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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 덕유정의 역사와 풍속
답사지역: 충남 강경 덕유정
답사기간: 2001년 6월 24일
참가자: 조영석, 이석희, 설동룡, 이건호, 정진명, 김기선, 장창민
1. 한영국 접장, 접장(?)
활쏘는 사람을 대접해주려면 접장이라고 불러야 하는데, 한영국 접장이라고 하면, 참 난처한 일이 생긴다. 강경 덕유정에서는 사두나 부사두라는 말 대신에 '사백'과 '접장'이라는 말을 쓰기 때문에 대접해주겠다고 접장이라고 불러준다면 부사두 대접을 해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온깍지궁사회가 덕유정을 방문하는 이유가 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인터넷에 접속하는 방법을 배운 지 4개월 남짓 된 한영국이라는 분이 국궁신문에 의미심장한 기록을 남겼다. 말인 즉슨, 덕유정은 역사가 한 200년 되었다는데, 그 정의 사계좌목과 당시의 사정 현황을 자세히 기록한 것이 보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건호 접장은 그 내용을 즉시 확인하여 자료를 넘겨받아서 사이버궁도장의 홈페이지에 소개하였다.
그리고 그 바톤이 온깍지궁사회로 넘어왔다. 즉, 이러한 중요한 자료가 있으니 그곳을 한 번 방문해서 조사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논의로 압축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한영국 접장의 뒷이야기 때문이었다. 즉 사정에는 사계좌목이 있는데, 논산시 문화원의 주관으로 인근의 대학에 의뢰해서 번역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활터 풍속의 보고가 활량들의 손을 떠나서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아주 중요한 내용이다. 그래서 온깍지궁사회의 홈페이지에 그러한 뜻을 올리고 참여할 수 있는 회원들은 참여하라고 공개하였다.
인터넷 왕초보 한영국 접장의 열정이 오늘의 이러한 성과를 올리는 계기를 만들었으니, 생각하면 국궁 사랑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주변의 것에 관한 관심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다.
2. 각지의 무사들, 강경으로 모이다.
이석희 행수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23일(토) 청주로 왔는데, 원래 계획은 청주에서 모여서 하루 저녁 활쏘며 놀고 그 다음날 덕유정으로 가자고 한 것인데, 이건호 접장은 공주에 숙부님이 사신다고 하여 그리로 먼저 가고, 조교장님은 당일날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오기로 하였다. 그래서 행수님이 먼저 청주로 이동한 것이다.
일요일 아침 10시, 청주에서 일박한 행수님이 제일 먼저 우암정으로 올라오고, 활터의 주인장인 우총무와 김기선 장창민 세 접장은 느즈막히 올라와서 주객이 뒤바뀐 상황으로 청주를 출발했다. 장마비가 내리는 중이었다. 논산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빠져나와서 강경 쪽으로 가다보니 설동룡 접장이 먼저 와서 마중나온다는 연락이 왔다. 아니! 설접장이?
알고 보니 설접장의 고향이 강경이고 선친(薛泰洙)은 덕유정의 접장을 지낸 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온깍지궁사회에서 덕유정에 간다고 하니 모든 일을 제쳐두고 한 달음에 고향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그러니 고향을 방문하는 회원들에게 길안내를 나선 것.
장마는 올라오고 우리는 내려갔으니 덕유정에 도착했을 때는 장마비가 장대처럼 쏟아졌다. 이건호 접장은 온 가족을 끌고 이미 도착했고, 광주의 조교장님도 이미 도착했으니, 결국 청주 일행이 꼴찌로 도착한 것이었다. 예정 시간 12시를 40분 초과하였고 먼저 도착한 분들은 사계 좌목을 펼쳐놓고 구경을 하는 중이었다.
