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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들의 밤잠을 설치게 하는 <밤의 마왕>이 납셨다!
- 청소년의 삶/운동 이야기 첫 번째 손님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밤의 마왕> 님과의 인터뷰
정리: 한낱
지금, 글의 제목을 붙여 놓고 혼자 키득거리는 중이다.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밤의 마왕(이하 밤마)의 이미지가 저렇게 위풍당당하진 않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하기 전, 사전 조사를 위해 주변 아수나로인들에게 “밤마 님은 어떤 느낌의 사람이야?” 라고 물었더니 “음...좀 까칠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문자메시지에 이모티콘 한 번 넣는 적이 없다더라.
밤마 님을 만나보고 나니, 그 ‘까칠함’의 정체를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었다. 과잉된 감정도, 자신의 견해를 뻥튀기처럼 부풀리는 경향도 없다. 그렇다고 냉소적이지도, 무기력하지도 않다. 그저 담담함. 현실에 대한 직시. 비겁하지 않음.
한 번 만나본 주제에 사람을 이렇게 판단해버려도 되는 건가? 살짝 찔리기도 하지만, 뭐 인터뷰가 그런 거 아니겠나. 나는 밤마 님이 아니니깐 살짝 뻥튀기해서 써버리는 수밖에. 다만, 이것 하나는 확신할 수 있을 것 같다. 밤마 님 같은 존재가 많아지면, 이 땅의 ‘꼰대’들이 밤잠을 좀 설치겠구나. 밤잠 못잔 ‘꼰대’들이 신경질적으로 굴어도, 담담하게 맞서면 되는 거니까. 그러다 보면, 학교도 이 사회도 조금씩 변하겠지.
고등학생 시절, 청소년인권운동을 시작한 밤마 님. 그이의 학교 안에서의 싸움, 그리고 스무 살을 갓 넘긴 요즘 여전히 청소년인권운동판을 떠나지 않고, 다만 공간을 이동해 활동하고 있는 최근의 이야기까지 들어봤다. <청소년의 삶/운동 이야기> 코너는 흩어져 있는 청소년 활동가들의 싸움의 경험과 삶의 고민을 모아 구술사로 남기는 원대한 목표를 갖고 있기에 대부분의 속기 기록을 살리는 방향으로 인터뷰를 정리했다. 그래도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은 분은 술을 매우 좋아한다는 밤마 님에게 데이트 신청을 해도 좋을 것 같다. 처음 만나고도 서먹하지 않게 속내를 보여주신 밤마 님에게 감사를 표한다.
‘밤의 마왕’이란?
한낱: 저도 그렇고, <밤의 마왕>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분들도 궁금해 할 것 같아요. 언제 부터 쓴 별명이고, 이유는 뭔가요?
밤마: <아수나로>에 처음 가입했을 때부터 썼어요. 2007년 3월 24일에 가입했어요. (전에 가입일자를 한 번 확인해 봤다고.) 뜻은 딱히 없었는데, 밤에 잠을 잘 안자기 때문에 그렇게
한낱: 무섭다, 고 느끼신 분이 학교에서 그렇게 잘 싸우신 거예요? 언제, 어떤 내용으로 싸우신 건가요?
(밤마 님은 2008년 마산 용마고등학교에서 두발․복장 규제 철폐, 강제야자 금지, 휴대폰 압수 금지 등 학생의 기본적 인권 보장을 내걸고 학교 친구들과 함께 학내 시위를 시도했습니다.)
2008년, 학교와의 싸움이 시작되다
밤마: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바로는 아니었고, 2학년 중반 늦봄 정도였어요. <아수나로>를 알고 나서 1년 후에 학교에서 싸우기 시작했어요. 주장했던 내용은 기본적으로 항상 이야기해온 두발규제, 체벌, 강제야자 문제 등이었어요. 그밖에 동아리 활성화, 학생회를 학생에게! 등등. 그리고 그 때 저희 학교는 학생들이 후문으로 못 다니게 했어요. 후문이 등교하기 편한 친구들이 많았는데도 학교에서 쉽게 교문 단속을 하려고 정문만 개방했죠. 자기들은 끝까지 아니라고 우겼지만. 당시 요구항이 11개 정도였어요. 결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당시의 요구사항을 담은 문서 <7.10 용마고 행동- 우리들의 인권을 위한 외침> 클릭!
