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이 만주에서 몇년 마적단 꼬붕으로 활동한 경력을 내세워 독립운동했다고 사기치며 우려먹는 것에 비하면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은 별로 한국인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외교로 미국 대통령을 움직여 우리민족을 독립시키도록 하신 어른이 바로 이승만 박사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한국인이 이토록 독립운동사에 무지하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스런 일이다. 그러나 1958년에 이승만 박사의 구국 항일운동이 잠시 국민에게 영상물로 소개된 적이 있었다.
요즘, 영국에서는 영국 여왕 80회 탄신일 기념 경축 국가 행사가 한창인데, 우리나라에서도 1958년에 국가원수 82회 탄신일을 경축하는 행사가 베풀어졌었다. 그때 우남 전시회와 연극 공연으로 그의 독립운동 활동이 잠시 소개되었었다. 이승만 박사의 항일 독립운동을 10가지만 추린다면 대략 이러한데, 우남전시회에서 희귀한 사진들이 공개되었을 것이다.
한국의 개화와 구국 및 독립운동을 영도(1898-1945) a. <매일신문> <제국신문> 을 창간하여 개화의 선봉이 되다(1898) b.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를 개회하여 구국운동을 주도 c. 구국의 밀사로 미국에서 활동하다 독립운동을 영도 d.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1919-1925) e. 와싱턴 D.C.에 집정관총재부와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독립공채를 발행 f. 한인기독교회(KCC)와 기독학원(KCI)을 설립하고 대한인동지회를 결성하여 홍보와 외교를 통한 합법적인 한국독립운동을 영도(1918-1945) g.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에 대한 한국독립외교를 추진 h. 영문저서 <Japan Inside Out>를 발간 (1941) i.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승인 외교 j. 한국인의 대일참전 외교 (한국인특무부대를 조직)
이런 귀중한 사료 보존에는 선교사들의 도움도 컸다. 지금은 일본의 독도 침략에도 민감하지만 구한말 시대에는 일본의 점차적인 침략에 사람들이 무관심했었는데, 바로 그 시절 청년 이승만은 민족을 깨우치며 항일 구국운동의 선봉에 섰다가 당국의 탄압으로 7년간의 옥살이를 했는데, 그 시절의 청년 이승만의 사진도 언더우드 선교사의 카메라에 찍혀 보존된 듯하다.
우리 민족 독립에는 선교사들의 도움도 컸다. 지금 티벳이 반세기가 넘도록 독립운동하고 있지만 국제사회가 티베트의 역사를 모르기에 티베트의 독립 성취는 요원하기만 하다. 그런데, 일제 시대에 우리나라 영토가 일본 영토로 세계지도에 표기되어 있었을 때 선교사들은 줄곧 우리나라를 Korea 혹은 Chosun 으로 표기하고 부르며, 우리 민족의 실체를 세계에 알렸으며, 이렇게 산교사들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일본인과 구분하여 국제사회에 알린 것이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 때 국제사회가 우리 민족의 독립을 약속해 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958년에 연극으로 소개된 위 영상물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감옥을 자주 방문하여 책을 넣어주며, 격려하다가 미국으로 일단 피신하여 해외에서 구국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장면을 비쳐준다. 아직 한국에 TV가 없던 1958년에 제작된 사극은 오늘날의 화려한 사극에 비할 바 되지 못하나, 그럼에도 구한말의 우리나라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영상물이다.
대한뉴스가 제작하였던 이 뉴스 영상물에 담긴 내용들:-우남전시회, 대통령의 기록 사진 전시 -시립극장, 연극(대통령의 독립운동을 주제로 함) -한국의 밤(한국 주재 외인들을 대상으로 공연) -불꽃 놀이 우남 이승만 박사의 항일 구국운동에 관한 추가 사료와 자료들 몇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