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활터에 떠도는 착각과 무지 3
정진명(온깍지궁사회)
1.강궁 열풍의 본질
작년 재작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관련하여 문화재청의 요청으로 각궁 만드는 분들을 몇 분 만났습니다. 부천궁방에 갔다가 김윤경 접장을 만나서 40호 정도의 연궁이 혹시 있느냐고 물었더니 요즘은 그렇게 약한 활 만들면 팔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모두 막막강궁을 써서 세게 만들수록 잘 팔린다고 합니다. 말로 들으니 한 60호 정도는 되어야 사람들이 좋다고 한다네요. 오랜만에 각궁을 잡아볼까 하는 생각을 접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광주 이상운 접장의 궁방에 가니 40~45호의 각궁이 제법 많은 겁니다. 제가 두루 돌아본 결과 40호 내외의 연궁을 만드는 궁장은 현재 광주의 이상운 접장뿐이었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강궁 열풍이 불었을까요?
옛날에 활터 어른들이 입에 달고 산 말이 있습니다. 연궁에 중시라! 연궁은 연한 활을 쓰라는 얘기고 중시는 무거운 화살을 쓰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게 다 무시 당하는 현실입니다. 이 현상이 무엇을 뜻할까요? 잘라 말하면 전통 사법이 사라졌다는 얘기입니다. 전통 사법은 연궁중시로 하는 사법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강궁경시입니다. 강궁 경시로 전통사법을 구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강궁 경시로 전통사법을 한다는 사람들은 사기꾼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그냥 자신의 주먹구구 사법일 뿐이지, '전통' 사법일 수 없습니다.
연궁중시가 분명한 우리 활의 전통임은 예천 권영학 궁장을 찾아갔을 때 또렷이 드러났습니다. 권 궁장이 저를 알아보더니, 정 접장은 활을 몇 호로 쏘느냐고 묻길래 저는 힘이 약해서 45호 이상을 쓰지 못합니다 했더니, 그게 맞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각궁은 50호 이상을 쓸 필요가 없답니다. 47~48 호 정도만 되어도 아홉 돈 짜리 죽시를 과녁까지 보내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아홉 돈짜리 죽시를 무겁까지 보내지 못하는 47~48호 각궁은 불량이라는 겁니다.
이 말에 따르면 50호가 넘어가는 강궁을 쓰려면 화살이 10돈을 넘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10돈 이하로 썼다간 조준점을 낮춰도 과녁을 훌떡 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강궁을 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47호 정도만 되어도 무거운 죽시를 무겁까지 너끈히 보낼 수 있고, 바람도 다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뭐하려고 죽울 동 살 동 똥심을 써가며 굳이 강궁을 당긴단 말입니까?
저는 권영학 궁장의 말을 과장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정곡을 찌른 말이라고 봅니다. 권 궁장 자신이 1980년대를 풍미한 명궁이기도 하고 활을 오래 만든 당사자이기 때문입니다.
2.강궁을 자꾸 만드는 까닭은?
그러면 오늘날 궁장들은 왜 강궁을 만들까요? 수요자들이 그렇게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수요자들은 왜 그렇게 센 활을 쓰려고 할까요? 센 활을 쏘지 않으면 화살이 제대로 나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화살이 제대로 나가지 않는다는 것은 무겁까지 잘 안 나가는 것과 바람을 많이 탄다는 것 2가지를 말합니다. 그러면 옛날 50호가 채 안 되는 각궁을 썼던 30년 전의 선배들은 둘 중의 하나였을 겁니다. 바보이거나 재주꾼거나...... 먼저 물어봅니다. 바보들이었을까요? 이건 아닐 겁니다.
그러면 답은 하나입니다. 50호가 채 안되는 각궁으로도 중시를 무겁까지 보내는 특별한 비법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 재주가 무엇일까요? 그에 대한 답이 바로 '전통 사법'입니다. 이 전통 사법의 반댓말이 바로 '명궁 사법'이라고 앞서 말씀 드렸습니다. 명궁 사법의 형성과정은 <활터에 떠도는 착각과 무지 2>에서 자세히 말씀 드렸으니 거기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똑같은 힘으로 쏘는 데도 화살이 무겁까지 가지 못하거나 바람이 조금만 불면 떠다 밀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한 가지에서 찾은 것이죠. 강궁이 그 답입니다. 무지막지한 강궁을 들이대서 가벼운 화살을 걸어 쏘면 웬만한 바람을 다 이기고 갑니다.
