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오싱 여행17 - 난정에서 신라 포석정처럼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었던 곡수유상을 보다!
10월 19일 사오싱 에서 3路 버스를 타고 서남쪽에 위치한 蘭亭风景区(닌정풍경구) 에 내려
왕희지 노닐던 란팅 蘭亭(난정)을 보는데 王羲之(왕희지) 의 행서첩 난정서 (蘭亭集序)
가 유명한 곳이니, 鹅池碑亭(아지비정) 을 보고 거위가 노니는 鹅池(아지) 를 지나
蘭亭碑亭(난정비정) 정자에 도착해 청나라 강희제가 썼다는“蘭亭(난정)” 글씨를 봅니다.
書聖(서성) 이라 불리는 왕희지 사당인 왕우군사(王右軍祠) 경내에 이르러 먼저 중국에서
가장 크다는 높이 7미터에 달하는 비석을 보는데 御碑亭(어비정) 이니 석비 앞면에는
"강희제가 쓴 난정집서” 그리고 뒷면에는 "건륭제가 쓴 난정집서”가 새겨져 있습니다.
왕우군사(王右軍祠) 건물로 들어가 왕희지의 초상과 글씨며 난정집서를 보고 뜰에 자리한
왕희지가 글씨를 쓰던 책상이며 붓을 씼었다는 墨池(묵지) 를 보는데 왕희지는 한(漢),
위(魏)의 비문(碑文)을 연구해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의 서체를 완성 합니다.
해서 왕희지는 서성(書聖) 의 칭호를 얻었다고 하는데.... 당나라 시대 詩仙(시선)이라고
불린 이백(李白) 은 왕희지를 생각하며 "왕우군(王右軍)" 이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王右軍 李白
右軍本淸眞(우군본청진) 왕우군은 본시 맑고 진실해
瀟쇄(水+西)在風塵(소쇄재풍진) 속세에 살면서도 때 묻지 않았다
山陰遇羽客(산음우우객) 산음 땅에서 한 은자를 만났는데
要此好鵝賓(요차호아빈) 이 거위 좋아하는 손님을 좋아했다
掃素寫道經(소소사도경) 흰 비단을 펴 '도덕경' 을 베껴 쓰니
筆精妙入神(필정묘입신) 필법이 정교해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書罷籠鵝去(서파농아거) 글을 마치고 새장에 새를 담아 가니
何曾別主人(하증별주인) 어찌 주인에게 작별을 고하리?
동진시대에 왕씨(王氏) 가문은...“왕씨와 사마씨가 함께 천하를 다스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고귀한 가문인데 왕씨네 가문에서 서예가가 나타났으니....
서성 왕희지 (書聖王羲之) 로 관직이 우군장군(右軍將軍) 이라 사람들이
“왕우군(王右軍)”이라 불렀으니 일곱 살 때 부터 붓글씨를 익히기 시작했습니다.
길을 걸어가거나 앉아서 쉴 때도 붓글씨를 쓰는 연습을 했으니 손가락으로 옷에다가 한획,
한획 그려보곤 했는데, 옷이 닳아서 구멍 이 났다고 하며 붓글씨 연습을 끝낸 후에 붓과
벼루를 집 앞에 연못(墨池) 에서 씻곤 했는데... 나중에는 그 못물이 다 검어졌다고 합니다.
왕희지는 매일 서재에서 붓글씨 연습에 골몰했으며 끼니때가 되어도 붓을 놓을 줄
몰랐으니 하루는 부인이 마늘과 떡을 가져왔는데 고개도 들지 않는지라 음식을
탁상 위에 올려놓고 서재를 나갔다가 돌아오니 왕희지는 입 언저리가
온통 새까맸으며 손에는 먹물이 잔뜩 묻은 떡(붓?) 을 쥐고 있었다고 합니다.
신라 포석정(鮑石亭) 처럼 왕희지가 벗들과 술잔을 띄워놓고 시를 짓던 곳 유상정(流觴亭)
은 곡선을 이루는 물길에 잔을 띄우고 잔이 머물면 바로 시를 지어야 하는 그런 유희니
술잔(觴) 을 구부러진(曲) 물줄기(水) 에 떠내려 보낸다(流) 는 뜻에서 유상곡수
(流觴曲水) 라는데 북경의 고궁과 헤이안 시대 일본 선암원 에도 이런게 있었나 봅니다.
회계내사로 재직중인 353년 봄 난정(蘭亭)에서 열린 유상곡수(流觴曲水) 연회에 참석하니
그때 모인 사안(謝安), 손작(孫綽) 등 41명의 명사들이 시를 썼는데 그것을 편집한
시집(詩集)의 서문으로 쓴게 蘭亭序(난정서) 니 도가(道家)의 현허(玄虛)를 추구하던
풍조를 반대한 내용과 서경(敍景) 과 서정(抒情) 에서 뛰어난 독창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계축(癸丑)년 늦봄에 회계군 산음현의 난정(蘭亭)에 모여 계(禊)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인재들이 이르렀으니 높은 산과 무성한 숲과 맑은 시냇물이 있어 좌우를 비추면서
둘렀는데 물길을 끌어다 술잔을 띄울 굽은 물줄기를 만들고는 서로 둘러앉으니
관현(管絃) 의 성대함은 없지만 한잔 술에 시(詩) 한수로 족히 그윽한 심정을 펼수 있다.
