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정사대지국사지감원명탑비(億政寺大智國師智鑑圓明塔碑) 이지관
大智國師碑銘 (篆題)
有明朝鮮國忠州 億政禪寺 故高麗王師 諡大智國師碑銘과 아울러 序文
嘉靖大夫藝文春秋舘學士 都評議使司使 겸 成均大司城 臣 朴宜中은 王命을
받들어 碑文을 짓다.
近世에 큰 스님이 있었으니, 그의 호는 太古이다. 일찍이 玄旨를 깨닫고, 四方으로 두루 다니면서 善知識을 親見하다가 중국으로 遊學을 가서 湖州 霞霧山 天湖庵에서 달마대사의 28代 法孫인 石屋淸珙禪師로부터 法을 이어받고 귀국하여 그의 宗旨를 크게 떨쳤다. 그의 弟子가 매우 많아서 그 數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제자 중 재주가 뛰어나고 氣像이 고매하며 豪爽하고 卓越한 이가 참으로 많았으나, 그 중에 大智國師가 더욱 傑然하였다.
스님의 휘는 粲英이고 字는 古樗이며, 호는 木菴이다. 속성은 韓氏이며 아버지의 諱는 績이니 楊州 사람으로 司僕直長을 역임하였고, 어머니는 郭氏이니, 淸州 출신으로 膳官署丞인 永潘의 딸이다. 泰定 戊辰年 1월 8일에 탄생하였다. 14살 때 서울로 유람차 왔다가 三角山의 三峰이 우뚝 서서 超然함을 바라보고, 出家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삼각산 重興寺 圓證國師를 은사로 하여 삭발하고 스님이 되어 法을 배웠다. 5년만에 卓然히 깨친 바가 있어 淨慧國師를 친견하고, 총림으로 가서 迦智山의 제 2座가 되었다. 그 후 選拔되어 行謳에 충원되었고, 名望으로는 修行輩中에서 뛰어났다.
또 楡岾寺守慈和尙을 親見하고 그의 會下에서 薰陶받았는데 얼마지나지 않아 禪旨를 크게 깨달았다. 庚寅年 九山禪門의 승과고시에 應試하여 上上科에 합격하였고, 癸巳年에는 또 功夫選科에 으뜸으로 합격하였다. 그 당시 國一智嚴尊者가 스님의 관상을 보고 이르기를 “이 사람은 반드시 王의 스승인 王師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얼마 있다가 大興寺의 주지가 되고 나서 탄식하기를 “出家하여 住持가 되는 것은 내가 出家한 本意가 아니다”라 하고, 드디어 주지직을 떨쳐 버리고 小雪山으로 들어가 一大事인 見性을 기약하였다. 三角山으로 가서 3년간 머물렀다.
己亥年 봄에 공민왕이 궁중으로 招致하여 스님의 法力을 공경하고, 그의 容貌가 奇異함을 찬탄해 마지 않고 碧眼達磨라고 칭하였다. 또 僧錄司에 繫屬시키고 매우 존중하면서 스님과 같은 이는 一般的인 冗僧과 같이 대우해서는 안된다면서 釋林에서 선발하여 스님을 兩街都僧錄을 맡게 하였다. 스님은 이 직책을 數年間 맡고 있다가 간절히 辭意를 표하여 允許를 받았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特命을 받아 石南·月南·神光·雲門 等寺의 주지를 역임하였는데 就任하는 곳마다 禪那를 講演하여 弟子가 더욱 많아졌다.
壬子年 봄에는 공민왕이 內院으로 맞아들여 “淨智圓明 無礙國一禪師”라는 호를 올렸고 또 金襴비단으로 만든 가사와 바리때 및 妙筆과 觀音大士像 등을 선사하여 지극한 精誠을 보였다. 甲寅年 봄에 공민왕이 崩去하자 스님은 世上을 피하여 山中에 은둔하고자 하였으나, 新王이 간곡히 만류하며 迦智寺 주지로 임명하고, 특별히 “禪敎都摠攝 淨智圓明 妙辯無礙玄悟國一都大禪師”라는 贊號를 첨가하였다.
丁巳年에 이르러 완고하게 사양하였으나 允許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드디어 寶盖山에 들어가서 편지를 올려 病을 핑계대고 떠났다. 그 다음해인 1378년에 迦智寺 주지로 있다가 또 그 다음해에 太子寺의 주지로 있었으니, 이는 모두 王의 特旨를 받들었던 것이다. 壬戌年 봄에는 淸凉山으로 가서 옛 方丈室에서 지냈는데, 王의 欽慕함이 더욱 돈독하였으므로 癸亥年 3월 乙丑日(22日)에 王師로 책봉하여 “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圓明佛日 明辨大智 祐世利生 普濟無礙 都大禪師 妙辯智 圓應尊者”라는 칭호를 드리고, 예를 갖추어 使臣을 보내어 忠州 億政寺로 맞이하였다. 스님은 日常에는 언제나 禪書로써 後學을 가르쳤으며, 客이 찾아 와서 법을 물으면 문득 이 禪書를 들어 보이고 웃으면서 答하기를 “이는 나의 日用事이다”라고 하였다.