한낱: ‘타협’이라도 이루어진 게 없었나요? 요구안이 전부 다 받아들여지지 않은 건가요?
밤마: 그 때 결과적으로는 완전 졌어요. 과정들이 있었는데, 2008년 5월말 서명운동을 하다 걸렸고, 7월 초에 학내 시위를 조직했으나 당일에 학생들이 교사들에게 걸려서 못나왔어요. 어떤 식으로 정보가 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면서 혼자만 와장창 깨진 거지요. 주위에 도움을 주는 단체들이 아예 없지는 않았어요. <아수나로>경남중부지역모임은 제가 있으니 뛰어 들었고, 지역에 진보적인 교사 단체나 학부모 단체 등도 있었지만 아수나로를 제외한 나머지 단체들에서는 그다지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는 모습이 안 느껴졌어요. 그나마 믿었던 사람들인데 뒤통수 맞은 느낌도 솔직히 있었죠. 학내 시위 불발로 언론에 이슈화가 되긴 했지만, 저는 그냥 완전 찍힌 아이가 돼버렸어요. 그래도 제가 학교 재학 중일때는 학교가 제 눈치를 보긴 하더라구요.
한낱: 중학교 때는 어땠어요? 용마고에서 싸움을 시작한 건 쌓였던 분노가 폭발한 것이었나요?
밤마: 중학교 2학년, 3학년 초만 해도 정말로 ‘모범생’이었어요. 머리도 단정히 자르고, 시키는 대로 잘하고 다녔죠. 근데 생각을 해보니 뭔가 아니다 싶고, 그렇게 하고 다니긴 했지만 이거는 학교에 얽매이는 거다, 라는 고민이 들기 시작했어요. <아수나로> 가입하고, 8월부터 활동 시작하고, 제대로 보고 느낀 것이 있었던 거죠. 우리학교 정말 안 되겠다, 이게 무슨 학교냐 싶어서. 그냥 시작하면 완전히 깨진다 싶어서 주변에 공감대를 형성하기 시작했죠. 그래서 2학년 때 학교 안에 언론 동아리를 만들고 주변 친구들을 ‘꼬시기’ 시작했어요. 근데 사람이 참 안 모이더라구요. 가입에 제한도 안 뒀는데 오질 않더라구요.
한낱: 왜 그랬을까요?
싸움의 시작, 동아리 활동과 전교생 대상의 서명운동
밤마: 동아리 홍보할 때, 언론 이야기 뿐 아니라 인권적인 관점에서 학교를 비판해서 그런가. 애들이 쫄아서 그랬나. 그래서 겨우 모인 것이 2학년 8명, 1학년 조금. 어쨌든 모이긴 모였는데, 친구들이 자기 고민이 많진 않더라구요. 불만은 있는데, 그 이상의 것들이 없었어요. 그래서 혼자 힘들었는데, 2008년 5월에 촛불 집회들이 시작되었을 때, 2학년 중 한 친구가 서명운동을 먼저 제안하더라구요. 서명 운동 나쁘지 않겠다 싶었고, 그래서 요구안을 준비하게 된 것이죠. 교사들에게 걸리지 않게 조심하고, 저항의식이 있는 반장들 중심으로 배포하기로 했죠. (웃음) 1학년 동아리 부원이 서명을 받다가 교사에게 걸렸고, 그걸 빌미로 제가 담임교사에게 취조를 당했어요. 그냥 뻗댈까 하다가 제가 했다고 이야기 했어요. 면담 코스가 쫙 있더라구요. 담임, 학생부장, 교감까지. 저녁도 못 먹고, 하루에 쭉 만났어요. 담임 교사와 이야기 할 때도, 학생부장과 이야기 할 때도, 교감과 이야기할 때도 논리에 있어서는 제가 타당했죠. 그런데 정말 레드 콤플렉스에 다들 엄청 쩔어있더라구요. 나는 인권이 이념이라고 생각 안하는데, 제 이야기를 마구 왜곡시키는 거에요. 그리고 권위 의식에 사로잡혀 있고. 저한테 말끝마다 ‘싸가지 없다’고 그러고. 마지막에 나온 말이 “아버지 불러와라!” 였어요. 결국 아버지께서 학교에 찾아 오셨어요.