원래 사계 좌목은 논산시 문화원에서 가져가서 전문가인 교수들에게 번역을 의뢰한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가 갈 때만 해도 볼 수 없다는 답을 받았다. 그런데 문화원에 몇 차례 얘기해서 결국은 볼 수 있도록 회수한 것이니, 이렇게까지 정성을 들여 손님을 맞이하는 분들에게 우리 일행은 그저 송구스러울 따름이었다. 서둘러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덕유회관이라는 현판이 걸린 건물 안에서 덕유정의 역사와 풍속에 관한 대담을 하였다. 이건호 접장과 김기선 접장이 비디오를 켜놓고서 중간중간에 사진을 찍으며 진행을 하니 분위기가 한껏 진지하고 엄숙해졌다. 활터의 유구한 역사가 세상에 그 진면목을 처음으로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정접장이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것을 이준구 고문, 한영철 사백, 최양웅 접장, 그리고 한영국이 번갈아 가며 대답을 하는 형식이었다.
3.덕유정의 운영체계
흔히 활터에서는 우두머리를 사두라고 한다. 그리고 전라도 지역 일원에서는 '사장'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지 30년 쯤 되는 '사수'라는 말도 있었다. 그런데 이곳 덕유정에서는 특이하게도 '사백'이라고 하는 것이다. 활터의 풍속이 지금은 대한궁도협회의 관리하에 지방에 따른 특성을 잃어버리고 획일화하였지만 옛날에는 아주 다양한 풍속으로 퍼져있었다는 아주 중요한 징표이기 때문에 이것은 활의 풍속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띤다.
특이한 것은 이 뿐이 아니다. 전국의 활터가 대부분 현대성과 실용성을 강조하여 옛것을 버리고 현대화하여 총무니 이사니 하는 명칭으로 바뀌었는데도 덕유정에는 모든 명칭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부사두를 접장이라고 하고, 정의 살림을 맡는 사람을 '권무'라고 하며, 일반 사원을 공원(公員)이라고 한다.
신사가 입회하려면 2인 이상의 추천을 받는데, 입사한 후에도 6개월 동안 유예 기간을 두어서 살펴본 뒤에 입회 여부를 이사회에서 결정한다. 옛날에는 지체있는 분들이 활을 쏘았기 때문에 덕유정 주민들은 활을 쏘라는 말을 들으면 '내 주제에 어떻게 활을 쏘겠는가'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고 한다. 한영국 접장의 경우에도 그렇게 생각을 했다고 한다. 장무라는 것도 있는데,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다. 장무는 활을 배운 초년생을 말한다.
사백은 옛날에는 두 명을 추대해서 그 중에서 총회에서 뽑았는데, 1970년대 들어서 한 명만 추대해서 뽑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추대는 이사회에서 한다. 이런 엄정한 절차를 거쳐서 뽑힌 사백이기 때문에 사백의 권위는 그야말로 법 그 자체였다고 한다. 사백의 한 마디면 활터에서 그날로 쫓겨날 수도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셈이다. 그런 만큼 사백은 덕을 갖춘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권위를 나타내주는 물건이 바로 용방망이(龍椎)이다.
이것은 사원들을 징계할 때 쓰는 일종의 매인데, 아픔보다는 그 상징성을 나타내기 위한 물건이다. 그래서 소리가 잘 나라고 그 바닥쪽은 홈을 파서 때리는 순간 공기가 압축되면서 소리를 내게 되어있다. 빨래방망이보다 조금 더 작은데, 용 무늬를 파놓아서 그모양도 아주 멋을 부렸다.
그런데 이런 직함이 문제가 되는 것은, 평상시에 활터에서 부르는 호칭 때문이다. 활터에서는 보통 활량을 대접해주는 뜻에서 접장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접장이 부사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니 사원끼리 부를 때는 접장이라는 경어를 쓰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도 호칭을 부를 때는 접장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무호를 만들어서 쓰는 슬기를 발휘했다. 그래서 덕유정 사원들은 모두 호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정에서 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성씨를 붙여서 김무사, 이무사라고 부르거나 그냥 접장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무호를 부르는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 생긴 풍속이라고 이준구 원로 사백이 고증한다. 그 전에는 활터에 올라온 사람들이 일정한 벼슬을 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벼슬에 해당하는 관직명을 불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에 그런 직함이 사라지면서 호칭에 대한 문제가 불거진 것이고, 그것을 무호로 해결한 것이다. 아주 재미있고 슬기로운 판단이 적용된 경우이다.
