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에서의 첫 마라톤
강명구
텅 비어버린 26 년, 돼지 뱃살을 가르고 내장을 꺼내어 깨끗하게 씻어낸 돼지곱창. 그 텅 빈 속을 전국에서 모인 런러스클럽 회원 250여 명과의 가슴 벅찬 만남, 그리고 8 월의 마지막 일요일 막바지 여름의 땡볕에 고생하며 뛰던 기억, 달리며 보았던 사과밭과 포도밭의 풍성한 열매들, 강가에 한가로이 모이를 찾는 두루미, 그리고 자원봉사를 나온 여고생들의 푸릇한 모습까지, 새로운 추억들을 채워 넣으며 한국에서의 새로운 삶을 빈 순대 속 채우듯 채워가고 있다.
사실 이민생활이란 것이 사람 속에 살았지만 텅 빈 돼지 곱창 같이 허전할 때가 많았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이 있었다. 그 채워지지 않는 속은 달리면서 위로받으려고 더 달리기에 빠져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달리면 바람 빠진 풍선 같았던 내게 누가 입을 대고 바람을 불어주어 금방 뻥 터져버릴 듯이 가슴이 부풀어 올라 언제라도 날아오를 것 같았다. 그렇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 지금 나는 농암이 뚜렷한 수묵화라도 한 폭 그리기 좋은 화선지처럼 깨끗하게 비어있다.
텅 빈 고요와 같은 상태이다. 내게 마라톤은 텅 빈 고요를 가로지르는 떨림이다. 마라톤 친구들은 그 떨림을 튕겨내는 현이다. 떨림이 잘 절제되고 조화를 이루면 고은 음을 낸다. 나의 고요는 지금 맑고 아름다운 음들로 빛나고 있다.
영동포도마라톤이 고국에서의 첫 마라톤이 되었다. ‘첫’이라는 접두어에는 희망과 오랜 기다림의 숨결이 담겨있다. 첫이란 말이 앞에 붙으면 언제나 가슴이 설렌다. 첫사랑, 첫 발자국, 첫눈, 첫 아기, 첫 마디 말,… … 마지막 이라는 말이 주는 공포감과 반대로 첫이란 접두어는 신선함과 두 번째 세 번째를 이미 내포하는 연속성을 의미한다. 작년 재작년에 눈이 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올겨울에 내리는 첫눈을 사람들은 첫눈이라고 부른다. 첫눈이라고 불러야 더 낭만적이다. 그러므로 내가 작년에 재작년에 마라톤을 뛰지 않은 건 아니지만 영동마라톤은 첫 마라톤이다.
첫사랑도 첫눈도 언제나 오는 듯 지나가고 말지만 그래도 사랑은 계속되고 겨우내 눈은 펄펄 내린다. 오늘 만난 전국에서 모인 많은 회원들 첫사랑처럼 첫눈처럼 살짝 눈인사만 하고 지나쳤지만 우리는 다시 만나서 지지고 볶으며 살아갈 사람들이다. 함께 달리며 그 거친 숨소리가 보여주는 진솔함에 서로 감동을 주고받으며 만남을 이어갈 것이다.
회원들이 달리기 연습 틈틈이 연습하여 선보인 사물놀이 연주도 흥이 났고, 단체 줄넘기 경기나 전국 각지에서 가져온 막걸리 맛을 골고루 시음하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facebook을 통해 오래 교제해온 김승기형님과 여종범, 서훈님도 첫 대면을 하니 너무 반가웠다.
달리면서 뜨거워진 심장으로 바라보면 세상은 더 정겹고 따뜻하게 보인다. 하찮게 여겨지던 일상들이 빛으로 가득하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새 어둡고 음침하던 생의 굴곡마저도 아름답게 표현하는 시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기화되어 날아간 기쁨들이 다시 비가 되어 내리는 봄날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팔월의 마지막 더위에 풀코스 마라톤을 달리느라 이곳 영동의 보랏빛으로 잘 익은 포도송이처럼 내 몸에 매달린 땀방울들이 사랑스럽다.
오늘 만난 사람 중에는 잠시 눈길이 스치는 사이 어떤 떨림의 눈길도 있었고 담담한 눈초리도 있었고 무심한 눈빛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에게서 똑같이 전해져오는 것은 달리는 사람들의 뜨거운 가슴의 열기였다. 따가운 햇살이 포도를 다 익혀내면 이제 가을이겠다. 내 이마에서 한 알 한 알 영글어 떨어지는 땀방울도 내게는 풍성한 수확을 의미한다. 나는 이 빛나는 떨림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안주하는 대신 이 떨림의 선율을 나누기 위해 길을 나서련다.
첫댓글 sorigana(강명구)님 이민생활을 마무리 하고 귀국하여 대한민국에서의 첫대회 완주를 축하합니다...다녀온 영동대회 소감에 대한 글 솜씨도 대단히 멋있고 근사하네요 잘 봤습니다...그동안 마라톤으로 달려온 세월의 흔적을 정리하여 책으로 만들어 보심도 권하면서 나오면 꼭 읽어보고 싶네요...그리고 신마클과의 인연으로 좋은 글을 올려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소리님! 앞으로도 부담 갖지마시고 우리 카페에 자주들려서 소식 전해 주시어요~~(소리님^화이팅)~~
소리님.약돌님 반갑습니다.
여유있는 모습이 자랑스럽습니다.
영동 포도마을에서 4년전 근무한적이 있어 추억이 그리워지는군요.
환절기 건강유의하시고 풍성한
가을을 맞이하기를 바라며
재회의 날을 기다려 봅니다. .
화이팅 !!!!!
현양씨 다녀가셨구랴~ 내일(9/5토) 뚝섬유원지역 아래 한강공원에서...국민건강대회에 출전을 하는데 9시에 출발해서 11시전에 골인 예정인데 시간되시면 응원 겸 소풍 나오기요~~
약돌님....
내일은 낮에는 예식장 가고
저녁 6시 이후에 시간이 되므로
다음 대회에서 만나요.
약돌님.양해...
오케바리 즉각 응신^댓글 감사혀라 ㅉㅉㅉ~~~
마라톤만 잘 하시는줄 알아는데 글쟁이 이상으로 글쓰는 솜씨가 대단 하십니다.한국으로 영구 귀국 하셨으니 안온한 분위기 속에서 취미 건강을 위하여 좋와 하시는 마라톤의 열심히 정진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