한낱: 아버지의 반응은 어떠셨어요?
밤마: 집에서 맞지는 않았는데;; 고기를 사주면서 타이르시더라구요. “조용히 살자. 학교가 원래 그런 곳이다.” 라고 말씀 하셨죠. 보통의 꼰대들이 하는 이야기를 하시더라구요. 알겠다, 알겠다 라고 대답하며 넘어갔죠.
한낱: 서명운동 한 이후 학교 상황은 어떻게 되었나요?
밤마: 5월 서명운동 사건이 <오마이뉴스>에 기사화 되었어요. 학교에서는 신문 보도가 되니 난리가 났죠. 교사들은 계속 이야기를 묻어버리는 작업하면서, 저희 동아리 부원들을 불러 추궁했어요. 학내 인권 문제가 학생들 사이에서 공론화 되었고, 토론이 이루어지려고 했죠. 제가 그 때 학생회 전교 부회장이었고, 학생회 임원들을 소집해 토론을 해보려고 준비하는데 교칙에 전교 학생회장, 부회장은 학생회 임원을 소집할 권한이 없더라구요. 다만 학생부장에게 제안만 할 수 있었어요. 그런 상태에서 토론이 될 리 없죠. 어영부영 넘어갔어요. 학생부장은 간부 수련회에서 문제를 논의해보자고 약속하더니 제가 못가는 날로 수련회를 잡았어요. 다녀온 친구들한테 물어보니 달라진 것도 없고, 토론도 안했다고. 다시 한 번 때를 기다려보자 하고 기다렸는데, 이놈의 학교가 학생인권 개선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으나 실제 움직임은 없었어요. 오히려 규제가 심해지기도 했어요. 그렇게 난리를 쳐도 변화가 없는 모습을 보면서 “서명운동으론 안 되겠다, 더 큰 행동이 필요하다.”라고 친구들과 의견을 모았어요.
한낱: 그렇게 해서 “7.10 용마고 행동”을 준비하게 된 거군요?
우리들의 인권을 위한 외침, 7.10 용마고 행동
밤마: 날짜를 잡고 비밀리에 시위를 준비했고, 당일까지 잘 진행되었어요. 학생들 반응도 좋았는데, 당일이 되고, 발각이 됐어요. 6교시 수업 중에 수학 담당 교사가 저를 불러 “너는 학교에 애교심이 있냐?”라고 묻더라구요. 직감적으로 걸렸다는 느낌이 들었죠. 수업 끝나고 불려가고, 서명 운동 때처럼 취조를 당하고. 네가 하는 이야기 맞지만,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를 또다시 반복해서 들어야 했어요. “대학가서 할 수 있지 않냐?” 라는 말로 추궁이 끝났어요. 시위가 발각되었다는 소문이 일순간에 퍼지면서 학생들 사이에 형성되었던 분위기도 죽어버렸고, 혼자만의 싸움이 시작됐어요. 인권 활동가들이 급하게 와서 교문 앞 피켓팅도 하고 선전전도 했어요. 기자들이 와서 취재하고 그러니까, 야자시간에 아이들이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교사들이 촉각을 곤두세웠죠. “나가면 에어컨을 꺼버리겠다.”는 협박도 했다더라구요. 그사이에 제 부모님이 오셨고, 같이 교무실로 가서 10시 넘게 까지 이야기 했어요. 선생님들 여럿이 쭉 둘러싸고 이야기 하는데... 17대 1로 싸우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싶었어요. 저는 끝까지 잘못 한 것 없다고 버텼고, 학교가 엉망이니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결국엔 징계 절차 협의로 들어갔고, 징계 반대 투쟁도 했으나 결국 징계를 받았어요. 전교 부회장에서 짤리고, 피선거권 박탈 당하고, 사회봉사 5일을 받았죠. 퇴학, 정학 바로 아래 단계의 징계였어요. 징계 위원회에도 문제가 많아요. 변호사 같은 것도 없고, 인권단체 활동가도 없고, 징계 위원회가 오로지 교사로만 구성돼 있잖아요. 저는 끝까지 제가 잘못한 것 없다고 철판 깔고 주장했어요. 학교에서 5일간 수업 못 듣고 학교 안에서 쓰레기를 주웠어요. 그게 8월 말이었는데, 몸과 마음이 정말 지쳤죠. 친구들이 다들 사람 몰골이 아니라고 하더라구요.
