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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조선의 동양화
東昊 추천 0 조회 125 17.12.12 12:5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 선 의 동 양 화

 

 

■ 산수화 ■

 

자연계의 풍경을 수묵 또는 채색을 써서 모필로 그린 그림의 총칭이다. 서양화의 풍경화에 비견되나 이와 달리 자연 광경을 사진과 같이 단순히 옮겨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의경(사의)이란 용어로 표현되듯이 그리는 사람의 뜻 즉 자연관이 동시에 나타나 있어야 한다. 이에 관념산수라는 서양화에서와 다른 개념이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魏晋南北朝時代道家의 자연관과 儒家山水愛 등을 정신적인 배경으로 해서 산수화가 일어나서 五代末 宋初에 산수화의 대가들이 다수 배출되어 크게 번성하여 이후 이 분야의 그림이 중국회화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특히 송대의 翰林圖畵院의 성립이후 이곳을 중심으로 院體山水畵가 정립되어 北宗山水의 바탕 구실을 해왔다. 이에 상대적인 개념으로 일어난 南宗山水元末 四代家 등의 뛰어난 창작활동을 통해서 체계 잡혀지게 되어 화단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明代엔 북종산수를 그리는 浙派그림이 나타나 淸初까지 지속되었고 또한 남종산수는 명 이후 크게 번져 明末吳派樣式의 산수화가 크게 유행하였다.

 

남종산수는 동양화의 산수화에 있어 가장 오랜 전통적인 분류법으로 당대 선종불교가 南北 兩宗으로 나뉘어져 北宗禪漸修, 南宗禪頓悟를 그 宗旨로 했는데 이러한 불교사상이 회화정신에도 적용되어 남북종화의 명칭이 생겼다는 설도 있다. 명대에 이르러 동기창·막시룡 등이 남종화의 우위를 강조하여 上南貶北論을 내세움으로써 더욱 명확하게 되었다.

 

남종화는 唐代 왕유를 開祖로 하고 수묵과 옅은 채색으로 피마준(披麻 )을 써서 平遠山水를 위주로 詩書畵를 연결 종합한 그림으로 학덕이 높고 수양이 깊은 선비 등이 비록 묘사기법이 전문적인 직업화가에 뒤질지라도 내면세계를 소박하게 드러내는 높은 화격의 그림을 칭해온 것이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五代의 동원·거연, 北宋의 미불·미우인, 元末 사대가인 황공망·예찬·왕몽·오진 등을 들 수 있고, 명에 이르러 구기창 등이 대성하였다.

 

북종화는 이사훈을 시조러 하여 송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대체로 한림화서원의 명사를 비롯한 직업화가들이 물체의 사실표현에 치중하여 짙은 채색으로 외면적 형사(形似)를 이룩한 그림들로 부벽준(斧劈 )을 써서 산을 올려다보는高遠山水를 많이 그렸다. 강건한 필법이 세미하며 농채를 즐겨 사용해 청록산수와 같은 화풍도 파생되었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당의 이소도, 북송의 곽희, 남송의 마원·하규·유송년·조백구·이당, 명의 대진·주신 등이다.

 

(산수화의) 기법과 구도에 의한 남북의 차이는 무엇인가

남종화와 북종화의 차이는 지리적 구분은 의미가 없다. 선불교에서 북파는 점수(漸修: 점진적 깨달음)를 남쪽은 돈오(頓悟: 자연발생적이고 직관적인 깨달음)에 가까웠는데, 회화의 영역에 이 개념이 적용되어 북종화는 기본적으로 다색물감을 쓰고 여백을 별로 남기지 않았고, 초상화나 화조화를 주로 그려서 궁전을 장식하는 직업적인 궁정화가들의 기법을 대표한다. 남종화는 주로 학인관료들의 양식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여기(이것은 결코 아마추어를 뜻하지는 않는다)로서 그림을 그렸으며 수묵산수화로서 잘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구분은 畵院畵(궁정양식)과 문인화(사대부들의 그림) 화가들의 회화양식에도 적용된다. 물론 이러한 구분들을 엄격하게 적용할 수는 없다. 때에 따라 남종화 양식을 추구한 궁정화가도 있고, 생계를 위해 북종화 양식의 초상화나 화조화를 그려야 했던 문인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화의 전형이 완성된 원대 이후, 즉 명청대에는 절충적인 양식을 추구하는 화가들이 대거 등장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산수화는 고구려의 고분벽화를 통해 그 시원을 살필 수 있으니 6세기 무렵의 무용총안의 수렵도에는 산의 굴곡이 보이며 강서대묘에서는 산악표현에 있어 초보적인 준법( )이 나타난다. 비록 회화는 아니지만 백제의 산수문전을 통해 진일보한 산수화적인 공간구성을 살필 수 있고, 통일신라는 현존 자료가 없어 구체적인 양상을 살필 수 없으나 다른 분야의 예술의 발전과 더불어 크게 진보했을 것으로 사료되며, 고려 역시 비슷한 형편이다.

