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염불-2 예레미아 7:2-11 마 7:7-11
시작하는 말
내 나이 90에 접어들면서
그 동안 공염불을 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목사가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
여섯 살 되던 해 크리스 마스 이브다.
5 리쯤 되는 곳에 있는 교회당으로 가는 동중
동네 한 아주머니가 날더러
“너 커서 무엇이 될래?” 하고 물었다.
그리자 내 눈에
김약연 목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김약연 목사는 민족을 위해서 사신
동만의 대통령과고 같은 분이시다.
그래서 나는 목사가 돼래요!“ 하고 대답응 했다.
결국 나는 목사가 되었다.
기독교가 민족을 새롭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민족은 남과 북으로 갈라진 채로 있다.
남과 북에서 새롭게 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나는 군사 독재를 물리치고 민주화를 이룩하면
새롭게 되리라고 생각을 하여
나 나름으로 노력을 했다.
그렇나 새롭게 되지 않았다.
산업 문화가 뒤따라 와서 각가지 비극을 창출했다.
한 민족은 춧불 시위까지 하면서투쟁을 했다
그리고 교회도 이에 가담했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도 했다.
그러나 빈부 격차는 날로 늘어나고
인류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나는 공염불을 하고 있었구나 하고 자탄을 한다.
그러는 내 궤에 예레미아의 음성을 들렸다.
1. 예레미아의 웨침
예레미아가
성전에 제사드리려 온는 자들에게 맞우서서 외쳤다.
“이것이 야훼의 전이다. 야훼의 전이다. 야훼의 전이다 하는
헛된 말을 믿지 말라“
야훼의 이름을 붙인 이곳에 와서
지켜주셔서 감하다고는
나가서는 악하 일만을 하니
너희들은 이 내이름으로 부르는 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 라고 외쳤다.
야훼께 제사를 드리면 지켜주신다고 믿었는데
그들은 빠벨론에 잡혀가서 부로가 되었다.
모든 제사와 가원이 다 공염불이 되고 만 것이다.
이사야 선지도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리는 자들을 향하여
불호령을 내렸다.
“너희들의 드리는 제사 냄새에 구역기가 난다.
누가 너희들을 이 성전들을 밟으라고 했느냐?
빌고 또 빌어보아라.
나는 보지 않으리라.
빌고 또 빌어보아라
나는 듣지 아니 하리라.“
야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제사에 구역기가 나고
그 기도에는 귀를 기우리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 질문의 대답은 다윗에게서 찾아야 한다.
다윗은 싸움에 능한 부하들을 데리고 얠살렘을 점령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것은 야훼의 뜻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노예들을 이끌어 가나안 복지에 정착을 시켜
과부, 고아, 떠돌이들이 안심하고 사는
정의와 평화의 야훼는
출애급 공동체에 왕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출애급 공동체는 300 여년 동안 야훼만을 섬기고
왕을 가지지 않았다.
그런데 다윗은 이 야훼의 지시를 거슬려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것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인데 그는
그 야훼와의 계약문을 모신 법궤를 예루살렘 성전에 모시고
야훼를 그의 수호신으로 만들었다.
수호신이란
왕의 뜻을 받드는 심부름꾼에 불과하다.
일종의 우상이다.
당시 왕들은 다 이런 우상을 가졌었다.
다윗 왕은 그들의 뒤를 따른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주변의 약소민족들을 정복하여 그의 야망을 채우면서
그것을 다 야훼의 이름으롷 했다.
그리고 야훼의 제단에 감사예물을 드렸다..
그리고 자기는 야훼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가 애끼는 선민이라고 하면서
백성들로 야훼에게 제사를 드리고
원하는 것을 그에게 기원하라고 지시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성껏 야훼께 제사를 드리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기원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문화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에 분노하는 예언자들이 있었다.
이사야나 예레미아와 같은 예언자들이
그런 예언자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드리는 예배나 기도는 헛된 일이라고 질책을했다.
그런 기도는 야훼가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문제는 그들의 행동이라고 깨우쳤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리고 그들의 소원을 목청을 높여서 아뢰였다.