甲子年에는 重興寺에 太古圓證國師의 비를 세워,국사의 德行을 記刻하였으니, 참으로 美德이 있어 능히 後世에 널리 傳할만한 偉業을 남기신 분이라고 할만 하다. 다음해 乙丑年에 禑王이 스님을 廣明寺로 모시고 존경하는 마음이 더욱 돈독하였다. 戊辰年에 幼君이 寶位를 계승하게 되었다. 스님은 또 新王에게 王師의 辭退書와 印章을 還納하였으나, 幼君인 昌王은 이를 다시 스님에게 돌려보내고 다시 先王이 섬기던대로 王師로 섬겼다. 그리고 그 해 10월 興聖寺로 옮겨 주석하며너, 세 번이나 병으로써 辭意를 표하였다.
다음해 2월 王이 專使를 보내서 護行하여 스님을 다시 億政寺로 모셨다. 恭讓君이 卽位한 다음해인 庚午年에 謙遜한 말로 편지를 써서 사신을 보내어 京城으로 맞이하고 國師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당시 臺諫으로부터 異端인 佛敎人을 국사로 모시는 것은 부당하다고 배척하는 上疏가 있었다. 스님은 이 일을 알고 강력히 거절하였다. 王도 또한 간곡히 만류하였으나, 스님의 돌아가려는 뜻은 浩然하여 도저히 꺾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知申事인 李行을 보내어 위로하기를 “다가오는 가을에 다시 만나 본래의 뜻을 나눕시다.”라 하니, 스님이 말하기를 “小僧은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가을에 다시 온다 해도 서로 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中使를 시켜서 香을 하사하고 護行토록 하였으나, 스님이 이르기를 “나의 자취는 흐르는 물과 같고 野人의 家風이므로 모실 必要가 없거늘 主上께서는 어찌 이와 같이 拳拳하며 이처럼 극진히 보살펴 주시는가”라 하고 드디어 億政寺로 가서 조용히 聖胎를 頤養하였다. 어느 날 門人에게 이르기를 “나는 올해 壽命이 다 할 것이다.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다.”라 하고, 곧 方丈室 西쪽 중간 지점을 가리키면서, “여기가 나와 因緣이 있는 곳이니, 마땅히 여기에 나의 壽堂을 짓되, 급히 서두르라.”라고 당부하였다. 그리하여 문인들이 곧 木手를 불러서 命하고 감독하여 준공하였다. 스님은 병을 얻어 그 해 6월 28일 大衆에게 이르기를 “오늘 내가 殼漏子를 벗어 버리고자 한다.”라 하고 드디어 古德의 頌을 읊어 이르기를 “곧 이 見聞이 見聞이 아니므로 이것 밖에 어떤 聲色으로도 그대에게 보여줄 것이 없다. 이 가운데서 만약 전혀 無事한 理致를 안다면 주관인 體(정신)와 객관인 用(육체)이 나누어지든 나누어지지 않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라면서 “이것이 곧 나의 偈頌이다.”라고 하였다.
門人이 다시 臨終偈를 청하였더니 스님이 이르기를 “혹 위에 다시 혹을 붙여 무엇 하겠는가? 다시 이 밖에 千萬偈頌을 짓는다 하여도 나의 뜻은 이것을 뛰어 넘질 못할 것이니, 나의 말을 믿겠는가?” 라 하였다. 말이 끝나자 마자 北쪽으로 머리를 向하고 右脇으로 西쪽을 보면서 누워서 조용히 入寂하였다. 화장을 마치고 億政寺의 東쪽 언덕에 탑을 세우고 遺骨을 봉안하였으니, 세수는 63세요 법랍은 49夏였다. 王이 訃告를 듣고 追悼하면서 敦厚한 賻儀를 보내고, 시호를 智鑑國師, 탑호를 慧月圓明이라 追贈하였다.
스님의 儀表는 魁偉하고 器局은 넓고 깊었으며 性品은 민첩하고, 行動은 峻嚴하였다. 얼굴은 근엄하지만 말씀은 溫和하였고, 입에는 남의 잘하고 잘못하는 일을 言及하지 않았으며, 얼굴에는 기껍거나 不滿스러운 표정을 나타내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저지른 舊惡을 마음 속에 두지 않았으며, 비록 원수일지라도 마음에 원한을 품고 있지 않았고, 항상 다른 사람의 잘하는 것만 말하였다. 무른 9개소의 有名한 伽藍의 주지를 역임하였으며, 세 차례에 걸쳐 法號를 加贈받았고, 兩王으로부터 函丈 곧 王師의 禮遇를 받았으며, 二代王에게서 시호를 받았으니, 이것만 보더라도 그의 德行이 古人에 비하여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어서 碑文에 새길 만하다고 하겠다.