 

조선시대는 왕조 중간에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같은 이민족의 침입에 의해 많은 서화류가 소멸되었으나 그 이전에 비해 발전된 양상을 분명히 살펴볼 수 있다. 도화서(圖畵署)에 속한 畵員으로 대표되는 전문적인 직업화가와 여기로 그림을 즐긴 지식층의 文人畵家로 크게 나뉘어지는데, 화단엔 이 양자의 역할이 상호보완적으로 작용되어 각기 회화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문인화가들은 때로 표현력에서 서툼을 보이기도 했으나 중국으로 새로운 화풍의 수용이나 보급 유행시키는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새로운 화풍을 전개시키는 선두에는 늘 문인화가들이 선구자의 역할을 감행했다.

 

조선시대 회화는 화풍에 의해 시대구분이 가능한데 특히 산수화가 조선회화의 주류로서 그 변화를 분명히 보여준다. 학자들에 따라 前後兩分하거나, 前期만을 다시 나눠 3기로, 또는 각 기를 다시 양분하여 4기로 나누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4구분을 따랐다. 화풍에 의한 구분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기의 60년을 제외하곤 대체로 150년을 주기로 화풍의 변화가 초래된다.

 

조선 건국 후 약 150년간인 제1기는 세종대의 문화부흥으로 회화도 크게 번성한 것으로 사료되나 周知되듯이 임진왜란 등으로 인해 전래작이 드문 실정이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는 강희언(14191464)이고 화원으로는 안견 및 이상좌의 활동이 크게 두드러졌다. 몇 안되는 현재작을 통해볼 때 이 시기는 중국의 남·북송 원체화풍(院體畵風)의 짙은 여운을 간직하고 있다. 고려 말 화풍의 지속으로 보여지나 조선회화의 흐름이란 측면에서 살필 때 중국화풍의 일반적인 답습이나 모방이 아닌 조선적인 특징을 이미 지니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2기의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말에 걸치는 중기회화는 제1기와 사뭇 구별되는 화풍으로 중국 명대 절파화풍(浙派畵風)과 닮은 산수화가 크게 유행한다. 이러한 화풍은 당시 명으로부터 직접 수용된 것으로 보기 힘들며 고려 말 이래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화풍에 명의 화풍이 일부 가미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 이미 15세기 중엽 강희언의 「고사관수(高士觀水)」에서 그 始原樣式을 살필 수가 있는데 16세기후반 사대부 화가 김제(15241593) 이경윤(1545?)

이징(1581?) 및 화원으로서 이흥효(15371593)·이정(15781607) 등에 이어 김명국(16001662이후)이 대성했다.

 

이 시대의 화풍의 특징은 산수임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이 크게 부각되어 산수가 마치 인물을 위한 배경처럼 보이며, 거칠고 짙은 농묵의 필선은 화면상에 강한 흑백 대조를 이룬다. 화면구성에 있어선 다소 산만하고 동적이다.

 

3기인 후기는 일반역사에서 처럼 회화사에 있어서도 크게 중시되는 시기이다. 15·16세기 명에서 일어난 吳派系列의 남종화법이 조선화단에서 부분적으로 소화되기 시작하였는데 18세기에 이르러 조선적인 화풍으로 정착하게 된다. 특히 심사왕(17071769)같은 사인화가는 당시 큰 유행을 보이는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외면한 채 남송산수에 전념하여 이를 토착·국풍화시키는데 크게 주력케 된다. 당시 산수화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 실제 경치를 소재로 한 진경산수의 대유행을 꼽게 된다.