재미있는 것은 '앉은 사원'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앉은 사원은 활은 쏘지 않으면서도 활터에 나와서 회비를 내고 하여 회원 자격을 유지하는 사람을 말한다. 요즘으로 치면 명예회원이나 뭐 이쯤 될텐데, 그것을 앉은 사원이라고 하는 아주 재미있는 말로 쓰는 것이 관심을 끌었다.
4. 점심, 그리고 강경
대담을 끝냈을 때는 1시가 훌떡 넘어버렸다.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재촉이 성화같다. 온깍지궁사회에서 방문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미리 식당에 예약을 해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빗속을 뚫고 삼삼오오 차를 탔는데, 식당은 강가에 바짝 붙은 '돌산아구'라는 집이었다. 그런데 빗줄기가 주룩주룩 쏟아지는 식당 입구에서 정장을 한 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한병수 강경읍장과 정현수 강경읍번영회장이었다.
얼떨결에 인사를 하고 식당에 들어가서 얘기를 들으니, 전국 각지에서 손님들이 강경의 문화재인 활터를 방문한다는 얘기를 듣고 일요일 날인데도 인사를 나온 것이었다. 이런 황송할 데가! 지역을 사랑하는 마음이 와닿았다. 휴일에 그렇게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식당에는 매운탕이 차렸는데, 소개를 받고 보니 그 음식이 강경을 대표하는 토속 음식이었다. 다름 아니고, 강경은 황복이 유명했는데, 황복과 아구로 끓인 매운탕이 나온 것이다. 역시 맛은 일품이었다. 바닷가 부산에 사는 이석희 행수와 설동룡 접장한테 품평을 해보라고 하니 아주 뛰어난 맛이라고 칭찬한다.
그 자리에서 강경에 대한 역사가 술술 풀려나왔다. 강경은 금강 하구에 있는 동네로 충청도와 전라도의 산물이 빠져나가는 포구였기 때문에 철도가 놓이기 전은 물론 해방 전까지만 해도 충청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고 한다. 한꺼번에 100척의 배가 들어왔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도 하다. 대전과 똑같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충남 최초로 우체국이 들어섰으며 일본인과 화교들이 몰려들어서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한다. 당시 정착 인구가 3만, 유동인구가 10만이었다니.
이렇다 보니 물산이 풍부해서 부자들이 활을 쏘았고, 그 유풍으로 1970년대 초까지 기생들 호창을 하며 활을 쏘았다고 한다.
그런데 대전은 광역시가 되었고, 강경은 아직도 읍이며 옛 건물들이 남아서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찍으러 종종 사람들이 내려온다고 한다. 그래서 관광 도읍으로 새로이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고 바로 그런 관심이 이 지역을 찾은 각지의 온깍지궁사회 회원들을 놓치지 않는 면밀함을 보인 것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점심을 먹는데, 막바지에 무슨 무침이 나온다. 강경의 명물 우어회라고 한다. 먹어보니 비릿한 내음이 전혀 없고 입에서 살살 녹는다. 이 우어는 성질이 급해서 잡히자마자 죽기 때문에 회로 먹기 어려운 고기라고 한다. 그래서 잡자마자 냉동을 시킨다는 것이다. 그 귀한 음식을 우리를 위해 내놓은 것이다. 아! 감동, 또 감동! 이 우어는 보리가 패기 전에 먹어야 제 맛이 나는데 이 날이 6월이기 때문에 많이 늦어져서 맛이 좀 떨어진다고 하는데도 우리의 입에서는 혓바닥이 놀래 자빠지고 있었으니, 말해 무엇하리. 활터가 아니라 회맛을 조사하러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숟가락을 놓는 손끝으로 잠시 스쳐갔다.
