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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북부 지역의 목궁
답사지역: 경기도 북부 포천 일대
답사기간: 2001년 4월 21일~ 22일
참가자: 이석희, 이건호, 정진명, 최석규, 박동일, 이명환
1. 박동일 접장
지난 2월 초순, 이건호 접장한테서 메일이 왔다. 경기도 연천에 박동일이라는 분이 계신데 인터넷이나 메일에 익숙지 않아서 온깍지궁사회에 가입하고 싶어도 가입할 수 없으니 대신 가입해달라고 했다면서 신상에 관한 내용을 간단히 적어보낸 것이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전화를 드리고서 온깍지궁사회 가입을 알려드렸다. 이번에 다녀온 답사는 바로 이 박접장의 배려 때문이었다.
박접장은 원래 고향이 예천으로 서울에서 생활하다가 경기도 연천으로 내려가서 취미 삼아 사슴도 기르고 하면서 그 지역의 전통 문화를 정리하는 분이다. 물론 활량이다. 그 지역에는 옛날부터 목궁이 유명하였고, 바로 그 목궁의 존재를 처음으로 정리하여 지역 신문에 연재를 했고, 그것을 국궁신문을 운영하는 이건호 접장이 국궁신문에 게재를 하여 많은 활량들이 볼 수 있게 하였다.
그러던 중에 부산의 이석희 행수가 목궁과 죽궁에 관심이 많아서 온깍지궁사회를 통하여 알게 된 이건호 접장과 통화하는 과정에서 한 번 연천을 방문하는 게 어떠냐는 의견을 나누고 박동일 접장과 의견을 나눈 뒤에 일정을 잡아서 답사를 하기로 한 것이었다.
2. 출발
먼저 부산에 사는 이석희 행수가 청주로 20일에 왔다. 거기서 우총무와 최석규 접장과 동행하기로 한 것이다. 토요일 정오에 셋이서 우총무의 차로 출발하였다. 청주 톨게이트를 빠져나갈 때쯤에 울진에서 아침에 출발한 이건호 접장은 벌써 만나기로 한 호법 인터체인지 근방을 지나고 있었다.
중부고속도로 이천휴게소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고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남양주에 우총무의 차를 세워두고 이건호 접장의 차로 넷이 합류하여 포천으로 방향을 잡았다. 박접장이 연천이지만 목궁을 만든 분들이 대부분 포천 분들이기 때문에 대군정으로 목적지를 잡은 것이었다. 수락정의 이명환 접장은 그곳으로 직접 오기로 하였다. 포천 대군정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많이 기울고 있었다. 포천 대군정의 사원들 예닐곱 분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3. 포천 대군정
대군정(大軍亭)은 포천군 신북면 덕둔리에 있다. 왜 대군정이라고 이름을 지었느냐고 물었더니 최춘식 사두님(64세)이 자세히 설명해주신다. 지금 대군정 활터가 있는 곳에서 골짜기를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대군터'라는 이름이 붙은 지명이 나오고, 그 대군터란 옛날에 조선시대의 군대가 주둔했던 곳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란다. 이것은 동네 이름인 '덕둔'이라는 지명에서도 증명된다. 둔(屯)이란, 군대가 주둔하는 지역, 즉 병영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옛날에 군대가 주둔해있었기 때문에 동네 이름이 그렇게 정착한 것이다. 그리고 활터에서 조금 아랫쪽으로 돌아가면 사정동(射亭洞)이라는 동네가 있는데, 이 역시 대군터와 관련이 있는 이름으로 보인다. 즉 군대가 주둔했던 곳이 대군터이고, 그 군대의 사장이 있던 곳이 사정동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오는 것이리라. 묘하게도 활쏘기와 관련이 있는 곳에 다시 활터가 들어섰으니, 역사를 아는 자라면 어찌 묘한 감회가 없을 수 있으랴!