 

우리 산천을 그림의 소재로 한 것은 이미 고려시대에서도 작품은 전하지 않으나 작품명을 통해서 확인되며, 계회도 등을 통해 점진적인 변천을 엿볼 수 있으나 정환(16761759)에 이르러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진다. 골산(骨山)이 많은 한국산천의 표현에 있어 기존의 화본풍으로는 불가능한 이른바 수직선을 반복하는 독특한 방법을 창안하여 중국산수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한국화의 새로운 그림세계를 이룩하였다. 그의 화풍은 김윤겸(17111775) 강세황(17131791)

정수영(17431831) 등의 士人畵家 외에 김응환(17421789) 김홍도·김석신

(1758?)·최북 같은 화원에게도 고루 영향을 끼쳐 한 시대를 풍미하여 그 여맥은 근대화단의 小亭·靑田 등에게서도 간주된다.

 

4기는 1850년 이후 50년 남짓한 시기로 말기인데, 김정희(17861856)가 이룩한 격조높은 文人畵를 추종하는 조희룡(17891866)전기(18251854)

허련(18091893)등에 의해 본격적인 남종화가 주류를 이룬다. 화원으로서 출중한 기량을 지닌 장승업(18431897)은 조선말을 장식한 인물이며, 한편 과감한 생략과 과장 등 신감각의 파격적인 소묘와 수채화를 방불케 하는 설채법(說彩法)으로 산수·화훼를 그린 김수철과 같은 화가들에 의한 이색적인 화풍이 화단에서 잠깐 비치기도 했다.

 

이상에서 살핀 조선시대 산수는 중국화의 영향하에 있었으나 이를 충분히 소화흡수하여 단순한 모방이나 아류가 아닌, 중국화와는 엄연히 구별되는 독자적인 민족양식을 이룩하였다.

 

 

■ 진경 산수화 ■

 

조선후기를 통하여 유행한 우리나라 산천을 소재로 그린 산수화이다. 진경 또는 동국진경이라고도 하였으며, 일본에서는 신조선산수화라고도 하였다.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 . 중기에 걸쳐 그려진 실경산수화에 비하여 화단에서 하나의 조류를 형성하며 성행하였을 뿐 아니라 높은 회화성과 함께 한국적인 화풍을 뚜렷하게 창출하며 전개되었다. 이러한 조류의 이념적 성향은 당시 집권층이었던 노론 문인사대부들과 남인 실학파들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실경의 소재는 조선 초기. 중기와 마찬가지로 명승명소. 별서유거. 야외아집류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금강산과 관동지방, 서울근교 일대의 경관이 가장 많이 다루어졌다.

 

화풍은 종래의 실경산수화 전통에 18세기에 이르러 새롭게 유행하기 시작한 남종화법을 가미하여 형성되었으며, 정선에 의하여 개척되었다. 정선은 산천의 특색을 남종화법을 토대로 표현하여 진경산수화풍의 정형을 수립하였다. 그의 진경화풍은 기존 화법과 남종화법을 우리 산천의 형상에 어울리는 필법으로 소화해낸 것으로, 실경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회화적 재구성을 통하여 경관에서 받은 가흥과 정취를 감동적으로 구현했다는 데 그 특색이 있다. 그리고 양식적으로는 부감법의 시각에 동적이 대각선이나 사선을 활용한 화면구성법을 비롯하여 습윤한 피마준법과 듬성한 태점, 괴량감 넘치는 짙은 적묵의 바위와 능란한 편필직필의 스케치풍 소나무 묘사법 등을 특징으로 구사하였다.