이날 점심을 함께 한 사람들은 위의 두 분 외에도 이준구 원로사백, 한영철 사백, 최양웅 접장, 박명식 사범, 김춘억, 이한구, 한광수, 김선원 공원과 이건호 접장의 식구들을 포함은 온깍지궁사회 회원들이었고, 또 신도정의 변현태 부사두도 자리를 함께 했다.
5. 덕유정의 숨결
다시 활터로 돌아왔다. 이제는 활터 곳곳에 있는 옛 정취를 맡을 순서였다.
덕유정은, 건물이 모두 네 채이다. 덕유정 본 건물이 설자리 바로 뒤에 있고, 그 옆에 동쪽으로 바짝 붙어서 관해루(觀海樓)가 있다. 이것은 기둥을 교체해서 새 집처럼 보이지만, 가장 오래된 건물로 200년이 되었다. 관해루란,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누각이라는 뜻인데, 말 그대로 방향이 강쪽으로 향하고 있다. 옛날에는 활을 강쪽으로 쏘았다는 말이 전해온다는데, 그러니까 덕유정 건물이 들어서기 전에는 그 관해루 앞에서 강쪽으로 쏜 것이 분명하다. 관해루 바로 옆에 팽나무가 한 그루 서있는데, 그 건물을 지으면서 심은 나무로 지금은 아름드리 두세 폭은 되는 거목이 되어 건물 지붕을 덮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덕유정 건물 뒷편에 100년쯤 되어 보이는 팽나무가 서있는데, 2미터쯤 되는 지점에 옹이가 생겼고, 그 옹이는 썩어서 웅덩이처럼 패였는데, 그곳에 향나무 한 그루가 자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향나무는 한 10년쯤 되었다고 한다. 팽나무의 둥치 구멍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희한한 명물이어서 다들 웃었다.
덕유정에서 왼쪽 약간 앞쪽으로 이층짜리 건물을 지었고, 그 앞쪽으로 옛날에 살림집으로 쓰던 집이 있는데, 지붕이 얇은 돌로 덮였다. 이 또한 묵은 냄새와 함께 한 풍물이 된다.
덕유정 건물은 모두 다섯 칸 집인데, 정면 안쪽에 정간이 걸려있고 그 위로 역대 사백의 사진과 상장, 그리고 활터 사진이 나란히 걸려있다. 그리고 오른쪽에 옛날 궁방이 한 칸을 차지 하고 있는데 바로 그 궁방 문 바로 윗에 조그만 미닫이 문이 달려있다. 그리고 그 옆에 선생안이라고 쓰여있다. 역대 사백과 접장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다.
매년 백중날(7. 15)이 되면 제상을 차려 선생안을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이때는 지금의 사원은 물론 선생안에 오른 분들의 자손들이 모두 와서 제사를 모신다고 한다. 이런 것이 바로 활터의 면면한 역사와 숨결을 유지해가는 진면목인 것이다.
덕유정 안의 대들보에는 액자로 사면이 가득 차 있다. 역대 임원들의 명단을 임기가 끝날 때마다 널에 새겨서 기념하는 것들이다. 건물은 비록 낡아가지만, 그것이 세월과 역사의 무게를 더해가는, 그래서 조상들의 숨결을 느끼게 해주는 산 목소리가 된다.
한영국 접장의 안내로 구석구석 자세하게 안내를 받은 뒤에,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다시 활 얘기였다. 그래서 몇몇은 쏟아지는 빗속에서 활을 쏘며 사법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이건호 접장과 김기선 두 접장은 좌목과 활터, 그리고 역사 자료가 될 만한 것을 카메라에 담고 찍고 하느라고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건호 접장의 카메라 밑으로 뻔질 드나드는 좌목의 목차와 내용을 곁눈질하며 보는데, 명단 위에 거의가 다 '仙'이라고 쓰여있다. 선? 신선 선짜인데, 이게 뭘까를 곰곰히 생각하다가 혹시 성락인 선생이 말씀하신 죽은 사람을 표하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황학정에서는 사원이 죽으면 좌목의 명단 위에 '入山'이라고 표했다고 하셨다. 이 '入山'을 바짝 붙여서 쓰면 '仙'과 비슷해 보이지 않는가? 아니면 활쏘던 사람들이니 죽으면 신선이 된다는 뜻의 도교식 표현일까? 모를 일이다.