대군정은 생긴 지가 얼마 안 되는데 활터를 만들기가 몹시 힘들었다고 한다. 저녁을 먹으면서 최 사두님이 저간의 사정을 웃으면서 이야기해 주시는데, 활을 사랑하는 사람의 희생정신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우면서도 깊은 감동을 받았다. 지금의 활터 자리는 국유림이어서 산림청에서 관리하는데 처음에 그곳에 있던 비탈을 깎아내고 가건물을 지으니 산림청에서 나와서 그것을 보고는 고발조치까지 당하여 오랜 조사기간 끝에 벌금형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자기 일도 아니고 활터의 일로 검찰에 불려 다니며 형까지 받은 것이다. 이렇게 활을 사랑하는 분들 때문에 활의 나라라는 전통이 이어져온 것이리라.
4. 목궁
인사를 나누고 잠시 기다리니 박동일 접장이 준비한 목궁 재료와 수수깡을 내놓고서는 목궁을 쓰고 만들었던 분들에게 설명을 부탁했다. 박접장의 권유로 유재수(68), 황금주(70) 두 분이 나서서 많은 설명을 해주셨다. 행수는 그 분들의 말을 받아주고 우총무는 받아적고 이건호 접장은 카메라와 비디오를 찍고 하면서 한 시간 넘게 설명이 이어졌다.
목궁으로 쓰는 나무는 물푸레나무, 뽕나무, 느릅나무, 싸리나무, 그리고 시무나무를 쓰는데, 시무나무가 탄력이 좋아서 가장 즐겨 썼다.(이 시무나무는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인데, 사투리인지 원래 이름인지는 그 나무를 볼 수 없어서 확인할 길이 없었다. 다만, 가시가 달린 나무라는 것만 알아냈다.)
만드는 방법은 겨울철에 나무를 골라서 적당한 길이로 자르고 줌통 부분은 그대로 두고 고자쪽으로 가면서 적당한 두께로 깎아낸다. 활을 휘어서 모양이 나도록 깎은 다음에 시위를 걸어서 쓰는 것이다.
화살은 수수깡으로 쓰는데 대략 45cm가량을 잘라서 끝에 대장간에서 벼린 쇠촉을 달고 오늬는 싸리나무로 깎아서 박아 쓴다. 수수깡은 열매 때문이 휘어있기 마련인데, 그것을 판판한 곳에 놓고 불인두로 눌러서 펴면 모가 생기면서 반듯한 모양으로 펴진다. 오늬나 촉을 박은 부분은 쪼개지기 쉽기 때문에 촉과 오늬가 박힌 살대 부분에는 풀솜을 감고서 콩기름이나 들기름을 발라두면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는다. 풀솜은 누에실을 뽑고 난 뒤에 남은 찌꺼기 실을 말한다. 여기에다 기름을 먹이는 것인데, 이것은 장판지에 기름 먹이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6.25 이후에는 촉을 칼빈 탄피로 쓰기도 했다.
이 수수깡 살대를 만드는 것 때문에 또 재미난 얘기가 생겼다. 수수대 화살이 좋으려면 우선 곧아야 한다. 그런데 수수가 매달리면 그 무게 때문에 목이 휘이므로 곧게 자랄 수가 없다. 그래서 활량들은 수수가 자랄 때에 수수밭으로 돌아다니면서 곧고 좋은 놈을 골라서 열매가 많이 매달리지 못하도록 끝동을 잘라낸다. 그러면 수수깡은 곧게 자란다. 그걸 보고 웬 못된 짐승이 잘라놓은 줄 알고 아낙들은 혼잣소리로 아지 못할 불평을 늘어놓는다는 것이다.
시위는 보통 쓰는 흰 실을 감아서 만들었다고 한다.
