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동갑이라서 족보를 따져보았더니 공교롭게도 국민학교 동창이었다. 그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국민학교 때
기억이 많이 떠올랐다. 내가 다녔던 청구국민학교와 길 건너에는 상대적으로 형편이 좋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장충국민학교가 있었다. 그래서 국민학교 교가는 기억이 나지 않아도 “청구! 청구! 깡통을 앞에 차고 장충 앞으로ㅡ..”라고 불렀던 자조적인 노래가 생각나서 그 노래를 함께 부르면서 웃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어렸을
적부터 빈부의 차이를 뚜렷하게 느끼며 살아온 것 같다. 내가 살던 동네인 신당동은 아래쪽은 소위 적산가옥이라고 부르는 일본 사람들이
지어 놓은 번듯한 양옥집이, 위쪽으로는 한옥이, 산 쪽으로는
해방 후 가난한 사람들이 지은 무허가 촌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이런 동네에서 늘 단칸 방 셋방살이로 전전했던 내가 계급의식을
느끼지 않았다면 그것이 비정상이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고교 때부터 “사회주의자”를 자처했었다.
30년 전인 1990년도대 초에 광나루 장로회 신학대학에 신앙 강좌를 하러 갔을 때였다. 강연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내가 빈민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학생처장을 맡은 나이 들은 교수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변혁운동이 가진 자들에 대한 적개심을 근거로 해서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상대에 대한 적개심이 큰 에너지가
되기는 하지만 미움은 사랑과 반대 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사랑으로만이 자랄 수 있는 생명을 파괴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라고 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앉았지만 이 분이야말로 참으로 문제를 피상적으로 밖에 보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 노동자 빈민의 자각이 그에게는 증오심과 적개심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들의
감정은 그 교수가 아름다운 꽃을 보고 고상한 음악을 들으면서 좋다고 느끼는 것처럼 춥고 떨리고 배고프고 억울한 사람들이 자기의 현실을 느끼는 것일
뿐인 것이다. 다만 그 교수에게는 그런 현실이 자기 현실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현실이 제대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시끄러운 불협화음으로 들렸을 뿐인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온 내가 국민학교 동창을 만나 뜻밖에 어려운 문제가 생겼다.처음 만났을 때
내가 목사였었다는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냄새를 맡고는 본격적으로 목사로 대하기 시작을 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그가 꺼내는 주제들이 나에게 매우 부담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가정제단’,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세상과 짝 지어서” 등등 이런 용어들은 나는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기도 하지만 들어 본지도 오래된 말들이어서 어떻게 반응을 보여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따지고 보면
그런 표현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재래식 기독교 분위기에서는 상투적인 표현이기는 한 것이다.
앞으로 관계가 깊어질수록
나에게서 자기와 다른 점을 발견하고 공세적으로 나오면 어떻게 방어 작전을 펼쳐야 할 것을 목하 고민 중이다.
나는 호주에 와서 내가
법적으로 속해 있는 교단의 일로 특별하게 접촉하는 것 외에는 한국교회와 관련이 전혀 없이 살았고 오히려 호주 백인들의 기독교 문화와 접촉이 있을 뿐이었다.
나에게는 감정 위주의 한국교회 분위기 보다 보다도 기독교적 사고를 하도록 노력 하는 호주교회의 분위기가 훨씬 더 건강하게 보였다.
그래 보았자 교회에 노인들만 있어 얼마 안 있으면 자연 소멸할 운명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