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삼사라
어제 모임에서 영화 삼사라 이야기가 나와서 오래 전에 봤던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 영화 줄거리가 생생하게 떠올라 놀라웠다.
이것은 아마도 그 영화 주제가 불교의 핵심 교리를 정확히 찝어내고 있어서 그럴 것이다.
이 영화의 줄거리가 뭐냐고?
수행이 뭔가? 깨달음이 뭔가? 뭘 깨달아야 깨달음이라고 하는가?
에 대한 요점정리 같은 것이다.
한 수행자가 무문관 천일결사에 들어간다.
수행자가 동굴에 들어서고 입구는 돌과 흙으로 봉쇄된다.
그는 봉쇄된 무문관에서 천 일 동안 명상에 든다.
그가 동굴에서 얼마나 깊은 삼매에 들었는지 가부좌를 한 자세에서 움직임이 없이 천 일을 보낸다.
손톱은 손가락보다 더 길게 자라나고 머리카락은 땅바닥에 닿는다.
그 정도 삼매라면 아마도 색계 사선정을 지나 무색계 사선정까지 통달했으리라.
그렇게 먹고 자지도 않고 가부좌를 한 상태서 삼매에 들어 천 일을 보낸다.
여기서 어떻게 인간이 먹고 자지도 않고 가부좌한 상태서 천 일을 보낼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문제를 제기하는 분에게 이렇게 대답을 드리겠다.
"그냥 영화 설정이 그렇다고!!!!"
우쨌든 그렇게 천 일째에 스승과 동료 스님들이 동굴에 도착해서 벽을 허물고 수행자를 밖으로 끄집어낸다.
스승과 동료들이 그의 손톱을 자르고 머리를 깎아주고 그를 부축해 길을 떠난다.
천 일 동안 사용해본 적 없는 다리가 다시 작동하기까지 꼬박 하루가 걸린다.
그렇게 그는 천일결사를 마치고 히말라야 산 중턱에 있는 티벳사원으로 되돌아간다.
그렇게 일상의 삶으로 돌아온 어느 날 마을에서 불교 축제가 열린다.
사원의 스님들이 마을에 내려가 꼬깔모자를 쓰고 바라춤을 춘다.
거기서 그 수행자는 아름답고 예쁜 여인과 눈이 마주친다.
(극중 여주인공은 홍콩 여배우 아름다운 종려시다.)
그 예쁜 여인을 보고 온 수행자는 사원으로 돌아와 몽정을 한다.
여기서 문제 의식이 일어나야 한다.
아니, 동굴에서 천 일 동안 움직임도 없을 정도의 깊은 삼매에 들 정도의 고도의 정신세계에 도달한 수행자에게 어떻게 성욕이 남아있어 몽정을 한단 말인가?
그러면 그렇게 깊은 삼매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게 이 영화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주제이자 불교의 핵심 교리이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아무리 깊은 명상에 들고, 색계 무색계 삼매에 통달하고, 황홀감, 엑스터시를 경험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부처님을 만나고, 그보다 더한 성스러운 종교체험을 한다해도,
그것은 내면의 욕망 하나를 무너뜨린 것보다 못하다.
수행은 탐진치로 드러나는 자아를 무너뜨리는 데 있지, 그런 깊은 삼매를 체험하는 데 있지 않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깊은 삼매를 경험한 그 수행자는 예쁜 여인을 보면 눈이 돌아가고 결국 승복을 벗는다.
(예쁜 종려시를 보면 아무리 도가 높은 도인도 눈이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농담입니다.)
그는 환속해서 그 예쁜 종려시와 결혼해서 토끼같은 자식을 낳고 살아가지만, 세속의 삶은 또 만만치가 않다.
농사짓고 수확물을 팔아 가족을 먹여살리려고 개고생을 하는 과정에서 속임을 당하고, 다 자란 농작물이 사악한 장사꾼의 방화에 한순간에 날아간다.
세상일이 원래 그런 것이여!
그래서 그는 세상일에 환멸을 느끼고 다시 승복으로 갈아입고 재출가를 한다.
아니, 그렇다고 가족을 팽개치고 사원으로 도망친단 말인가!
이런 무책임한 인간 같으니라고!
우쨌든 영화 설정이 그렇다는 것이지!
인터넷을 찾아보니, 예전에 올렸던 이 영화의 광고에 이런 글귀가 있던데....
"경험을 해봐야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에이! 꼭 결혼도 해보고 성관계도 원없이 해보고, 그래야 성욕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길은 간단 말인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경험을 해봐도 이건 포기가 안 돼!!!!!
수행이 뭔지 모르고, 깨달음이 뭔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이게 이 영화의 주제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수행자의 입장에서 본 이 영화의 주제는
"아무리 깊은 삼매를 성취하고, 아무리 특별한 종교 체험을 한다해도, 그것은 내면의 욕망 하나를 무너뜨리는 것보다 못하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수행의 방향성의 문제입니다.
수행은 삼매를 닦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욕망 하나, 에고 하나, 자아를 관찰하고 무너뜨리고 넘어서는 데 있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