5. 활 백일장 풍경
이렇게 해서 이 목궁으로 해방 전에는 활 백일장을 열었다. 특별히 붙박이 과녁이 있는 활터가 없던 당시에는 냇가에서 모여서 백일장을 치루었다. 그런데 일제시대에는 사람들이 모일 때면 반드시 집회 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이 백일장 모임만큼은 별 제재를 가하지 않고서 허락을 해주었다. 그러면 활 백일장을 하는 주변에는 사람들이 하얗게 모여드는데, 그 모습이 마치 시골 학교 운동회 날 모이는 광경과 흡사했다. 백사장 같은 곳에서 대회가 열리면 그 주변에는 노름꾼들도 끼어들어서 노름도 하고 씨름, 윷놀이도 하고 여흥으로 신파극 같은 것도 했다.
주최측에서는 상으로 보통 황소를 걸었는데, 그 아래로 재봉틀 우산 기름 광목 같은 것을 상으로 주었다. 과녁의 크기는 요즘 거실에서 쓰는 양탄자(작은 것) 만한 솔포를 썼는데, 거리는 80발짝 정도 놓고 쏘았다. 솔대를 높이 세우고 뒤로 비스듬히 해놓고서 쏘는데, '번붙이기'를 하면 몇 차례고 다시 쏠 수 있었다. 번붙이기란 한 순을 쏘는 것을 말하는데, 번 한 번 붙이는데 비용은 쌀로 되 가옷은 주었다. 돈으로 하면 10~15전쯤이다.
백일장을 한 번 하면 보통 1주일씩 했다. 사람들이 덜 오면 날짜를 연장해서 하곤 했다. 번 붙이는 비용으로 상금을 마련하는데, 번 붙이는 숫자가 적으면 손해를 보기 때문에 일부러 날짜를 연장한 것이다. 그래서 대개 결선에서는 처음 쏜 과녁의 1/4에 해당하는 과녁을 썼는데, 그것 가지고 1등 결정이 안되면 그때부터는 주최측에서 마음대로 정한다. 그래서 어떤 때는 자기 집 대문짝을 갖다 놓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넉가래를 거꾸로 세워놓고서 시합을 하기도 했다.
6. 편사 풍속
포천 덕둔에는 모두 8개 마을이 있는데, 옛날부터 이 목궁으로 편사를 했다. 활쏘기로 마을끼리 단합을 꾀하고 친목을 도모한 것이다. 그래서 마을 별로 편사를 하는데, 편사를 하려면 그 마을의 우두머리를 뽑아서 일사분란하게 훈련을 하고 대회를 치룬다. 그 우두머리를 '편장'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우두머리의 명을 받아서 예하 사원들한테 명령을 하달하고 지휘하는, 즉 연락병에 해당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을 '사말'이라고 했다. 식사 시작을 알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대회에 임하는 것까지 마치 군사행동처럼 일사분란한 단결을 보이는데 편장의 명을 받아서 사말이 전달하는 형태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편사를 하려면 약간의 자금이 필요하고 그것을 충당하기 위해 활량들이 회비를 내어 상금으로 쓰고, 이긴 쪽에서 음식을 마련한다. 그것을 계 타온다고 하는데, 계를 가져오는 사람한테는 무한한 영광이지만 그 계를 탄 사람의 부인들은 음식 준비 때문에 죽을 맛이다. 특히나 동짓달 계는 부인들이 싫어했는데, 그 때문에 일화가 전한다.
어느 편장님이 활을 애지중지하느라고 늘 안방 아랫목에 모셔놓고 사는데, 부인과 아이들한테 이르기를, 활 깔고 앉으면 지니 활 깔고 앉지 마라는 지시를 하였다. 그 부인이 생각하기를, 계 타오면 골치 아프니 남편이 계를 타오지 못하게 하려면 그 활을 깔고 앉으면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남편이 뒷간에 간 사이에 몰래 활을 꺼내어 깔고 앉았다가 남편이 돌아오는 기척이 들리자 다시 활을 제자리에 갖다 놓았는데, 다음 날 편사에서 그 활로 동짓달 계를 타오니, 그 부인이 왈,
"저 놈의 활은 깔고 앉으면 계를 타오지 않는다고 해서 깔고 앉았는데 계를 타오니, 깔고 앉으면 계타오는 활인가부다. 절대로 활 깔고 앉지 마라."
