'연기가 중도다'라는 데서 '윤회가 없다'라고 결론이 어떻게 도출되는지 그 비약적인 상상력에 감탄하면서 애잔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뭐, 관념론자들의 철학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라고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자.
붓다께서는 '연기가 윤회다'라고 설명하셨는데 그게 어떻게 '연기가 중도다'로 변질되어 버렸고, 거기서 '윤회는 없다'로 넘어갔을까?
어이가 집을 나가버린다.
윤회가 없기는 하지.
다만 모든 번뇌에서 해탈한 아라한이나 붓다에게는. . .
그런데 당신은 거기에 해당이 안 되지 않는가!
당신에게는 무명이 있지 않는가?
무지(무명)하니까 윤회하는 것이다.
이게 연기다.
번뇌가 있으니까 윤회하는 것이고
욕망이 있으니까 윤회하는 것이고
끝없는 추구가 있으니까 윤회하는 것이고
생각이 끝없이 흘러가니까 윤회하는 것이다.
이것을 연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원래를 따지면 윤회는 없다는 것은 맞기는 하지.
바탕을 따지면. . .
근데 그게 당신에게 해당이 안 된다니까.
왜냐고?
당신은 그 넓고 광대하고 텅 빈 바탕에 도달하지 못했으니까.
거기는 다 놓아버려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인데, 당신은 끝없이 쌓고만 있지 않은가!
나를 무너뜨려야 도달하는 곳인데 당신은 끝없이 나를 세우고 있지 않은가!
'내'가 있는 한 윤회는 끝이 없다.
'내'가 존재한다는 무명이 있으니까 윤회가 있는 것이다.
진리에 무지하니까 윤회를 한다니까.
이게 붓다께서 말씀하신 연기다.
그런데 '연기가 윤회다'라는 붓다의 말씀이 어떻게 '연기가 중도다'로 변해서 거기서 '윤회는 없다'라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일까?
첫댓글 붓다께서 윤회가 았다라고 말씀 하신 것으로 불교계에서는 받아드리고 있지만, 붓다께서는 확인되지 않는 허황 된 것들에 대해서는 결코 가르침을 주시지 않았다고 확신 합니다. 윤회가 인간계의 보편적인 법칙이라면 왜 붓다께서는 '깔라마경'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겠습니까?
"'만약 다음 세상이 있고,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 대한 결실과 과보가 있다면 나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 천상세계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이것이 그가 얻는 첫 번째 위안이다." 윤회라는 다음세상이 기정 사실로서 있는 것이라면 왜 붓다께서는 경에서 보시듯이 '만약'이라고 말씀 하셨겠습니까?
그 만약이라는 것이 붓다의 입장에서의 만약이 아니고 깔라마인들 입장에서의 만약입니다.
그리고 12연기가 경에서 수없이 반복됩니다.
무명이 있으니까......존재가 있고....생이 있고....노사가 있다.
향봉스님이 윤회가 없다고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시는 걸 유튜브에서 보았습니다.
향봉스님이 고타마 싯달타 부처님의 말씀을 안 읽어보신 것 같습니다.
기독교에서도 성경을 안 읽는 목사들이 생뚱맞은 이야기를 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불교나 기독교나 모두 교조 붓다와 예수의 말씀을 제껴두고 관념적인 교리를 만들어 주장하고 가르치거나 거기에 동조하는 승려나 목사가 많습니다.
다만 향봉스님은 옳바른 생활을 하고 계시니 그분의 삶은 존경합니다. 일례로, 시자를 두지 않는다든지, 공양주 없이 스스로 끼니를 해결한다든지, 재력있는 신도라도 행세하려들면 절에 못 오게한다든지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