궁장들로서도 이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심을 조금만 더 놓고 뿔을 조금만 덜 깎으면 되는 아주 간단한 방법인 것입니다. 그러면 활 만들 때 뭐가 편하냐? 대충 만들어도 고장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연궁을 만들기가 힘들지, 강궁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주 예민한 연궁을 만들어서 뒤집었느니 상하장이 안 맞는다느니 하는 소비자들이 잔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죠. 그래서 얼마든지 강한 활을 만들어주마, 하고 아주 편하게 강궁을 만들어주는 겁니다.
강궁은 기술이 좀 떨어져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궁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정교하고 세밀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상당한 해궁 기술이 필요합니다. 여러 가지로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이 연궁 작업입니다. 강궁 만드는 일이 궁장으로서는 일거양득입니다. 그러니 굳이 소비자들의 요구를 마다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진짜 궁장의 실력은 강궁이 아니라 연궁을 만드는 능력입니다. 공인을 제대로 주려면 40호 이하 짜리 연궁을 만들어오라고 해서 그것이 7~8돈짜리 죽시를 무겁까지 제대로 보내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을 테스트해야 합니다. 그러면 궁장들의 실력을 담박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죽시가 무겁까지 가는 활만 공인으로 허가하면 됩니다. 그게 아니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니 오늘날 공인 문제로 온 세상이 시끄러운 것입니다. 본질과는 거리가 먼 공인 문제로 '활터' 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3.개량궁과 바가지활
그리고 강궁이 나타난 조건은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개량궁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국궁계에서 승단제도가 실시된 이래, 각궁과 죽시는 5단부터 해당됩니다. 그 이하는 개량궁에 카본살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신사 때 대부분 개량궁을 씁니다. 그렇게 개량궁에 길들다가 4단까지 딴 뒤 갑자기 각궁을 잡으니, 계속해서 낙방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개량궁과 각궁은 그 성질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래서 4단들은 궁장에게 요구합니다. 활의 느낌을 최대한 개량궁과 같은 느낌이 나도록 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각궁의 느낌이 개량궁과 비슷해질까요? 줌통을 주저앉히고 한오금을 둥글게 만드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해궁된 각궁은 모양도 느낌도 개량궁과 아주 비슷합니다.
이렇게 된 각궁을 옛날 어른들이 뭐라고 불렀는지 아십니까? '바가지활'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면 옛 어른들은 왜 바가지활이라고 이름을 붙였을까요? 그것이 좋아서 그랬을까요? 경계하려고 그랬을까요? 당연히 그렇게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바가지활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붙인 겁니다. 줌팔을 될수록 곧게 펴라고, 그렇게 잘 안 되는 것을 가리키는 '멍에팔'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처럼 말이죠. 그러니까 요즘 각궁은 옛 어른들이 그렇게도 꺼려했던 바가지활로 재탄생한 것입니다. 그게 바가지활인 줄도 모르고 쏘는 명궁들이 요즘 정말 많습니다. 이래서 요즘 사법의 대세를 주도하는 명궁과 전통은 상극이라는 결론이 나는 겁니다. 서기 2000년 이후, 명궁이란 호칭을 들으면 '저 사람은 전통과는 다른 활쏘기를 하는구나.'하고 저는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지금 이 자리의 논의는 '전통'의 문제를 두고 하는 말임을 짚고자 합니다. '전통'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다면 저는 모든 명궁님들을 존경할 것입니다. 과녁을 그렇게 잘 맞추는 사법을 나름대로 터득한다는 것은 정말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명궁님들은 존경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내가 전통 사법을 한다.'고 하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전통 사법의 기준으로 그 명궁의 궁체를 볼 것이고, 그것이 전통이 아니라면 당연히 비난 받아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활에서 전통의 기준은 <조선의 궁술>이라고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 화살이 과녁에 가서 땅땅 맞거든, 그냥 나의 사법이라고 하고 쏘십시오. 그 비법이 정 아깝거든 자신의 이름을 붙여서 예컨대 '김갑돌 사법'이라고 선언하고, 독점하여 가르치고 싶으면 특허 등록을 하십시오. 음식물에도 특허가 허가되는 세상입니다.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김갑돌 사법'이 아니라 그 앞에 '전통'이라는 말이 붙이는 순간 전통성 시비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리고 일단 그렇게 되면 결코 명궁님에게 유리할 수 없습니다. 명궁님들이 전통사법을 배우고자 해도 어디 가서 그 전통 사법을 배울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전통 사법은 벌써 명맥이 끊겼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만약 여러분이 전통 사법을 한다고 주장하신다면) 여러분이 하는 그 전통사법이란 실제 전통사법이 아니라, '이것이 전통일 거야.'라고 상상하여 만들어내는 '상상 전통 사법'입니다.