고 했다는 것이다. 활 깔고 앉지 말라는 것이야 부러질까 봐 그런 것인데, 부인의 해석이 걸작이다.
또 최춘식 사두님의 말씀을 들으면, 1970년대까지도 동네 어른들 생일 잔치날에는 활쏘기를 했다. 보통 시골에서는 집안 어른들 생일이면 동네의 친구 어른들을 모셔다가 아침을 해드린다. 그 전날이면 내일 내 생일이니까 우리 집에 밥 먹으러 오라고 한다. 그 다음날 아침에 그 집에 가면 아침 상을 차려서 먹고는 그날 하루 종일 활쏘기를 하며 논다. 말하자면 생일기념 활쏘기 잔치인 셈이다.
7. 30년 묵은 목궁
그곳의 접장님들이 박동일 접장님의 부탁으로 미리 활을 몇 개 만들어 놓았다. 뽕나무와 물푸레 나무를 잘라서 깎아놓은 것이다. 그것을 온깍지궁사회에 주었다. 그래서 그것을 챙겼는데, 그날 주목을 끈 것은 최공진(1948년생) 접장님이 쓰던 목궁이었다. 물푸레나무로 만들었다는데, 빠짝 마르고 때가 묻었으며 색이 많이 바래서 첫눈에 보기에도 굉장히 오래 묵은 것으로 보였다. 어찌 된 거냐고 물었더니, 온깍지궁사회에서 목궁을 보러 온다고 하여 특별히 옛날에 자기가 쓰던 활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30년이 넘은 목궁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가져가도 되겠느냐고 묻자 선뜻 대답을 못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가져다가 그냥 집에 보관하는 것이 아니고 활 관련 박물관에다가 기증을 해서 기증자의 이름을 넣어서 전시를 하도록 하겠다고 하니, 최접장님도 그러면 좋다고 기꺼이 허락을 하신다. 그래서 이건호 접장이 그것을 가지고 우선 육사박물관에 접촉을 해보기로 하고 우리가 받아왔다.
8. 숙박, 그리고 신북 온천
어두워져서 식당으로 옮겼다. 밥을 먹는데도 활 이야기는 끊이지 않아 그럭저럭 얘기를 하다 보니 시계는 벌써 10시를 넘겼다. 그래서 그 밑의 여관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자정 넘어서 사두님과 박동일 접장님이 귀가하시고, 이명환 접장을 비롯하여 다섯이 남아 다시 활 얘기가 시작되었다. 자정을 넘긴 그 야밤의 주제는 이명환 접장의 활병 바로잡기였다.
이명환 접장이 그 동안 겪은 활병, 특히 요즘 깃이 손가락을 훑고 나가는 병을 얘기하자 그에 대한 설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활병 한 가지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궁체 전체를 교정하는 단계까지 나아갔다. 이명환 접장이 쓰는 활의 줌통 모양을 지적해주고 줌손 흘려쥐는 것과 비정비팔로 서는 법, 그리고 깍지손 끄는 동작이 최석규 접장의 설명으로 이어지고, 거기에다가 행수님이 힘 들이지 않고 편하게 쏘는 법까지 강의가 이어졌는데, 옆에서 우총무가 살펴보기에는 신사인 이명환 접장이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가 너무 많이 섞여 있어서 말리고 싶은 생각까지 들 지경이었다. 더구나 이접장은 아침이면 석호정 사두기 대회에 참가할 사람인 것을!
어쨌거나 활에 미친 사람들이니 말리지 못할 일. 두 시가 다 되어서야 이명환 접장이 대회 때문에 서울로 가야 한다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 두 시간 가량 들은 이야기로 충격을 많이 받은 듯했는데, 신사가 과연 얼마나 그 이야기들을 소화할지는 조심스레 두고 살펴볼 일이다.
