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1일 5선 국회의원 원혜영이 불출마 선언을 했다. 그의 퇴장을 보면서 정계진출에 인연을 맺었던 나로서 소감이 없을 수가 없었다.
88년 어느 날 빈민 운동의 동지 고 제정구 선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당시 재야 세력의 정치적 진출을 위하여 최초로 진보적인 한겨레민주당이 창당되었고 제 선생은 종로구에서 출마를 준비중이었다. 약속 장소인 소사 삼거리의 한 식당에 갔더니 애 띠어 보이는 청년 한 명을 소개하면서 부천에서 출마하니 책임 지고 도와 달라고 지시(?)를 했다.
당시 현실 참여의 의지가 강했던 분위기이어서 많은 청년, 학생 노동자들을 모아서 선거운동을 축제처럼 치뤘다.
원혜영의 출마는 당장의 당선 보다는 재야의 현실 정치 참여 실험이라는 성격이 있었기 때문에 선거 사무실은 재야 인사들의 출입이 빈번해서 당시 선거 사무실은 쇼인도우 같은 분위기였다.
그들은 도와주러 왔다고는 하지만 부천지역에 연고가 없는 이들이라 큰 도움은 되지 않았고, 말 동냥이나 해주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를 일으켰다. 당시 부천 지역 후보 중에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은 후보는 김영삼의 비서실 차장 출신으로 인천시장을 지낸 고 최기선이었다. 어느 날 원 혜영의 서울대 출신 선후배들이 선거 사무실을 찾아왔다가 서울법대 출신인 최기선의 선거 팜프렛에서 '민주화를 투쟁하다 수차례 제적 및 투옥'이라는 문구를 발견했다.
이호웅이 “야, 최기선이 언제 감옥 갔다 왔냐?”고 했다. 그 자리에서 감옥전과가 있는 선후배들이 이리저리 따져보더니 최기선은 감옥에 간 일이 없는 것이 밝혀졌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는 줄 알았는데 며칠 후 선거 전날 사무실에 들렀더니 ‘최기선의 투옥은 사실인가?’라는 내용의 인쇄물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순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미 20대에 국회의원 비서로서 선거를 치러본 경험이 있어 선거판의 생리를 정치 초년생인 그들 보다는 비교적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이야 선거법이 발달되어 있어서 그럴 일이 없지만 당시만 해도 투표 전날 결정적으로 불리한 흑색선전을 당하면 상대방에서 해명할 시간적 여유도 없기 때문에 당황하고 흥분해서 이성를 상실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흔히 발생했다. 그래서 나는 모두 식사를 하러 간 자리에서 원혜영을 화장실로 불러냈다. “최기선의 과대포장이 폭로된다고 해서 당신이 당선되는 것이 아니고, 이번 선거는 민정당 후보가 당선될 것 아니겠소?" 원혜영은 웃으면서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선배들이 해온 겁니다. 목사님 생각대로 처리하세요.”라고 했다. 원혜영은 본래 품성이 좋은 사람이기도 했지만 당시는 아직 30대 후반의 전혀 때가 묻지 않은 사람이었다.
나는 일행이 식사를 하는 동안 인쇄물이 한 장이라도 유출되면 안 되기 때문에 청년들을 시켜서 인쇄물을 우리 집으로 옮겨서 증거물로 몇 장만 남겨 두고 드럼통에 넣어 불을 태워버렸다. 더 이상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밤 12시가 넘어서 비로소 최기선에서 전화로 사실을 설명하고 나중에 원혜영에게 감사하고 인쇄비를 갚으라고 하고 사람을 보내어 증거물을 가져가도록 했다.
최기선은 고맙다며 밤 12시에 자기 처남을 비밀리에 나에게 보내서 인쇄물을 가져갔다. 그야말로 투표 전날 심야의 007 작전이었다. 선거결과는 최기선이 근소한 표차로 민정당 후보에 앞서 당선이 되었다. 만일에 인쇄물이 배포되었다면 최기선의 당선은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천 남구 13대 총선 결과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 부터였다. 괘씸하게도 최기선은 그 사건에 대하여 말 한 마디 없었다. 우연히 그의 비서를 전철에서 만나서 최 의원에게 전해주라고 한 번 주의를 환기해 주었고 그 후에 부인을 만난 자리에서(최 의원 아들은 우리 집 큰아들과는 한 학급의 친구였고 최 의원은 나의 중학 2년 선배로서 평소에도 자주 만나는 사이이었다.) 또 한 번 그 이야기를 했다.
최 의원 부인은 “목사님! 최 의원 성격이 남에게 고맙다는 말을 잘 못 해요. 이해해 주시고 미워하지 마세요.”라고 호소를 했다. 그러나 내가 용서를 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 문제는 원혜영에게 당연히 사례를 하고 인쇄비를 갚아야 해결되는 것이었다. 최기선은 끝내 답이 없었지만 그 후 김영삼 정권이 들어와서 인천시장이 되었지만 부인이 우울증으로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을 했다. 부인의 자살 소식을 듣고 부인이 사정하던 생각이 나서 가슴이 아팠다.
그 외에도 원 의원과는 셀 수 없이 많은 일이 있었지만 재미 있는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한다.
한 번은 서울신대에서 모이는 집회가 있어서 원혜영과 함께 가는데 경찰이 길을 모두 막고 있었다. 순서를 맡은 우리는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전경들이 막고 있는 뒷 쪽에는 도로를 내느라고 절벽처럼 산을 깍은 곳이 있었다. 내 출신 학교였기 때문에 지리를 잘 알아서 절벽을 넘어 가기로 하고 원 혜영에게 손 짓으로 신호를 하고 전경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에서 20 M 쯤 떨어진 곳에서 살금 살금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뿔싸 앞만 바라보고 있어야 할 전경 한 녀석이 군기가 빠져서 그만 뒤를 돌아다보는 바람에 우리를 발견한 것이다.
전경들이 일제히 달려와서 밑에서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손과 발로 정신 없이 기어 올라가는데 "알았어!! 알았어!! 내려갈게." 하는 원혜영의 소리가 들렸다. 나보다 몇 살 젊은 원혜영이 그만 전경들에게 바짓가랑이를 붙잡힌 것이다.
그 순간 잠시 고민을 했다. 나는 거의 다 올라갔기 때문에 그대로 가야 하나 내려가야 하나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지를 버리고 혼자 도망갈 수 없어서 도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양팔을 잡혀서 끌려 온 나를 보고 평소에 거래가 많았던 정보과장이 했던 농담 섞인 희죽거림이 걸작이었다.
"목사님이 이게 뭐요?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아야지."
결국 그날 나는 원혜영 때문에 또 한번 경찰에 연행되어갔다. 우리 둘이 잡혀 갔다는 소식을 듣고 집회가 끝나고 부천 경찰서로 몰려 와서 “석방하라!”고 외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나는 의례적인 진술서를 쓰고 나왔는데 원혜영은 나오지를 않았다. 몇 시간 후에 나왔기에 “왜 늦었느냐?”고 했더니 자기는 질문이 정치사찰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묵비권을 행사했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선수답게 경찰서 안에서 농성을 한 셈이었다. 나중에 듣고 보니 형사에게 담배를 달라고 해서 담배도 한 대 피웠단다.
첫댓글 최기선도 그의 부인도 이제는 고인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