이날 하늘은 밝고 공기는 맑으며 부드러운 바람은 화창하였다. 우러러 우주의
원대함 을 보고 아래로 만물의 무성함 을 살피니, 눈을 돌려 두루
보고 생각을 달리는 것이 보고 듣는 즐거움을 다할 만하여 참으로 즐겁다.
사람이 서로 어울려 한세상을 살아감에 마음속에 지닌 생각을 가지고 한 방안에 마주앉아
이야기하고 맡겨진 처지에 따라 외적인 육체를 방랑하게도 하니 비록 선택은
만가지로 다르고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같지 않지만 각자 처한 경우에 기뻐하게
되어서는 자신에게 득의하여 즐겁게 의기양양하면서 아예 늙음이 장차 이르는 것도 모른다.
향하던 바가 지루하게 되면 감정도 변화에 따라 감개가 얽히게 되니 기뻐하던 일이 잠깐
사이에 이미 낡은 자취가 되어버리니 이 때문에 "감회" 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수명의 길고 짧음이 변화를 따르면서 결국 끝남으로 기약됨에랴. 옛 사람이
이르기를“죽고 사는 것이 또한 큰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가슴 아프지 않겠는가.
매번 옛 사람들이 감회를 일으켰던 이유를 살펴보면 마치 한개의 부절을 맞춘 것 같아
일찍이 글을 대하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이것을 마음속에서 달랠 수가 없다.
진실로 죽고 사는 것을 하나로 여기는 것은 허황되고 거짓된 것 이며...
팽조(彭祖) 와 어려서 죽은 자를 같게 보는 것은 망령되고 작위적인 것임을 알겠다.
후세 사람들이 지금 사람을 보는 것도 또한 지금 사람들이 옛 사람을 보는 것과 같으리니,
슬프다. 그래서 당시에 모인 사람들을 차례로 서술하고, 그들이 지은 글을 기록한다.
비록 세상이 달라지고 상황이 변하여도 감회를 일으키는 이유는
그 이치가 같으니, 후세에 읽어보는 자들도 아마 이 글에 "감회" 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도착하니 그전에 사전에 예약한 어떤 일행이 둘러앉아 시를 짓고 술마시는 놀이를
하면서 선녀(?) 들이 도우며 시를 짓거나 노래를 부른 모양인데 우리가 도착하니
손님들은 막 일어서버렸고 선녀들은 투호 놀이를 시범해 보이고는 안으로 사라집니다.
그러고는 한바퀴 돌아서 蘭亭碑林(난정비림) 으로 가는데 벽에는
많는 사람들이 글씨를 새겼으니 옛날 작품들은 아니고.....
1987년에 주로 만들어 새겼는데 쭉 훑어보다가 朴东奎 라는 이름을 발견하고는
아니? 중국에도 박(朴)씨가 다 있나 했더니 우리나라 서예가 이네요?
그러고는 蘭亭碑林(난정비림) 을 나와 걸어서 다음 모퉁이에 초가 정자를 보고는
대나무숲 길을 걸어 강 으로 가는데 지붕을 씌운 긴 다리를 지납니다.
그 위쪽에 돌로 된 다리가 보이는데 중국인들은 다리를 직선으로 만들지 앟고
구불국불 아홉 구비 굽어지는 것을 좋아하는가 봅니다?
다리를 걸어 강을 건너 반대편 기슭으로 올라서니 작은 뜰 저편에 聚雲軒(취운헌)
이라는 건물이 있어 들어가니 송나라 인종과 이종의 초상화 가 보이는데
그림중에는 조선시대에 서민생활을 풍속도로 그린 김홍도의 그림을 생각나게 합니다.
정무난정의 유래 성명문에 난정서를 지나니 서예 글씨 족자가 보이더니
다음 방에는 엉뚱하게도 스탈린과 마오쩌뚱등 공산주의자들 사진이라?
건물을 나와 조금 더 걸으니 또 다른 건물이 보여 들어가니 鉞窑靑瓷(월요청자) 라는
제목 아래 원시시대 부터 동한- 삼국- 서진- 동진- 당조- 오대- 북송-
현대에 이르기 까지 여기 절강선 월나라 청자의 발전 순서 를 표시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기원전인 원시시대 청자로 볼록한 항아리 사진이 보이고 이어 동한(후한)
을 지나 삼국시대 백자도 보이며 당나라 시대에 이르면 백자가 참 세련되어 보이는데
북송대에는 고려청자의 원형인 아름다운 상감청자 가 보이니 고려로 전해졌는가 합니다?
중국인 쌍기 가 고려에 오자 그의 재주를 아낀 광종 이 벼슬을 주어 고려에 살게했는데
쌍기는 중국의 과거제도 를 추천하니 970년 광종이 우리나라 최초로 실시했는데
쌍기는 과거제 외에 수입만 하던 청자를 송나라로 부터 기술도입 을 하게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건물 안에는 무수히 많은 도자기가 진열 되어 있어 재미있게 구경하는데
처음엔 도자 박물관 인가 싶었는데 현대적인 생활 도자기 와
소품 들이 많은걸 보니..... 그럼 도요를 가진 어느 개인이 운영 하는 것일까요?
그러고는 밖으로 나와 왼쪽으로 강을 끼고는 서예 박물관 으로 가는데 여기 산 길
옆에 동자들이 노는 그림 들이 그려져 있어 웃음을 자아내는데 저만치
그림에 나올법한 아이들이 길에 퍼져 앉아 노는 모습에 미소가 절로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