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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화상, 모란 거울 | ||||||||||||||||||||||||||
펜들힐 영성기행 3번째 이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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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딸 서원이가 뱃속에 있을 때 나는 민화를 그리러 다녔다. 소박한 민화속의 호랑이, 소나무, 구름과 버섯을 그리면서 참 행복했다. 민화를 처음 배우면 먼저 그려야 하는 게 있었는데 그게 바로 모란꽃이었다. 나는 이상하게도 모란꽃을 그리는 게 싫었다.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는 방법에 거부감도 있었지만, 모란꽃은 어딘가 모르게 세련되지 못하고, 납작해 보이고, 촌스럽고 심지어는 싸구려 같았기 때문이다. 동양문화에서 모란은 부와 풍요로움을 상징한다. 양반집 여인들과 궁궐의 여인들 방에는 늘 모란꽃을 수놓은 병풍이나 족자가 있었다. 어쩌면 이 꽃은 여성성을 상징하는 꽃이기에 거부감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4월이 끝나가던 어느 날, 나는 펜들힐과 캠퍼스와 바로 맞닿아있는 Swarthmore 대학교에 산책을 나갔다. 펜들힐도 봄이 되면 여느 수목원이 부럽지 않게 아름답다. 특히나 하얀 산딸 나무 꽃이 나무를 가득 덮은 모습이 잊히질 않는다. 스와스모어는 교정 전체가 정식 수목원으로 등록되어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과, 향기로 진동하는 라일락 군락, 목련과 봄바람에 흔들리며 피는 수선화를 놓치지 않으려고 봄이 되면 부지런히 찾곤 했다.
그 즈음 나는 펜들힐의 어떤 한 사람과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보면 이런저런 부딪침이 있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미국에 있는 공동체이다 보니 이들은 소수자인 다른 민족의 문화나 습관에 대해 무지에서 비롯된 편견을 보이기도 했다. 외국에서 온 학생들은 언어가 자유롭지 못하다 보니 제대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지 못해 답답하고 힘들어했다. 나는 등 뒤에서 칼에 찔린 듯 아팠다. 그런데 그 상처로 인해 벌어진 틈으로 모란꽃이 들어왔다. 지금까지 이렇게 자신의 존재에 대해 솔직한 꽃은 처음 보았다. 그녀는 수줍어하지도 겸손하지도 않았다. 대범하고 요란하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참으로 정직하고 충실하였다. 크고 화려한 꽃! 모란꽃이 나에게 말하였다. “넌 누구니? 네 자신에게 충실해 봐.”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사회에서 강요했던 여성의 모습이 내 안에는 어떻게 들어와 있는 것일까? 나의 색깔은 무엇일까? 펜들힐에서 보낸 시간 가운데 가장 나에게 소중했던 시간은 Spiritual Nurturing (영성 성장을 위한 상담) 이었다. 일주일 한 시간씩 정해진 시간에 상담 선생님과 만나는 영성 상담을 통해 나는 나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갔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심리 상담처럼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책을 찾아나가는 그런 상담이 아니었다. 둘이 만나면 먼저 잠시 침묵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 다음에는 마음에 있는 이야기들을 아무런 형식 없이 쏟아낸다. 이 시간은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쌓인 개인적인 어려움을 털어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점점 깊이 들어가면서 나는 나의 영성,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찰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문제의 그 사람과의 갈등을 이야기하면서 나는 많은 눈물을 쏟았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던 선생님은 listening committee를 가지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퀘이커에는 여러 가지 형식의 모임들이 많다. 직역을 하자면“들어주는 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모임은 문제가 발생한 당사자와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을 소집해 이야기를 들어주기 위한 모임이다. 나는 결국 그 사람과의 갈등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기로 결단 했다. 한국어로도 싸움을 하려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나에게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나와 그 사람, 상담 선생님과 또 다른 남자 한명 이렇게 네 명이 모였다.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가진 후,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을 있는 그대로, 덧붙이지도 과장하지도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 내 가슴은 옆 사람이 들을까 겁이 날 정도로 뛰었지만 나는 사소한 일 하나까지도 또박또박 이야기 하면서 그의 사과를 요구했다.
이 일을 겪고 있는 한 가운데서 나는 모란꽃을 만났다. 그리고 나는 펜들힐 사람들이 애용하는 재활용 가게, 그러니까 미국판 아름다운 가게에서 모란꽃이 그려진 접시와 마주쳤다. 뜻밖의 발견에 놀라워하며 나는 원색의 모란꽃이 그려진 접시 세트를 샀다. 그 접시를 깨서 모자이크로 거울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돌아오는 나의 발길이 급해졌다. 망치로 접시를 깼다. 내가 모자이크를 하는 가운데 가장 신나는 부분이다. 내 자신에 대해 갖고 있었던 이미지, 모든 게 굳어져 있는 나의 가능성, 내 자신에 대한 고정 관념들을 깨부수는 것이다. 물론 망치로 접시를 쨍그랑 깨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공중으로 날아가 버린다! 다음에는 접시 조각의 날카로운 모서리들을 하나 하나 다듬었다. 장갑을 끼고, 눈 보호 안경을 쓰고 기계 앞에서 또는 사포로 작은 조각을 정성스럽게 둥글려 주었다. 나는 뾰족한 조각을 다듬으면서 내 자신도 다듬고 있었다. 나의 날카로움으로 인해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부드럽게 다듬어진 접시 조각들은 바닷가 모래위에서 굴러다니는 유리 조각 같았다. 한없이 반복되는 파도와 모래에 휩쓸리어 둥글게 다듬어진 그 보드라운 감촉에서 세월의 흔적을 느꼈다. 한 조각 한 조각 다듬어 가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들었을까? 그 시간이 지루하기도 했지만 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깊은 명상으로 빠져들었다. 갈등으로 인해 상처받으며 날카로워진 내 자신이 치유되고 있었다. 이제 부드러워진 조각들을 다시 새롭게 짜 맞추는 시간이다. 깨졌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모란꽃 접시처럼, 나 역시도 늘 변화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나무틀에 접시 조각들을 붙였다. 거울은 계속 변화되며, 조금씩 늙어가지만, 성장해가려고 노력하는 내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준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통해 나를 본다. 친구들, 가족, 그리고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까지도, 사실은 나를 비추어주는 거울인 것이다. 모란거울은 나의 자화상이다. 모란 거울은 나에게 묻는다. “넌 누구니? 하나님이 지어주신 네 모습대로 살고 있는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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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과 사진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펜들힐 키워드를 쳤다가 발견한 "펜들힐 영성기행' 글을 읽고, 후속 글을 찾다가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모란꽃의 접시가 모란 거울로 변한 사진을 보고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에게도 묻게 되네요. ' 넌 누구니? 하느님이 지어주신 네 모습을 똑바로 본 적은 있니? " 문동환 선생님의 최근 소식을 접하게 된 것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