공손히 생각하여 보건대, 주상전하께서 卽位하신 초기부터 善行을 표창하고, 惡을 막으려고 새로운 法則을 제정하여 시행하였다. 국사께서 入寂하신지 4년 후에 스님의 덕행을 추모하여 다시 大智國師라는 시호와 智鑑圓明이라는 塔號를 추증하고 臣 宜中에게 命하여 스님의 碑銘을 지으라고 하였다. 스님의 德行이 世上에 널리 알려져서 尊信을 받는다는 것을 또한 이를 통해서도 더욱 더 잘 알 수 있다. 臣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臣이 至正 丙申年에 圓融府 錄事로 있을 때 스님이 入侍의 책임을 맡고 왔을 적에 서로 알게 되었으니, 스님의 碑銘을 짓는 것을 義理上으로도 차마 사양할 수 없거늘, 하물며 主上의 命을 받았음이랴! 臣이 비록 不敏하기는 하지만, 감히 拜手하고 稽首하여 사양하지 못하고 碑銘을 짓게 되었으니 그 詞에 이르기를,
億政寺의 卓越하신 大智國師여!
先天에서 타고나신 투철한 資質
淳樸하온 그 性品은 오직 質일뿐
玉과 같이 맑고 맑아 티가 없도다! ①
經律論에 정통하여 해박한 지식
바다보다 깊고 넓어 끝이 없도다
모든 것을 包容하고 恢恢하오며
白雪같이 희고 맑은 그 모습이여! ②
釋林에서 選拔되어 스님 中 스님!
大衆들을 指導하는 祖室의 기둥
智嚴尊者 그 豫言이 부합되었다.
모든 일을 直觀으로 미리 아시네! ③
恭愍王이 法門 듣고 존경하였고
魁偉하신 모습보곤 達磨라 하다
그 法統을 살펴보니 太古의 弟子
石屋淸珙法을 받아 오직 외길뿐! ④
모든 規律 百丈淸規 依存하였고
日用事는 戒律條項 맞게 하였네!
智慧光明日就月長 增益하오며
그 이름은 더욱더욱 빛이 나도다! ⑤
恭愍王이 스님 道德 傳해 듣고서
禮를 갖춰 王師로서 추대하였네!
임금께서 欽慕하여 마지 않았고
백성들도 한결같이 仰慕하도다! ⑥
중생에게 끼쳐주신 스님의 法乳
저마다의 그릇따라 滋養을 받다
入寂後엔 스님 모습 볼 수가 없고
스님 陰德 만날 길이 전혀 없도다! ⑦
歲月이란 無常하여 점점 멀어져
自我 찾는 그 方法을 누가 알리요!
門徒들의 請託으로 碑文을 지어
돌을 깎아 글을 세겨 碑를 세웠네! ⑧
뒤로부터 다가오는 모든 後哲은
자세하게 이 碑文을 읽어보소서!
前內願堂判曹溪宗事 禪敎都摠攝 慈興慧照 國一都大禪師 겸 判僧錄司事 臣 旋軫이 王命을 받들어 碑文과 篆額을 썼다.
洪武 26년 癸酉 10월 일에
門人大禪師 中允은 碑를 세우고
惠公은 글자를 새기다.
門徒
大禪師 釋希 中允 乙珪 景松 天冒 善濡 天雨 省文 師智
淸裕 法海 覺自
小禪師 省珍 竺闌 印生 心印 道修 意正 信玄 洪坦 惠□
定□ 智瑚 向信 惠澄 乃珪 智仍 仁照 定宜 惠齊
行澄 洪誼 乃澄 明浩 仁冏 凉原 克澄 尙文 宗海
海仍 尙田 覺倫 意原 萬雄 宗喜 衍嚴 文遠 誼聞
法性 尙忍 學賁 勝安 惠淵 斯近 善能
中德 智寬 禪皓 惠闌 省敏 乃乳 衍田 省敦 德琛 釋崇
□和 淸信 志用 衍璘 斯敏 克如 可松 尙其
大選 衍海 義天 正藏 善南 省如 了衡 當午 處雲 哲南
守全 省南 覺益 省樞 戒然 戒天 達禪 尙令 克誠
定通 乃令 雪牛 惠登 慈淑 性哲 衍瑚
雲水 衍玄 正安 達心 海印 信溫 玄和 達修 延圭 雪仍
覺如 達芬 正因 六空 止用 明訓 圓信 雪祥 達令
衍具 正閑 雪栖 了珎 斯牧 永超 法□ 信仍 戒行
意禪 惠度 普惠 惠門 曇順
叅學 尙雄 道原 覺異 鴻規 雪尹 惟善
俗門徒 判門下 洪永通
門下侍中 李穡
侍中 沈德符
判開城 禹仁烈
政堂文學 朴形
奉翊 朴德公
右司尹 閔由誼
判事 孫敬時
左諫議 李滉
左尹 韓介臣
軍器監 郭拯
摠郞 李芳茂
摠郞 李陽實
外正 朴尙文
外正 李漬
前通州 鄭之道
祇候 崔湜
都事 趙啓生
禮賓卿 金璫
校勘 鄭之稚
及第 李擔
及第 崔沆
進士 韓皐
安□別監
祇候 金輊
建碑管事員
兩街都僧錄 大師 尙柔
州住崛山寺 禪師 斯近
州住廣林寺 中德 衍璘
忠州牧使 李希桂
判官 安智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