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정변의 역사 2009.9.8.화
연산군
연산군은 조선의 제10대 왕(1494~1506 재위)이다. 성종의 큰아들이며 어머니는 지평(持平) 윤기묘의 딸 폐비 윤씨이다. 비는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의 딸이다. 폐비 윤씨가 사사(賜死)된 뒤인 1483년(성종 14)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는 1494년 12월 성종이 죽자 19세에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 비융사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하고 변경 지방으로 백성을 이주시켰다. 녹도(鹿島)에 쳐들어온 왜구를 물리치고 건주야인(建州野人)을 토벌하는 등 국방에도 힘썼다. 또한 사창(社倉), 상평창(常平倉),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하는 등 빈민구제를 위한 조치를 취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부활시켰다.
그 뒤 연산군은 그의 생모(生母) 윤씨가 죽게 된 사연을 알게 된다. 그 후로 차츰 폭군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연산군 당시 첫 번째 사화는 1498년 무오사화 이다.
성종실록 편찬 때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실은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의 즉위를 비방한 것이라며 연산군은 발끈했다. 그리고 김종직을 부관참시 한다. 김일손, 권오복 등을 처형하고 정여창, 이주, 김굉필, 강혼 등은 귀양 보냈다.
두 번째 사화는 1504년 갑자사화 이다. 어머니 윤씨의 폐비와 사사에 관련했던 후궁들과 윤필상, 이극균, 김굉필 등을 처형하고 한치형, 한명회, 정창손, 정여창, 남효온 등 역시 부관참시 했다.
갑자사화는 무오사화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와 함께 훈구파의 거목들도 대거 참화를 당한 것이다. 이는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 등을 위해 훈구 재상들의 토지를 몰수하려는 조짐이 보이자 훈구파가 이 조치에 반발하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연산군은 홍문관과 사간원을 없애고 경연(經筵)과 상소제도를 중단시켰다. 채청사(採靑使)와 채홍사(採紅使)를 전국에 파견해 미녀와 좋은 말을 징발했다. 장악원(掌樂院)을 두어 기녀(妓女)를 양성했다.
성균관을 유흥장으로 만들고 사대부의 여인들과 관계를 갖는 등 음행을 일삼았다. 자신을 비방하는 한글투서가 발견되었다 하여 한글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다.
마침내 1506년 성희안, 박원종 등이 군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중종)을 왕으로 세우고 연산군을 왕위에서 축출했다. 연산군은 군(君)으로 강등된 뒤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된다. 그리고 두 달 후 병을 얻고 그곳에서 죽었다. 당시 나이 31세였다.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은 왕비 1명, 정비 3명, 후궁 9명 등 12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자녀는 16남 12녀이다. 공혜왕후 한씨는 영의정 한명회의 딸로 소생이 없다.
당시 폐비 윤씨는 후궁으로 입궐하여 숙의에 봉해졌다. 그녀는 공혜왕후 한씨가 죽자 1476년 왕비로 책봉되고 세자 융(뒤의 연산군)을 낳았다. 이후 투기가 심하여 국모로서 부덕한 일을 종종 일으킨다.
1477년 비상(砒霜)을 숨겨둔 일이 발각되면서 왕과 왕의 후궁을 독살하려 한다는 혐의로 빈(嬪)으로 강등당할 뻔하였다. 이어 1479년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어 왕과 모후인 인수대비의 격분을 사서 결국 폐비되고 친정으로 쫓겨난다.
1482년 일부 조정 신료들에 의하여 폐비의 선처를 바라는 상소가 이어졌다. 그러나 성종은 신하들과 논의하여 폐비에게 사약을 내려 사사하였다. 처음에는 묘비명도 없었다.
그러다가 1489년 세자 즉위 후를 고려한 왕의 배려로‘윤씨지묘(尹氏之墓)’라 이름 지었다. 1495년 연산군 즉위 후 묘호(廟號)가 추봉되고 신원되었다. 그러나 1506년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관작이 추탈된 뒤 끝내 신원되지 못했다.
한편 정현왕후 윤씨는 1473년(성종 4)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숙의(淑儀)에 봉해졌다. 후궁으로 입궐하여 숙의에 봉해졌으며, 왕비 윤씨가 폐위되자 왕비로 봉해졌다.
소생으로는 중종과 신숙공주가 있다. 명빈 김씨는 숙용에 책봉되었다가 빈으로 승격되었으며, 무산군을 낳았다. 귀인 정씨는 폐비 윤씨의 폐출 사건에 가담했다가 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안양군(安陽君) 이항 은 1480년(성종 11) 성종과 귀인 초계정씨의 장남이다. 시호는 공회(恭懷)다. 귀인 정씨는 안양군과 봉안군 등 두 아들을 두었다. 안양군의 이복 형인 연산군은 왕위에 오른 후 아버지 성종이 길들인 사슴을 쏘아 죽이는 등 패륜 행위를 계속했다.
안양군은“나라의 기강이 땅에 떨어지고 선왕대의 중신들을 물리치니, 백성들의 불평불만이 심하게 되었습니다. 안으로 음란하고 밖으로 사냥만 일삼으며 정사에 태만하면 종묘사직이 위태롭습니다. 전하는 신들의 간언을 듣고 회개하여 어진 임금이 되시기를 원합니다”라고 충언을 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양군을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그 후 임사홍의 무리들은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쫓겨난 것은 오로지 엄(嚴)· 정(鄭) 두 귀인 때문이라고 임금에게 무고했다.