한낱: 학교와의 싸움 이후 주변 친구들과의 관계는 어땠나요?
밤마: 초반에는 조금 서먹했는데, 점차 회복 됐어요.
한낱: 싸움이 졌기 때문에 오히려 학교의 규제가 더 강화되고, 학생인권이 전보다 더 열악해진 부분이 있다고 했는데, 그럼 싸웠던 걸 후회하시나요?
밤마: 후회하지는 않아요. 조금만 더 잘할 걸, 이라는 생각을 해요. 특히 조직 부분. 그 때 경험이 없었으니까 많이 미흡했죠. 좀 더 열심히 해볼 걸. 한 사람 한사람 더 설득 해볼 걸. 그게 잘 안된 게 아쉬워요. 그리고 또 정말 정말 아쉬운 부분은 교사들 하고 싸울 때 조금 더 논리적으로, 정리된 근거를 가지고 싸웠으면 좋았을 텐데. 내 안에 있는 이야기들을 좀 더 잘 말했으면 마음에 쌓인 억울함이라도 덜 했을 텐데. 절차나 방법에 대한 것도 그렇고.
한낱: 당시에 밤마가 만들었던 언론 동아리는 지금도 있나요?
밤마: 망했어요. 3학년은 동아리를 못한다는 치명타가 있었고, 제 징계 이후에는 다시는 인권 관련해서 모이질 않았어요. 졸업하고 나서 학교에 간 적은 없어요. 서울에 와 버렸고, 그 안에 움직임도 다 죽어버렸어요.
지역 청소년인권운동에 대한 고민: <아수나로> 경남중부지역모임 활동
한낱: <아수나로> 경남중부지역모임(경중지부) 활동가였는데,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수가 워낙 적다고 들었어요. 떠나온 곳이 걱정되지는 않는지?
밤마: 그 걱정은 2년 전부터 했었어요. 그러면서 3학년 때, 대학 진학 결심하면서 고민이 극에 달했죠. 부산, 울산 친구들 중 열심히 하던 친구들이 빠지면서 그 쪽 지역 모임이 망해버렸어요. 그걸 옆에서 보면서, 경중지부도 그렇게 될까봐 걱정됐죠. 그 이후 활동가들 모으려 노력했어야 하는데 그건 잘 안됐고, 지금도 걱정되고, 걱정이 현실화되고 있어서 미안하기도 하고. 기존에 남아있던 인간들은 어디 갔나 싶기도 하고. 예견된 결과 속에서 벗어나 보려고 하지만, 상황이 많이 어렵긴 해요.
(한낱: 아, 이, 적나라한 평가들;;)
한낱: 경중지부 상황에 개입할 생각은 없나요?
밤마: 하고 싶은데, 못하고 있어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왕복 차비만 해도 6만원. 시간도 없고. 개입하는 걸 또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돈이 문제면 어떻게든 해볼 텐데, 그 쪽에서도 시큰둥해요;; 지금 실제 활동하는 사람은 2~3명이에요. 다들 검정고시나 병역 준비 중. 제가 서울 올라가기 직전까지는 10명 가까이 됐었는데, 그 절반이 다 떠날 사람들이었던 거죠.
한낱: 경중지부 활동을 돌이켜 봤을 때, 지역 운동에 꼭 필요한 걸 꼽자면?
