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500km 떨어진 나일강 상류의 작은 마을
나그 함마디(Nag Hammadi)에 사는 농부 모하메드 알리는 집 근처 동굴에서
주로 퇴비로 쓰는 사바크흐를 캐기 위해 땅을 파다가 땅 속에서 밀봉된 항아리 하나를 발견합니다.
길이가 1m가 넘는 이 커다란 항아리 속에는 13개의 가죽에 쌓인
두루마리로 된 고대 문서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 52개의 문서는 이집트의 고대 기독교 교리인 그노시스 교리 이외에 신약성서와 외경,
헬레니즘시대의 격언집 등 성서에는 없는 영지주의(Gnosticism)에 관련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데요,
4세기 초 로마 제국을 통일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자
영지주의가 이단으로 공격을 받게 되었고 367년 '이단적'이라고 여겨지는 책들을
모두 파기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이에 어느 수도사가 이 문서들을 숨긴 것으로 여겨집니다.
나그 함마디 문서(The Nag Hammadi Library)로 불리는 이 문서들 중에서
가장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은 『도마복음서』와 『빌립복음서』로
특히 빌립복음서는 흥미롭게도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주장합니다.
이 빌립복음서를 기초로 댄 브라운은 소설『다빈치 코드』에서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가 결혼을 하였으며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후
막달라 마리아는 이집트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예수의 딸 '사라'를 낳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그 후 배를 타고 프랑스 남부지방으로 이주한 막달라 마리아와 사라의 후손들이
프랑스 메로빙거 왕조를 이루었으며 레오나르도 다빈치,
아이삭 뉴턴, 빅토르 위고 등도 그 후손이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리고 이 모든 내용이 역사를 기반으로 한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가 정말 사실일까요?
그렇다면 막달라 마리아는 도대체 어떤 여인이었을까요?
등불 아래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The Penitent Magdalen with Night-light)
-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
Georges de La Tour
The Penitent Magdalen with Night-light
1640
막달라 마리아, 그녀는 창녀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예수의 가장 큰 사랑을 받았던 제자이자 예수를 가장 사랑했던 여인이기도 했습니다.
갈릴리 호수 서쪽 연안에 위치한 막달라(Magdalene)출신으로
막달라 마리아 혹은 막달레나로 불리는 마리아는 고향을 떠나 유랑생활을 하다 유대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그녀는 천박한 웃음을 흘리며 남자들에게 몸을 팔다 바리새인들에게 붙잡혔고,
그들은 마리아를 모세의 율법에 의해 돌로 쳐 죽이기로 했지요.
하지만 예수가 "죄 없는 사람이 돌로 치라"고 하자,
군중들은 하나둘 씩 도망갔고 마리아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붙어 있던 7마리의 악귀를 쫓아내 주었고
그 뒤 그녀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의 제자가 됩니다.
그 후 예수가 체포되자 그를 따르던 제자들마저 모두 예수를 부인하고 달아난 상황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곁을 지켰고,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에도 그녀는 예수 곁에 있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부활절 아침 예수의 시체에 바를 향료를 가지고 무덤을 찾았간 여인이었고,
부활한 예수를 가장 먼저 만난 여인이기도 합니다.
르네상스 이후 막달라 마리아는 죄와 구원, 성모와 창녀를 나타내는 인물로
지금까지 문학과 예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17세기프랑스 화가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는
'촛불'이라는 모티브를 사용하여 어둠과 빛에 의한 강조와 대비의 정점을 보여줘
대가의 반열에 오른 인물입니다.
내면을 비추는 듯한 조용한 시선과 희미한 불빛에 포착된 인물의 모습이
깊은 감동을 이끌어내는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바로 <등불 아래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어두운 밤, 죄를 지은 여인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그녀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어둠 속에서 홀로 밝게 타오르는 촛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촛불은 주변의 어둠을 물리치며 모든 것을 고요하게 드러냅니다.
그 속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차분하게 지난 삶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그녀의 손은 무릎 위의 해골 위에 놓여져 있는데,
해골은 보통 인생의 덧없음을 상징하지만 때로는 은둔하는 성자의 상징물이기도 합니다.
탁자 위에 있는 책 옆에 있는 나무 십자가와 채찍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이 약간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마치 임신을 한 듯 배가 불러 있는 모습인데요,
이로 인해 이 작품은 '성배'의 비밀이 담긴 그림으로 화자 되기도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 하지만 그녀는 부활한 예수가 하늘로 승천한 뒤 성경에서 사라집니다.
왜 그녀처럼 중요한 제자가 성경에서 사라지고 성경의 가장자리인
외경도 아닌 거짓으로 지어낸 문서를 뜻하는 위경으로 밀려난 것일까요?
학자들은 이 이유에 대해서 예수의 수제자이자 초대 교황인 베드로가
막달라 마리아를 질투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성경에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창녀의 오명을 쓰게 된 것 역시 그녀의 존재가 남성 중심적인
기독교에 중대한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예수가 죽고 막달라 마리아의 위치는 촛불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초대 교황으로 있었던 당시 교회는 막달라 마리아 외에도
여러 여사제들을 이단으로 몰아버리고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을 역사에서 지워버렸습니다.
흥미롭게도 나그 함마디 문서보다 훨씬 이전인 1896년 이집트 아크밈(Akhim) 마을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문서인 『마리아복음서』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탁월한 이해력을 바탕으로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와 경쟁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는 남성들이 중심인 교회에서 질투의 대상이었으며
초기 카톨릭 교회를 지배했던 남성들이 여성인 그녀를 창녀로 전락시켰다는 것이죠.
1969년 카톨릭 교회는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공식 인정하고 사과 성명을 발표합니다.
이로써 1400여년에 걸쳐 창녀라는 주홍글씨를 달아야했던
막달라 마리아의 오명이 조금은 씻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는 정말 결혼을 한 사이였을까요?
『빌립복음서』와『마리아복음서』에는 각각 '예수는 어느 제자보다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했으며
종종 그녀의 입에 입맞춤을 했다.'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당시 입맞춤은 혼인한 부부만이 할 수 있는 행위였습니다.
더구나 다윗 왕의 후계자인 유대인으로서 예수에게 결혼은 반드시 해야 할 의무였습니다.
또한 성경 마가복음 14장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에게 향유를 붓는 장면을 언급하고 있는데요,
이 역시 유대의 풍습으로 당시 남자에게 향유를 부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신부 뿐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빌립복음서』를 포함한 다른 영지주의 복음서들은 예수 당대에 쓰여진 것이 아니라
예수가 죽고 200여년이 지난 3세기에 쓰여 신빙성이 높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당시 지나치게 신비적이고 왜곡된 내용들로 인해 정경으로 인정받지 못해 위서로 판명된 책들이라
그 근거가 희박하지요.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거짓인 것일까요?
결국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는 각자의 몫이네요.
참고문헌: 위키백과
마가렛 스타버드 <성혈과 성배>
사실 고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에 대한 의혹을 파헤친 최초의 책.
저자들은 10년에 걸친 조사를 토대로 한 연구결과를 BBC 방송의 고고학 다큐시리즈 <연대기>에서
3편에 걸쳐 방영했으며,이 책은 그 연구에 대한 기록물이다.
오랜 시간 추적한 역사적 사실들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행적에 대한 의혹을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서 결혼을 해 아이를 낳았으며,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고 주장한다.
성당 기사단, 시온 수도회, 메로빙거 왕조와 그 후손들에 대한 이야기 등 정치와 신앙의 뒤섞인 복잡하고
미스터리한 이야기들을 다루면서 또 다른 역사를 둘러싼 논란을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