6.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지난 시절의 한 컷
옛날에는 강경의 중심이 활터였고, 오가는 손님 접대 또한 관청보다는 활터에서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지체높은 사람들이 활터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덕유정 건물에는 사백 이외에는 아무나 오를 수가 없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지체에 따라서 그 아래로 주욱 마당까지 섰다고 한다.
우리가 덕유정 섬돌에 발을 올려놓고 마루에 걸터 앉아서 얘기꽃을 피우는데 그곳 사원들이 설명한 내용이다. 그러니 우리는 외람되게도 사백의 지위에 앉아서 노닥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섬돌 옆 기둥이 서있는 마루 부분을 가리키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마루바닥이 약간 주저앉았다. 전통 한옥은 말루를 지을 때 밑에 나무를 대고 송판에다 못질을 한 것이 아니라 못은 한 개도 쓰지 않고 나무에 홈을 파서 그 홈으로 송판을 집어넣어서 끼워맞추는 방식으로 짓는다. 그런데 끼워맞춘 부분의 아귀가 깎여나간 것이다. 끼여있는 송판두 쪽을 드러낸 자취이다. 뭐냐고 물으니, 그 사연을 얘기하는데, 기가 막힌 이야기이다. 옛날에 어떤 백정이 사정을 잘 모르고 그 자리에 걸터 앉았는데 그것을 보고는 도끼로 그 자리를 찍어냈다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 앉았던 백정은 말해 무엇하랴! 그 설명을 들으며, 말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 가슴을 꽉 막히게 했다. 그 정체가 무엇일까? 지금도 분명치 않다.
백정이 잠시 걸터 앉았다고 마루장을 도끼로 찍어낸 것. 신분제 사회의 질곡이 묘한 방식으로 드러난 것이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런 행위를 용납키 어렵거니와, 그렇다고 도끼를 들었던 분들의 머릿속에 들어있었을 그 세계를 지금의 잣대로 쉽게 평가해버리기에는 석연치 못한 구석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냥지금 우리 생각으로는 꾸짖어도 될 법한데, 도끼를 들었다는 것은 그 당시 선비들의 준엄한 정신을 엿보아야 할 대목일까? 아니면 신분의 폭력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몰지각한 판단으로 이해해야 할까? 돌아오는 동안 내내, 아니 지금까지도 언뜻 결정하지 못할 아주 묘한 일이었으니! 아, 역사는 그것을 읽는 자한테도 시련을 요구하는 것이리라.
7.홈페이지의 성격과 사법 논쟁
일이 거의 끝나갈 무렵, 조교장이 우총무에게 사법에 관해 물었다. 홈페이지에 올라있는 사법에 관한 글이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즉 홈지기가 정리한 사법과 조교장이 정리한 사법이 서로 모순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서 그 홈을 찾는 사람들이 큰 혼동을 일으키니 어느 한쪽으로 정리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이때 어느 한쪽이란 물론 교장을 맡고 있는 조영석 명궁의 이론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온깍지궁사회의 공식 견해를 나타내야 할 자리라면 응당 내부 논의를 거쳐서 어느 한쪽으로 견해를 밝혀야겠지만, 홈페이지의 성격 때문에 우총무의 견해는 이와 달랐다. 홈페이지란, 이미 결정된 의견을 공표하는 자리가 아니고 누구든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자기의 견해를 내놓고 그를 토대로 새로운 이론을 정립할 수 있는 <열린> 통신수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틀린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계속하여 일관되게 주장을 하면 그것을 수용하여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 비판을 기다리도록 자리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홈을 운영하는 사람의 기본 자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온깍지궁사회 홈페이지에는 조교장의 사법 이론 이외에도 "사법광장" 난에 최석규, 심동석, 장창민의 글을 따로 마련하여 올린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두 가지 견해로 압축되었다. 