밤마: 사람이 필요해요. 마산, 창원 합쳐도 인구수 전체가 100만이 안 되요. 부산, 울산, 서울 활동가들 만나면 “인구수 자체가 엄청난데, 너네 왜 운동 말아 먹냐? 인구수 대비해서 활동가 수가 왜 그따구 밖에 안되냐!” 라고 말해요. 마산의 경우 한 달에 <아수나로> 가입자가 한 두 명 정도고 다 활동한다는 보장도 없어요. 지역 내 청소년 인권 관련해 연대할 단체도 별로 없고, 진보 이름을 걸고 운동하는 단체도 ‘꼰대스러운’ 경우가 많았어요. <아수나로>를 대할 때, 한 수 아래로 보는 경우도 많고. 이 부분도 짜증났어요. 청소년 인권단체가 <아수나로> 말고는 없었으니까.
대학 진학, 그리고 스무 살을 넘긴 내게 청소년인권이 갖는 의미
한낱: 청소년 인권운동을 하다보면, 수능 거부에 대해 생각하게 되기도 하잖아요.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던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밤마: 대학가면 좀 더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 (웃음) 너무 지역 활동이 힘들어서... 3년 넘도록 마산에서 활동하면서 기자회견을 자체적으로 한 경험이 딱 한 번 있었어요. 교육청 브리핑 룸에서 4명이 했어요. 기자 회견은 오전에 해야 하는데, 학생들이 참여할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서울 활동가들은 지그들 끼리 청소년 인권을 걸고 집회를 열기도 하고, 연대 단체도 정말 많고 신기했어요. 또 서울 활동가들 보면, 자퇴한 친구들도 많잖아요. 그거 보면서는 학교 안에서 어떻게든 싸움을 만들어가야 하지 않나? 학내 문제가 청소년 인권 문제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데? 라는 의문도 들었어요. 서울에 직접 올라와서 이야기도 하고, 활동하는 모습도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큰 집회는 대부분 서울에서 열리고, 큰 단체도 다 서울에 집중되어 있잖아요. 어떻게 하면 지역과 서울의 격차를 줄일 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들어서... 여러 가지 배우려고 유학 온 거에요. 서울로 가고 싶은데, 아무 이유 없이는 집에서 안 보내줄 것 같기도 하고 해서.
한낱: 대학 생활은 어떠세요?
밤마: 대학 내에서 청소년 인권운동을 하긴 어려워요. 이미 나이가 들어서 가슴으로 느끼질 못하니까요. 학내 학회에 가입했는데, 아직까지 회의에 한 번도 참석해보지는 못했어요. 단과대 학생회 집행부 활동을 하고, 개인적으로 공부를 하고 있어요. 읽기 싫은 책들 억지로 읽으며... 제가 활동가이기 때문에 공부의 필요를 느껴요. 지금 현실의 문제들... 명박 정권 속에서 점점 열악해 지는 민중들의 삶, 노동자들의 현실 이런 것들을 청소년 인권만으로 얘기하기엔 협소 하더라구요. 그래서 공부의 폭을 넓히게 되었어요.
한낱: 비청소년이 된 밤마 님에게 청소년인권은 어떤 의미인가요?
밤마: 저는 아직 제가 청소년인 느낌이에요. 버스도 청소년 요금이고; 물론 청소년인권을 쟁취하기 위한 움직임들은 비청소년이 대신해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청소년 본인들이 직접 쟁취해야하는 부분인데, 적극적 지지와 담론 만들기 그리고 지원의 역할을 생각하게 되요. 같이 싸우기도 하고. 청소년 인권이라는 게 또 언제 보면 내 문제가 되기도 해요. 20대 초반과 청소년 사이에 유사성이 있어요. 약간의 자유는 더 얻었지만, 사실상 의식 속에서는 억압이나 제한이 남아 있어요. 청소년 시기에 길들여진 부분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기도 하죠. 음...또...대학교 와서 술을 참 많이 먹게 되는데, 청소년 시기에 마시지 말라는 말만 듣다보니 욕구가 폭발하는 것 같아요. 청소년 시기에 당했던 억압이 마음 한 편에서 계속 트라우마로 남는 것 같아요.