 

정선의 이러한 화풍은 강희언. 김윤겸 정황. 김유성. 최북. 정충엽. 장시흥. 김응환. 김석신. 김득신. 거연당. 신학권 등, 주로 중인층 문인화가들과 화원들에게 파급되어 정선파라는 유파를 형성하면서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풍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통신사절단을 따라 도일하였던 최북과 김유성을 통하여 일본 에도시대 남화가들인 이케, 우라카미 등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으며, 민화의 금강산도와 관동팔경도의 양식적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중. 후반을 풍미하였던 정선파의 화풍은 화원들에 의하여 형식화의 경향을 나타내면서 18세기 말엽에 이르러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였던 강세황은 정선의 화풍과 형식화된 영조시대 진경산수화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실제 경관과 부합되는 사실적인 기법을 강조했다. <송도기행명승도첩>을 통하여 서양화법을 수용하면서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화풍을 구현하였던 강세황의 이러한 경향은 김홍도에 의하여 구도와 필법이 더욱 치밀하고 박진감 넘치는 화풍으로 발전되었다.

 

김홍도의 이와같은 사실적인 화풍은 조선후기 진경산수화의 새로운 양식으로 18세기말에서 19세기 전반의 화단에서 이인문. 조정규. 임득명. 이유신. 엄치욱. 이재관. 유숙 등의 화원들에게로 이어지면서 계승되었다.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풍은 정선파와 김홍도파 이외에도 심사정. 이인상. 허필. 정수영. 윤제홍. 정철조 등의 문인화가들도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였다.

 

진경산수화는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정치권의 보수화 추세의 의해 김정희를 중심으로 사의적인 문인화풍이 득세함에 따라 쇠퇴하게 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서 1970년대에 걸쳐 특정경관이 아닌 생활주변의 일상적인 풍경을 그리는 사경산수화로 그 전통이 계승되어 양식보다 정신적 배경으로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표작으로는 정선의 <경외명승첩>,<금강전도>,<인왕제색도>를 비롯하여, 강희언의 <인왕산도>, 김윤겸의 <영남명승첩>, 김응환 <금강산화첩>, 김석신의 <도봉산도>, 심사정의 <경구팔경도>, 이인상의 <구룡연도>, 정수영 <한림강명승도권>, 강세황 <송도기행명승도첩>, 김홍도 <사군첩>, 이인문의 <단발령금강전도>, 임득명의 <서행일천리장권>, 조정규 <금강산병풍> 등이 있다.

 

 

■ 사군자 ■

 

동양화에 있어서 四君子는 매·란·국·죽(···)을 지칭한다. 아직 눈발이 날리는 이른 봄에 가장 먼저 꽃망울을 터뜨리는 매화와 서리내리는 가을에 향기를 뿜는 국화, 곧은 줄기에 마디가 있는 대나무, 그윽한 향과 청초한 외형의 난초 등은 상징적인 의미와 함께 동양에 있어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받던 식물들이다. 이들에서 난·국을 제외하여 을 넣어 歲寒三友라 칭하기도 하고, 사군자에 을 포함시켜 五友로 불리우기도 한다.

 

이들은 문인화의 소재로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수법이 비교적 단순하고 용이하여 지식인들이 손쉽게 즐길 수 있었으나 높은 화격에 도달한 작품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중국에 있어 墨梅畵 11세기말 선승 중인에 의해 창시되어 이간·가구사·조맹부 등이 뛰어났다. 墨蘭은 남송대의 정소남이 묵란법을 창시하여 원대 관도승·양보지, 명대 마수정 및 여류화가들도 많이 그렸다. 菊花는 송대 범석호·유준호를 시조로 북송의 황전·서희 등이 유명했다. 墨竹은 사군자중 가장 먼저 발전했고 당의 오도자와 소열로부터 시작했다. 송의 서희·문동·소동파, 원대의 고극공·이간·조맹부, 명대의 서위·주단·, 청대의 석도·정섭·김농·이선 등이 있다.

 

중국 송에서 墨梅가 창시된 지 1세기도 채 못되어서 고려의 정지상(?1135)이 매를 잘 그린 인물로, 또한 고려말 차원부(1320?)에 뛰어난 사대부로 문헌에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의 전래작이 없어 고려시대 묵매의 실상을 파악하기 힘들다. 다만 고려의 화적으로 매만이 아닌 송죽매를 함께 그린 해애의 「세한삼우도」가 일본에 유존되고 상감청자에 매화문이 등장하고 있어 이를 통해 묵매도 적지 않게 그려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조에 이르러서도 15세기작으론 공개된 것이 전무한 실정이나 당시 제작된 청화백자의 표면에서 뛰어난 솜씨의 매화문을 살필 수 있어 이를 통해 묵매의 양식이나 수준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16세기에는 신사임당(15041551) 傳稱作인 「姑梅花」과 아들 이우(15421609)의 「雪中梅, 딸 이부인(15291592)의 「月梅」등이 전해진다. 어몽룡(1566?)은 묵매 한가지로 명성을 얻었는데 조선묵매의 한 정형을 이룩하였다. 신부인과도 강한 공통점을 보이는데 굵은 노지(老枝)는 중심부를 비워 비백(飛白)으로 나타냈고, 잔 가지는 수직으로 그리며 태점(苔點)

