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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안 (ecumenian.com)에 지난 2년간 펜들힐에서 지낸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관심있으시면 웹사이트에 들어가셔서 보시고 또 댓글도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문영미
신앙, 신비로운 놀이터 | ||||||||||||||||||||||||||||||||||||||||||
펜들힐 영성기행 2번째 이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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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들힐에 짐을 풀자마자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펜들힐의 공동체 생활은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빡빡했다. 여유롭게 명상과 산책을 하며 글 쓰는 일에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는 나의 기대가 얼마나 낭만적인 생각이었던지... 공동체에서의 하루는 이런 저런 노동으로 조각조각 쪼개져 있었다. 매일 부엌에서 설거지나 밥상 차리기 같은 일을 한 시간 정도 했고 일주일에 한번은 건물 계단 청소 등 맡은 곳을 청소해야 하는 데 그것도 족히 두 시간 정도 걸렸다. 매주 수요일은 “일하는 아침”으로 공동체 구성원이 다 함께 일을 한다. 수요일 아침만큼은 밭일, 마당 풀 뽑기, 사무실 서류 정리, 마늘 까기, 가구 고치는 일을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한다. 그리고는 열시 반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면 팝콘을 먹으면서 농담을 나눈다. 공동체를 지탱해주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인 육체적인 노동을 사랑의 봉사이자, 서로에 대한 헌신, 더 나아가 기도의 한 방법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에다가 근로 장학금을 받았을 경우 일주일에 8시간 정도 더 일을 해야 한다. 이렇다보니 첫 몇 달 동안 나는 수업과 노동, 게다가 두 아이를 돌보는 싱글 맘의 역할까지 동시에 해내야 했다. 마치 서커스의 접시돌리기 묘기를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새로운 문화와 언어를 배우며 학교에 다녀야 하는 아이들도 적응하느라 힘들어했다. 우아하게 글을 쓰고자 했던 내 생각은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말았다. 힘든 적응기간이 몇 달 지나가면서 나에게 이상한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꿈을 많이 꾸는 게 잠을 깊이 자지 못해서라고 하지만 나는 꿈이 자신의 무의식의 세계와 의식의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다리라고 생각한다. 꿈에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해 나는 공책에 꿈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종종 아침식사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그 전날 밤 꾼 꿈 이야기를 모험담 하듯이 들려주곤 했다. 펜들힐에 잠시 머물다 가는 사람들도 이곳에 오면 선명한 꿈을 꾸곤 한다고 말하는 것을 여러 차례 들었다. 아마도 펜들힐의 터와 사람들이 맑은 영이 사람들의 꿈을 이끌어내는 것 같았다. 그 해 겨울 나는 수요일 아침 마다 조금은 색다른 일을 맡게 되었다. 30여권이 넘는 함석헌 선생님의 전집의 제목과 내용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펜들힐 도서관 카드에 기록하는 일이었다. 오래전에 퀘이커에 입문하시고 20년 넘게 펜들힐 이사로 활동을 해 오시고 통일 운동가 이행우 선생님이 기증하신 것이었다. 비록 미국사람들이 읽지는 못하겠지만 상징적인 의미로 보내오셨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종종 함석헌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뵙곤 했다. 아버지가 (문동환 목사) 76년 3.1 민주구국선언문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가면서 같이 연루되었던 함 선생님을 법정에서, 농성장에서, 갈릴리 교회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늘 흰 두루마기에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그 모습이 어린 나에게는 마치 산신령 같이 신기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의 저서를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다. 영문으로 번역하기 위해 전집을 한 권 한 권 들춰보기 시작했다. 다른 노동에 비해 참으로 편하면서도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명저인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제대로 읽어보았다. 또 펜들힐에서의 깨달음을 담은 <펜들힐 명상>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가 50년 전에 바로 이 자리에서 이 글을 썼다니! 지금 내가 그 자리에 와 있다는 게 묘한 느낌을 주었다. 그는 펜들힐에 머물면서 <퀘이커 300년 역사>라는 하워드 브린튼의 책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함 선생님은 62년과 67년 그리고 70년에 그렇게 세 차례에 걸쳐 펜들힐에 와서 머물다 가셨다고 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곳에서 머물었던 함석헌 선생님, 그리고 그 후로도 이곳을 스쳐지나갔던 많은 한국 사람들과 깊이 연결된 느낌이 나를 따뜻하게 감싸왔다. 거미줄처럼 잘 보이지 않지만 끈끈한 인연의 줄로 이어져 있다고나 할까? 어느 수요일 아침, 그의 글귀 하나가 나의 마음을 깊이 파고들었다. “신앙은 힘이다. 말이 아니다. 생각이 아니다. 사상이 아니다. 지식이 아니다. 이론도 아니고 학설도 아니다. 술도 아니요. 방편도 아니다. 신앙은 힘이다. 살리는 힘이다. 들을 뿐 아니라 보았다. 볼 뿐 아니라 실제로 경험하고 있다.” 연못 깊은 곳에 오랜 세월 켜켜이 쌓였던 고운 흙이 흔들려 수면으로 올라오는 듯했다. 나의 신앙은 무엇일까? 과연 나의 신앙은 삶을 지탱해주고 새롭게 해 주는 신앙일까? 어렸을 때부터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형식적인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삶 깊은 곳에 늘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절절하게 느끼고 싶었다. 흰 눈이 허리까지 내린 겨울 학기 펜들힐 사람들은 더 깊은 내면의 세계로 빠져 들어간다. 눈으로 덮인 펜들힐은 시릴 정도로 아름답지만 공동체는 조용하고 때로는 침울하기까지 하다. 겨울 학기 미술시간에는 책 만들기를 배우고 있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만의 책이나 공책을 만드는 수업이다.
그 전날부터 함석헌 선생님의 책에서 읽은 ‘신앙’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기에 나는 Faith의 첫 글자인 F를 골랐다. 그 F를 붙여놓고 손이 가는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 손끝에서는 신비로운 상상의 놀이터가 그려지고 있었다. “신앙, 신비로운 놀이터”라는 제목이 떠올랐다.
나는 이 그림을 발전시켜 본격적인 책으로 만들기로 했다. 종이를 여러 겹 겹쳐 입체감 있는 책이면 좋을 것 같았다. 칼로 실루엣 이미지를 오려내는 방식으로 표현해 보았다. 그림의 여러 아이디어는 유치원에 다니는 딸 서영이의 그림에서 살짝 빌려오기도 했다. 요정처럼 생긴 아이들은 신앙이라는 신비한 놀이터에서 신나는 모험을 펼치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Margaret Guenther의 Holy Listening이라는 책에서 이런 글귀를 발견했다. “Play (놀이)와 pray(기도)라는 말이 얼마나 비슷한지를 깨닫고 충격을 받는다. 나는 자판으로“이것에 대해 기도해 봐야겠어.”라는 말 대신 “이것에 대해 놀아봐야겠어.”라고 잘못 쓰며 깨달음을 얻는다. 기도와 놀이를 연결시키는 것은 곧 명상하는 삶과 놀이를 연결시킨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삶이 어렵고 힘들수록 무겁고 경건하게만 기도하기 보다는 가볍게 놀이하듯이 기도해보면 어떨까? 하나님의 신비로운 놀이터에서 뛰어 노는 천진한 아이들처럼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