9. 포천 떡갈비
아침에 일어나니 박동일 접장님이 다시 오셨다. 그 동안 제일 먼저 일어난 최석규 접장이 사우나를 마쳤고, 행수와 우총무는 8시 경에 늦잠자고 일어나 지하의 사우나로 내려갔고, 이건호 접장은 전날 운전의 피로를 이기지 못하여 사우나를 포기하고 잠으로 때웠다.
저녁을 먹은 집으로 다시 가서 아침을 먹고 대군정에 올라가서 활을 몇 순 내니 사두님이 올라오셨다. 사두님한테 대장간에서 촉 벼리는 것과 나머지 목궁 만드는 것을 부탁을 하고 12시 경에 출발했다.
포천을 지나오니 오후 1시, 포천 막걸리와 함께 유명한 갈비를 먹어보자고 하여 떡갈비라는 이름이 붙은 곳을 찾아들어갔다. 넷이 자리에 앉았는데 일하는 아가씨가 와가지고는 '3인분 드릴까요?'한다. 행수님이 그 얘기를 듣고는 "누구 쌈 시킬 일 있는겨?" 했는데, 억센 부산사투리를 알아들을 길이 없는 그 아가씨. 허락으로 알고 일어나서 갈비를 가져오는데, 3인분 가지고는 안된다고 한 행수님의 우려가 틀린 것을 증명하기 위함일까? 3인분인데도 넷이서 먹다가 남길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그 아가씨가 행수님 말을 못 알아들은 게 다행이지. 양이 그렇게 많으면서도 맛이 또한 좋다. 이걸로 보면 '떡갈비'의 <떡>은 먹는 떡이 아니라 '떡 벌어지게 차린' 그 <떡>이 분명하렷다!
10. 노래방?
하행선 이천 휴게소에서 이건호 접장과 이별하고 우리는 청주로 왔다. 청주 우암정에서 저녁을 먹고, 행수가 오는 내내 예고한 대로 노래방을 가기로 했는데, 거기에 불행하게도 덜미 잡힌 사람이 이태호 접장이었다. 그래서 넷이서 노래방에 가서 못하는 노래를 하며 광란의 밤을 보내니 11시경. 행수님이 굳이 열차 타고 가시겠다고 우겨서 조치원 역으로 직행. 새벽 1시 5분차를 끊었는데, 시간이 남아서 피시방에 들어가서 온깍지궁사회 홈페이지를 여니 이건호 접장은 벌써 어제 찍은 비디오를 시디롬에 담았다는 연락이 올라와있다.
즐거우면서도 우리 겨레의 뿌리를 찾아가는 뜻 깊은 답사. 온깍지궁사회의 힘!
11. 뒷이야기
움직이는 데는 반드시 경비 문제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 점을 온깍지궁사회에서는 당사자 스스로 해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여윳돈이 생기면 그 돈 때문에 회원들 간에 불화가 생기는 것을 익히 아는 까닭이다. 그래서 당사자들이 걷어서 그 자리에서 다 써 버리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런데 대책없이 후원하는 분들이 있어서 우리를 망연자실한 감동(?)으로 몰아넣곤 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장영학 충북궁도협회 부회장이 길 떠나는 우리의 주머니에 봉투를 억지로 밀어넣었고, 또 황학정의 성순경 접장님이 통장으로 돈을 보내셨으니, 이를 어쩌란 말인가? 하여간에 그 덕에 행장이 한결 가벼워져서 좋았지만, 마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으니, 오오! 돈이여! 돈이여! 어쨌든 이 자리를 빌어 두 분께 고맙다는 말 전한다.
포천에 갔다 온 뒤에 이석희 행수는 몸살을 앓았다. 평소 기관지가 안 좋은 편이었는데, 남한의 극과 극을 한 번 왕복한 피로가 겹쳐서 드디어는 활터에도 못 올라가고 앓아누운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우총무한테 전화를 걸어서 그 뒤의 경과를 확인하고 새로운 제안을 하기에 이르렀다.