조교장은 자신의 명석한 이론이 뒷받침하는 사법으로 온깍지궁사회의 공식 견해로 결정하자는 것이고, 우총무는 조교장의 이론이 탁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온깍지궁사회의 모임 취지가 전통을 널리 찾아서 정리하는 것이니 사법 또한 어떤 사법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전통을 잴 것이 아니라 널리 수집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통해서 얻어진 일정한 결론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전통을 보는 시각의 차이가 빚은 논쟁이었다. 조교장의 사법은 분명 전통 사법이지만, "조선의 궁술"에 나오는 사법을 불완전한 것으로 보고 그것을 비판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고, 우총무는 조교장의 이론이 "조선의 궁술"을 바탕으로 하고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성과를 바탕으로 새롭게 한 단계 더 나아간 사법이기 때문에 그 시각으로 재단하여 부인하면 큰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다. 조교장이 "조선의 사법"의 불완전성과 비효율성을 지적한 반면, 우총무는 설령 "조선의 궁술"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간 사람의 시각으로 보기에 다소 부족하고 불완전하더라도 우리 전통 사법의 정통인 것은 부인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일단 그 출발점인 "조선의 궁술"과 그 당시의 세계관을 지녔던 사람들의 사법을 찾아서 그것을 분명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법의 이론은 한 가지이지만, 사법은 사람마다 한 가지씩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구나 신사 때 배웠던 자세를 토대로 습사해가면서 스스로 터득한 것을 추가하여 자기만의 사법을 완성해가는 것이다. 따라서 사법의 이론은 한 가지이지만 사법은 사람마다 한 가지씩 다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사법을 기준으로 그 사법의 출발점을 삼은 선배들의 사법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그것의 효율성을 따져서 우수성을 비교할 수는 있지만, 옛부터 내려온 어떤 모형 자체을 부인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온깍지궁사회가 해야 할 일은 현재의 사법으로 예전의 사법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의 구사들로부터 사법을 채록하고 정리하여 옛모습 그대로 후손에게 물려주려는 것이다. 조교장은 이미 달인의 경지에 이른 위치에서 옛 사법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것을 극복하자는 방향으로 논지를 전개한 것이고, 우총무는 개인의 성취 수준과 관계없이 옛 사람들이 취했던 기본 자세를 채록하고 정리하여 올바르게 보존하자는 방향으로 논지를 전개한 것이다. 그 뜻깊은 논의가 유서 깊은 덕유정에서 이루어졌으니, 이 또한 우리 선배들의 영령이 굽어살피심인가!
시간이 없어서 어떤 결론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아주 큰 보람이 없지 않았다. 조교장은 자신의 사법이 "조선의 궁술"에 바탕을 하고 있지만,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 훌륭한 사법이라는 것을 확인하였고, 우총무는 온깍지궁사회 홈페이지의 성격에 비추어 사법 또한 전통에 촛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을 조교장에게 피력한 계기가 되었다. 이 논의는 앞으로 계속 이어져서 국궁의 발전에 바람직한 효과를 내도록 전국의 회원들께서도 관심을 갖고 고민해야 할 것이다.
8.마치고!
답사를 마쳤다.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 모두들 아쉽다. 갈 길은 멀고. 부산, 울진, 광주, 청주로 떠나야 한다. 정말 전국에서 다 모였다. 이것이 온깍지궁사회의 정성이자 힘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니 덕유정 사원들은 정말 아쉬워 한다. 특히 비 때문에 활을 쏘지 못해서 정말 아쉽다. 활을 쏘았다면 틀림없이 그 유명한 '똑띡이'를 했을 것인데..... 똑띡이란, 편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돈을 걸어놓고서 시합으로 그것을 챙기는 일종의 전사인데, 그 역시 유구한 활쏘기 풍속이다. 그것을 실연해 보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천상 다시 오는 수밖에.