시편을 보면 그런 기도가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빠벨론에 부잡혀가서
처량한 부로가 되었다.
그런데 바벨론에 가서도 그들은 깨다지 못했다.
이 그릇된 다윗의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면서 메시아 사상이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야훼 하느님은 다윗 왕을 그렇게 사랑하셨고
이스라엘백성을 선민으로 삼으셨기에
열심히 성전에 지물을 드리고 기원을 하면서
이방인들과 섞여서 살지 않으면
다윗왕 후예에서 메시아를 보내시어
그 화려했던 다윗왕조를 재건하실 것이라고 믿엇다.
그래서 그들은 정성것 야훼의 이름으로 불리는 성전에 예물을 드리면서
어서메시아를 달라고 기원을했다.
2. 다윗,바울 그리고 기독교
방울도 그런 메시아 대망자였다.
로마 황제 아우그스도가 천하를 정복하고
스스로 평화의 왕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서
바을의 메시아 대망은 그 극에 이르렀었다.
“야훼여. 어서 메시아를 보내주시어 이 로마를 무너뜨리고
메시아 왕국을 이룩해 주소서“라고 기원을 했음에 틀 림이 없다.
그리다가 그는
그가 박해를 하던 예수님의 환상을 만나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확신을 한다.
로마제국의 형틀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하느님이 다시 살리셨으니
틀림 없이 예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라고 믿은 것이다.
그들이 오랜 동안 기원한 기도를
야훼 하느님이 들어주신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바울은
때가 이르면 야훼 하느님이 그를 세상에 다시 보내시어
이 세상 나라들을 심판하시고
메시아 왕국을 이룩하실 것이라고 확신을 했다.
따라서 이것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그가 오실 때 메시아 왕국의 시민이 된다고
온 로마 천지를 돌아다니면서 선포를 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서로 사랑하면서
그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망공동체를 이룩했다
그 동안 여러 가지 고난이 잇을 것이다
모든 소원을 기도로 하느님께 아뢰면
하느님이 들어주실 것이라고 격려했다.
따라서 그들을 모여서 독생자 예수니을 찬양하면서
그들의 소원을 야훼께 아뢰였다.
이 전통이 기독교의 삶이 되었다
기독교는 주일마다 모여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독생자라고 고백을 하면서
그의 재림을 고대한다.
동시에 그들이 바라는 소원을 알린다.
그들의 소원은 가지 각색이다.
통성 기도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
남편의 사업이 성공하게 해 달라고
아들이 일류 대학에 입학하게 해 달라고
아내의 병이 났게 달라고
좀더 종교적인 자들은
교회가 성장장하여 큰 교회당을 짓게 해달라고
교회 선교가 확장이 되어서
모두 구원을 받게 해 달라고. 기원을 한다.
진보적이라는 교회에서는
사회의 불의를 지적하면서
정의로운 민주화가 이룩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적지 않은 신도들이
정의 운동에 앞장을 선다.
이것은 행동으로 표현이 되는 기도다.
그런데 문재는
이 세상은 날로 더 악화된다.
빈부 격차는 날로 늘어만 가고
강자들의 발악은 날로 더 심해진다.
그리고 산업 문화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설국열차가 그것을 명확이 보여주고 있다.
구하고 구해도 하느니은 들어주시지 않는 것 같다.
왜 그런가?
그 까닭은
다윗 왕조가 만든 그릇된 문화다.
정성껏 구하면
야훼 하느님은 이룩해 주신다는 그릇된 이념이다.
3. 예수님의 삶과 깨우치심
예수님은 일찍
구하기만 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을 깨달으시었다.
구하면서
끈질기게 찾고 새 내일의 문을 두드려야 한다고 생각을 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사셨다.
당시 수공업을 하는 자들은 농토에서 쫓겨난 자들의 몫이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손재간이 있어서 목수가 되었다.
깨끗한 수공업을 하는 자는 중산층에 속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삶을 그리 비참하지 않았다.
율법도 예언서도 시편도 잘 아신다.
랍비라는 칭호도 받았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그의 마음은 아팠다.
목자 없는 양처럼 유리방황하는 갈릴래아의 떠돌이들을 보면서
그의 마음은 아프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기도했다.