결국 연산군은 1504년(연산군 10) 두 귀인을 죽였다. 안양군은 제주도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 이때 안양군의 나이 25세였다. 당시 8세 된 안양군의 아들 종남도정(從南都正) 이억수는 지금의 군포시 산본동 수리산하 광정동에 숨어 살았다. 후손들은 그 뒤 이곳을 고향과 선영으로 정하게 되었다.
완원군(完原君)은 1480년(성종 11)에 성종과 숙의(淑儀) 남양홍씨 사이의 7왕자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시호는 소도(昭悼)다. 부인은 면천군부인 전주최씨, 정선군부인 양천허씨이며, 이성군(伊城君), 이천군(伊川君) 등 아들을 두었다.
완원군은 연산군이 패륜행위를 저지르자 기탄없이 바른 말로 간하다가 오히려 노여움을 얻어 충청도 부여현으로 유배되었다가 중종 때 유배지에서 풀려난다. 그 뒤 완원군은 사가의 일에 간섭하지 않고 오로지 제조(提調)의 본분을 지켰다. 특히 문소전(文昭殿)의 친선(親膳)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봉안군(鳳安君) 이봉(李熢.1482~1505)은 성종과 귀인 초계정씨 사이의 차남이다. 귀인 정씨는 성종 때 숙의에 봉해졌다가 후에 귀인으로 승격되었다.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폐출 사건에 가담했다가 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소생으로는 안양군과 봉안군 등 아들 2명과 정혜옹주가 있다. 장남은 안양군이다. 봉안군은 1504년(연산군 10) 폐비 윤씨의 폐출 사건 때 귀양을 갔다가 1505년 형 안양군 이항 과 함께 사사되었다.
영산군(寧山君) 이전(1490∼1538)은 성종과 숙용 심씨의 소생이다. 숙용 심씨는 청송심씨로 이성군, 영산군 등 아들 2명과 경순옹주, 숙혜옹주 등 딸 2명이 있다. 영산군의 자는 공근(公謹)이다. 그는 명민하고 학식이 깊어 왕자시절부터 중종에게 총애를 받았다.
중종이 잠저에 있을 때 연산군이 사냥을 핑계 삼아 가해하려고 할 때 그는 기지와 용기로써 화를 면했다. 영산군은 중종반정에 앞장섰다. 1506년(중종 1) 형인 회산군과 종사의 위급함을 걱정하고 몇몇 중신들과 종사 회복을 위한 은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 뒤 연산군이 성 밖으로 사냥 갔다 환궁할 때, 영산군은 백관을 거느리고 정현왕후(성종의 비)의 명이라며 성문을 가로막고 연산군을 들이지 않았다. 결국 연산군은 교동으로 물러나게 되었고 이어 중종이 보위에 올랐다.
연산군 당시의 기록은‘실록’취급도 받지 못하고‘연산군 일기’형식으로 남아 전해온다. 그는 두 부인에게서 4남2녀의 자식을 두었다. 네 아들은 모두 사약을 받고 죽었다.
중종은 폐비 신씨를 그래도 왕족의 예우로 대해 주었다. 연산군을 끝까지 따라간 폐비 신씨는 그의 옆에서 묻히길 원했다. 연산군과 폐비 신씨는 5남 1녀를 두었다. 첫아들은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 죽었다. 그 다음 아들은 폐세자인 이황 이다. 반정 때 유배를 간 후 죽음을 당한다.
그리고 창녕대군이 있다. 역시 반정 때 유배당했다가 사사된다. 밑으로 두 명의 왕자는 어려서 죽었다. 그리고 막내인 딸 휘순공주는 구문경이라는 사람에게 출가했다가 시아버지에 의해서 이혼 당하게 된다.
연산군의 묘는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그는 딸 그리고 사위와 함께 이곳에 묻혀있다. 원래 연산군의 묘는 강화도에 있었다. 그가 죽은 뒤 7년째 되는 해에 그의 부인 신씨의 탄원에 의하여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폐위되어 왕릉으로서의 규모는 아니다. 왕자의 예를 갖추었을 뿐이다. 왕릉에 있는 정자각, 홍살문도 없다. 묘 주위에 석호(石虎), 석양(石羊), 무인석도 없다.
한편‘시인 연산군’이라는 책이 나와 관심을 모은 적이 있다. 이 책에는 연산군의 생애와 그의 시 세계를 살핀 글과 함께‘많은 근심’‘어진 정승들이여’등 125편의 시가 한문 원문과 함께 실려 있다.
이 책은 그가 단순한 폭군이었다기보다 시인의 감수성에 바탕을 둔 모후에 대한 그리움과 복수심이 그의 성품을 포악하게 변하게 한 것이 아닌가 라는 질문을 던져주었다.
( 정복규 논설위원 )
첫댓글 이극돈은 갑자사화의 단초를 제공한 자로 이인손의 아들로 예종 때 그의 5 형제들의 위세가 대단했던 자들로 5극이라 칭합니다. 이극균은 그 형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