으로 꽃눈을 나타내는 양식화된 기법을 조속(15951668)조지운(1637?)부자

, 허목(15971682), 오달제(16091637), 정조(17521800)에 까지 이어진다. 는 대련(對聯)으로뿐 아니라 화첩(畵帖)으로 꾸며지기도 했으며, 월매·설중매·수중매 등 여러 형태를 한데 모은 墨梅帖이 만들어졌다. 후기에 이어 말기에 접어 들면서 淸畵風의 유입과 더불어 묵매뿐만 아니라 채색을 사용한 紅白梅 10폭병(幅屛)과 같은 大幅으로 그리기도 했으며, 또한 물들인 색지를 사용하여 화사한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이송우(1805?)나 조희룡(17891866)·양기훈(1845?)를 들 수 있는데, 신분이 낮은 중인들도 점차 이 분야 그림을 즐겨 그리는 양상을 보인다.

 

墨蘭은 중국에 있어서도 사군자 중에선 비교적 늦은 13세기 후반경에 발생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변계량(13691430)의 『춘정집, 春亭集』에 옥서침이란 인물이 蘭竹을 잘 그린 것으로 나타나 있고, 세종(13971450)과 성종(14571494)이 난죽을 그렸거나 제발(題跋)을 남긴 기록 등으로 미루어 늦어도 15세기경에는 그려졌음은 분명한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이 시기 그림은 전래된 것이 없어 이정(1541?)이나 이징(1581?)現存作이 시대가 올라가는 그림 축에 낀다. 17세기 이후에는 백자표면에 장식화로 빈번하게 등장되는 것으로 일본인들은 秋草文이라 지칭하는 식물이 있는데 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난이 자주 그려짐은 18세기에 이르러서인데 강세황(17131791)이나 중인출신 임희지(1765?)가 수작을 남기고 있어 김정희(17861856)는 유명한 「부작란도 ,不作蘭圖」를 비롯해 「墨蘭帖」을 다수 남기고 있다. 특히 그는 예서(隸書)書法과 묵난 치는 것을 同一視보는 화론을 바탕으로 타인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탁월한 경지를 개척하였다. 조희룡·이시응(18201898) 등 적지 않은 추종자들이 그의 화법을 따랐다. 민영익(18601914)은 당시의 청말화풍의 직접적인 영향아래 죽·난 모두 독특한 화풍을 이룩하였다. 자유분방한 필치로 끝이 잘린 듯 뭉뚝하게 나타냈고 적절한 화면구성의 묘로 몇 무더기 난을 한 화면에 등장시키기도 한 大小 다수의 묵란을 남기고 있는데 당시 및 후대의 영향이 컸다. 방윤명(18271880)이나 김응원(18551921)도 이시응의 화풍과 친연성이 큰 묵란을 남기고 있는데 모두 秋史에서 연원을 찾게 하는 묵란들이다.

 

은 송이전에 다른 꽃들과 마찬가지로 채색을 사용하여 한가지만이 아닌 여러 꽃들과 함께 그려졌다. 四君子의 하나로는 늦게 발생되었으나 수묵 외에 채색으로도 줄기차게 계속 되었다. 우리나라에선 청자 등 도자기의 문양으로 일찍부터 등장되었으나 수묵화로는 청화풍의 유입 이후인 조선후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렇다 할 墨菊이 등장하였다. 조선조 화가중에선 사군자의 다른 식물들과 달리 국 한가지만을 전념한 인물은 찾기 힘들다.