그들도 인간답게 살게 해 다라고 야훼끼 기원했다.
그리다가 그는 깨달았다.
기도만 하고 있어서는 아니 된다고
왜 이런 빅극이 일어나는 지를 찾아야 한다고.
그리고 해결법을 발견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 해결법을 이룩하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고.
그것이 새 내일을 창출하는 길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는 구도의 길에 나셨다.
이를 위해 그는 가출을 하기까지 했다.
2차대전이 끝나면셔 이집트에서 발견이 된 도마복음서에
이런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이 되어있다.
“네 부모와 형제 자매를 나처럼 미워하지 않고서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부모와 형제자매를 미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 까닭이란
그들은 다 그릇된 다윗 문화에 사로잡허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모님들도 예수님에게
앞으로 메시아가 오시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이 될것이기에
메시아가 오시기를 기원하면서 기다리라고 타이렀을 것이다.
이런 안이한 자세에 있는 부모님들에게 반발을 했다.
그리다가 마침내 가출을 하여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떠돌이들과 같이 지내면서
구도의 삶을 사시었다.
그리던 어는 날 그는
세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면서
“회개하라 하느니 나라가 가까웠다”라고 외치자
모여드는 사람들로 인산 인해를 이룩한다는 소식을 들으셨다.
이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때가 이르렀다고 생각을 하셨다
그래서 그에게 세례를 받으섰다.
그런데 그가 물에서 나오려고 하시자 공중에서
“네가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는 음성이 들렸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자가
야훼의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훼의 영의 이끄심에 따라광야에 가시어
악의 뿌리란 탐욕, 권세욕, 야훼까지 오용을 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다윘 왕조의 그릇된 문화다.
로마제국이 추구하는 문화다.
예수님은 단연 이것을 거부했다.
그렇다면 새 내일을 향한 문화는 무었인가?
그것은 나누고 용서하고 섬기는 문화다.
에덴 동산의 문화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류를 죽음의 문화에서 생명문화로
돌아서게 하시는 것을 그의 삶의 목표로 삼으시었다
그래서 그는 외쳤다.
회개하라고.
가던 길에서 돌아서라고.
이렇게 외치신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시지 않았다.
그곳은 다윗 문화에 사로잡흰 자들이
권력을 부리면서 호강을 누리는 곳이다.
그들은 기득권을 놓으려고 할 까닭이 없다.
그래서 그는 갈릴래아로 가셨다.
강자들에게 수탈을 당하고 죄인 취급을 받는 자들을 찾아가셨다.
그들은 악을 경험한 자들이다.
깨우치면 알아들을 자들이다.
그렇나 그는 말로 깨우치시려하신지 않이았다.
분노와 원한, 자모심과 복수심에 가득한 자들의 귀에
말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사랑으로 그들을 인간 대접을 해 주셨다.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시고
병든 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리고 외와운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
죄채람에 시달린 자들에게 죄의 용서를 선포하시고
그들이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깝다고 속삭이셨다.
그랬더니 그들은
새 사람이 되어 직립하였다.
서로 사랑하여 나누고 용서하는 공동체룰 이륙했다.
이것을 보신 예수님은
“너희들 사이에 하느님 나라가 이룩되었다.”
“너희들은 예댄 동산의 주인공이다“라고 선포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촛불처럼 빗나고 께자나무처럼 자라고 누루거럼 퍼지고
언덕 위의 동리처럼
모두에게 새 소망을 줄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맺는 말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시었다.
세계 방방곡곡에서 아우성을 치고있는
한 많은 무리들이 있는 갈릴래아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 곳에 가서 그들과 더불어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고 하셨다.
나누고 용서하고 섬기면서
새로운 문화공동체를 이룩하라고 부탁하셨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하는 찬가를 부르는
에덴 동산의 문화를 창출하라고 부탁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따.
“새 술은 새부대에 넣으라.
옛 부대에 새 술을 넣으면
옛 부대는 터지고
새 술은 낭비된다“라는 것이다.
새 부대란 생명문화를 말하는 것이다.
이 생명문화 속에서 보고 듣고 경험을 하면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