그럼 옛 어른들은 왜 바가지 활을 경계했을까요? 2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바가지활은 살을 제대로 못 채줍니다. 그리고 충격이 몸으로 들어옵니다.
1970년대까지 찍은 사진을 보면 각궁의 모양이 지금과 달라진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지금과 완전히 다릅니다. 옛 각궁은 줌통이 많이 솟았고, 오금이 줌통쪽으로 붙었습니다. 옛 사진을 지금의 각궁사진과 비교해보십시오. 제 말이 틀렸나 맞았나? 지금 활은 모두 바가지활입니다. 그런 활을 가지고 죽시를 보내자니 자꾸 강궁을 쓰게 되는 겁니다. 심지어 70호 되는 각궁을 써도 바람을 살핍니다. 바가지활은 아무리 센 강궁이라도 바람을 이기지 못합니다. 옛 사람들이 바보라서 줌통이 바짝 솟은 활을 쓴 게 아닙니다. 바가지활은 꾀활입니다. 잔머리 대마왕들이 쓰는 활입니다. 바가지활은 잘 못 채지만, 잘 안 뒤집어집니다. 그래서 활 다룰 줄 제대로 모르는 어설픈 애한량들이 좋아하는 겁니다. 오늘날 명궁들은 이런 불명예를 안고 활을 쏘아야 합니다. 제 아무리 명궁 명궁 떠들어도 이런 숙명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각궁 40호에 7돈 죽시 걸어서 5몰기 하십시오. 제가 무릎 꿇고 당장 명궁님이라고 떠받들 것입니다.
바람을 이기려고 강궁을 쓰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바람은 전통 사법으로 쏘면 다 이길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개량궁으로 익힌 사법에 맞도록 각궁을 개조해서 바가지활로 만들어 쏘면서 활터의 전통 운운하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일입니다. 각궁은 각궁의 특징이 있는 것입니다. 그 특징을 벗어나면 각궁과 똑같은 재료로 만들었어도 각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가지활은 잘못된 각궁의 표본입니다. 반면(꺼꿀)교사로 삼아야 할 각궁이 바가지활입니다. 명궁사법의 요구로 온 세상이 바가지활로 넘쳐나니, 각궁의 특징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하는 시절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세월을 탓해야 할까요, 인사를 탓해야 할까요?
저는 불과 30여년 전의 활쏘기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30년 전에 당연했던 이야기들입니다. 30년 전에 당연했던 이야기가 귀에 거슬린다면 그것은 저의 탓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 활터가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고 자문할지언정 저를 욕하진 마시기 바랍니다. 누구한테 욕 먹는다고 거짓말 할 수는 없는 것이 또한 저의 운명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이비 전통에 맞서서 제대로 된 전통을 지키기 위해 고민하는 분들께 존경을 바칩니다.
첫댓글 돌아 올겁니다.
연궁중시..동감하는바가많습니다
연궁중시를써보고싶지만말그대로연궁에중시를걸어쏘면활의수명을재촉하거나활이망가지기쉽지않을까하는염려에망설여지곤합니다 연궁중시..자기힘에충분히여유있는활을쓰더라도화살은어떻게쓰면좋을까요?
연궁중시는 충격이 줄어들어서 사람과 활이 다치지 않습니다.
연궁에중시...
50파운드에 8돈쓰다 38파운드로 했더니 발시때마다 온몸에 감도는 시원함이 이루말할수없었던 경험이 있었죠.활을 다쏘고나서도 한동안 그시원함이 몸에 남아있었던기억이...
쏘임새가 달라지고 각궁 제작이나 해궁 모양도 달라졌다고 들었습니다. 쓰신 내용 중에 공감가는 내용이 많네요. 한편, 옛날 대회의 시수 기록을 보면 요즘보다 관중이 많이 적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추구하는 바가 다르긴 하지만, 적중율로 놓고보면 쏘임새와 함께 각궁의 제조나 해궁 방식도 전통 사법이 최고다라고 하기에 조심스럽습니다. 사람과 활이 다치지 않지만, 잘 뒤집어질 수 있는, 잘 안 맞는.. 그럭저럭 잘 맞으며, 사람과 활에 무리가 간다지만 그래도 적당히 편한.. 이제 개량궁에서 각궁으로 넘어가려는 중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