계속되는 <스쿨 어택>,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
한낱: <아수나로>에서 <스쿨 어택>이라는 책을 만들고 있다고. 어떤 책인가요?
한낱: 그럼 대체로 <아수나로>에서 직접행동을 말리는 역할을 한다는 건가요?(웃음)
밤마: 그렇다기보다 신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자기 결의가 중요해요. 그래서 유일하게 <스쿨어택>에서 수정 논의된 게 제가 쓴 부분이에요. 너무 겁을 준다는 평이 많았어요. 그치만 저는 현실이, 싸우는 과정들이 사람을 지치게 하기 때문에, 때로는 소외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정말 자기 의지와 결의가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야만 할 수 있어요. 저는 현실의 탄압 수준을 보여주는 건데, 주위에서는 오히려 너무 싸우려는 의지를 꺾는 것 아니냐고 해요. 하지만 무책임한 희망을 쥐어주고 싶지 않아요. “일단 해봐라!” 라는 건 말은 쉽지요. 그치만 세상이 쉽게 변하지는 않잖아요. 무책임한 조언은 배설하는 것과 같아요. 나중에 뒷감당을 어찌 할려고? 결국 그 학생만 죽는 건데. 현실을 담담하게 직시해야 실패해도 상처로만 남지 않아요.
한낱: 저도 밤마 님의 생각에 공감합니다. 음..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밤마: 배고파요.
한낱: ;;;;; <아수나로> 친구들한테 하고 싶은 말은?
밤마: 서울지부 친구들한테 하고 싶은데, 쫌 회의를... 안건 수가 많은 건 상관없는데 회의를 좀 미리 공지해줬으면 좋겠어요. 왜냐면, 저도 노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일정이 있어요. <아수나로>에서 미리 연락을 안주면 가기가 쉽지 않아요. 미리 미리 좀 공지하라! 경중지부 활동과 달라서 당황스러워요.
한낱: ;;;;;; 쫀득쫀득하게 해줄 말은 없어요?
밤마: 서울지부 친구들이 서로 더 친한 것 같아요. (갑자기 서울 말씨로) 저나 개드립(개+애드립)치지 경중지부는 딱딱 할 얘기만 했었거든요. 서로 나름 친하긴 했지만. 서울 지부는 다 반말하고 친하더라구요. 그거 말고는... 그거 말고는...
인터뷰가 끝나고, 밤마 님께 맛있는 식사를 대접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밥을 먹는다며 좋아하시는 밤마 님에게 넌지시 농을 걸었다. “한 시간 넘게 제가 밤마 님 이야기 들어드린 거니깐, 언제 한 번 술 사세요!” 까칠한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네에..알겠어요.” 하시더라. 이렇게 글로도 남겼으니, 곧 있으면 연락이 오겠지. 한 번 만나고도, 술 한 잔 하고 싶은 느낌이 들 만큼 괜춘한 활동가 밤의 마왕. 낮밤 가리지 않고, 어이없는 행실을 일삼는 사회 각계의 꼰대들에게 마수를 뻗쳐 주시길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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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가 다 밤의마왕님을 신뢰하니까 떠넘기는 겁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소한 거 고쳐주셨으면 하는 것들
6교시 끝나고 "애교심 있냐"고 물어본 인간은 담임교사가 아닌 수학담당교사
마산, 창원, 김해 다 합쳐 인구 100만이 안 되는 게 아니라 마산, 창원만 합치면 인구 100만이 안 된다는.
질문에 답하면서의 실수나 속기하면서 실수는 항상 있을 수 있는 거니까. 그리고 저것들이 내용의 요지를 해치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사실 관계는 분명해야 하는 거니까 수정 부탁요.
그리고 술은 마시고 싶은 사람이 전화를 해야 하는 거예요ㅋㅋ 치맥 정돈 가능...할... 거예요... 아마....
ㅋㅋㅋ 댓글을 이제서야 발견했네요. 수정 할게요. 치맥이 뭘까; 하고 10초정도 생각했는데 아마도 치킨-맥주겠군요? 쿠폰 하나 확보한 셈 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