 

東晋의 시인 도잠(365427)의 일화를 주제로 한 일종의 古事人物畵로는 조선에서도 일찍부터 그려졌으나 현존하는 으로 시대가 가장 올라가는 것은 이선해(15391609) 傳稱作일 것이다. 정선(16761759)의 「국일한묘, 菊日閑猫」는 翎毛畵의 범주에 드는 그림으로 設彩가 두드러짐 작품인데 화면에서 과 고양이가 同價를 보이고 있어 국의 그림을 살피는데도 중요한 자료로 제시될 수 있다. 심사정(17071769)은 채색뿐 아니라 묵국도 여럿 알려져 있으나 화본풍이 짙다. 국을 포함한 어엿한 수묵 사군자만을 그린 화첩도 전래되고 있다. 이인상(17101760)도 드문 예이긴 하지만 「병국, 病菊」과 같은 이 분야 그림을 남기고 있다.

정조(17521800)野菊으로 보여지는 大作 墨蘭이 공개된 바 있고, 강세황도 국을 남겼으며, 19세기로 접어들면서 김수철은 묵국은 아니나 담채로 개성있는 필치의 국을 다수 그렸으며 유숙(18271873)秀作도 알려졌다. 사군자와는 별개로 일종의 草蟲圖에 속하는 것으로 나비를 곁들인 설채의 소폭채국(小幅彩菊)도 다수 그려졌다. 20세기초 근대화단에서도 수묵 외에, 줄기와 잎은 수묵으로 나타내고 꽃은 황색을 加彩하여 그려지기도 하였다.

 

죽은 사군자 중 가장 먼저 그려진 것으로 일찍이 고려조의 안치민·정홍진·김군수

·이인로(11521220) 등과 같은 문인이나, 석행·석혜근 등의 승려가 묵죽으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조선조에선 세종(13971450)·손순효(14271554)

·안정(1494?)·윤언직·유진동(14971501)·인종(15151545)·신세림(15211589) 등이 묵죽으로 조선전기에 이름을 얻고 있으나 전래작들이 없으며 다만 박팽년(14171456)의 전래작이나 신사임당 것이 알려져 있으나 眞僞에 문제가 있다.

일본에는 수문(1403?) 1424년에 그린 10폭의 『묵죽화책, 墨竹畵冊』이 현존되는데 그를 조선인으로 간주하면 현존조선묵죽 중에서 가장 시대가 올라가는 그림인 셈이다. 조선묵죽의 어엿한 정형은 이정(1541?)에게서 비롯된다. 대폭의 수작이 여럿 전래되고 있으며 그림에 간기(干紀)를 남기고 있어 82세까지 붓을 놓지 않았음이 확인된다. 문헌상에 나타나있는 것뿐 아니라 그림을 통해서 후대에까지 화풍이 이어져 후배 화가들의 묵죽에 그의 영향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통죽(筒竹)·풍죽(風竹) 등 여러 종류의 죽을 함께 그린 聯幅도 알려져 있다. 18세기에 있어 가장 뛰어난 인물을 유덕장(16941774)이다. 그의 집안은 6대조인 진동 외에 증조부인 유혁연(16181680)이다.도 죽에 뛰어나 묵죽의 연원이 꽤 오랜 가문임을 알 수있다.

신위(17691847)는 이정·유덕장과 더불어 조선三代墨竹畵家로 지칭된다. 이들 모두는 詩書畵에 두루 능한 사대부들로 어엿한 경지에 도달하였다. 조희룡이나 민영익도 이 분야에서 두드러진 명품을 남기고 있다. 또한 이들 외에 다수의 문인들이 여기로 묵죽을 많이 쳤다.

 

이상에서 간략히 살핀 사군자는 조선조 문인들이 즐겨 그린 소재로 다른 소재의 그림과 같이 他國과 구별되어지는 독특한 양상을 예외없이 보여준다. 이 분야 그림에선 묘사력보다는 格調가 중시되었으나 여기(餘技)의 범주를 넘어 무수한 習作을 거친 뒤에야 비로서 高格을 이룩할 수 있다. 지덕을 겸비한 인물만이 가능한 문인화는 조선에 있어선 산수보다 더욱 중시되었다.

 

 그외 인물화, 화조화, 영수화, 판화, 축수도 사신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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