새 제안이란, 포천 지역의 어른들이 옛날에 양구 지역 사람들과 목궁으로 편사 교류도 하고 활 백일장도 했으니, 목궁 백일장을 한 번 추진해 보자는 것이었다. 전통을 살리는 측면에서 이것은 아주 굉장히 중요한 제안이다. 그리고 얼마든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현재 온깍지궁사회의 구상이지만, 좀더 계획을 면밀하게 짠 다음에, 포천 지역의 구사분들과 상의하여 그 일을 추진하고, 또 그 지역 지방자치단체의 후원을 받는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현실화되기만 한다면 우리는 아주 훌륭한 문화유산을 계승하는 일이 된다.
최공진 접장님이 쓰던 40년 가까이 되었다는 그 물푸레나무 목궁은 이건호 접장이 육군박물관 측과 접촉해본 결과 육사에서 아주 반색을 하고 반가워 하였다는 소식이다. 육군박물관의 소장품 중에는 그렇잖아도 목궁 부문이 취약해서 고민을 하고 있던 차에 아주 잘 되었다며 언제든지 가져오라는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 또한 예상 밖으로 좋은 결과였다. 온깍지궁사회의 활 사랑이 바람직한 결과를 향해 나아가는 좋은 징조이다.
포천에 다녀와서 답사기를 정리할 무렵에 박동일 접장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즉슨, 그 날 이야기를 해주신 분들이 내용을 틀리게 말한 곳이 두 군데 있다는 것. 편사에서 우두머리를 접장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편장>이라고 했다는 것과 활 백일장 과녁거리가 70보가 아니라 80보라는 것이다. 인터뷰할 당시에는 접장과 70보라고 했는데, 박동일 접장이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두루두루 확인해 본 결과 편장과 80보가 맞다는 것이다. 인터뷰할 때 그 분들이 잠시 착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그 기록에 맞도록 고쳤다.
12. 목궁, 육사 박물관으로
2001년 6월 7일(목요일). 온깍지궁사회에서 추진한 포천 목궁이 드디어 육군 박물관에 들어갔다. 그 목궁은 포천 대군정의 최공진 접장님이 1960년대에 쓰던 것인데, 온깍지 궁사회에서 지난 사월 포천 목궁을 취재하러 갔다가 육사박물관에 기증하는 게 어떻겠냐고 의견을 냈고, 목궁 주인인 최공진 접장님이 기꺼이 허락해서 온깍지궁사회에서 가져왔는데, 그것이 이번에 성사된 것이다.
평소 김기훈 박물관장과 친분이 있던 이건호 접장의 주선으로 기증식까지 하게 되었다. 기증식에는 이석희 행수님과 이건호(울진 칠보정), 성순경(서울 황학정), 윤영이(서울 수락정), 이명환(서울 수락정), 박동일(연천 학소정) 주비(서울 공항정), 김만두(덕양정) 접장이 참석했고, 포천에서는 기증자인 최공진 접장님과 대군정의 여러 접장님들(최춘식, 황금주, 김남석, 박영빈)이 함께 나오셔서 김기훈 박물관장님의 안내를 받았다. 이외에도 육사의 강신엽 연구사님과 이관우 중령님이 준비를 해주셨고 이건호 접장의 부인 최순요 여사와 아이들(수영, 원영)이 자리를 같이 했다. 기증식이 끝나고 이 귀한 손님들은 화랑정에 가서 습사도 하고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이렇게 해서 온깍지궁사회에서 추진한 목궁 박물관 기증이 마무리되었다.
김기훈 박물관장이 최공진 접장에게 기증서를 주는 모습
식이 끝나고 열린 좌담회
화랑정에서 목궁 발시법을 설명하는 최공진 접장
<정리: 우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