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6년 가을 한국교회의 지도급 신자들은
신자들의 신앙 지도와 효율적인 선교활동을 위해 중국교회의 교계제도를 본따
이른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설정하였다.
이때 유항검은 신부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교회서적을 열심히 탐구하다가 가성직자들의 성사 집전이 독성죄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1787년 이승훈에게 성사 집전을 중단토록 촉구하였다.
그 후에도 가성직단은 얼마동안 지속되다가 해체되었다.
한국교회는 1789년 10월 처음으로 북경교회에 윤유일을 밀사로 파견하였다.
그는 다시 1790년 7월에 파견되어 10월에 귀국했는데, 이때 구베아 주교가 한국교회에 보내는 사목교서를 가져왔다.
그 교서에는 성직자를 보내주겠다는 내용과 유교식 조상제사를 금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있었다.
윤유일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유항검 ․ 윤지충 ․ 권상연은 신주를 폐기하였다.
당시 지식인 신자들은 한국교회 창설기부터 책을 통하여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교회 교도권자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보유론적(補儒論的)입장에서 천주교교리를 인식하고 믿던 양반층 신도들은 대부분 교회를 떠나고, 유교문화의 가치관과 윤리관에서 탈피한 신자들만 남게 되었다.