조교장하고 우총무는 사법 논쟁 때문에 남들이 다 정리하고 일어서서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서로 얼굴을 맞대고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이석희 행수가 우리 먼저 떠난다고 끼어드는 바람에 이야기기 멎었다. 언제 만나도 뜨거운 한량들, 그리고 언제나 아쉬운 온깍지 답사!
9. 뒷이야기
강경 덕유정을 답사한 이야기를 정리해서 올렸더니, 다음과 같은 글이 올라왔다. 새삼 활의 역사와 숨결이 느껴지는 글이어서 여기에 소개할까 한다. 청주 우암정의 장창민 접장이 2001년 4월 27일날 응접실에 올린 글이다.
답사일지 잘 읽었습니다.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면 보이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는 옛 어른의 말씀이 실감나는 답사였습니다. 우총무님의 열정이 조상의 숨결을 더욱 가슴 가까이 와 닫게 합니다. 제 생각도 조금 보태겠습니다.
과녁의 주변이 화살의 위험성에 대한 주민들의 민원으로 높게 담장이 둘러있고 가까이 아파트단지의 건설이 예정되어 있어 걱정이라는 말씀과 전국대회를 열 수 있는 정의 부지를 매입하였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정의 존립이 걱정되었습니다. 정에서 활을 낼 수 없다면 이미 그 정은 생명이 다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건물만 보존된다면 이미 박물관에 들어선 역사의 잔해에 불과할 뿐이지요. 전통은 생활 속에 녹아있어야 진정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곳 분들도 그래서 걱정을 하시는 것이지요.
주변의 땅이 정의 소유이기는 하지만 민원을 잠재울 만큼 충분치 않으므로 문화보호차원에서 국가적인 지원이 있어야겠고 우선은 과녁주변과 현재의 경계를 따라서 나무를 심는 다면 보기도 좋고 민원도 예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정에 한가득 걸려 있는 역사적인 유물에 감동을 받으면서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도난과 화재등으로 이것이 훼손된다면--- 200여년을 지켜오신 덕유정의 사원님들의 정신에 상처 입히고 역사적인 보물의 손실은 생각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합니다. 이것은 당장이라도 방법을 강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국가나 대궁이 나서야 할 일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화재에 안전한 부속건물을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모든 것은 그 자리에 있어야 하지만 워낙에 보물인지라 어찌할 도리가 없지요.
그리고 체계적인 정리와 설명이 곁들여 진다면 뜻 있고 효율적인 역사교육의 장으로 화려하게 부상할 것입니다. 활에 관한 수 천년의 역사를 책에서만 보아왔고 양궁의 세계제패로 우리의 활을 자랑할 뿐인 현실입니다. 덕유정은 수 천년의 역사에 세계적인 격동기와 민족최대의 고난이 있던 이백여년을 당당히 버텨온 살아있는 증거를 가지고 우리 앞에 있는 것입니다. 국궁을 하는 사람으로 민족의 일원으로 숙연해지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제가 다녀본 어느 정에도 대문은 없었고 담장도 높지 않았지요. 덕유정은 거기에 사대위를 오래된 등나무가 덮었고 그 뒤에 아담하고 고풍스러운 정과 팽나무 고목이 조화의 극을 이루었습니다. 고목들의 그늘 아래 넓은 뒤뜰! 장마비를 맞으며 장중하게 버티고 있는 정과 고목들! 저는 한동안 끊었던 담배를 물고야 말았습니다.
덕유정에서는 봄,가을에 주변에 있는 정들과 칠정 혹든 구정대회라는 이름으로 편사를 오랫동안 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충분한 참가비를 정에서 지원함에도( 덕유정은 아주 부자임) 전국대회의 참가회수는 많지 않다고 합니다. 장단점이야 있겠지만 명성에 치우치는 현세태를 보면 덕유정의 당당한 뱃심이겠지요. 그리고 지역의 발전을 위해 고민하고 화합하는 사우님들을 보았습니다. 국궁인만의 사회가 아니라 널리 열려 있는 정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활의 전통과 풍속이리라 생각하며 한없이 부러웠습니다.
강경 덕유정 만세! 국궁 만세!
<정리: 우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